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예언
유림이 왔을 때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유림이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재희는 수혁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수혁은 재희의 부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지 않고 흔쾌히 수락해 주었고, 드디어 유림이 재희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유림은 뜻밖에도, 재희가 방안에 있자 놀란 표정이 되었다.
분명 마님의 부름을 받고 온 것인데, 재희가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이내 그녀는 무언가 눈치를 챈 듯 홱하고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문 앞에는 재희의 부탁을 받은 수혁이 무서운 눈을 하고 서서 유림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림은 수혁의 매서운 눈을 보자 움찔 놀란 듯했다.
이어 수혁이 수중에 든 칼을 살짝 빼내자, 그 칼의 청명한 금속성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서슬 퍼런 칼날이 보이자, 유림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돌아서서 재희 앞에 넙죽 엎드렸다.
"대... 대신녀님... 왜 이러십니까, 미천한 것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재희는 진작부터 작심하고 있었다.
먼저번에는 막 과거로 넘어온 터라 어안이 벙벙하여 그냥 보냈지만, 오늘은 작심하고 그녀를 쥐어짤 생각이었다.
재희는 차분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고, 재희가 앉자 수혁이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바깥에서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길동이가 사방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재희는 유림을 노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있네."
나름 사극에서 봤던 말투 중에 가장 위엄 있고 압박을 줄 수 있는 말투를, 나름대로 고른 것이었다.
"예예, 말씀하십시오."
유림은 잔뜩 겁에 질러 대답하고 있었다.
"자네는 나를 어찌 부른 것인가?"
재희는 최대한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소인은... 소인은 능력이 미천하여... 그저 동생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옵니다."
유림의 말에 재희는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동생이라니? 자네의 친동생을 말하는 것인가?"
재희의 물음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예, 소인의 동생이 저희 가문에서 가장 출중한 무당이옵죠. 그녀가 마음먹으면 못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허나, 전부터 나랏일과는 거리를 두었기에, 이곳에서의 굿판에는 제가 오게 된 것이옵니다. 이곳에 와서 시키는 대로만 하라기에, 그리 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수혁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대의 동생, 이름이 어찌 되는가?"
"진서연이라고 하옵니다."
수혁은 놀란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희를 보고 말했다.
"들어봤습니다. 당대 최고의 무당이라 들었습니다."
재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유림에게 다시 물었다.
"나는...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대의 동생에게 내가 돌아갈 방법을 알아봐 줄 수 있겠는가?"
재희의 물음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예, 물론입니다."
그러자 그런 유림을 보며 수혁이 말했다.
"신녀님을 도와주면 자네에게도 큰 보상이 있을 것이네. 허나, 허튼짓을 한다면 내 단칼에 자네를 벨 것이다."
단호한 수혁의 말에 유림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장 가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혁이 재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재희도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허면... 부탁하겠네."
재희의 말에 유림이 "예예"하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혁은 유림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 길동에게 말했다.
"너는 유림과 함께 진서연이란 무당을 찾아가거라. 그곳에서 신녀님이 신녀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보고 오거라."
그러자 길동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맡겨주십시오."
길동은 유림과 함께 수혁에게 인사를 한 뒤, 집을 나섰다.
수혁은 두 사람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재희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재희를 보며 수혁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곳에 사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수혁의 물음에 재희는 멋쩍은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아... 그게... 이곳은 맞는데... 뭐랄까... 차원이 달라요. 그게..."
재희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어색해 하자, 수혁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잘은 모르겠으나, 지금 여기는 아니라는 이야기군요."
수혁의 말에 재희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희가 돌아간다는 말에 서운함을 느꼈던 것일까, 잠깐 서운한 기색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 것 같았는데...
재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이공께서 신녀님께 거는 기대가 크신 것 같은데, 바로 돌아가시려고 하는 걸 알면... 쉬이 보내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수혁의 말에 재희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차원이 다르고, 역사의 흐름이 달라진 상황이라면, 수혁이 살길을 만들어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원래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수혁은 안평대군 사람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역사를 바꿔 안평대군이 살아남는다면, 수혁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재희가 살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라, 재희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역사는 분명 그대로일 것이라 그렇게 믿었다.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놓고 갈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희의 말에 수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다행입니다."
형식적인 대답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재희는 얼른 돌아갈 일만 생각하기로, 스스로 또 다짐하고 다짐했다.
===
야심한 밤, 안평대군이 찾는다는 말에, 수혁의 안내를 받아 안평대군의 거처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니, 한쪽에는 안평대군이 앉아있고, 그 옆으로 이현로가 앉아 있었다.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이현로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뭐, 이미 알 것 다 알고 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우리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네."
이현로의 말에 재희는 살짝 눈빛이 흔들리긴 했지만,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땅한 거사일이 언제면 좋겠는가?"
이현로의 물음에 재희는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시키고 있었다.
이미 이러한 물음이 있을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적당한 상황을 만들어, 상상으로 연습했던 바로 그 상황이었다.
재희는 마치 연기하듯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궁궐에서 부엉이가 울 것입니다. 첫날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울 것이고, 그다음은 사정전(思政殿)에서 울 것이고, 세 번째는 경복궁 동쪽에서 울 것입니다."
재희의 구체적인 이야기에 안평대군과 이현로는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 번째 부엉이가 울면 수양대군의 거사일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부엉이가 울면 거사를 행하실 때가 되신 것이옵니다."
실록에 기록된 부엉이의 울음은 총 3번 정도가 이 무렵에 언급되고 있었다.
3번째 부엉이가 우는 날은 9월 19일이고, 계유정난은 10월 10일에 일어난다.
재희 나름대로 고민 끝에 내린 그럴싸한 대답이며, 동시에 수혁을 살리고, 자신은 거사가 일어나기 전에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복심이 깔려 있는 대답이었다.
잠시 안평대군과 눈빛을 주고받은 이현로가 재희를 보며 물었다.
"허면, 저들의 거사일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이현로의 물음에 재희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이어 이현로가 말을 이었다.
"저들의 정확한 거사일을 알면 우리 일이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네. 혹,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는가?"
재희는 난처해졌다. 나름대로 고민 끝에 내린 대답이고 이로써 자기 할 일 다 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일에만 전념하고 싶었는데, 정확한 거사일을 물을 줄이야.
"대략... 다음 달 초쯤일 것입니다."
재희는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이현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희에게 말했다.
"그래, 알았네. 그만 물러가 보시게."
재희는 이현로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린 뒤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재희는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혁은 그런 재희를 보고 서 있었다.
재희가 자기 거처 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수혁은 그런 그녀를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정녕... 부엉이가 세 번 웁니까?"
문득 뒤에서 묻는 수혁의 물음에, 재희가 놀란 표정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수혁이 살짝 웃어 보였다.
"무림인들은 대체로 귀가 밝습니다."
수혁의 말에 재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세 번 울 것입니다."
맥이 풀린다. 나름 고심 끝에 준비한 그럴싸한 대답이었는데, 정확한 날짜를 다시 다그쳐 물었다가 제대로 대답을 못하니 쫓겨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빈정이 상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일로 빈정이 상한 기분이 드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진짜 신녀라도 된 기분인 것일까?
재희가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수혁이 걱정스럽게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수혁의 말에 재희는 살짝 놀란 표정이 되더니, 금세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어 재희의 방앞에 다다르니, 재희가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방앞에서 꾸뻑 인사한 재희는, 수혁의 맞인사를 보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차분히 돌아서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재희는 방안에서 수혁이 가는지 안 가는지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다가, 어딘가로 가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잘생겨가지고..."
재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서랍을 열어 고이 모셔둔 자기 가방을 꺼내 들었다.
가방 안에는 전원이 꺼진 스마트폰과 충전용 배터리, 그리고 몇몇 화장품과 노트가 담겨 있었다.
노트를 집어 든 재희는 노트에 적힌 메모를 살피기 시작했다.
노트 안에는 스마트폰에 저장해뒀었던 조선왕조실록 중 지금 재희가 머물고 있는 시대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옮겨 적은 것이었다.
재희는 그 안에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서 재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다 외우게 생겼네."
수혁은 재희의 부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지 않고 흔쾌히 수락해 주었고, 드디어 유림이 재희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유림은 뜻밖에도, 재희가 방안에 있자 놀란 표정이 되었다.
분명 마님의 부름을 받고 온 것인데, 재희가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이내 그녀는 무언가 눈치를 챈 듯 홱하고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문 앞에는 재희의 부탁을 받은 수혁이 무서운 눈을 하고 서서 유림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림은 수혁의 매서운 눈을 보자 움찔 놀란 듯했다.
이어 수혁이 수중에 든 칼을 살짝 빼내자, 그 칼의 청명한 금속성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서슬 퍼런 칼날이 보이자, 유림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돌아서서 재희 앞에 넙죽 엎드렸다.
"대... 대신녀님... 왜 이러십니까, 미천한 것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재희는 진작부터 작심하고 있었다.
먼저번에는 막 과거로 넘어온 터라 어안이 벙벙하여 그냥 보냈지만, 오늘은 작심하고 그녀를 쥐어짤 생각이었다.
재희는 차분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고, 재희가 앉자 수혁이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바깥에서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길동이가 사방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재희는 유림을 노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있네."
나름 사극에서 봤던 말투 중에 가장 위엄 있고 압박을 줄 수 있는 말투를, 나름대로 고른 것이었다.
"예예, 말씀하십시오."
유림은 잔뜩 겁에 질러 대답하고 있었다.
"자네는 나를 어찌 부른 것인가?"
재희는 최대한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소인은... 소인은 능력이 미천하여... 그저 동생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옵니다."
유림의 말에 재희는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동생이라니? 자네의 친동생을 말하는 것인가?"
재희의 물음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예, 소인의 동생이 저희 가문에서 가장 출중한 무당이옵죠. 그녀가 마음먹으면 못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허나, 전부터 나랏일과는 거리를 두었기에, 이곳에서의 굿판에는 제가 오게 된 것이옵니다. 이곳에 와서 시키는 대로만 하라기에, 그리 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수혁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대의 동생, 이름이 어찌 되는가?"
"진서연이라고 하옵니다."
수혁은 놀란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희를 보고 말했다.
"들어봤습니다. 당대 최고의 무당이라 들었습니다."
재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유림에게 다시 물었다.
"나는...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대의 동생에게 내가 돌아갈 방법을 알아봐 줄 수 있겠는가?"
재희의 물음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예, 물론입니다."
그러자 그런 유림을 보며 수혁이 말했다.
"신녀님을 도와주면 자네에게도 큰 보상이 있을 것이네. 허나, 허튼짓을 한다면 내 단칼에 자네를 벨 것이다."
단호한 수혁의 말에 유림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장 가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혁이 재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재희도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허면... 부탁하겠네."
재희의 말에 유림이 "예예"하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혁은 유림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 길동에게 말했다.
"너는 유림과 함께 진서연이란 무당을 찾아가거라. 그곳에서 신녀님이 신녀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보고 오거라."
그러자 길동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맡겨주십시오."
길동은 유림과 함께 수혁에게 인사를 한 뒤, 집을 나섰다.
수혁은 두 사람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재희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재희를 보며 수혁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곳에 사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수혁의 물음에 재희는 멋쩍은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아... 그게... 이곳은 맞는데... 뭐랄까... 차원이 달라요. 그게..."
재희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어색해 하자, 수혁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잘은 모르겠으나, 지금 여기는 아니라는 이야기군요."
수혁의 말에 재희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희가 돌아간다는 말에 서운함을 느꼈던 것일까, 잠깐 서운한 기색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 것 같았는데...
재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이공께서 신녀님께 거는 기대가 크신 것 같은데, 바로 돌아가시려고 하는 걸 알면... 쉬이 보내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수혁의 말에 재희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차원이 다르고, 역사의 흐름이 달라진 상황이라면, 수혁이 살길을 만들어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원래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수혁은 안평대군 사람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역사를 바꿔 안평대군이 살아남는다면, 수혁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재희가 살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라, 재희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역사는 분명 그대로일 것이라 그렇게 믿었다.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놓고 갈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희의 말에 수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다행입니다."
형식적인 대답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재희는 얼른 돌아갈 일만 생각하기로, 스스로 또 다짐하고 다짐했다.
===
야심한 밤, 안평대군이 찾는다는 말에, 수혁의 안내를 받아 안평대군의 거처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니, 한쪽에는 안평대군이 앉아있고, 그 옆으로 이현로가 앉아 있었다.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이현로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뭐, 이미 알 것 다 알고 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우리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네."
이현로의 말에 재희는 살짝 눈빛이 흔들리긴 했지만,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땅한 거사일이 언제면 좋겠는가?"
이현로의 물음에 재희는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시키고 있었다.
이미 이러한 물음이 있을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적당한 상황을 만들어, 상상으로 연습했던 바로 그 상황이었다.
재희는 마치 연기하듯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궁궐에서 부엉이가 울 것입니다. 첫날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울 것이고, 그다음은 사정전(思政殿)에서 울 것이고, 세 번째는 경복궁 동쪽에서 울 것입니다."
재희의 구체적인 이야기에 안평대군과 이현로는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 번째 부엉이가 울면 수양대군의 거사일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부엉이가 울면 거사를 행하실 때가 되신 것이옵니다."
실록에 기록된 부엉이의 울음은 총 3번 정도가 이 무렵에 언급되고 있었다.
3번째 부엉이가 우는 날은 9월 19일이고, 계유정난은 10월 10일에 일어난다.
재희 나름대로 고민 끝에 내린 그럴싸한 대답이며, 동시에 수혁을 살리고, 자신은 거사가 일어나기 전에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복심이 깔려 있는 대답이었다.
잠시 안평대군과 눈빛을 주고받은 이현로가 재희를 보며 물었다.
"허면, 저들의 거사일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이현로의 물음에 재희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이어 이현로가 말을 이었다.
"저들의 정확한 거사일을 알면 우리 일이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네. 혹,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는가?"
재희는 난처해졌다. 나름대로 고민 끝에 내린 대답이고 이로써 자기 할 일 다 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일에만 전념하고 싶었는데, 정확한 거사일을 물을 줄이야.
"대략... 다음 달 초쯤일 것입니다."
재희는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이현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희에게 말했다.
"그래, 알았네. 그만 물러가 보시게."
재희는 이현로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린 뒤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재희는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혁은 그런 재희를 보고 서 있었다.
재희가 자기 거처 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수혁은 그런 그녀를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정녕... 부엉이가 세 번 웁니까?"
문득 뒤에서 묻는 수혁의 물음에, 재희가 놀란 표정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수혁이 살짝 웃어 보였다.
"무림인들은 대체로 귀가 밝습니다."
수혁의 말에 재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세 번 울 것입니다."
맥이 풀린다. 나름 고심 끝에 준비한 그럴싸한 대답이었는데, 정확한 날짜를 다시 다그쳐 물었다가 제대로 대답을 못하니 쫓겨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빈정이 상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일로 빈정이 상한 기분이 드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진짜 신녀라도 된 기분인 것일까?
재희가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수혁이 걱정스럽게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수혁의 말에 재희는 살짝 놀란 표정이 되더니, 금세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어 재희의 방앞에 다다르니, 재희가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방앞에서 꾸뻑 인사한 재희는, 수혁의 맞인사를 보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차분히 돌아서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재희는 방안에서 수혁이 가는지 안 가는지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다가, 어딘가로 가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잘생겨가지고..."
재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서랍을 열어 고이 모셔둔 자기 가방을 꺼내 들었다.
가방 안에는 전원이 꺼진 스마트폰과 충전용 배터리, 그리고 몇몇 화장품과 노트가 담겨 있었다.
노트를 집어 든 재희는 노트에 적힌 메모를 살피기 시작했다.
노트 안에는 스마트폰에 저장해뒀었던 조선왕조실록 중 지금 재희가 머물고 있는 시대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옮겨 적은 것이었다.
재희는 그 안에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서 재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다 외우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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