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변화의 바람
조용한 실내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빛을 완전히 차단한 체, 촛불만으로 밝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안에서는 낮인지 밤인지 구별할 수 없었고, 꽤 무거운 침묵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장소였다.
그곳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명은 길고 화려한 곤포를 입고, 긴 수염과 독특하게 생긴 상투관을 하고 있었다.
꽤 기품 있어 보이는 그 중년 남자 맞은편에는, 준수한 용모에 차분한 표정을 한 수혁이 앉아 있었다.
중년 남자는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여유로운 웃음을 띄운 체 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한 발걸음이니 환대를 해주고 싶기는 하다만... 알다시피, 금분세수(金盆洗手)하여 떠난 이가 찾아오는 것은 반기지 않는 것이 관례이니, 이해하거라."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익히 알고 있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문주 님."
수혁 앞에 앉아 있는 남자, 그는 바로 수혁이 몸담았던 문파인 환검문(幻劍門)의 장문인(掌門人) 황해담이었다.
"그래, 사람을 알아보고 있다고? 너처럼, 나랏일을 할 사람 말이냐?"
"예, 나랏일에 뜻이 있는 사람을 찾아보려 합니다."
수혁의 대답을 들은 황문주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곰곰이 생각에 빠지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사람, 추천해 줄만한 사람이 있긴 하겠구나."
수혁이 살짝 반기는 표정이 되었다.
사실 여길 찾아오면서도 내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던 그였다.
"누구...입니까?"
수혁의 물음에 황문주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채원이라고 아느냐?"
웃어 보이던 수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채원이라면... 혹, 풍련이가(風連李家)의 망나니로 불리는, 이채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수혁의 말에 황문주가 껄껄 거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다. 그자 역시 너처럼 금분세수를 하고 이 무림을 떠난 인물이지. 야심이 많아, 네가 모시고 있다는 그 안평대군의 부름이라면, 아마 너한테 절이라도 할 것이다."
수혁은 적잖이 실망하고 있었지만, 애써 내색하지는 않고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허나... 인물됨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까?"
황해담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격앙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냐? 설마 내가 네게 그런 사람을 소개하겠느냐?"
이어 차분해진 황해담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이채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십 년 전 무림이 요괴들로 혼란했었을 때, 영웅 도운평과 함께 섭비왕(燮沸王)의 아내, 혈비(血妃)를 죽이러 갔던 이채석의 동생이다. 당시 이채석의 죽음으로 방황의 시기를 보내 무림인들에게 힐난을 듣기는 했지만, 워낙 자기가 존경하던 형의 죽음이었기에 많이 괴로워했던 것일 뿐이다. 형인 이채석과 함께 풍련이가의 절기인 삭풍참(削風斬)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 바로 그다. 너도 알겠지만, 무공을 그만한 경지까지 끌어올린 사람이 어디 헛한 사람이 있더냐?"
황해담의 말에 수혁도 설득이 된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림 내에서 요괴들과 사대마왕(四大魔王)의 토벌을 이야기해왔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형을 잃은 이채원이 얼마나 속상하겠느냐? 그는 그 때문에 무림을 원망하며 금분세수를 하여 무림을 떠난 것이다. 사람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 사람들 말만 듣고 결론을 내려서는 아니될 것이다."
수혁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송구합니다. 오늘 또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스승님. 허면, 그를 소개해 주시지요. 저도 이제는 만나보고 싶어 졌습니다."
수혁의 대답에 황해담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 다행이구나. 어떤 사람인지는 네가 직접 판단해 보거라. 내 조만간에 기별을 하여, 그로 하여금 너를 찾아가게 하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자자, 기왕 왔으니 차라도 마셔야지. 식기 전에 마시거라."
"예."
수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비로소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의 진한 향이 수혁의 코끝을 간지럽혔고,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 마음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
대부분의 준비된 사람들은 일찌감치 여흥으로 떠난 터라, 집안이 제법 썰렁해져 있었다.
조용해진 집 안을 터벅한 걸음으로 걸으며 두리번거리던 재희는 때마침 들어서고 있던 수혁과 마주했다.
"나와 계셨습니까?"
재희는 짐짓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고개 숙여 대답했다.
"네...."
문득 그녀의 눈에, 수혁의 곁에 서서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앳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재희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궁금함을 가득 담은 체 소년을 바라보니, 수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저를 대신해 신녀님의 수발을 들어줄 아이입니다."
이어 수혁이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사 올리거라. 이분이 대신녀 님이시다."
그러자 아이가 기쁜 표정이 되어 얼른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대신녀님. 이렇게 예쁘신 분 인줄 몰랐습니다."
희희낙락하는 소년을 보며 재희는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수혁에게 되물었다.
"제... 수발을 들 아이라구요? 하지만, 아직 어린..."
재희가 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소년이 나서 소리치듯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자신 있습니다. 이래 봬도, 제가 어지간한 어른들보다 힘이 셉니다."
옆에 서 있던 수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맞습니다. 저도 이 아이의 힘을 당해낼 수 없을 만큼, 큰 신력(神力)을 가진 아이입니다. 한번 믿어 보시지요."
수혁의 말에 재희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름이 뭐니?"
재희가 소년을 보며 묻는 말에, 소년은 활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예, 홍씨 성에 길자, 동자를 씁니다."
순간 재희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홍... 길동?"
"예, 맞습니다. 길동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이어 재희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
"호, 홍길동? 진짜 홍길동?"
그녀의 반응에 수혁은 물론 길동의 표정도 어리둥절해졌다.
"예? 그럼... 가짜 홍길동도 있습니까?"
재희가 이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 아하하, 아, 아냐... 길동... 길동이면.... 혹시 아버님이 홍상직... 어른이시니?"
홍길동이 약간 어색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다만, 제가 그리 부르면 아니 됩니다."
재희가 절로 "아..."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맙소사. 홍길동이라니...
그 사이 수혁이 재희에게 물었다.
"허면, 이 아이에게 그 유림이란 사람을 찾으라 할까요?"
수혁의 물음에 재희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어..." 하며 수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길동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내가 찾는 사람이 있어. 유림이라고 했었거든. 무당... 아니 신녀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었어. 그 사람을 찾아 줄 수 있겠니?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
재희의 말에 길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제가 어떻게 찾으면 되는 겁니까?"
재희는 수혁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여기서는 좀 도와주십시오. 유림이란 사람은, 이곳에서 그리 큰일을 벌였습니다. 분명 마님께서 부르셨을 테니,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연락하면 되는지는 마님께서 아실 겁니다."
수혁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럼 제가 마님께 여쭤본 후, 길동이에게 알려주겠습니다."
재희는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재희의 인사에 수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혁이 길동을 데리고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겨 가니, 재희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생겼으니 다행히 아니겠는가.
어쩐지 이곳에서의 삶이 조금씩, 생각보다 빠르게 익숙해져 가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
깔깔 거리는 헤픈 웃음소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풍악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누군가 뒷짐을 쥐고 한적한 곳으로 몸을 옮겼다.
그는 이미 어둑해진 밤하늘을 스윽 올려다본 후,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며 수풀 쪽으로 걸어갔다.
이어 소변을 보려는 듯 바짓 저고리를 풀어헤치고 섰으나, 정작 소변은 보지 않은 체, 마치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알아보았는가?"
아무도 없는 수풀 앞에 서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는 바로 이현로였다.
이현로가 중얼거리듯 말하였고, 아무도 없는 듯했으나, 수풀 너머에서 누군가의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예, 확인하였습니다."
이현로는 대답 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면서도 눈빛은 날카롭게 번득거리고 있었다.
"한명회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대답 소리에 이현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쪽에서 주시하고 있음을 들켜서는 아니될 것일세. 이곳에서 우리가 이리 놀고 있으니 어느 정도 마음은 놓고 있겠지. 내 분명 강음으로 간다 하였던 이몽가가 이리 왔으니, 그도 수양의 사람이다. 오늘 이후 이몽가 뒤에도 사람을 붙여 놓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어 이현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서서 휘청휘청 거리며 다시 술자리 쪽으로 걸어갔다.
술자리로 돌아간 이현로는 큰소리로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정암(貞菴) 나리, 제 술을 받으시지요."
그가 술병을 들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니, 그가 취기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이 친구 이거, 나를 놀리는 구만."
그는 기분 좋은 듯 이현로의 술을 받았고, 이현로는 여전히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 큰일을 하실 분 아니신가? 내 미리 축하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다 같이 웃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안평대군도 같이 있었다.
그 역시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으나, 그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모습을 감춘 체,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술 마시며 웃고 있는 안평대군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안평대군의 딸 우희였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이자 안평대군 본부인의 장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그 때문에 안에서는 낮인지 밤인지 구별할 수 없었고, 꽤 무거운 침묵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장소였다.
그곳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명은 길고 화려한 곤포를 입고, 긴 수염과 독특하게 생긴 상투관을 하고 있었다.
꽤 기품 있어 보이는 그 중년 남자 맞은편에는, 준수한 용모에 차분한 표정을 한 수혁이 앉아 있었다.
중년 남자는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여유로운 웃음을 띄운 체 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한 발걸음이니 환대를 해주고 싶기는 하다만... 알다시피, 금분세수(金盆洗手)하여 떠난 이가 찾아오는 것은 반기지 않는 것이 관례이니, 이해하거라."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익히 알고 있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문주 님."
수혁 앞에 앉아 있는 남자, 그는 바로 수혁이 몸담았던 문파인 환검문(幻劍門)의 장문인(掌門人) 황해담이었다.
"그래, 사람을 알아보고 있다고? 너처럼, 나랏일을 할 사람 말이냐?"
"예, 나랏일에 뜻이 있는 사람을 찾아보려 합니다."
수혁의 대답을 들은 황문주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곰곰이 생각에 빠지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사람, 추천해 줄만한 사람이 있긴 하겠구나."
수혁이 살짝 반기는 표정이 되었다.
사실 여길 찾아오면서도 내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던 그였다.
"누구...입니까?"
수혁의 물음에 황문주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채원이라고 아느냐?"
웃어 보이던 수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채원이라면... 혹, 풍련이가(風連李家)의 망나니로 불리는, 이채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수혁의 말에 황문주가 껄껄 거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다. 그자 역시 너처럼 금분세수를 하고 이 무림을 떠난 인물이지. 야심이 많아, 네가 모시고 있다는 그 안평대군의 부름이라면, 아마 너한테 절이라도 할 것이다."
수혁은 적잖이 실망하고 있었지만, 애써 내색하지는 않고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허나... 인물됨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까?"
황해담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격앙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냐? 설마 내가 네게 그런 사람을 소개하겠느냐?"
이어 차분해진 황해담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이채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십 년 전 무림이 요괴들로 혼란했었을 때, 영웅 도운평과 함께 섭비왕(燮沸王)의 아내, 혈비(血妃)를 죽이러 갔던 이채석의 동생이다. 당시 이채석의 죽음으로 방황의 시기를 보내 무림인들에게 힐난을 듣기는 했지만, 워낙 자기가 존경하던 형의 죽음이었기에 많이 괴로워했던 것일 뿐이다. 형인 이채석과 함께 풍련이가의 절기인 삭풍참(削風斬)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 바로 그다. 너도 알겠지만, 무공을 그만한 경지까지 끌어올린 사람이 어디 헛한 사람이 있더냐?"
황해담의 말에 수혁도 설득이 된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림 내에서 요괴들과 사대마왕(四大魔王)의 토벌을 이야기해왔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형을 잃은 이채원이 얼마나 속상하겠느냐? 그는 그 때문에 무림을 원망하며 금분세수를 하여 무림을 떠난 것이다. 사람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 사람들 말만 듣고 결론을 내려서는 아니될 것이다."
수혁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송구합니다. 오늘 또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스승님. 허면, 그를 소개해 주시지요. 저도 이제는 만나보고 싶어 졌습니다."
수혁의 대답에 황해담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 다행이구나. 어떤 사람인지는 네가 직접 판단해 보거라. 내 조만간에 기별을 하여, 그로 하여금 너를 찾아가게 하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자자, 기왕 왔으니 차라도 마셔야지. 식기 전에 마시거라."
"예."
수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비로소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의 진한 향이 수혁의 코끝을 간지럽혔고,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 마음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
대부분의 준비된 사람들은 일찌감치 여흥으로 떠난 터라, 집안이 제법 썰렁해져 있었다.
조용해진 집 안을 터벅한 걸음으로 걸으며 두리번거리던 재희는 때마침 들어서고 있던 수혁과 마주했다.
"나와 계셨습니까?"
재희는 짐짓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고개 숙여 대답했다.
"네...."
문득 그녀의 눈에, 수혁의 곁에 서서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앳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재희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궁금함을 가득 담은 체 소년을 바라보니, 수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저를 대신해 신녀님의 수발을 들어줄 아이입니다."
이어 수혁이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사 올리거라. 이분이 대신녀 님이시다."
그러자 아이가 기쁜 표정이 되어 얼른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대신녀님. 이렇게 예쁘신 분 인줄 몰랐습니다."
희희낙락하는 소년을 보며 재희는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수혁에게 되물었다.
"제... 수발을 들 아이라구요? 하지만, 아직 어린..."
재희가 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소년이 나서 소리치듯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자신 있습니다. 이래 봬도, 제가 어지간한 어른들보다 힘이 셉니다."
옆에 서 있던 수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맞습니다. 저도 이 아이의 힘을 당해낼 수 없을 만큼, 큰 신력(神力)을 가진 아이입니다. 한번 믿어 보시지요."
수혁의 말에 재희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름이 뭐니?"
재희가 소년을 보며 묻는 말에, 소년은 활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예, 홍씨 성에 길자, 동자를 씁니다."
순간 재희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홍... 길동?"
"예, 맞습니다. 길동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이어 재희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
"호, 홍길동? 진짜 홍길동?"
그녀의 반응에 수혁은 물론 길동의 표정도 어리둥절해졌다.
"예? 그럼... 가짜 홍길동도 있습니까?"
재희가 이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 아하하, 아, 아냐... 길동... 길동이면.... 혹시 아버님이 홍상직... 어른이시니?"
홍길동이 약간 어색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다만, 제가 그리 부르면 아니 됩니다."
재희가 절로 "아..."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맙소사. 홍길동이라니...
그 사이 수혁이 재희에게 물었다.
"허면, 이 아이에게 그 유림이란 사람을 찾으라 할까요?"
수혁의 물음에 재희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어..." 하며 수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길동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내가 찾는 사람이 있어. 유림이라고 했었거든. 무당... 아니 신녀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었어. 그 사람을 찾아 줄 수 있겠니?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
재희의 말에 길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제가 어떻게 찾으면 되는 겁니까?"
재희는 수혁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여기서는 좀 도와주십시오. 유림이란 사람은, 이곳에서 그리 큰일을 벌였습니다. 분명 마님께서 부르셨을 테니,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연락하면 되는지는 마님께서 아실 겁니다."
수혁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럼 제가 마님께 여쭤본 후, 길동이에게 알려주겠습니다."
재희는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재희의 인사에 수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혁이 길동을 데리고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겨 가니, 재희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생겼으니 다행히 아니겠는가.
어쩐지 이곳에서의 삶이 조금씩, 생각보다 빠르게 익숙해져 가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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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깔 거리는 헤픈 웃음소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풍악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누군가 뒷짐을 쥐고 한적한 곳으로 몸을 옮겼다.
그는 이미 어둑해진 밤하늘을 스윽 올려다본 후,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며 수풀 쪽으로 걸어갔다.
이어 소변을 보려는 듯 바짓 저고리를 풀어헤치고 섰으나, 정작 소변은 보지 않은 체, 마치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알아보았는가?"
아무도 없는 수풀 앞에 서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는 바로 이현로였다.
이현로가 중얼거리듯 말하였고, 아무도 없는 듯했으나, 수풀 너머에서 누군가의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예, 확인하였습니다."
이현로는 대답 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면서도 눈빛은 날카롭게 번득거리고 있었다.
"한명회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대답 소리에 이현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쪽에서 주시하고 있음을 들켜서는 아니될 것일세. 이곳에서 우리가 이리 놀고 있으니 어느 정도 마음은 놓고 있겠지. 내 분명 강음으로 간다 하였던 이몽가가 이리 왔으니, 그도 수양의 사람이다. 오늘 이후 이몽가 뒤에도 사람을 붙여 놓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어 이현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서서 휘청휘청 거리며 다시 술자리 쪽으로 걸어갔다.
술자리로 돌아간 이현로는 큰소리로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정암(貞菴) 나리, 제 술을 받으시지요."
그가 술병을 들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니, 그가 취기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이 친구 이거, 나를 놀리는 구만."
그는 기분 좋은 듯 이현로의 술을 받았고, 이현로는 여전히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 큰일을 하실 분 아니신가? 내 미리 축하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다 같이 웃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안평대군도 같이 있었다.
그 역시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으나, 그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모습을 감춘 체,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술 마시며 웃고 있는 안평대군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안평대군의 딸 우희였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이자 안평대군 본부인의 장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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