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시공간을 넘다
슬슴슬금 큰 물통을 들고서 자리를 옮기던 그녀는, 누가 볼세라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곱게 차려입은 비단옷에 흙이라도 묻을까, 누가 보면 얼른 달려가 물통이라도 받아줄 것인데,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니, 그녀는 재밌다는 듯이 물통을 든 체 발걸음을 옮기며 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기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담장 쪽으로 다가가서 들고 있던 물통을 뒤집어 놓고, 비단신으로 조심스럽게 딛고 올라섰다.
담장 너머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한가운데 자리잡은 큰 통에는 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독특한 복색의 한 중년 여인이 서 있었으니, 신녀 유림이었다.
유림이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춤을 추듯 덩실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림의 맞은편에 아직 앳되어 보이는 한 여인이 곱상한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신기한 듯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장군께서 오셨다. 큰 뜻을 품고 오셨느니라."
유림이 큰소리로 말하고는 칼을 들고 맞은편 여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손을 내보거라."
유림이 다가와 건네는 말에, 그녀는 큰 눈망울을 껌뻑 껌뻑 거리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유림은 거침없이 칼로 그녀의 손을 베었다.
"아야!"
그녀는 갑작스럽게 손이 베이자 인상을 쓰며 손을 거두었고,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유림을 바라보았다.
유림은 그런 그녀를 외면하며, 피 묻은 칼을 치켜들었다.
"보거라, 천년호(千年狐)의 피를 얻었으니, 이 피로써 장군의 뜻을 전할 것이니라."
유림이 소리치며 피 묻은 칼을 커다란 물통의 물 안에 담갔고, 그 모습을 앳된 여인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천년 안됐는데? 997년인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자신의 상처 난 손을 쳐다 보았다.
놀랍게도 손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더니,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문득 담장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담장 너머의 여인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기색을 띄며 손을 흔들어 보였고, 물통을 딛고 서서 구경하던 담장 너머의 여인 역시 손을 마주 흔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애랑아~"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손을 내렸다.
자신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몸종들을 보고서는 얼른 물통 위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아이고, 우희 아가씨, 이게 뭐시래요? 마님이 아시면 큰일 납니다."
우희라는 이름의 여인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으응... 그래, 알았어."
우희는 마지못해 몸종들의 등살에 밀려 다시 자신의 방으로 쫓겨나듯 가야만 했다.
그 사이, 유림의 춤은 더욱 격해지고 있었고, 그녀를 도와 풍악을 울리는 이들의 손동작도 빨라졌다.
사람들은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한쪽에는 한 손에 흰색 천을 손에 들고, 양손으로 기도를 올리는 이가 있었다.
그런 상황이 신기한 듯 계속 두리번거리던 애랑의 눈에, 가운데 놓인 커다란 물통에 물이 살짝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어?"
애랑이 유심히 그 물을 바라보니, 어느새 물에 파장은 푸른빛을 띠면서 찰랑 거리고 있었고, 이를 발견한 애랑이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누구 한 사람 그 물을 보지 못한 듯했다.
애랑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한번 물을 바라보았다.
파란 물결은 점점 더 짙어지며 어떤 형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광경을,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다들 멀뚱한 눈으로 춤추는 유림만 응시하고 있었다.
파란 물결의 형체는 어느새 기묘한 동굴 같은 형태가 되어 반짝거렸다.
마치 이리 들어오라는 듯 파란 불빛이 반짝 거리는 것이 신묘해서, 애랑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춤을 추며 신들린 듯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던 유림은, 멍한 표정으로 물 쪽으로 걸어가는 애랑을 보았다.
"뭐하는 것이야?"
유림이 호통치듯 애랑을 향해 외쳐 보지만, 애랑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저벅저벅 걸어가던 애랑은 난데없이 물속으로 확 뛰어들었다.
===
살인적인 햇빛이 쭉쭉 내리쬐는 날씨에, 가만히만 서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재희는 챙겨 온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 내며 이제 막 도착한 궁궐 한켠의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여기가 빨래터구나..."
재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빨래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느 동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딱히 신기하다거나 새롭다거나 한 느낌은 아니었다.
"에휴, 무슨 과제를 내줘도..."
재희는 투덜투덜 거리면서 빨래터 쪽으로 다가갔다.
좁다란 계단을 통해 내려서서, 창덕궁 빨래터의 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는 것이, 물도 맑고 시원해 보여 당장 발이라도 담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일단 핸드폰으로 사진부터 찍어야 했다.
교수님은 관련이 있는 장소를 찍어오라 하셨지만, 설마 궁궐에 뭐 하나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재희는 일단 궁궐 여기저기를 사진 찍어서 수집해놓은 다음, 이야기를 끼워 맞출 생각이었다.
핸드폰 카메라로 빨래터를 이리저리 찍어본 재희는 이내, 핸드폰을 넣어두고 회심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디..."
재희는 빨래터에 걸터앉아서 신발과 양말을 벗어 한쪽에 놓아두었다.
천천히 맑은 물속에 발을 담그니, 그 시원함이 발끝부터 전해져 왔다.
"으으~~ 시원하다~"
재희는 재밌다는 듯이 깔깔 거리고 웃으면서 발을 물에 담근 체 찰랑거렸다.
바로 그때, 갑자기 물에 푸른빛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어?"
재희가 놀라 해하며 신기한 듯 그 물결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 작은 물이 폭발하듯 솟구쳐 오르며, 무언가가 재희 옆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으악!"
재희는 너무나 놀라 옆으로 몸을 눕혔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그대로 빨래터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빠진 재희는 그 와중에도 이해되지 않는 의구심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분명 빨래터의 물은 발목조차 차지 않을 만큼 얕은 물이었건만, 어떻게 이렇게 빠질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 그녀는 물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들듯 그렇게 빨려 들고 있었고, 수면에 빛나던 푸른빛은 점점 사그러 들기 시작해 어느 순간,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접시물에 코 박고 죽는다더니,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웃지 못할 생각을 끝으로, 재희는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
반면, 그 빨래터 물속에서 뛰쳐나온 이가 있었으니,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뭐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태연하게 빨래터를 걸어 나왔다.
"우와? 여기가 어디래? 신기한 동네네."
그녀, 애랑은 신기한 듯 세상을 두리번거리 더니, 발길 닿는 대로 휘적 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
흐려졌던 의식이 다시 돌아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분명 물에 빠져 호흡을 못하는 것이 정상일 진대, 이상할 정도로 편한 상태였다.
숨을 쉬지 못하고 있음에도 괴롭거나 아프지 않았고, 물속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물의 흐름이 급격히 빨라지는가 싶더니, 분명 아래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로 불쑥 튀어 오르는 느낌과 동시에 물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푸핫!"
드디어 숨을 쉬니 살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코에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여태 괜찮다가 마지막 튀어나올 때만 비로소 자신이 물속에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한참 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희는 영 이상한 생각에 기침이 잦아들자, 얼른 이야기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 제가 저기 빨래터 물에 빠져서..."
하지만 재희의 그런 이야기를 듣지도 않은 체, 그들 가운데 있던 유림이 큰 소리로 외쳤다.
"대신녀(大神女)께서 오셨다! 천년호를 재물로 대신녀께서 직접 강림하셨도다."
유림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신녀님..."
"오오, 신녀님..."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신녀심..."
사람들이 저마다 기도하듯 이야기했고, 유림 역시 무릎을 꿇고 간절한 눈빛으로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녀님이시여, 길을 열어주시옵고, 빛을 밝혀 주시옵소서."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 재희는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이게 뭐지?'
재희는 넋 나간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나무로 된 커다란 물통 안에 자신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알길 없었지만, 주위 풍경은 한층 더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디 사극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이 그녀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재희는 어리둥절함에 주위를 살피다가 얼른 물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맨발임을 알고, 포장되지 않은 길이라 돌이라도 밟으면 엄청 아플 것 같았기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옷도 몽땅 젖어 있었다.
맙소사! 한여름 더운 날씨라 옷을 가볍게 입었건만, 이제 보니 속옷까지 죄다 비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재희는 놀란 나머지 얼굴을 붉히며 얼른 다시 물속에 몸을 담갔다.
"신녀님..."
"신녀님,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다들 재희를 향해 기도하기 바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든 당장 몸을 가릴 옷이 필요했다.
재희가 고개를 돌리며 도움을 줄만한 사람을 찾는 와중에, 저 너머 담벼락 위로 누군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재희와 눈이 마주치자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있었다.
"옷 좀..."
재희가 자신을 보라는 듯이 손짓을 해가며 신호를 보내자, 그녀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손짓을 해가며 답장(?)을 보내오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재희는 답답한 듯 살짝 일어나서 자신의 몸을 보여준 뒤, 얼른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제발 알아들었기를....
재희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여전히 자신을 향해 기도하며 뭔가를 바라는 좌중을 살피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알 수 없을 뿐이었고, 뭔가를 깊게 생각하기엔 너무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곱게 차려입은 비단옷에 흙이라도 묻을까, 누가 보면 얼른 달려가 물통이라도 받아줄 것인데,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니, 그녀는 재밌다는 듯이 물통을 든 체 발걸음을 옮기며 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기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담장 쪽으로 다가가서 들고 있던 물통을 뒤집어 놓고, 비단신으로 조심스럽게 딛고 올라섰다.
담장 너머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한가운데 자리잡은 큰 통에는 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독특한 복색의 한 중년 여인이 서 있었으니, 신녀 유림이었다.
유림이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춤을 추듯 덩실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림의 맞은편에 아직 앳되어 보이는 한 여인이 곱상한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신기한 듯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장군께서 오셨다. 큰 뜻을 품고 오셨느니라."
유림이 큰소리로 말하고는 칼을 들고 맞은편 여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손을 내보거라."
유림이 다가와 건네는 말에, 그녀는 큰 눈망울을 껌뻑 껌뻑 거리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유림은 거침없이 칼로 그녀의 손을 베었다.
"아야!"
그녀는 갑작스럽게 손이 베이자 인상을 쓰며 손을 거두었고,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유림을 바라보았다.
유림은 그런 그녀를 외면하며, 피 묻은 칼을 치켜들었다.
"보거라, 천년호(千年狐)의 피를 얻었으니, 이 피로써 장군의 뜻을 전할 것이니라."
유림이 소리치며 피 묻은 칼을 커다란 물통의 물 안에 담갔고, 그 모습을 앳된 여인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천년 안됐는데? 997년인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자신의 상처 난 손을 쳐다 보았다.
놀랍게도 손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더니,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문득 담장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담장 너머의 여인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기색을 띄며 손을 흔들어 보였고, 물통을 딛고 서서 구경하던 담장 너머의 여인 역시 손을 마주 흔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애랑아~"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손을 내렸다.
자신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몸종들을 보고서는 얼른 물통 위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아이고, 우희 아가씨, 이게 뭐시래요? 마님이 아시면 큰일 납니다."
우희라는 이름의 여인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으응... 그래, 알았어."
우희는 마지못해 몸종들의 등살에 밀려 다시 자신의 방으로 쫓겨나듯 가야만 했다.
그 사이, 유림의 춤은 더욱 격해지고 있었고, 그녀를 도와 풍악을 울리는 이들의 손동작도 빨라졌다.
사람들은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한쪽에는 한 손에 흰색 천을 손에 들고, 양손으로 기도를 올리는 이가 있었다.
그런 상황이 신기한 듯 계속 두리번거리던 애랑의 눈에, 가운데 놓인 커다란 물통에 물이 살짝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어?"
애랑이 유심히 그 물을 바라보니, 어느새 물에 파장은 푸른빛을 띠면서 찰랑 거리고 있었고, 이를 발견한 애랑이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누구 한 사람 그 물을 보지 못한 듯했다.
애랑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한번 물을 바라보았다.
파란 물결은 점점 더 짙어지며 어떤 형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광경을,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다들 멀뚱한 눈으로 춤추는 유림만 응시하고 있었다.
파란 물결의 형체는 어느새 기묘한 동굴 같은 형태가 되어 반짝거렸다.
마치 이리 들어오라는 듯 파란 불빛이 반짝 거리는 것이 신묘해서, 애랑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춤을 추며 신들린 듯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던 유림은, 멍한 표정으로 물 쪽으로 걸어가는 애랑을 보았다.
"뭐하는 것이야?"
유림이 호통치듯 애랑을 향해 외쳐 보지만, 애랑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저벅저벅 걸어가던 애랑은 난데없이 물속으로 확 뛰어들었다.
===
살인적인 햇빛이 쭉쭉 내리쬐는 날씨에, 가만히만 서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재희는 챙겨 온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 내며 이제 막 도착한 궁궐 한켠의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여기가 빨래터구나..."
재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빨래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느 동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딱히 신기하다거나 새롭다거나 한 느낌은 아니었다.
"에휴, 무슨 과제를 내줘도..."
재희는 투덜투덜 거리면서 빨래터 쪽으로 다가갔다.
좁다란 계단을 통해 내려서서, 창덕궁 빨래터의 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는 것이, 물도 맑고 시원해 보여 당장 발이라도 담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일단 핸드폰으로 사진부터 찍어야 했다.
교수님은 관련이 있는 장소를 찍어오라 하셨지만, 설마 궁궐에 뭐 하나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재희는 일단 궁궐 여기저기를 사진 찍어서 수집해놓은 다음, 이야기를 끼워 맞출 생각이었다.
핸드폰 카메라로 빨래터를 이리저리 찍어본 재희는 이내, 핸드폰을 넣어두고 회심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디..."
재희는 빨래터에 걸터앉아서 신발과 양말을 벗어 한쪽에 놓아두었다.
천천히 맑은 물속에 발을 담그니, 그 시원함이 발끝부터 전해져 왔다.
"으으~~ 시원하다~"
재희는 재밌다는 듯이 깔깔 거리고 웃으면서 발을 물에 담근 체 찰랑거렸다.
바로 그때, 갑자기 물에 푸른빛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어?"
재희가 놀라 해하며 신기한 듯 그 물결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 작은 물이 폭발하듯 솟구쳐 오르며, 무언가가 재희 옆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으악!"
재희는 너무나 놀라 옆으로 몸을 눕혔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그대로 빨래터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빠진 재희는 그 와중에도 이해되지 않는 의구심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분명 빨래터의 물은 발목조차 차지 않을 만큼 얕은 물이었건만, 어떻게 이렇게 빠질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 그녀는 물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들듯 그렇게 빨려 들고 있었고, 수면에 빛나던 푸른빛은 점점 사그러 들기 시작해 어느 순간,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접시물에 코 박고 죽는다더니,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웃지 못할 생각을 끝으로, 재희는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
반면, 그 빨래터 물속에서 뛰쳐나온 이가 있었으니,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뭐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태연하게 빨래터를 걸어 나왔다.
"우와? 여기가 어디래? 신기한 동네네."
그녀, 애랑은 신기한 듯 세상을 두리번거리 더니, 발길 닿는 대로 휘적 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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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려졌던 의식이 다시 돌아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분명 물에 빠져 호흡을 못하는 것이 정상일 진대, 이상할 정도로 편한 상태였다.
숨을 쉬지 못하고 있음에도 괴롭거나 아프지 않았고, 물속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물의 흐름이 급격히 빨라지는가 싶더니, 분명 아래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로 불쑥 튀어 오르는 느낌과 동시에 물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푸핫!"
드디어 숨을 쉬니 살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코에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여태 괜찮다가 마지막 튀어나올 때만 비로소 자신이 물속에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한참 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희는 영 이상한 생각에 기침이 잦아들자, 얼른 이야기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 제가 저기 빨래터 물에 빠져서..."
하지만 재희의 그런 이야기를 듣지도 않은 체, 그들 가운데 있던 유림이 큰 소리로 외쳤다.
"대신녀(大神女)께서 오셨다! 천년호를 재물로 대신녀께서 직접 강림하셨도다."
유림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신녀님..."
"오오, 신녀님..."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신녀심..."
사람들이 저마다 기도하듯 이야기했고, 유림 역시 무릎을 꿇고 간절한 눈빛으로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녀님이시여, 길을 열어주시옵고, 빛을 밝혀 주시옵소서."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 재희는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이게 뭐지?'
재희는 넋 나간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나무로 된 커다란 물통 안에 자신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알길 없었지만, 주위 풍경은 한층 더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디 사극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이 그녀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재희는 어리둥절함에 주위를 살피다가 얼른 물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맨발임을 알고, 포장되지 않은 길이라 돌이라도 밟으면 엄청 아플 것 같았기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옷도 몽땅 젖어 있었다.
맙소사! 한여름 더운 날씨라 옷을 가볍게 입었건만, 이제 보니 속옷까지 죄다 비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재희는 놀란 나머지 얼굴을 붉히며 얼른 다시 물속에 몸을 담갔다.
"신녀님..."
"신녀님,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다들 재희를 향해 기도하기 바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든 당장 몸을 가릴 옷이 필요했다.
재희가 고개를 돌리며 도움을 줄만한 사람을 찾는 와중에, 저 너머 담벼락 위로 누군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재희와 눈이 마주치자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있었다.
"옷 좀..."
재희가 자신을 보라는 듯이 손짓을 해가며 신호를 보내자, 그녀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손짓을 해가며 답장(?)을 보내오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재희는 답답한 듯 살짝 일어나서 자신의 몸을 보여준 뒤, 얼른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제발 알아들었기를....
재희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여전히 자신을 향해 기도하며 뭔가를 바라는 좌중을 살피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알 수 없을 뿐이었고, 뭔가를 깊게 생각하기엔 너무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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