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태동하는 음모
그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습관적인 웃음은 그를 경박스러워 보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삿기운을 가진 이는 아니었다.
흡사 그의 웃음과 경박한 행동들은, 숨겨둔 칼날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채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하하, 설마 하니 천하에 환검쌍절(幻劍雙絶)이 안평대군을 모시고 있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단 말이지. 어쨌든 이렇게 날 찾아주니 고맙고, 내 이 은혜 꼭 갚으리다."
하는 말 모두가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가 입으로 내뱉는 모든 말은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없다.
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이다.
"별말씀이십니다. 일단 함께 인사드리러 가시지요."
수혁은 찾아온 이채원을 데리고 이현로와 안평대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노복이 안에 수혁이 왔음을 알리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대답에 두 사람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상석에 앉아 있는, 기품과 기세가 함께 느껴지는 안평대군 옆으로 여유로운 듯 날카로운 눈빛의 이현로가 앉아 있었다.
수혁이 가볍게 인사를 하니, 이채원이 넙죽 절을 하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대대손손 큰 영광이옵니다."
가식적이다. 그러한 가식적인 행동을 이현로와 안평대군이 모를 리 없다.
수혁의 눈빛이 재빨리 두 사람을 살폈다.
헌데 어찌 된 일인가? 두 사람은 흡족한 듯 기뻐하고 있었다.
수혁이 속으로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이현로가 나서 말했다.
"재밌는 사람을 데려왔구나."
이현로의 말에 수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편히 앉게."
안평대군의 말에 이채원이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고, 그 옆으로 수혁이 자리 잡고 앉았다.
"그래, 수혁 군이 데려왔으니, 대단한 고수일 테고?"
안평대군이 수혁을 보며 묻는 듯 말을 하니, 수혁이 나서 대답했다.
"무림에 명문세가인 풍련이가에 계셨던 분으로, 풍련이가의 자랑인 삭풍참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다 들었습니다."
수혁의 소개에 이채원이 얼른 나서 대답했다.
"소인 풍련이가에 이채원이라고 하옵니다. 보잘것없는 재주이나, 대군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신명을 받쳐 모시겠습니다."
사뭇 진지한 이채원의 말에 안평대군이 흡족한 웃음을 띄워 보였다.
"그래, 마음에 드는 구만. 나도 잘 부탁하네. 저기 저 수양의 사람들에 맞서려면 자네같이 훌륭한 인재가 필요하니 말이야."
이채원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싹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수혁은 다시 한번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얼른 이현로와 안평대군의 기색을 살폈으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두 사람은 기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 친구 이거 아주 호쾌한 친구 구만."
안평대군이 껄껄 거리며 웃자 이현로가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수혁 군이 아주 제대로 된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두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수혁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자신과 인물 봄이 다른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혼란스러움은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그는 알지 못한 것이다.
안평대군이나 이현로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올바르고 곧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의 명이라면 무슨 일이든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
야심한 밤,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무리 중 대장인 듯 보이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왜소한 몸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앉아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겠지?"
그가 묻는 말에, 덩치가 산만한 사내 하나가 나서 대답했다.
"자준께서 걱정할 일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네."
대답하고 있는 이는 양정이었고, 그에게 대답을 듣고 있는 이는 한명회였다.
그 옆으로 또 한 사람, 양정만큼은 아니어도 우람한 체격에 거친 인상을 가진 이가 나서 말했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싹 쓸어버릴 수 있네."
그, 홍달손의 말에 한명회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성급하게 움직여서는 안 돼. 도리어 저들에게 역습을 당하게 될 게야. 저들이 눈치채서는 안 돼. 누가 보아도 우리의 세가 불리하여, 저들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여야 하네. 아직 드러내서는 안 돼. 이빨을 감추게."
한명회의 말에 홍달손과 양정은 심기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 성격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모두 도륙을 내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한명회는 꾹 참고 있었다.
"김종서와 조극관, 일단 일이 시작되면 이 둘을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이야."
한명회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양정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 거리며 바깥쪽을 향했다.
이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벼락같이 일어나 뛰쳐나가니, 한명회와 홍달손이 어리둥절해하였다.
잠시 후,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니, 한명회와 홍달손이 놀라 부랴부랴 쫓아 나갔다.
그들 눈에는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복색의 누군가와, 주먹 쥔 손에 피를 묻힌 체 서 있는 양정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한명회가 놀라 묻는 말에, 양정이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첩자요."
첩자라는 말에 한명회의 표정이 굳어졌다.
양정이 몸을 숙여 쓰러진 자를 돌려세우니, 그는 눈과 귀, 입등 칠공(七孔)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이렇게 바로 죽여 버리면 어찌하나?"
한명회가 아쉬운 듯하는 말에 양정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훈련된 살수(殺手) 요, 단박에 죽이지 않으면 되려 역습을 당할 것이오."
양정의 말에 한명회는 할 말을 잃었다.
홍달손이 궁금한 듯 양정에게 물었다.
"누가 보낸 첩자 같은가?"
그 물음에 양정이 대답하지 못하니, 옆에 있던 한명회가 대답했다.
"이현로겠지."
그의 대답에 양정과 홍달손이 동시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현로가? 그 인간은 바로 어제도 안평대군과 장사터에서 술판을 벌였다고 들었는데...."
홍달손의 말에 한명회가 고개를 흔들며 웃어 보였다.
"그 간교한 인간이 우리 앞에서 탈을 쓰려고 하는 모양인데, 어쩌나... 이미 탈속에 누가 있는지를 알고 있으니... 다만 놀라운 것은, 그 역시 내가 쓴 탈을 알아보았다는 것이겠지."
이어 한명회가 양정과 홍달손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만반에 준비를 해주시게. 거사가 시작되면, 일각이 급해질 것일세."
한명회의 말에 두 사람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아직 끝나지 않은 그 야심한 밤에, 또 다른 이가 조심스럽게 담장을 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담장을 넘어선 그는 어느 방문 앞에 이르렀고, 방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열렸다.
그리고 그 방 안에는 이현로가 막 담장 너머 다가온 이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어찌 되었느냐?"
이현로의 물음에 담장을 넘은 검은 복색의 사내가 대답했다.
"양정이 저희 쪽 살수를 단숨에 죽였습니다."
그의 말에 이현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미끼를 물었는구나. 그래, 그 정도는 돼야지. 수고했다. 이제 저들의 움직임이 좀 더 긴박해질 것이다. 놓치지 말고 잘 감시하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어 검은 복색의 사내가 물러가자, 이현로가 방 안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자네가 좀 나서 줘야겠네."
이현로의 맞은편 자리에는, 이채원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현로가 이채원과 은밀한 밀담을 나누고 있는 그 시각,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혁이 그러한 낌새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복잡한 심경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정치적인 것들은 그에게는 꽤나 어렵게 다가오는 문제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차가워진 밤바람만큼이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안평대군을 주군으로 모시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을 향해 눈빛을 반짝 거리고 있는 재희가 보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재희가 있는 쪽 방으로 걸어온 것이었다.
다가오는 수혁을 의아한 듯, 또 한편으로는 반가운 듯 바라보고 있는 재희를 보며 수혁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왜, 어쩌다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
'아니다. 내가 맡은 임무는 대신녀를 지키는 것이지 않은가.'
스스로 합리화 시크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이 진실이었을까.
수혁은 자신의 행동에 더욱 혼란스러움이 가중되는 것을 느꼈다.
재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수혁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제야 수혁도 부랴부랴 재희에게 마주 인사하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재희가 걱정스레 물어오고 있었다.
수혁은 살짝 웃어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무 일도..."
재희가 입술 끝을 내리며 과장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그러면서 웃는 재희를 보며 기분이 참 묘해졌다.
이런 말을 하는 여인이 또 있었던가?
아니면 비슷한 말이라도 하는 여인을 본 적이라도 있었던가?
아무리 신녀라고 하지만, 그녀 자체가 매우 신비로웠다.
그녀가 하는 말도, 행동도, 왠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참 신기한 분이십니다."
난데없는 수혁의 말에 재희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네? 누가요?"
그러자 수혁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재희가 눈살을 찌푸린다.
"뭐야?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누구 말하는 거예요? 나 궁금해서 오늘 잠 못 자면 책임질 거예요?"
재희의 협박 같은 말에 수혁은 다시 한번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신녀님은 참 대단하십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수혁의 물음에 재희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아... 그게... 헤헤... 제가 살던 곳에서는 흔한 표현이라..."
어색하게 웃는 재희를 보며 수혁은 여전히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왠지 재희와 있으면 마음속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들이 조금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습관적인 웃음은 그를 경박스러워 보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삿기운을 가진 이는 아니었다.
흡사 그의 웃음과 경박한 행동들은, 숨겨둔 칼날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채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하하, 설마 하니 천하에 환검쌍절(幻劍雙絶)이 안평대군을 모시고 있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단 말이지. 어쨌든 이렇게 날 찾아주니 고맙고, 내 이 은혜 꼭 갚으리다."
하는 말 모두가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가 입으로 내뱉는 모든 말은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없다.
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이다.
"별말씀이십니다. 일단 함께 인사드리러 가시지요."
수혁은 찾아온 이채원을 데리고 이현로와 안평대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노복이 안에 수혁이 왔음을 알리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대답에 두 사람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상석에 앉아 있는, 기품과 기세가 함께 느껴지는 안평대군 옆으로 여유로운 듯 날카로운 눈빛의 이현로가 앉아 있었다.
수혁이 가볍게 인사를 하니, 이채원이 넙죽 절을 하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대대손손 큰 영광이옵니다."
가식적이다. 그러한 가식적인 행동을 이현로와 안평대군이 모를 리 없다.
수혁의 눈빛이 재빨리 두 사람을 살폈다.
헌데 어찌 된 일인가? 두 사람은 흡족한 듯 기뻐하고 있었다.
수혁이 속으로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이현로가 나서 말했다.
"재밌는 사람을 데려왔구나."
이현로의 말에 수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편히 앉게."
안평대군의 말에 이채원이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고, 그 옆으로 수혁이 자리 잡고 앉았다.
"그래, 수혁 군이 데려왔으니, 대단한 고수일 테고?"
안평대군이 수혁을 보며 묻는 듯 말을 하니, 수혁이 나서 대답했다.
"무림에 명문세가인 풍련이가에 계셨던 분으로, 풍련이가의 자랑인 삭풍참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다 들었습니다."
수혁의 소개에 이채원이 얼른 나서 대답했다.
"소인 풍련이가에 이채원이라고 하옵니다. 보잘것없는 재주이나, 대군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신명을 받쳐 모시겠습니다."
사뭇 진지한 이채원의 말에 안평대군이 흡족한 웃음을 띄워 보였다.
"그래, 마음에 드는 구만. 나도 잘 부탁하네. 저기 저 수양의 사람들에 맞서려면 자네같이 훌륭한 인재가 필요하니 말이야."
이채원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싹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수혁은 다시 한번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얼른 이현로와 안평대군의 기색을 살폈으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두 사람은 기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 친구 이거 아주 호쾌한 친구 구만."
안평대군이 껄껄 거리며 웃자 이현로가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수혁 군이 아주 제대로 된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두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수혁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자신과 인물 봄이 다른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혼란스러움은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그는 알지 못한 것이다.
안평대군이나 이현로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올바르고 곧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의 명이라면 무슨 일이든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
야심한 밤,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무리 중 대장인 듯 보이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왜소한 몸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앉아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겠지?"
그가 묻는 말에, 덩치가 산만한 사내 하나가 나서 대답했다.
"자준께서 걱정할 일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네."
대답하고 있는 이는 양정이었고, 그에게 대답을 듣고 있는 이는 한명회였다.
그 옆으로 또 한 사람, 양정만큼은 아니어도 우람한 체격에 거친 인상을 가진 이가 나서 말했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싹 쓸어버릴 수 있네."
그, 홍달손의 말에 한명회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성급하게 움직여서는 안 돼. 도리어 저들에게 역습을 당하게 될 게야. 저들이 눈치채서는 안 돼. 누가 보아도 우리의 세가 불리하여, 저들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여야 하네. 아직 드러내서는 안 돼. 이빨을 감추게."
한명회의 말에 홍달손과 양정은 심기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 성격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모두 도륙을 내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한명회는 꾹 참고 있었다.
"김종서와 조극관, 일단 일이 시작되면 이 둘을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이야."
한명회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양정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 거리며 바깥쪽을 향했다.
이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벼락같이 일어나 뛰쳐나가니, 한명회와 홍달손이 어리둥절해하였다.
잠시 후,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니, 한명회와 홍달손이 놀라 부랴부랴 쫓아 나갔다.
그들 눈에는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복색의 누군가와, 주먹 쥔 손에 피를 묻힌 체 서 있는 양정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한명회가 놀라 묻는 말에, 양정이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첩자요."
첩자라는 말에 한명회의 표정이 굳어졌다.
양정이 몸을 숙여 쓰러진 자를 돌려세우니, 그는 눈과 귀, 입등 칠공(七孔)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이렇게 바로 죽여 버리면 어찌하나?"
한명회가 아쉬운 듯하는 말에 양정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훈련된 살수(殺手) 요, 단박에 죽이지 않으면 되려 역습을 당할 것이오."
양정의 말에 한명회는 할 말을 잃었다.
홍달손이 궁금한 듯 양정에게 물었다.
"누가 보낸 첩자 같은가?"
그 물음에 양정이 대답하지 못하니, 옆에 있던 한명회가 대답했다.
"이현로겠지."
그의 대답에 양정과 홍달손이 동시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현로가? 그 인간은 바로 어제도 안평대군과 장사터에서 술판을 벌였다고 들었는데...."
홍달손의 말에 한명회가 고개를 흔들며 웃어 보였다.
"그 간교한 인간이 우리 앞에서 탈을 쓰려고 하는 모양인데, 어쩌나... 이미 탈속에 누가 있는지를 알고 있으니... 다만 놀라운 것은, 그 역시 내가 쓴 탈을 알아보았다는 것이겠지."
이어 한명회가 양정과 홍달손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만반에 준비를 해주시게. 거사가 시작되면, 일각이 급해질 것일세."
한명회의 말에 두 사람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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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그 야심한 밤에, 또 다른 이가 조심스럽게 담장을 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담장을 넘어선 그는 어느 방문 앞에 이르렀고, 방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열렸다.
그리고 그 방 안에는 이현로가 막 담장 너머 다가온 이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어찌 되었느냐?"
이현로의 물음에 담장을 넘은 검은 복색의 사내가 대답했다.
"양정이 저희 쪽 살수를 단숨에 죽였습니다."
그의 말에 이현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미끼를 물었는구나. 그래, 그 정도는 돼야지. 수고했다. 이제 저들의 움직임이 좀 더 긴박해질 것이다. 놓치지 말고 잘 감시하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어 검은 복색의 사내가 물러가자, 이현로가 방 안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자네가 좀 나서 줘야겠네."
이현로의 맞은편 자리에는, 이채원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현로가 이채원과 은밀한 밀담을 나누고 있는 그 시각,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혁이 그러한 낌새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복잡한 심경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정치적인 것들은 그에게는 꽤나 어렵게 다가오는 문제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차가워진 밤바람만큼이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안평대군을 주군으로 모시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을 향해 눈빛을 반짝 거리고 있는 재희가 보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재희가 있는 쪽 방으로 걸어온 것이었다.
다가오는 수혁을 의아한 듯, 또 한편으로는 반가운 듯 바라보고 있는 재희를 보며 수혁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왜, 어쩌다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
'아니다. 내가 맡은 임무는 대신녀를 지키는 것이지 않은가.'
스스로 합리화 시크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이 진실이었을까.
수혁은 자신의 행동에 더욱 혼란스러움이 가중되는 것을 느꼈다.
재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수혁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제야 수혁도 부랴부랴 재희에게 마주 인사하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재희가 걱정스레 물어오고 있었다.
수혁은 살짝 웃어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무 일도..."
재희가 입술 끝을 내리며 과장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그러면서 웃는 재희를 보며 기분이 참 묘해졌다.
이런 말을 하는 여인이 또 있었던가?
아니면 비슷한 말이라도 하는 여인을 본 적이라도 있었던가?
아무리 신녀라고 하지만, 그녀 자체가 매우 신비로웠다.
그녀가 하는 말도, 행동도, 왠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참 신기한 분이십니다."
난데없는 수혁의 말에 재희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네? 누가요?"
그러자 수혁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재희가 눈살을 찌푸린다.
"뭐야?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누구 말하는 거예요? 나 궁금해서 오늘 잠 못 자면 책임질 거예요?"
재희의 협박 같은 말에 수혁은 다시 한번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신녀님은 참 대단하십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수혁의 물음에 재희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아... 그게... 헤헤... 제가 살던 곳에서는 흔한 표현이라..."
어색하게 웃는 재희를 보며 수혁은 여전히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왠지 재희와 있으면 마음속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들이 조금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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