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3
어느덧 안개가 걷히고 배가 빠른 속도로 순항을 하고 있었다.
금문해역을 통과하자, 레나드가 뱃머리에서 내려와 선실로 돌아오려다가 상갑판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레나드는 순간 괜스레 가슴이 뛰는 느낌이 들었다.
"흠, 흠!"
레나드는 헛기침을 하며 성큼성큼 걸어가서 2층으로 올라서자마자 줄리아를 바라보며 호통치듯 말했다.
"너, 짐 정리 다 했느냐?!"
레나드가 호통치듯 하는 말에, 망연자실 바라보던 줄리아가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네? 네네! 정리 다 했습니다."
레나드는 순간적으로 할말을 잃고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헛기침과 함께 다그치듯 말했다.
"그, 그래? 그럼 들어가 자던가... 왜 여기 나와 있는거야?"
"네? 아, 아.. 네..."
줄리아가 머슥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선실안으로 들어가자, 옆에 서 있던 선원이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레나드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귀여운 녀석을 데리고 다니십니다?"
레나드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흠, 귀엽긴요. 사내녀석이 징그럽게..."
레나드가 줄리아의 뒤를 따라 선실 통로로 들어서자, 막 선실문을 열고 들어가는 줄리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시 심호흡으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 레나드가 뒤따라 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덧 침대 옆쪽에 이부자리를 펼친 줄리아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있었다.
레나드는 들어서자마자 줄리아한테 눈길도 주지 않고 침대에 가 드러누으며 말했다.
"어제 저녁에 잠 못잤을테니 지금부터 푹 자둬, 이따가 저녁되면 또 잠자긴 힘들테니까..."
그 말에 줄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상체를 일으켜 침대위에 레나드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요? 또 뭐가 나오나요?"
레나드는 돌아보지도 않은 체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다크시리어와 시리어들이 이대로 포기할 줄 알아? 금문해역은 수룡 오리엔시아의 둥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접근하지 못할 뿐, 이제 금문해역을 벗어났으니 다시 그것들이 달려들테지. 이배의 선원들이 베테랑이라고는 하지만, 아까 십여마리가 달려든 걸 보면, 그것들이 이번에 아주 작심하고 덤벼들 모양이니까... 지금이라도 푹 자둬."
줄리아는 이내 겁먹은 표정이 되어 물었다.
"그, 그래도... 레나드경이 다 잡아주실거죠?"
줄리아의 말에 레나드가 벌떡 일어나서 줄리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놈아, 내가 무슨 니 호위무사인줄 아냐? 그..."
레나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초롱초롱한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혀서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폭발하는 귀여움(?)이었다.
레나드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줄리아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돌아서서 드러누으며 말했다.
"뭐, 꼭 그런건 아냐! 이미 잡아둔 다크시리어들의 시체가 있어서, 조용히 갈 수 있는 방법도 있긴 하니까... 여튼! 신경쓰지말고 어여 자!"
[ 젠장... 누굴 닮아 이런 기질이 있는거야? ]
레나드는 애꿎은 자신에 부모를 탓하며 그렇게 들지 않는 잠을 청하고 있었다.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를 뚫고 한척의 날쌘 배가 바닷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배를 에워싼 시리어들이 배를 향해 달려들어 보지만, 여지없이 날아드는 금빛 섬광에 허공에서 흩어지기 일쑤였다.
배의 사방을 둘러싼 스무명의 골든헌터즈 대원들은 그 거친 파도에 배가 휘청임에도, 배와 밀착한 체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자신이 맡은 방향의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살없는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긴 체로 있다가, 시리어가 달려들면 어김없이 시위를 튕기는데, 놀랍게도 화살대신 금빛 섬광이 쏘아져 나가 시리어를 맞췄다.
단 한발의 빗나감도 없이, 시리어를 관통하는 금빛 섬광은, 시리어의 형상을 깨뜨려 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배는 거센 시리어 공격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런 저항이 없는 듯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또한 상갑판 맨 앞쪽에는 예의 거한 워렌이 버티고 서서 배 전체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키에엑!"
큰 파도를 타고 단번에 상갑판 쪽으로 달려드는 다크시리어가 순식간에 선원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워렌을 향해 달려들지만, 순간 워렌의 손에서 무언가 번득이는가 싶더니 달려들던 다크시리어가 허공에서 두동강이 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느새 워렌의 손에는 거대한 도끼 한자루가 양날을 번득이며 쥐어져 있었다.
"미물따위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
워렌의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거친 파도를 뚫고 바다위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놀란 듯 달려들던 시리어들이 움츠러 들었고, 잠시 그들의 공격이 멈추었다.
배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바닷물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고, 뒤쪽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선실안에 선장은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대단해...정말 대단해... 시리어들이 이 정도로 달려드는데 한치의 틈조차 없구나. 헌데 어찌된 영문이지... 전에도 이 해역에 와봤지만, 이 정도의 공격은 처음보는걸...보통 시리어들은 바다로 유인할 뿐 직접적으로 배를 공격하지는 않는데... 더군다나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있다가 기습하는 것이 다크시리어들의 공격 방법인데... 너무 적나라한 공격이 아닌가?"
선장은 오늘따라 시리어들과 다크시리어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설마?"
선장은 돌아서 선장 책상 아래쪽에 위치한 서랍장을 열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금새 그는 한권의 책을 찾아 꺼내들었는데, [ 로웬의 항해일지 ] 라고 적혀진 책이었다.
그는 책을 펼쳐 무언가를 열심히 찾다가, 다크시리어들에 대해 서술한 장을 곧 찾을 수 있었다.
선장은 책을 펼친 체로, 책상위에 돋보기를 찾아 낀 후 책 내용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책을 읽고 있었을까, 잠시 후 선장은 놀란 표정이 되더니, 이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 탁! ]
선장은 책을 덮어 책상위에 던져두고는 그대로 선실 문쪽으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휘청하는 상갑판 앞에 버티고 선 워렌에게 다가가, 파도소리에 자신의 목소리가 묻힐까, 큰소리로 말했다.
"워렌경!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워렌이 고개를 돌려 선장을 보며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선장님."
"아무래도 배를 돌려야 할 듯 합니다. 더이상의 항해는 위험합니다."
워렌이 선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선장이 바다의 상태를 한번 살펴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건 블러드문의 징후입니다. 뱃머리를 돌려 크게 우회해야 합니다."
그 순간 워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블러드문?"
"네. 시리어들과 다크시리어들의 행동이 과격해지고, 안개가 짙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날짜와 항해일지를 살펴보니 오늘 저녁이 블러드문, 피의 달이 뜨는 날입니다. 피의 달이 뜨는 날 이 해역에는 그렌디아들이 출몰합니다. 그래서 시리어들의 행동이 과격해진 진 겁니다."
워렌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항해는 원래대로 진행합니다. 상대가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정면으로 마주할 것입니다."
그 말에 선장이 놀라 소리쳤다.
"정면으로 맞서다뇨? 그렌디아들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러십니까? 그것들은 단순히 맞서고 자시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둥, 이미 결심한 듯 워렌은 배의 앞쪽만 응시할 뿐이었다.
"블러드문이요?"
레나드가 되묻는 말에, 당황한 기색의 선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요즘 일거리가 많아 경황이 없어 미처 살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까 다크시리어들의 공격이 거센 점이나 안개가 평소보다 많이 낀 점등이 이상해서 날짜와 항해일지를 살펴보니, 오늘이 바로 블러드문데이였습니다. 이를 어쩌죠?"
레나드 역시 조금 표정이 굳어지며 말했다.
"금문해역을 벗어난지 얼마나 됐죠?"
"한 3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레나드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 그저 아무일 없이 지나가기만을 기도하는 수 밖에요. 그렌디아들은 시각보다는 청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니, 당장 돛을 내리고 속도를 줄이세요. 바닷물과의 마찰음은 그렌디아들을 자극하는 소리이니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킨대로 합죠. 하지만... 다크시리어들의 공격은 어쩌죠?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소란이 일것입니다."
레나드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을 하다 말했다.
"어떻게든 조용히 지나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일단 그렌디아가 우릴 표적으로 삼는다면, 사실상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아까 죽은 다크시리어들의 시신들 있죠?"
"네. 후갑판에 모아두었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피를 빼내어 배 앞뒤로 칠을 하십시오. 다크시리어의 피냄새로 둔갑을 하면 잠시나마 조용히 갈 수 있을 겁니다."
"분부한대로 합죠. 그럼..."
선장이 돌아가고 레나드가 조금 초조해진 모습으로 서 있자, 한쪽에서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줄리아가 물었다.
"블러드문은 뭐고, 그렌디아는 또 뭐죠?"
줄리아가 묻는 말에 아미를 찌푸린 체 생각하던 레나드가 그 상태 그대로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블러드문이라고... 하라시안에 내려진 저주가 최고조에 이르는 날이 있는데, 일년에 두어번 정도 되지. 블러드문데이가 되면, 하라시안 인근에서는 핏빛으로 된 달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블러드문이라고 부르는데... 이날은 각종 요물들이 평소보다 더욱 과격해지는 날이라고 할 수 있어. 그중에서도 이 해역에서 가장 조심해야할 것이 바로 그렌디아야. 몸체 크기가 이 배의 서너배가 넘을 정도로 크고, 피부가 돌처럼 단단할 뿐 아니라, 날카로운 이빨에 포악한 성질까지... 그야말로 바다에 재앙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이지. 단지 평소에는 심연 깊은 곳에서 고래나 상어따위를 잡아먹으며 살기 때문에 그리 볼일은 없는데... 블러드문데이에 하라시안 인근 해역에서는 수면위로 올라와 지나가는 배를 공격하곤 하지."
줄리아는 이내 겁에 질린 표정이 되어버렸다.
레나드가 옷걸이에 걸려있던 겉옷을 챙겨입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마. 오리엔시아도 보내줬으니까, 그놈들도 보내주겠지."
줄리아가 놀라 되물었다.
"오리엔시아면... 그 금문해역에 있다는 수룡말인가요?"
레나드가 무언가 생각나는게 있는 듯 겉옷을 걸친 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래. 맞아. 수룡 오리엔시아... 금문해역을 지나는 모든 것들을 해한다고 하지. 하지만 나는 해치지 않았어. 그날도 그랬지. 짙은 안개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선원과 선장을 대신해 뱃길을 알아보기 위해 뱃머리에 섰는데 무언가 입김같은 것이 느껴지더라고... 내가 안광을 밝혀 앞을 보니 거대하고 푸른 용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거야. 너무 놀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그 용이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더군. 지나가라고..."
"우와..."
레나드가 이내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수룡 오리엔시아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과장되거나 만들어진 것들이 많아. 실제로 겪어보면 듣던거완 다른 경우가 종종 있지."
레나드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호통치듯 말했다.
"너... 이번엔 가만히 있어라. 쓸데없이 나돌아 다니다가 비명 지르고 그럼... 그럼 확 바닷속에 던져버릴테니까! 응!"
레나드가 엄포를 놓고 밖으로 나가자, 줄리아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레나드가 나간 문쪽을 향해 혀를 삐죽 내밀었다.
"잘났다, 흥!"
줄리아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왠지 레나드가 밉거나 싫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온 레나드는 잠시 입구에 멈춰 서서 가슴을 진정시켰다.
[ 나는 호모가 아니다, 나는 호모가 아니다... ]
레나드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이야기 하고는 자기 뺨을 양손으로 한차례 "짝"소리가 나게 친 다음 성큼 성큼 걸어나갔다.
배 바깥쪽에서는 선원들이 돛을 내리고 배 겉면에 다크시리어의 피를 바르고 있었다.
진두지휘는 선장이 하지만, 고함을 치거나 하지 않고 다가가 조용조용 이야기 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상황을 살핀 레나드는 하갑판으로 내려가 맨 앞쪽, 뱃머리에 서서 앞길을 살폈다.
안개는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상태지만, 육안으로 상황을 살피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레나드가 쓰는 기술중에는 안력을 끌어올리는 기술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종종 뱃머리에 서서 상황을 살피곤 했다.
그렇게 뱃머리에서 상황을 살피는 와중에 시리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리어들은 무언가 찾는 듯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고, 이따금씩 보이는 다크시리어들은 보이는가 싶으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느틈에 다가온 선장이 옆에 서서 나즈막한 소리로 말했다.
"다크시리어의 피가 효과가 있군요."
"네. 시리어들은 냄새와 소리로 상대를 식별하기 때문에 다크시리어의 피냄새가 식별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시리어들의 눈은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죠. 반면 다크시리어들은 시력이 뛰어나 우릴 볼 수 있지만, 자신들의 피냄새를 두려워 하는 경향이 있어, 이 근처로 오지 않는 겁니다."
선장도 익히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법은 일전에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해보기는 처음이군요."
하지만 레나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렌디아의 공격은 피했지만, 또다른 포식자를 불러들이는 격이니깐요."
선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포식자라뇨?"
"그렌디아 처럼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말을 하던 레나드가 갑자기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지며 입술에 손을 갔다 대었다.
"쉿!"
선장이 놀라 앞쪽을 바라보니, 거대한 그림자가 바닷물 아래에서 일렁이며 서서히 배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그렌디아..."
선장 역시 굳어진 표정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문해역을 통과하자, 레나드가 뱃머리에서 내려와 선실로 돌아오려다가 상갑판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레나드는 순간 괜스레 가슴이 뛰는 느낌이 들었다.
"흠, 흠!"
레나드는 헛기침을 하며 성큼성큼 걸어가서 2층으로 올라서자마자 줄리아를 바라보며 호통치듯 말했다.
"너, 짐 정리 다 했느냐?!"
레나드가 호통치듯 하는 말에, 망연자실 바라보던 줄리아가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네? 네네! 정리 다 했습니다."
레나드는 순간적으로 할말을 잃고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헛기침과 함께 다그치듯 말했다.
"그, 그래? 그럼 들어가 자던가... 왜 여기 나와 있는거야?"
"네? 아, 아.. 네..."
줄리아가 머슥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선실안으로 들어가자, 옆에 서 있던 선원이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레나드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귀여운 녀석을 데리고 다니십니다?"
레나드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흠, 귀엽긴요. 사내녀석이 징그럽게..."
레나드가 줄리아의 뒤를 따라 선실 통로로 들어서자, 막 선실문을 열고 들어가는 줄리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시 심호흡으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 레나드가 뒤따라 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덧 침대 옆쪽에 이부자리를 펼친 줄리아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있었다.
레나드는 들어서자마자 줄리아한테 눈길도 주지 않고 침대에 가 드러누으며 말했다.
"어제 저녁에 잠 못잤을테니 지금부터 푹 자둬, 이따가 저녁되면 또 잠자긴 힘들테니까..."
그 말에 줄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상체를 일으켜 침대위에 레나드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요? 또 뭐가 나오나요?"
레나드는 돌아보지도 않은 체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다크시리어와 시리어들이 이대로 포기할 줄 알아? 금문해역은 수룡 오리엔시아의 둥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접근하지 못할 뿐, 이제 금문해역을 벗어났으니 다시 그것들이 달려들테지. 이배의 선원들이 베테랑이라고는 하지만, 아까 십여마리가 달려든 걸 보면, 그것들이 이번에 아주 작심하고 덤벼들 모양이니까... 지금이라도 푹 자둬."
줄리아는 이내 겁먹은 표정이 되어 물었다.
"그, 그래도... 레나드경이 다 잡아주실거죠?"
줄리아의 말에 레나드가 벌떡 일어나서 줄리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놈아, 내가 무슨 니 호위무사인줄 아냐? 그..."
레나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초롱초롱한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혀서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폭발하는 귀여움(?)이었다.
레나드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줄리아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돌아서서 드러누으며 말했다.
"뭐, 꼭 그런건 아냐! 이미 잡아둔 다크시리어들의 시체가 있어서, 조용히 갈 수 있는 방법도 있긴 하니까... 여튼! 신경쓰지말고 어여 자!"
[ 젠장... 누굴 닮아 이런 기질이 있는거야? ]
레나드는 애꿎은 자신에 부모를 탓하며 그렇게 들지 않는 잠을 청하고 있었다.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를 뚫고 한척의 날쌘 배가 바닷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배를 에워싼 시리어들이 배를 향해 달려들어 보지만, 여지없이 날아드는 금빛 섬광에 허공에서 흩어지기 일쑤였다.
배의 사방을 둘러싼 스무명의 골든헌터즈 대원들은 그 거친 파도에 배가 휘청임에도, 배와 밀착한 체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자신이 맡은 방향의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살없는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긴 체로 있다가, 시리어가 달려들면 어김없이 시위를 튕기는데, 놀랍게도 화살대신 금빛 섬광이 쏘아져 나가 시리어를 맞췄다.
단 한발의 빗나감도 없이, 시리어를 관통하는 금빛 섬광은, 시리어의 형상을 깨뜨려 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배는 거센 시리어 공격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런 저항이 없는 듯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또한 상갑판 맨 앞쪽에는 예의 거한 워렌이 버티고 서서 배 전체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키에엑!"
큰 파도를 타고 단번에 상갑판 쪽으로 달려드는 다크시리어가 순식간에 선원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워렌을 향해 달려들지만, 순간 워렌의 손에서 무언가 번득이는가 싶더니 달려들던 다크시리어가 허공에서 두동강이 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느새 워렌의 손에는 거대한 도끼 한자루가 양날을 번득이며 쥐어져 있었다.
"미물따위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
워렌의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거친 파도를 뚫고 바다위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놀란 듯 달려들던 시리어들이 움츠러 들었고, 잠시 그들의 공격이 멈추었다.
배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바닷물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고, 뒤쪽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선실안에 선장은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대단해...정말 대단해... 시리어들이 이 정도로 달려드는데 한치의 틈조차 없구나. 헌데 어찌된 영문이지... 전에도 이 해역에 와봤지만, 이 정도의 공격은 처음보는걸...보통 시리어들은 바다로 유인할 뿐 직접적으로 배를 공격하지는 않는데... 더군다나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있다가 기습하는 것이 다크시리어들의 공격 방법인데... 너무 적나라한 공격이 아닌가?"
선장은 오늘따라 시리어들과 다크시리어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설마?"
선장은 돌아서 선장 책상 아래쪽에 위치한 서랍장을 열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금새 그는 한권의 책을 찾아 꺼내들었는데, [ 로웬의 항해일지 ] 라고 적혀진 책이었다.
그는 책을 펼쳐 무언가를 열심히 찾다가, 다크시리어들에 대해 서술한 장을 곧 찾을 수 있었다.
선장은 책을 펼친 체로, 책상위에 돋보기를 찾아 낀 후 책 내용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책을 읽고 있었을까, 잠시 후 선장은 놀란 표정이 되더니, 이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 탁! ]
선장은 책을 덮어 책상위에 던져두고는 그대로 선실 문쪽으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휘청하는 상갑판 앞에 버티고 선 워렌에게 다가가, 파도소리에 자신의 목소리가 묻힐까, 큰소리로 말했다.
"워렌경!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워렌이 고개를 돌려 선장을 보며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선장님."
"아무래도 배를 돌려야 할 듯 합니다. 더이상의 항해는 위험합니다."
워렌이 선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선장이 바다의 상태를 한번 살펴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건 블러드문의 징후입니다. 뱃머리를 돌려 크게 우회해야 합니다."
그 순간 워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블러드문?"
"네. 시리어들과 다크시리어들의 행동이 과격해지고, 안개가 짙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날짜와 항해일지를 살펴보니 오늘 저녁이 블러드문, 피의 달이 뜨는 날입니다. 피의 달이 뜨는 날 이 해역에는 그렌디아들이 출몰합니다. 그래서 시리어들의 행동이 과격해진 진 겁니다."
워렌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항해는 원래대로 진행합니다. 상대가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정면으로 마주할 것입니다."
그 말에 선장이 놀라 소리쳤다.
"정면으로 맞서다뇨? 그렌디아들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러십니까? 그것들은 단순히 맞서고 자시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둥, 이미 결심한 듯 워렌은 배의 앞쪽만 응시할 뿐이었다.
"블러드문이요?"
레나드가 되묻는 말에, 당황한 기색의 선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요즘 일거리가 많아 경황이 없어 미처 살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까 다크시리어들의 공격이 거센 점이나 안개가 평소보다 많이 낀 점등이 이상해서 날짜와 항해일지를 살펴보니, 오늘이 바로 블러드문데이였습니다. 이를 어쩌죠?"
레나드 역시 조금 표정이 굳어지며 말했다.
"금문해역을 벗어난지 얼마나 됐죠?"
"한 3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레나드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 그저 아무일 없이 지나가기만을 기도하는 수 밖에요. 그렌디아들은 시각보다는 청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니, 당장 돛을 내리고 속도를 줄이세요. 바닷물과의 마찰음은 그렌디아들을 자극하는 소리이니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킨대로 합죠. 하지만... 다크시리어들의 공격은 어쩌죠?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소란이 일것입니다."
레나드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을 하다 말했다.
"어떻게든 조용히 지나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일단 그렌디아가 우릴 표적으로 삼는다면, 사실상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아까 죽은 다크시리어들의 시신들 있죠?"
"네. 후갑판에 모아두었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피를 빼내어 배 앞뒤로 칠을 하십시오. 다크시리어의 피냄새로 둔갑을 하면 잠시나마 조용히 갈 수 있을 겁니다."
"분부한대로 합죠. 그럼..."
선장이 돌아가고 레나드가 조금 초조해진 모습으로 서 있자, 한쪽에서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줄리아가 물었다.
"블러드문은 뭐고, 그렌디아는 또 뭐죠?"
줄리아가 묻는 말에 아미를 찌푸린 체 생각하던 레나드가 그 상태 그대로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블러드문이라고... 하라시안에 내려진 저주가 최고조에 이르는 날이 있는데, 일년에 두어번 정도 되지. 블러드문데이가 되면, 하라시안 인근에서는 핏빛으로 된 달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블러드문이라고 부르는데... 이날은 각종 요물들이 평소보다 더욱 과격해지는 날이라고 할 수 있어. 그중에서도 이 해역에서 가장 조심해야할 것이 바로 그렌디아야. 몸체 크기가 이 배의 서너배가 넘을 정도로 크고, 피부가 돌처럼 단단할 뿐 아니라, 날카로운 이빨에 포악한 성질까지... 그야말로 바다에 재앙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이지. 단지 평소에는 심연 깊은 곳에서 고래나 상어따위를 잡아먹으며 살기 때문에 그리 볼일은 없는데... 블러드문데이에 하라시안 인근 해역에서는 수면위로 올라와 지나가는 배를 공격하곤 하지."
줄리아는 이내 겁에 질린 표정이 되어버렸다.
레나드가 옷걸이에 걸려있던 겉옷을 챙겨입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마. 오리엔시아도 보내줬으니까, 그놈들도 보내주겠지."
줄리아가 놀라 되물었다.
"오리엔시아면... 그 금문해역에 있다는 수룡말인가요?"
레나드가 무언가 생각나는게 있는 듯 겉옷을 걸친 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래. 맞아. 수룡 오리엔시아... 금문해역을 지나는 모든 것들을 해한다고 하지. 하지만 나는 해치지 않았어. 그날도 그랬지. 짙은 안개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선원과 선장을 대신해 뱃길을 알아보기 위해 뱃머리에 섰는데 무언가 입김같은 것이 느껴지더라고... 내가 안광을 밝혀 앞을 보니 거대하고 푸른 용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거야. 너무 놀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그 용이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더군. 지나가라고..."
"우와..."
레나드가 이내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수룡 오리엔시아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과장되거나 만들어진 것들이 많아. 실제로 겪어보면 듣던거완 다른 경우가 종종 있지."
레나드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호통치듯 말했다.
"너... 이번엔 가만히 있어라. 쓸데없이 나돌아 다니다가 비명 지르고 그럼... 그럼 확 바닷속에 던져버릴테니까! 응!"
레나드가 엄포를 놓고 밖으로 나가자, 줄리아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레나드가 나간 문쪽을 향해 혀를 삐죽 내밀었다.
"잘났다, 흥!"
줄리아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왠지 레나드가 밉거나 싫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온 레나드는 잠시 입구에 멈춰 서서 가슴을 진정시켰다.
[ 나는 호모가 아니다, 나는 호모가 아니다... ]
레나드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이야기 하고는 자기 뺨을 양손으로 한차례 "짝"소리가 나게 친 다음 성큼 성큼 걸어나갔다.
배 바깥쪽에서는 선원들이 돛을 내리고 배 겉면에 다크시리어의 피를 바르고 있었다.
진두지휘는 선장이 하지만, 고함을 치거나 하지 않고 다가가 조용조용 이야기 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상황을 살핀 레나드는 하갑판으로 내려가 맨 앞쪽, 뱃머리에 서서 앞길을 살폈다.
안개는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상태지만, 육안으로 상황을 살피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레나드가 쓰는 기술중에는 안력을 끌어올리는 기술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종종 뱃머리에 서서 상황을 살피곤 했다.
그렇게 뱃머리에서 상황을 살피는 와중에 시리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리어들은 무언가 찾는 듯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고, 이따금씩 보이는 다크시리어들은 보이는가 싶으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느틈에 다가온 선장이 옆에 서서 나즈막한 소리로 말했다.
"다크시리어의 피가 효과가 있군요."
"네. 시리어들은 냄새와 소리로 상대를 식별하기 때문에 다크시리어의 피냄새가 식별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시리어들의 눈은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죠. 반면 다크시리어들은 시력이 뛰어나 우릴 볼 수 있지만, 자신들의 피냄새를 두려워 하는 경향이 있어, 이 근처로 오지 않는 겁니다."
선장도 익히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법은 일전에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해보기는 처음이군요."
하지만 레나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렌디아의 공격은 피했지만, 또다른 포식자를 불러들이는 격이니깐요."
선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포식자라뇨?"
"그렌디아 처럼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말을 하던 레나드가 갑자기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지며 입술에 손을 갔다 대었다.
"쉿!"
선장이 놀라 앞쪽을 바라보니, 거대한 그림자가 바닷물 아래에서 일렁이며 서서히 배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그렌디아..."
선장 역시 굳어진 표정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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