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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깃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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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슬린
· 최초 등록: 2025.11.10 · 최근 연재: 2025-11-10
목차
읽기 시간 예측: 약 4.1분

1화 - 시냇물을 품은 낡은 바가지


깊은 산골 아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물가에는 오랫동안 조롱박 바가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 바가지는 가볍고 물을 뜰 때마다 맑은 소리를 내주었으며, 무엇보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 있는 듯 따스했습니다.

바가지는 자신의 삶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침 일찍 우물물을 길어 올릴 때, 바가지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북과 같았습니다.

병든 이에게 깨끗한 물을 건네줄 때, 바가지는 '희망의 그릇'이었습니다. 바가지는 자신의 존재 가치가 '얼마나 많은 물을, 얼마나 자주 길어 올리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바가지도 조금씩 낡아갔습니다. 물이 닿는 안쪽에는 거뭇한 흔적들이 깊이 배었고, 겉은 투박하고 거칠어졌습니다.


어느 해 봄,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대감집에서 우물가에 새로운 물건을 기증했습니다. 그것은 번쩍이는 '놋쇠 양동이'였습니다.

놋쇠 양동이는 크고 깊었으며, 한 번에 바가지가 열 번 떠야 할 물을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양동이의 몸은 거울처럼 매끄러워 물을 담을 때마다 햇볕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낡은 바가지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손길은 오직 빠르고 효율적인 놋쇠 양동이에게만 향했습니다.

바가지는 우물가 구석, 이끼 낀 돌 위에 놓인 채 하릴없이 먼지만 쌓아갔습니다. 그는 이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어느 날, 놋쇠 양동이가 조롱하듯 말했습니다.

"어이, 늙은 바가지야! 너는 너무 작고 느려. 네가 물을 한번 길어 올릴 때 나는 이미 세 가정을 먹여 살린다고! 이제 세상은 속도와 크기가 전부야!"

바가지는 슬펐습니다. 자신의 평생이 부정당하는 듯한 모멸감이었습니다. 어느새 자신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바가지는 맑은 우물물조차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더 이상 물에 몸을 담글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요.

어느 날, 마을에서 나이 많은 '노선비' 한 분이 조용히 우물가에 찾아왔습니다. 선비는 마을의 번잡함과 거리가 먼, 소나무 숲속 다실에서 매일 차를 마시는 분이었습니다.

선비는 놋쇠 양동이도, 물을 빨리 길어 가는 사람들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선비의 시선은 곧장 이끼 낀 돌 위의 낡은 조롱박 바가지에게 닿았습니다.

그는 먼지를 손으로 조심스레 털어주고는,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나지막이 말을 건넸습니다.

"오래되어 보이는 것이 참 좋구나. 너의 이 거친 몸에 세월의 정성(精誠)이 그대로 새겨져 있군."

선비는 낡은 바가지를 들고 우물 안으로 깊숙이 내렸다가, 아주 천천히 물을 가득 채워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조용히 바가지의 물을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작은 도자기 찻잔에 옮겨 담았습니다.

선비는 맑은 눈빛으로 바가지를 보며 말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너를 찾는 이가 없으니, 나와 함께 가자꾸나. 자네의 그 묵직하고 느린 품이 필요한 곳이 따로 있다네. 놋쇠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세월을 담아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귀한 '정갈함' 말일세."

선비는 낡은 바가지를 들고 고즈넉한 '소나무 다실'로 향했습니다.


다실 안은 고요했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그릇과 도구들이 있었고, 바가지와 비슷한 다른 조롱박 바가지들도 있었습니다.

다실의 도구들은 물을 퍼 올리기 위해 경쟁하는 대신,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놋쇠 양동이처럼 크고 번쩍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오래되고, 작고, 투박했습니다.

낡은 조롱박 바가지는 선비의 다실에 놓여있는 다른 친구들 옆에 놓였습니다. 그의 낡음은 이곳에서 흠이 아니라, 운치였습니다.
그가 겪었던 고통과 슬픔은 이곳에서 '단단한 시간의 흔적'으로 대접받았습니다.

바가지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평생 우물가에서 배웠던 것이 '경쟁하는 속도'가 아니라, '흔들림 없이 세월을 견디는 품'이었다는 것을.

그의 가치는 물을 많이 길어 올리는 '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느림의 품속에 우물의 맑음을 온전히 담아내는 본질'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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