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역사속으로
옷을 다 갈아입은 재희가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우희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잘 어울리십니다."
아직 앳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친근감 있고 해맑은 우희의 미소를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일 것만 같았다.
"아, 네... 정말 감사합니다."
재희가 서먹하게 감사 인사를 건네자, 옆에 서 있던 유림이 나서 말했다.
"대신녀께서는 몸 가짐을 특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유림의 말에 재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바로 이어 말했다.
"이곳은 대군이신 안평대군(安平大君) 마마께서 계신 곳입니다. 각별히 조심하셔야 할 곳입니다."
유림의 말에 순간 재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한 것이, 혹시 몰래카메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뭔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느끼고 있어왔던 터였다.
'맙소사. 그럼 여기가 과거란 말인가?'
더욱이 안평대군이라면, 계유정난 때 죽고 집안은 풍비박살이 나서 그 후손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기록된 인물이 아닌가?
"오, 오늘이 며칠, 아니 몇 해입니까?"
난데없는 재희의 질문에 우희가 재밌다는 듯이 살짝 웃어 보이고는 대답했다.
"불쑥 나타나신 분이시라, 오늘이 어느 날인지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계유년이옵고 9월 4일이니, 정사일이 되지요."
재희의 표정이 순간 창백하게 굳어져 버렸다.
'계유년? 더군다나 구월이면... 계유정난까지 불과 한 달밖에 안 남은 거잖아?'
심장이 긴박함을 눈치채고 혼자 도망이라도 치려는지, 쉴 새 없이 두근거리며 뛰고 있었다.
"저기 그럼..."
재희가 재차 무언가를 물어보려 할 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오셨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아름다운 미색에 어딘지 모를 중후함을 갖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나셨느냐?"
들어서자마자 묻는 말에, 유림은 재빨리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허리를 굽혔다.
"마님 오셨습니까. 대신녀께서는 방금 일어나셨습니다."
재희 역시 유림의 행동을 보고는,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마님이란 여인은 재희에게 바짝 다가와 말했다.
"너무 어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편히 계시고, 서둘러 저희 대군께서 하고자 하는 일에 광영을 밝히어 주시면 됩니다."
재희는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하였다.
그런 그녀의 안색을 눈치챈 유림이 서둘러 말했다.
"대신녀께서는 방금 현세로 넘어오신 터라, 아직 경황이 없으실 것입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소인이 전하여 드리겠나이다."
유림의 말에 마님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그럼, 신녀님 믿고 저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어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눈이 우희에게로 향하자 매섭게 변하였다.
"아가씨는 예 있어서는 아니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같이 나가시지요."
그러자 우희의 표정이 울상이 되어버렸다.
"그게..."
"흠!"
마님이라 불린 여인이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가니, 우희가 고개를 푹 숙이고 뒤따라 나섰다.
두 사람이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림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연이어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고는 퉁명스러운 시선으로 재희를 바라보았다.
"좀 앉으셔."
그녀의 달라진 태도에 재희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어디서 오셨수?"
유림이 묻는 말에, 재희는 잠시 말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그게... 저는 서울에서... 아, 아니... 어디냐보다 중요한 게..."
재희가 횡설수설하는 것 같자 유림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됐고. 여하튼 댁이나 나나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살고 죽고가 달렸수. 댁이 어디서 뭐하다 온 사람인지는 내 몰라도, 여서 그 얄팍한 모가지 간수 잘 하려거든, 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신녀가 되어야 하는 거요. 알아 들으시것소?"
유림의 반 협박조 같은 말에 재희는 눈살을 찌푸린 체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유림은 한숨을 한번 더 내쉬고는 재차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까 보신 마님이, 이런 주술이니 뭐니 하는 것에 한참 빠져계슈, 어쩌겠어? 양반이 부르면 와야지... 동생한테 술법으로다가 어쩌다가 댁을 불러내긴 했는데... 나도 여까지 여. 나도 더는 모르겠다고. 여 마님이 뭘 원하는지 알겠는가? 응?"
유림의 난데없는 질문에 재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인 대답을 하고 있었다.
"부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
순간 유림이 화들짝 놀라서는 얼른 재희의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어 놀란 토끼눈이 되어서 재희를 보며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죽고 싶어 환장했수? 진짜 내 모가지 날아가는 꼴 봐야 것어?"
얼마나 놀랐는지 아랫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금 수양대군 쪽 사람들이 꼬투리 하나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댕기고 있수, 어느 쪽에 줄을 서든 살고 싶거들랑 입 조심 하슈."
유림이 조심스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것들은 말 한마디 잘못 내뱉었다가는,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니가. 입 조심하슈. 나는 이제 댁을 불러다 앉혀 놨으니... 내 할 도리는 다 했고, 난 이제 힘을 잃었다고 그리 말하고 떠날 거요. 댁한테는 미안하긴 한데... 댁도 앞가림 잘해서, 부디 살아서 나가길 바라요."
유림은 그 말을 남기고는 자리에서 부리나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 이보세요."
재희가 황급히 만류해 보려 했지만, 미처 잡을 겨를도 없이 도망치듯 달려 나가 버렸다.
"아니... 뭐 어쩌라고..."
재희는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인지 머릿속이 다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지금 여기는 조선시대고,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안평대군의 사가이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일어나면....
'필시 이 집에 있다가는 노비로 팔려나갈 것이다.'
재희는 그 생각이 들자, 얼른 자기 물건을 서둘러 찾아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자신의 옷이며 소지품 등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다 둔 거야...'
재희는 아랫입술을 깨물으며, 빼꼼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재희는 조심스럽게 방에서 나왔다.
놓여 있는 하얀색에 분홍빛으로 장식된 꽃신을 신고서 살금살금 집을 돌아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혹시나 누구와 마주칠까,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핀 다음 조심조심 옮겨가던 그녀는, 무심코 돌아서다 무언가에 콩 하고 부딪히고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헉?"
자신도 모르게 놀란 표정이 되어 뒤로 물러선 재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은 삿갓에 짙은 눈썹을 하고 아이마냥 순수한 듯 초롱 거리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는 조금 재밌다는 듯이,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이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재희가 놀라 묻는 말에, 그는 약간의 실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그건 제 쪽에서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이곳에 머무는 사람 치고 제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그가 되물어 오는 말에 재희는 할 말을 잃고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후다닥 달려오더니 재희와 마주 선 남자를 보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수혁 오라버니?"
그녀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 재희 앞에 선 남자가 환한 미소를 띄었다.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남자가 이리도 아름답게 생겼을까.
또 미소는 어찌나 부드럽고 온화한 지.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것만 같았다.
"대신녀님?"
그녀, 우희는 다가오더니 재희를 보고 놀란 표정이 되어 말했다.
"왜 나와 계십니까?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우희의 물음에 재희는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아... 아닙니다."
우희의 말에 수혁이라 불린 남자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대...신녀?"
수혁의 물음에 우희가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애랑이가 물속에 들어가고 여기 대신녀님이 나오셨어. 신녀님 말로는 자기 힘을 다 쏟아부어서, 애랑이를 제물로 받쳤다는데..."
순간 우희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애랑이가 걱정돼. 신녀님 말로는 그냥 다른 세계 어딘가에 머무는 것뿐이라고, 거기서도 잘 지낼 거라고 하시긴 했는데... 벌써부터 보고 싶어."
그런 우희를 다독이려는 듯, 수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 신녀님 말 따나 애랑이는 어디서든 잘 지낼 수 있는 아이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수혁의 부드러운 말에, 우희도 다시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사이 두 사람 대화를 듣고 있던 재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구미호를 제물로 자신이 온 거라니. 맙소사. 그럼 그날 물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구미호라면?
그럼....
'그 구미호랑 나랑 시대가 바뀐 건가? 그 구미호가 없으면.... 난 못 돌아가는 거야?'
재희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갑자기 휘청거리자, 수혁이 재빨리 그런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다시 한번 재희의 눈이 수혁의 눈과 마주쳤다.
실망감에 눈물이 맺혀 당황 해있던 재희의 눈과, 놀라움과 신기함을 가득 머금은 천진난만한 수혁의 눈이 마주치니, 흡사 시간이 그대로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우희 역시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재희와 수혁의 얼굴 사이로 비친 우희의 눈은 왠지 모를 갈등과 두려움에,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아직 앳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친근감 있고 해맑은 우희의 미소를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일 것만 같았다.
"아, 네... 정말 감사합니다."
재희가 서먹하게 감사 인사를 건네자, 옆에 서 있던 유림이 나서 말했다.
"대신녀께서는 몸 가짐을 특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유림의 말에 재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바로 이어 말했다.
"이곳은 대군이신 안평대군(安平大君) 마마께서 계신 곳입니다. 각별히 조심하셔야 할 곳입니다."
유림의 말에 순간 재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한 것이, 혹시 몰래카메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뭔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느끼고 있어왔던 터였다.
'맙소사. 그럼 여기가 과거란 말인가?'
더욱이 안평대군이라면, 계유정난 때 죽고 집안은 풍비박살이 나서 그 후손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기록된 인물이 아닌가?
"오, 오늘이 며칠, 아니 몇 해입니까?"
난데없는 재희의 질문에 우희가 재밌다는 듯이 살짝 웃어 보이고는 대답했다.
"불쑥 나타나신 분이시라, 오늘이 어느 날인지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계유년이옵고 9월 4일이니, 정사일이 되지요."
재희의 표정이 순간 창백하게 굳어져 버렸다.
'계유년? 더군다나 구월이면... 계유정난까지 불과 한 달밖에 안 남은 거잖아?'
심장이 긴박함을 눈치채고 혼자 도망이라도 치려는지, 쉴 새 없이 두근거리며 뛰고 있었다.
"저기 그럼..."
재희가 재차 무언가를 물어보려 할 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오셨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아름다운 미색에 어딘지 모를 중후함을 갖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나셨느냐?"
들어서자마자 묻는 말에, 유림은 재빨리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허리를 굽혔다.
"마님 오셨습니까. 대신녀께서는 방금 일어나셨습니다."
재희 역시 유림의 행동을 보고는,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마님이란 여인은 재희에게 바짝 다가와 말했다.
"너무 어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편히 계시고, 서둘러 저희 대군께서 하고자 하는 일에 광영을 밝히어 주시면 됩니다."
재희는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하였다.
그런 그녀의 안색을 눈치챈 유림이 서둘러 말했다.
"대신녀께서는 방금 현세로 넘어오신 터라, 아직 경황이 없으실 것입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소인이 전하여 드리겠나이다."
유림의 말에 마님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그럼, 신녀님 믿고 저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어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눈이 우희에게로 향하자 매섭게 변하였다.
"아가씨는 예 있어서는 아니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같이 나가시지요."
그러자 우희의 표정이 울상이 되어버렸다.
"그게..."
"흠!"
마님이라 불린 여인이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가니, 우희가 고개를 푹 숙이고 뒤따라 나섰다.
두 사람이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림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연이어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고는 퉁명스러운 시선으로 재희를 바라보았다.
"좀 앉으셔."
그녀의 달라진 태도에 재희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어디서 오셨수?"
유림이 묻는 말에, 재희는 잠시 말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그게... 저는 서울에서... 아, 아니... 어디냐보다 중요한 게..."
재희가 횡설수설하는 것 같자 유림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됐고. 여하튼 댁이나 나나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살고 죽고가 달렸수. 댁이 어디서 뭐하다 온 사람인지는 내 몰라도, 여서 그 얄팍한 모가지 간수 잘 하려거든, 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신녀가 되어야 하는 거요. 알아 들으시것소?"
유림의 반 협박조 같은 말에 재희는 눈살을 찌푸린 체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유림은 한숨을 한번 더 내쉬고는 재차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까 보신 마님이, 이런 주술이니 뭐니 하는 것에 한참 빠져계슈, 어쩌겠어? 양반이 부르면 와야지... 동생한테 술법으로다가 어쩌다가 댁을 불러내긴 했는데... 나도 여까지 여. 나도 더는 모르겠다고. 여 마님이 뭘 원하는지 알겠는가? 응?"
유림의 난데없는 질문에 재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인 대답을 하고 있었다.
"부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
순간 유림이 화들짝 놀라서는 얼른 재희의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어 놀란 토끼눈이 되어서 재희를 보며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죽고 싶어 환장했수? 진짜 내 모가지 날아가는 꼴 봐야 것어?"
얼마나 놀랐는지 아랫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금 수양대군 쪽 사람들이 꼬투리 하나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댕기고 있수, 어느 쪽에 줄을 서든 살고 싶거들랑 입 조심 하슈."
유림이 조심스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것들은 말 한마디 잘못 내뱉었다가는,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니가. 입 조심하슈. 나는 이제 댁을 불러다 앉혀 놨으니... 내 할 도리는 다 했고, 난 이제 힘을 잃었다고 그리 말하고 떠날 거요. 댁한테는 미안하긴 한데... 댁도 앞가림 잘해서, 부디 살아서 나가길 바라요."
유림은 그 말을 남기고는 자리에서 부리나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 이보세요."
재희가 황급히 만류해 보려 했지만, 미처 잡을 겨를도 없이 도망치듯 달려 나가 버렸다.
"아니... 뭐 어쩌라고..."
재희는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인지 머릿속이 다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지금 여기는 조선시대고,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안평대군의 사가이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일어나면....
'필시 이 집에 있다가는 노비로 팔려나갈 것이다.'
재희는 그 생각이 들자, 얼른 자기 물건을 서둘러 찾아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자신의 옷이며 소지품 등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다 둔 거야...'
재희는 아랫입술을 깨물으며, 빼꼼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재희는 조심스럽게 방에서 나왔다.
놓여 있는 하얀색에 분홍빛으로 장식된 꽃신을 신고서 살금살금 집을 돌아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혹시나 누구와 마주칠까,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핀 다음 조심조심 옮겨가던 그녀는, 무심코 돌아서다 무언가에 콩 하고 부딪히고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헉?"
자신도 모르게 놀란 표정이 되어 뒤로 물러선 재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은 삿갓에 짙은 눈썹을 하고 아이마냥 순수한 듯 초롱 거리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는 조금 재밌다는 듯이,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이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재희가 놀라 묻는 말에, 그는 약간의 실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그건 제 쪽에서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이곳에 머무는 사람 치고 제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그가 되물어 오는 말에 재희는 할 말을 잃고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후다닥 달려오더니 재희와 마주 선 남자를 보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수혁 오라버니?"
그녀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 재희 앞에 선 남자가 환한 미소를 띄었다.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남자가 이리도 아름답게 생겼을까.
또 미소는 어찌나 부드럽고 온화한 지.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것만 같았다.
"대신녀님?"
그녀, 우희는 다가오더니 재희를 보고 놀란 표정이 되어 말했다.
"왜 나와 계십니까?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우희의 물음에 재희는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아... 아닙니다."
우희의 말에 수혁이라 불린 남자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대...신녀?"
수혁의 물음에 우희가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애랑이가 물속에 들어가고 여기 대신녀님이 나오셨어. 신녀님 말로는 자기 힘을 다 쏟아부어서, 애랑이를 제물로 받쳤다는데..."
순간 우희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애랑이가 걱정돼. 신녀님 말로는 그냥 다른 세계 어딘가에 머무는 것뿐이라고, 거기서도 잘 지낼 거라고 하시긴 했는데... 벌써부터 보고 싶어."
그런 우희를 다독이려는 듯, 수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 신녀님 말 따나 애랑이는 어디서든 잘 지낼 수 있는 아이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수혁의 부드러운 말에, 우희도 다시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사이 두 사람 대화를 듣고 있던 재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구미호를 제물로 자신이 온 거라니. 맙소사. 그럼 그날 물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구미호라면?
그럼....
'그 구미호랑 나랑 시대가 바뀐 건가? 그 구미호가 없으면.... 난 못 돌아가는 거야?'
재희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갑자기 휘청거리자, 수혁이 재빨리 그런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다시 한번 재희의 눈이 수혁의 눈과 마주쳤다.
실망감에 눈물이 맺혀 당황 해있던 재희의 눈과, 놀라움과 신기함을 가득 머금은 천진난만한 수혁의 눈이 마주치니, 흡사 시간이 그대로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우희 역시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재희와 수혁의 얼굴 사이로 비친 우희의 눈은 왠지 모를 갈등과 두려움에,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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