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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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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10.26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0.56분

11화 - 순호


저녁노을이 하늘을 살짝 가리우고, 짙은 구름이 군데군데 자리 잡아 일찍부터 어둑해진 날이었다.

어느 이름 모를 술집에 자리 잡고 앉은 이채원 곁으로 몇몇 험상궂은 사내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양정?"

그들 중 누군가가 이채원의 이야기를 듣고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묻고 있었다.

"양정이라 하셨소? 내금위에 있었다는 그 양정?"

이채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맞네."

다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꽤나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 양정이 맞다면, 우리 같은 무명 한량들이 감당할 수 있겠소?"

그의 되물음에 이채원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양정과 홍달손은, 내 이손으로 처단할 것이니... 자네들은 그 밑에 수하들을 처리해 주면 되는 것이야? 어떤가? 어차피 무림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자네들 아닌가? 이참에 큰일에 동참해서 관직이라도 하나씩 꿰어 차 보면 어떻겠나?"

이채원의 말에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우리야 뭐... 나리만 믿겠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이채원이 기분이 좋은 듯 방긋이 웃는 표정이 되었다.

"아아, 나리는 무슨... 하하, 그래그래 내가 누군가? 이 안평대군의 사람 아닌가? 걱정들 붙들어 메라고."

이채원이 술잔을 들어 보이자, 다들 웃으며 함께 술잔을 들었다.

그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술집 밖에는 무수히 많은 사내들이 저마다 무기를 내려놓고 술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채원과 함께 술을 마시던 이들과 똑같은 복색을 하고 있었다.



===



"신녀님."

거울에 비친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재희는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수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

얼른 대답하고 문을 여니, 바깥에는 수혁과 함께 길동이 방긋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길동을 보니 재희도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알아봤니?"

재희가 얼른 길동에게 물으니 길동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순호께서 마님께 여쭤봐 주셔서, 쉽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길동의 대답에 재희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순호?"

그러자 옆에 있던 수혁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호입니다. 순호(训虎)..."

"아, 네..."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니, 길동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이름은 진유림이라 합니다. 황해도에 있는 무당 가문 사람이랍니다. 그리 찾아가 보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희가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니 이번엔 다른 걱정이 들었다.

어떻게 만나러 간단 말인가? 아니면 무엇으로 오라 할 수 있을까?

재희는 그 생각에 이내 난처한 표정이 돼버렸다.

그런 재희의 표정을 살핀 수혁이 나서 말했다.

"굿을 할 일이 있으니 잠깐 오라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 전할 수 있겠느냐?"

수혁이 길동에게 물으니, 길동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신녀님께서 찾는다고 전하겠습니다."

길동의 말에 재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차라리 여기 마님께서 다시 찾는다고 전해줘. 내가 찾는다고 하면 오지 않을 거야."

재희의 말에 길동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니, 왜 그렇습니까? 신녀님께서 찾는다는데..."

재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같은 신녀잖아. 신녀끼리는 좀 그래..."

길동은 이해되지는 않지만,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님께서 찾으니 이곳으로 오라 전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길동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쪼르르 달려가자, 재희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혁 역시 같이 보다가 재희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집에만 계시니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수혁의 물음에 재희는 툴툴 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답답해 미치겠습니다."

재희의 대답에 수혁이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럼 저와 함께 잠시 산책이라도 나가시겠습니까? 이 인근을 가볍게 도는 것이라면 그리 문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수혁의 말에 재희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요?"

"네, 그럼요."

수혁이 웃으며 대답하지 재희가 기쁜 듯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좋아요."

재희의 대답에 수혁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니 그를 따라 재희도 발걸음을 옮겼다.

"참... 요즘 아가씨가 보이지 않으시네요?"

재희의 물음에 수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머니의 장사 때문인지, 요즘 바깥 활동을 잘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재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것이 연기이든 사실이든, 자기 어머니 장사 날에 아빠라는 사람이 술을 먹으며 잔치를 벌였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재희는 수혁을 따라 집을 나섰다.

날이 그리 쾌청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쌀쌀한 듯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가슴을 상쾌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성큼 다가온 가을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군데군데 자리 잡은 가을빛깔이 불어오는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수혁을 따라 걷던 재희가 문득 그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런데... 뭐하시는 분이세요?"

재희는 일찍부터 궁금하였던 것을 그에게 묻고 있었다.

실록에도 없는 이름이었다.

수혁이 빙그레 웃으며 뒤따라 걷는 재희를 돌아보았다.

"그저 안평대군을 모시는 사람일 뿐입니다."

재희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모시게 되셨나요?"

재희가 다시 물어오자, 잠시 생각하던 수혁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이제 겨우 2년여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럼, 그전에는 뭐하셨는데요?"

재희는 혹시 실례가 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도, 그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록에 없는 인물은 그녀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주변 인물들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해 놔야지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재희의 집요한 물음에 수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발걸음을 조금 더 더디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래는... 환검문이라는 문파에 몸을 담은 무림인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재희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네? 무... 림인... 이요?"

재희의 되물음에 수혁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재희의 어리둥절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무림? 무림인이요? 뭐 무공 쓰는 그런 무림인이요? 무협지... 아, 아니... 그러니까... 그럼... 어... 무공? 그런 걸 쓰세요?"

재희의 반응이 재밌는지 수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맞아요. 무공. 환검문은 변화무쌍한 검술을 다루는 문파로, 검문으로는 팔도 제일의 문파입니다."

"아... 그렇구나."

재희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니 왠 난데없는 무공? 갑자기 왜 조선 역사 속에 무협지가 끼어든 것 같은 이 내용은 뭐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재희는 흡사 어지러움까지 느끼는 것만 같았다.

"괜찮으세요?"

수혁은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고, 재희는 이내 잠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을 거 같아요."

재희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그래, 그래 봤자 역사다. 역사 안에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제와 무림이 어떻고 무공이 어떻고 한 것들이 있었다는 것을 안들, 역사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니...

재희는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하며 애써 안정을 찾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협지라도 좀 읽어 놓을 것을 그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신녀님은 이곳 이전에, 어디 계셨습니까?"

문득 수혁의 물음에 재희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있던 곳이라...'

재희는 집 풍경과 학교 풍경, 가족과 친구들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요. 쭉 여기서 살았어요."

재희의 대답에 수혁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여기 사셨다고요? 여기 어디요?"

문득 재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리고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는 자기가 무슨 죄를 지어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갑작스레 몰아닥친 위기감과 두려움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자기 삶에 대한 회상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제가 어디 살았냐고요? 저는요, 서울특별시 살았어요. 서울특별시 관악구..."

말을 하며 울먹거리던 재희는 끝내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죽을까 봐, 혹은 노비로 팔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역사까지 바꾸며 몸부림쳤다.

그 긴장감이 쭈욱 이어져 밤에도 깊이 잠들지 못하였는데, 그 긴장감이 지금,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수혁은 울고 있는 재희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괜한 것을 물어봤군요."

수혁의 나지막한 말에, 재희는 울면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애써 눈물을 참아가며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있자, 수혁이 얼른 품에서 부드러운 손수건을 하나 꺼내어 내밀어 보였다.

재희는 수혁이 내민 손수건을 보았다가, 수혁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잠시 망설였다.

이 손수건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하는 어떤 우려감이었을까

하지만 이내 '그래 손수건일 뿐이야.'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표시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손수건의 소재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부드러웠다.

"감사합니다."

재희가 손수건을 도로 내밀자, 수혁이 빙그레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일단 가지고 계십시오. 아직 눈물 자국이 더 남은 듯합니다."

수혁의 말에 재희는 살짝 놀란 표정이 되어 손수건으로 다시 눈가 주변을 톡톡 닦아내었다.

거울이 있다면 보고 닦든가, 하다못해 스마트폰이라도 꺼내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늘에 저녁노을이 물감 번지듯 퍼져 나가는 모습이 문득 재희의 눈에 들어왔다.

"이쁘네요."

재희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듯이 말했고, 재희의 말을 들은 수혁이 하늘을 올려다 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무렵에 하늘이 참 곱습니다."

재희는 문득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별생각 없이 나온 터라 옷을 가볍게 입은 것도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울음 때문인지 추위가 더 느껴졌다.

재희가 몸을 움츠리니, 이를 본 수혁이 얼른 겉옷을 벗어 재희의 몸에 둘러주었다.

"아, 아니... 괜찮은데..."

재희가 놀라 해 하자, 수혁이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날이 쌀쌀합니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수혁의 말에 재희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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