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대군
이틀 여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간밤에는 정신없이 잠을 자버린 재희는 늦은 아침에야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침부터 찾아온 우희 덕에 조선시대 방식으로 세안을 할 수 있었기에 조금 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정오가 다 되어가는 지금은 제법 정신이 맑고 또렷해졌다.
이 모든 것이 꿈이나 상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좀 더 확연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어떻게 해서 과거로 오게 되었고, 또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재희는 진지하게 그 고민을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일단... 그 무당을 다시 찾자.'
재희는 유림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장본인이니, 그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스스로 살아야 한다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발언을 했다.
그 사실이 재희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현재가 다 바뀌어 버리면?
수많은 영화들이 그와 같은 현상을 이야기한다.
다만, 재희 스스로 마음 한편에 위로 삼고 있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시간여행에 대한 인과성 이론이었다.
즉, 재희가 과거로 넘어오는 순간, 이미 자신이 속한 우주는 분리되어 평행한 우주가 시작된다는 이론이다.
그 이론이 맞다면, 현재 재희가 넘어온 세상이 설령 재희가 알고 있는 역사와 다르게 흘러간다 해도, 재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변함없이 동일하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란 점이다.
그 이론이 맞기를 바라면서, 재희는 자신이 살던 세상의 역사를 토대로 이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믿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재희는 계속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마음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왠지 모를 답답함에 밖으로 나가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다.
재희가 방문을 열고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신발을 신었다.
우희라는 안평대군의 딸의 것으로 보이는 이 비단 고무신은 하얀 바탕에 꽃무늬가 새겨진 고무신이었다.
어쩐지 꽤나 마음에 드는 신발이었다.
어쨌든 그 신발을 신고 주위를 한번 스윽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요 이틀 여간 대략 집안 구조를 파악한 재희는 어떻게 해야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계속 집안에만 있었더니 이 집이 무슨 감옥처럼 느껴졌다.
잠시라도 좋으니 바깥으로 좀 나가보고 싶었다.
혹시 모를 일이다. 집 밖으로 나가면 무슨 방송국 같은 데서 짠하고 나타나서는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할지도.
그런데 내가 누구라고 몰래카메라를 할까.
그건 연예인 같은 유명인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집 대문 앞에 이르렀다.
주위를 살짝 둘러본 재희가 문을 열고 나가기 위해 문을 살폈다.
전통적인 나무 대문으로 가운데 큼지막한 걸음쇠가 걸려 있었다.
'이걸 들어야 하나?'
재희는 한 번도 이런 문을 열어본 적이 없었기에, 걸음쇠를 들어보려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걸음쇠가 무거운 것도 있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할려니 힘이 더욱 들어가지 않았다.
'어떡하지...'
재희가 문을 열기 위해 끙끙 거리고 있을 때였다.
"뭐하슈?"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 해하며 문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몸을 돌려보니, 이 집에서 일하는 하인 한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게..."
재희가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고 서 있으니, 하인이 다시 되물었다.
"나가시게?"
그 말에 재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네, 네...."
그러자 하인이 피식 웃으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럼 말씀을 하시지."
하인은 익숙한 듯 금세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옛수다."
하인이 문을 열어주자 놀란 재희가 꾸뻑 인사를 하였다.
"가,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재희는 부랴부랴 집 밖을 나섰다.
집 밖을 나서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내달렸다.
한참을 내달리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뭐야? 아무 일 없네?"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못 빠져나오고 저 안에서 죽거나 노비로 팔려갈까 봐 천기까지 누설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고 쉽게 나올 수 있다니.
너무하네.
왠지 모르게 서운함까지 느끼는 것은 오버였을까.
재희는 숨을 한번 고르고는 비로소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이 참 좋았다.
하늘은 한 폭의 그림 같은 구름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데, 이 하늘과 구름을 가리는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으니, 탁 트인 하늘이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재희는 챙겨가지고 나온 가방에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혹여나 누가 볼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바람은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한 것 같았다.
한여름의 기세가 꺾인 9월에 시원한 바람은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바람이었다.
지금 현재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까지 모두 다 날려버려 줄 것 같은 바람이었다.
"아~ 좋다. 미쳤다, 미쳤어. 이 상황이 좋냐?"
재희는 스스로에게 핀잔을 주듯이 중얼거리며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민속촌에 와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옛날 집들이 쭈욱 늘어선 길거리는 그 자체로 어쩐지 분위기 있어 보였다.
지금 손에 커피 한잔이 쥐어져 있었다면, 이 상황을 즐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 커피... 달달한 라떼 한잔 마시고 싶다."
재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큼지막한 시장 길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마치 사극 드라마 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와..."
재희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며 지나다니는 사람이며, 시장 상인들과 물건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신기함의 연속이었다.
특히 재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결이 정말 이뻐 보이는 비단과 여인네들을 위한 비녀 따위의 것들이었다.
마치 관광지 기념품 판매장 같은 곳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문득 머리에 큼지막한 무언가를 짊어지고 가는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재희도 어렸을 때엔 할머니들이 저렇게 머리에 지고 가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긴 했지만, 머리에 지고 있는 것의 크기가 남달랐다.
저도 모르게 눈길이 그 아주머니를 따라 흘렀다.
갓을 쓴 사람들 하며, 등에 큼지막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가는 사내들까지, 사극 드라마에서 이따금씩 보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펼쳐지니, 그야말로 별세상이었다.
상황이 그런 상황이 아닐진대, 저도 모르게 재희는 이따금씩 웃음 짓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다니다 보니, 문득 출출함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늦게 일어나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지... 돈도 없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괜스레 배를 문질 거리고 있으니, 난데없이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고프면 뭐라도 드시지요."
깜짝 놀라서 돌아서 보니 수혁이 서 있었다.
그는 방긋이 웃는 얼굴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놀란 재희가 그에게 물었다.
"어... 언제부터 계셨어요?"
재희의 물음에 수혁이 재밌다는 듯이 눈썹을 들썩거리며 대답했다.
"처음부터요."
재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따라오셨어요?"
수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얄밉다. 기척이라도 내든가. 뭘 그리 조용히 따라온단 말인가.
"제가 따라와서 싫습니까?"
수혁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물으니, 재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됐습니다."
재희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홱하니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뭐라도 드시지요."
수혁이 웃으며 재희의 뒤를 서둘러 뒤따르며 물었다.
"배 안 고픕니다."
재희가 퉁명스럽게 거짓말을 하니, 배에서 심통이 났는가 보다.
마치 난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배에서 큰 소리로 꼬르륵 소리가 나니, 재희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신녀님 배는 입장이 다른 모양입니다."
뒤 따라오던 수혁의 말소리에 재희는 "칫"소리를 내며 얼굴을 붉힌 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수혁이 흠칫 놀라 해하며, 서둘러 재희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평소 국밥 종류의 음식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던 재희였지만, 배가 고파서인지 이 희멀건한데다가 고기 한점 없는 국밥 한 그릇이 더할 나위 없이 맛있게 느껴지고 있었다.
부랴부랴 먹고 있는 재희를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보고 있는 수혁은, 여전히 그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재희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이따금은 웃음 지은 체, 함께 국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 수혁을 살짝 흘겨본 재희가 퉁명스레 말했다.
"민망하게 왜 자꾸 남 먹는 모습을 그렇게 보십니까? 아주 무례하게..."
수혁이 풉하고 웃음을 짓고는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무례해서 정말 송구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시선이 신녀님께 갑니다. 왜 그런 겁니까?"
수혁의 말에 재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뭐래?'
안 그래도 심경 복잡해 정신없어 죽겠는데, 지금 작업 들어오는 건가?
그런 생각에 재희는 코웃음을 치며 얼른 국밥을 마저 먹고 있었다.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긴 하지만... 또 너무 싫은 내색을 하면 마음 상하려나?
재희 얼른 표정을 풀며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으니, 수혁은 또다시 예의 재밌다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주막을 나서는 재희 곁으로 수혁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천천히 들어가시죠."
수혁의 말에 재희는 몰래 한숨을 내쉬며 수혁을 따라 안평대군의 집으로 향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함에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왔지만,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곁을 지키고 있으니, 유림은 또 언제 찾으러 간단 말인가.
집 앞에 다다를 무렵, 대문이 열리고 누군가 막 안평대군의 집을 나서고 있었다.
갓에는 긴 줄이 달려있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거무튀튀한 금색 빛 옷을 입은 그는 꽤나 준수한 용모에 진중한 표정을 한 체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를 본 수혁이 황급히 인사를 하니, 재희도 놀라 얼른 따라서 인사를 하였다.
그는 수혁을 못 본 듯이, 수혁의 앞을 횅하니 지나쳐 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재희가 놀라 수혁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꽤나 지위가 높은 분 같은데..."
그러자, 수혁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십니다. 이만 들어가시죠."
금성대군이란 말에 재희가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린 단종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은 인물이다.
어쩐지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마음에 쓰여 자꾸 돌아보던 재희는, 이내 수혁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간밤에는 정신없이 잠을 자버린 재희는 늦은 아침에야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침부터 찾아온 우희 덕에 조선시대 방식으로 세안을 할 수 있었기에 조금 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정오가 다 되어가는 지금은 제법 정신이 맑고 또렷해졌다.
이 모든 것이 꿈이나 상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좀 더 확연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어떻게 해서 과거로 오게 되었고, 또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재희는 진지하게 그 고민을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일단... 그 무당을 다시 찾자.'
재희는 유림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장본인이니, 그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스스로 살아야 한다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발언을 했다.
그 사실이 재희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현재가 다 바뀌어 버리면?
수많은 영화들이 그와 같은 현상을 이야기한다.
다만, 재희 스스로 마음 한편에 위로 삼고 있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시간여행에 대한 인과성 이론이었다.
즉, 재희가 과거로 넘어오는 순간, 이미 자신이 속한 우주는 분리되어 평행한 우주가 시작된다는 이론이다.
그 이론이 맞다면, 현재 재희가 넘어온 세상이 설령 재희가 알고 있는 역사와 다르게 흘러간다 해도, 재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변함없이 동일하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란 점이다.
그 이론이 맞기를 바라면서, 재희는 자신이 살던 세상의 역사를 토대로 이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믿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재희는 계속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마음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왠지 모를 답답함에 밖으로 나가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다.
재희가 방문을 열고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신발을 신었다.
우희라는 안평대군의 딸의 것으로 보이는 이 비단 고무신은 하얀 바탕에 꽃무늬가 새겨진 고무신이었다.
어쩐지 꽤나 마음에 드는 신발이었다.
어쨌든 그 신발을 신고 주위를 한번 스윽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요 이틀 여간 대략 집안 구조를 파악한 재희는 어떻게 해야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계속 집안에만 있었더니 이 집이 무슨 감옥처럼 느껴졌다.
잠시라도 좋으니 바깥으로 좀 나가보고 싶었다.
혹시 모를 일이다. 집 밖으로 나가면 무슨 방송국 같은 데서 짠하고 나타나서는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할지도.
그런데 내가 누구라고 몰래카메라를 할까.
그건 연예인 같은 유명인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집 대문 앞에 이르렀다.
주위를 살짝 둘러본 재희가 문을 열고 나가기 위해 문을 살폈다.
전통적인 나무 대문으로 가운데 큼지막한 걸음쇠가 걸려 있었다.
'이걸 들어야 하나?'
재희는 한 번도 이런 문을 열어본 적이 없었기에, 걸음쇠를 들어보려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걸음쇠가 무거운 것도 있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할려니 힘이 더욱 들어가지 않았다.
'어떡하지...'
재희가 문을 열기 위해 끙끙 거리고 있을 때였다.
"뭐하슈?"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 해하며 문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몸을 돌려보니, 이 집에서 일하는 하인 한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게..."
재희가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고 서 있으니, 하인이 다시 되물었다.
"나가시게?"
그 말에 재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네, 네...."
그러자 하인이 피식 웃으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럼 말씀을 하시지."
하인은 익숙한 듯 금세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옛수다."
하인이 문을 열어주자 놀란 재희가 꾸뻑 인사를 하였다.
"가,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재희는 부랴부랴 집 밖을 나섰다.
집 밖을 나서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내달렸다.
한참을 내달리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뭐야? 아무 일 없네?"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못 빠져나오고 저 안에서 죽거나 노비로 팔려갈까 봐 천기까지 누설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고 쉽게 나올 수 있다니.
너무하네.
왠지 모르게 서운함까지 느끼는 것은 오버였을까.
재희는 숨을 한번 고르고는 비로소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이 참 좋았다.
하늘은 한 폭의 그림 같은 구름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데, 이 하늘과 구름을 가리는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으니, 탁 트인 하늘이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재희는 챙겨가지고 나온 가방에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혹여나 누가 볼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바람은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한 것 같았다.
한여름의 기세가 꺾인 9월에 시원한 바람은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바람이었다.
지금 현재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까지 모두 다 날려버려 줄 것 같은 바람이었다.
"아~ 좋다. 미쳤다, 미쳤어. 이 상황이 좋냐?"
재희는 스스로에게 핀잔을 주듯이 중얼거리며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민속촌에 와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옛날 집들이 쭈욱 늘어선 길거리는 그 자체로 어쩐지 분위기 있어 보였다.
지금 손에 커피 한잔이 쥐어져 있었다면, 이 상황을 즐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 커피... 달달한 라떼 한잔 마시고 싶다."
재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큼지막한 시장 길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마치 사극 드라마 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와..."
재희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며 지나다니는 사람이며, 시장 상인들과 물건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신기함의 연속이었다.
특히 재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결이 정말 이뻐 보이는 비단과 여인네들을 위한 비녀 따위의 것들이었다.
마치 관광지 기념품 판매장 같은 곳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문득 머리에 큼지막한 무언가를 짊어지고 가는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재희도 어렸을 때엔 할머니들이 저렇게 머리에 지고 가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긴 했지만, 머리에 지고 있는 것의 크기가 남달랐다.
저도 모르게 눈길이 그 아주머니를 따라 흘렀다.
갓을 쓴 사람들 하며, 등에 큼지막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가는 사내들까지, 사극 드라마에서 이따금씩 보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펼쳐지니, 그야말로 별세상이었다.
상황이 그런 상황이 아닐진대, 저도 모르게 재희는 이따금씩 웃음 짓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다니다 보니, 문득 출출함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늦게 일어나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지... 돈도 없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괜스레 배를 문질 거리고 있으니, 난데없이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고프면 뭐라도 드시지요."
깜짝 놀라서 돌아서 보니 수혁이 서 있었다.
그는 방긋이 웃는 얼굴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놀란 재희가 그에게 물었다.
"어... 언제부터 계셨어요?"
재희의 물음에 수혁이 재밌다는 듯이 눈썹을 들썩거리며 대답했다.
"처음부터요."
재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따라오셨어요?"
수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얄밉다. 기척이라도 내든가. 뭘 그리 조용히 따라온단 말인가.
"제가 따라와서 싫습니까?"
수혁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물으니, 재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됐습니다."
재희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홱하니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뭐라도 드시지요."
수혁이 웃으며 재희의 뒤를 서둘러 뒤따르며 물었다.
"배 안 고픕니다."
재희가 퉁명스럽게 거짓말을 하니, 배에서 심통이 났는가 보다.
마치 난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배에서 큰 소리로 꼬르륵 소리가 나니, 재희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신녀님 배는 입장이 다른 모양입니다."
뒤 따라오던 수혁의 말소리에 재희는 "칫"소리를 내며 얼굴을 붉힌 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수혁이 흠칫 놀라 해하며, 서둘러 재희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평소 국밥 종류의 음식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던 재희였지만, 배가 고파서인지 이 희멀건한데다가 고기 한점 없는 국밥 한 그릇이 더할 나위 없이 맛있게 느껴지고 있었다.
부랴부랴 먹고 있는 재희를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보고 있는 수혁은, 여전히 그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재희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이따금은 웃음 지은 체, 함께 국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 수혁을 살짝 흘겨본 재희가 퉁명스레 말했다.
"민망하게 왜 자꾸 남 먹는 모습을 그렇게 보십니까? 아주 무례하게..."
수혁이 풉하고 웃음을 짓고는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무례해서 정말 송구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시선이 신녀님께 갑니다. 왜 그런 겁니까?"
수혁의 말에 재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뭐래?'
안 그래도 심경 복잡해 정신없어 죽겠는데, 지금 작업 들어오는 건가?
그런 생각에 재희는 코웃음을 치며 얼른 국밥을 마저 먹고 있었다.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긴 하지만... 또 너무 싫은 내색을 하면 마음 상하려나?
재희 얼른 표정을 풀며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으니, 수혁은 또다시 예의 재밌다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주막을 나서는 재희 곁으로 수혁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천천히 들어가시죠."
수혁의 말에 재희는 몰래 한숨을 내쉬며 수혁을 따라 안평대군의 집으로 향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함에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왔지만,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곁을 지키고 있으니, 유림은 또 언제 찾으러 간단 말인가.
집 앞에 다다를 무렵, 대문이 열리고 누군가 막 안평대군의 집을 나서고 있었다.
갓에는 긴 줄이 달려있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거무튀튀한 금색 빛 옷을 입은 그는 꽤나 준수한 용모에 진중한 표정을 한 체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를 본 수혁이 황급히 인사를 하니, 재희도 놀라 얼른 따라서 인사를 하였다.
그는 수혁을 못 본 듯이, 수혁의 앞을 횅하니 지나쳐 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재희가 놀라 수혁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꽤나 지위가 높은 분 같은데..."
그러자, 수혁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십니다. 이만 들어가시죠."
금성대군이란 말에 재희가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린 단종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은 인물이다.
어쩐지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마음에 쓰여 자꾸 돌아보던 재희는, 이내 수혁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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