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4
거대한 그렌디아의 그림자는 흡사 거북이와 유사한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 크기는 레나드가 탄 범선보다 적어도 너댓배는 커 보였다.
배가 떠 있는 해수면 바로 밑에 있는 듯 그 거대한 그림자는 아주 천천히 배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배위에 선원들은 물론 레나드와 선장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체, 배밑을 지나가는 이 거대한 그림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렌디아는 배를 느끼지 못한 듯 배를 지나쳐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하아~"
선장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더 지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방금 묫자리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인양, 얼굴은 파리한게 식은 땀까지 잔득 흘리고 있었다.
"정말 죽는 줄 알았수다."
선장의 말에 긴장하고 있던 레나드도 이마에 땀을 훔쳤다.
"후우..."
그도 역시 긴장 했었던 듯, 긴 한숨과 함께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크다, 크다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건 뭐 아예 어지간한 섬만 하구만..."
선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레나드는 다시 앞쪽을 살폈다.
방금 그렌디아의 출현이 있었던 터라, 시리어와 다크시리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레나드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릴 준비를 하세요."
선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레나드를 올려다 보았다.
"네? 아니 그러다, 저 그렌디아가 돌아오기라도 하면?"
레나드가 고개를 내저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렌디아는 뒤쪽에 자기 먹이가 있어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앞쪽에서 먹이를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워낙 덩치가 커서 먹이를 낚아채기 전에는 잘 안움직이죠. 이제 또다른 포식자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해야합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안전한 해역이 나오니, 당장 전속력으로 항해하면 별탈 없이 하라긴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선장도 기운을 차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알았소. 레나드경 말이니 믿고 따르겠수다."
선장은 돌아서 아직도 넋을 잃고 뒤쪽을 바라보는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돛을 올려라! 전속력으로 항해한다."
선원들은 선장의 호령을 듣고서야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돛을 올려라~"
선장의 지시에 맞춰 함께 구령하며 돛을 올리고, 각자 위치로 가서 빠른 항해를 진행하고 있었다.
여전히 앞쪽에서 상황을 살피던 레나드가 선장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남는 선원들을 모두 동원해서 다크시리어의 핏기를 닦아내라 하세요."
돛을 올리자 배가 탄력을 받아 빠른 속도로 물위를 미끄러지고 있었고, 레나드의 말에 따라 선장은 일사불란하게 선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서둘러, 빨리!"
선장의 재촉에 선원들은 진땀을 빼가며 배 겉면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레나드는 오직 앞만을 응시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자, 레나드의 얼굴에도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레나드는 돌아서서 선실로 돌아가려다 말고 멈춰서서 잠시 고민했다.
왠지 지금은 줄리아를 마주하는게 망설여졌다.
"좀 더 상황을 볼까..."
혼잣말로 중얼거린 레나드는 다시 뱃머리에 서서 전방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선원들의 지시를 마친 선장이 돌아서서 레나드를 보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제 빠져나온 것 같은데, 그만 선실로 돌아가서 쉬시죠. 이대로라면 내일 저녁 무렵에 도착할 겁니다."
"아, 그래요."
레나드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실쪽으로 몸을 돌리자 선장이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그 또다른 포식자란 건 뭘 말한거죠?"
레나드가 다시 돌아서 선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갈리하메시에 대해서 들어봤어요?"
선장이 놀란 얼굴이 되서 물었다.
"갈리하메시...라면 그 커다란 바닷뱀 말인가요?"
레나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요. 갈리하메시는 하라시안 인근 해역에서 그렌디아를 제외하고 가장 큰 종입니다. 그놈들은 주로 다크시리어들을 잡아먹고 사는데, 다크시리어의 피냄새에 특히 민감한 편이죠. 만약 우리가 갈리하메시를 만났다면, 그렌디아 못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렌디아를 빨리 지나칠 수 있었던게 다행입니다. 그렌디아를 피하려고 피칠을 했다가 갈리하메시를 만났다면 큰 낭패였을 겁니다."
선장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레나드는 다시 선실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줄리아를 만난 것도 아닌데, 왠지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 에이, 진짜... 불편하네, 거... 내리면 바로 갈길 가라 해야겠구만. ]
레나드는 괜한 선심을 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선실로 돌아갔다.
선실에 막 들어서자, 어느새 새근 새근 잠이 들어버린 줄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에혀..."
레나드가 다가가 잠결에 제쳐버린 이불을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자기 침대로 돌아온 레나드는 침대에 누웠지만, 눈이 감기질 않았다.
고개를 돌려 잠자는 줄리아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내자식이...쯧..."
안개가 조금 짙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안개가 보이지 않았다.
배는 순항을 하고 있었고, 빠른 속도로 물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가만히 물길을 바라보고 있던 워렌이 돌연 몸을 돌려 선장실쪽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안에서 가만히 해도를 살피던 선장이 놀란 얼굴로 들어서는 워렌을 바라보았다.
"워렌 경 무슨 일이십니까?"
워렌이 선장 코앞까지 다가와 묵직하지만,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왜 항로를 바꿨소?"
그의 질문에 선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날 바보로 아는가? 비록 뱃길은 모르지만, 적어도 아직 안개가 개일 시기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단 말이다!"
산만한 덩치에 워렌이 버럭 소리쳤지만, 선장은 조금도 물러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언행을 조심하시오, 워렌경! 이 배의 선장은 나요. 가주님은 물론 국왕폐하가 탄다해도, 어떤 뱃길을 이용할 지는 선장인 내가 결정할 문제요. 선장의 고유권한을 존중하시오!"
워렌이 그 말을 듣고 버럭 소리질렀다.
"선장! 당장 죽어도 그 따위 말을 할텐가!"
어느새 워렌의 도끼가 선장의 목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선장은 물러서지 않고 맞서 소리쳤다.
"확인되지도, 믿기지도 않는 그대의 호언장담만 가지고 배와 내 선원들을 사지로 몰아갈 순 없소! 천번만번을 다시 간다 해도, 내 결정은 하나요. 블러드문에는 하라시안의 해역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오!"
워렌은 도끼로 선장의 목을 겨눈 체,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지만 선장 역시 지지않고 맞서 응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몇일이나 걸리는가?"
워렌이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묻자, 선장 역시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배로 간다면 열흘... 하지만 우리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돌아갈 것이요. 그쪽 배는 크기가 큰 범선이니 적어도 십이일은 걸릴 터, 하루 먼저 출발 했다 해도, 하라긴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워렌이 잠시 선장을 응시하고 있다가 비로소 도끼를 거두었다.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선장에게 말했다.
"만약 그들을 놓친다면... 하라긴 항구가 그대의 묫자리가 될 것이네."
워렌이 돌아서 선장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자,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장이 이내 다리힘이 풀린 듯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는 이마에 땀을 훔쳤다.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막무가내구만."
선장은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선착장에 이르러 우렁찬 함성과 함께 밧줄 하나가 부두가로 날아들었고, 부두가에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밧줄을 받아 당기자, 미리 내려와 있던 보다 두꺼운 밧줄이 따라왔다.
두꺼운 밧줄을 부두가에 있는 두꺼운 돌기둥에 걸자, 이어 선상에서 또 다른 밧줄이 날아들었다.
다시 날아오는 밧줄 하나를 받아든 사내는 부산하게 잡아당겨 두꺼운 밧줄을 다음 돌기둥에 걸고 있었다.
그렇게 부두에 배를 대는 풍경을 줄리아는 신기한 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면..."
어느새 옆으로 레나드가 다가와 서며 말했다.
"니 갈길 가도 좋다. 배삯을 받을 때까지 부려먹을 생각이었지만... 뭐 선심쓴셈 칠테니까...갈길가라."
레나드의 말에 줄리아는 오히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니 가라니? 어딜? 어떻게? 여기서? 저주받은 땅 하라시안 인접지역으로 도적떼가 들끓는다는 여기서?
순식간에 오만 생각이 다 떠오르며 줄리아가 망연자실하게 서 있지만, 레나드는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체 부두가에서 배가 완전히 멈추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디 가시는데요?"
줄리아가 묻는 말에 레나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내가 어딜 가든, 네가 알바 아니다."
줄리아는 레나드가 그렇게 나오자 갑자기 막막함이 느껴졌다.
저주받은 땅 하라시안과 인접한 항구인 하라긴 항구. 딱 보기에도 벌써 깝깝하게 생겨먹은(?) 마을에서 뭘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그나마 의지하고 있던 레나드가 제갈길 가라고 하니 섭섭하기 까지 했다.
사실 집안 교육 받기 싫어 도망나오기 급급했지, 막상 나와서 뭘할지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더욱이 탈출(?) 초반부터 하라시안 인접 해역을 지나면서 세상을 떠돈다는게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터라 이제와서 혼자서 어딜 가기는 무서웠다.
배가 부두에 완전히 닿고, 다리가 놓이자 한 선원이 소리쳤다.
"하선하시오!"
이어 기다렸다는 듯 갑판에 줄지어선 사람들이 우르르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레나드 역시 그들과 함께 배에서 내리는데, 줄리아는 망연자실 여전히 배 갑판에 서서 내려가는 레나드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 어떡하지... 어떡하지... ]
줄리아는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문득 그런 그녀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언제나 당차고, 거세기만한 자신을 요리조리 잘 다루던 하녀 질렌이 떠오른 것이었다.
이윽고 줄리아는 주먹을 꽉쥐고 뭔가 결심했다.
"레나드 경~~!"
갑작스레 고함치듯 소리치르며, 줄리아가 레나드에게 쪼르르 달려가자, 레나드가 돌아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뭐냐? 이제 볼일 없을 텐데?"
줄리아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여, 여긴 좀 위험하고... 또... 전 여길 잘 모릅니다. 리베니아로 가신다고 했죠? 거기 갈때까지만, 제가 짐을 들어드리면 안될까요?"
줄리아는 나름대로 절박했다. 이대로 다시 혼자되는건 왠지 무서웠다.
도대체 무슨 용기로 가출을 한건지... 자기 스스로도 앞뒤안가리는 자기 성격이 싫을 때가 종종 있는 줄리아였다.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문제다. 기왕지사 바깥세상을 경험할 거라면 마음 단단히 먹기로 결심한 것이다.
"제발요, 네?"
간절한 줄리아의 부탁,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빌어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비는 사람은 많았다.
억쎈 줄리아의 고집에 언니 오빠는 물론 하녀나 가신들까지, 그녀를 달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빈적이 어디 한두번이던가?
한편 그런 줄리아를 보는 레나드는 등골이 오싹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간청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에 오히려 등골이 오싹해 지는 기분이 든 것이었다.
"그... 그건..."
당황한 레나드가 대답을 못하고 서 있는 사이, 부둣가 일행 사이를 뚫고 누군가 레나드에게 다가왔다.
"뭐야? 왠일로 일행이 다 있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칼칼한 소리에 줄리아가 먼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보았다.
레나드 허리에도 오지 않는 작달만한 키에 구부정한 등, 흰 수염과 숱이 없는 머리를 한 작은 노인 한명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체 레나드와 줄리아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 왔어요?"
레나드는 그 노인을 알고 있는지, 퉁명스레 대답하며 줄리아에게 무어라 얘기하려 할 때, 노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왠일이야? 돈 좀 벌었어? 여기까지 하인을 대동하고 오게?"
레나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게..."
하지만 이번엔 줄리아가 말을 가로챘다.
"제가 특별히 품삯이 아주아주 싸거든요. 히히"
줄리아는 재빨리 레나드가 든 짐과 말고삐를 낚아채듯 넘겨 받고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지금 줄리아는 가문에서 자신의 비위를 맞추며 언제나 일을 열심히 하던 질렌의 모습을 떠올리며 흉내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그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는 꽤나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 어디로 가면 되요?"
줄리아가 묻자 노인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줄리아와 레나드를 번갈아 보고는 이야기 했다.
"응? 아... 따라오면 돼."
노인이 앞장서서 성큼 성큼 걸어가자, 줄리아가 레나드를 돌아보며 씨익 웃고는 노인을 따라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레나드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이내 그 뒤를 따르며 소리쳤다.
"야, 너 진짜..."
레나드와 줄리아는 그렇게 노인을 따라 하라긴 항구의 선착장을 빠져나가고, 서산에 걸친 해는 마지막 햇빛을 뿌리며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배가 떠 있는 해수면 바로 밑에 있는 듯 그 거대한 그림자는 아주 천천히 배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배위에 선원들은 물론 레나드와 선장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체, 배밑을 지나가는 이 거대한 그림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렌디아는 배를 느끼지 못한 듯 배를 지나쳐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하아~"
선장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더 지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방금 묫자리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인양, 얼굴은 파리한게 식은 땀까지 잔득 흘리고 있었다.
"정말 죽는 줄 알았수다."
선장의 말에 긴장하고 있던 레나드도 이마에 땀을 훔쳤다.
"후우..."
그도 역시 긴장 했었던 듯, 긴 한숨과 함께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크다, 크다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건 뭐 아예 어지간한 섬만 하구만..."
선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레나드는 다시 앞쪽을 살폈다.
방금 그렌디아의 출현이 있었던 터라, 시리어와 다크시리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레나드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릴 준비를 하세요."
선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레나드를 올려다 보았다.
"네? 아니 그러다, 저 그렌디아가 돌아오기라도 하면?"
레나드가 고개를 내저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렌디아는 뒤쪽에 자기 먹이가 있어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앞쪽에서 먹이를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워낙 덩치가 커서 먹이를 낚아채기 전에는 잘 안움직이죠. 이제 또다른 포식자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해야합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안전한 해역이 나오니, 당장 전속력으로 항해하면 별탈 없이 하라긴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선장도 기운을 차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알았소. 레나드경 말이니 믿고 따르겠수다."
선장은 돌아서 아직도 넋을 잃고 뒤쪽을 바라보는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돛을 올려라! 전속력으로 항해한다."
선원들은 선장의 호령을 듣고서야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돛을 올려라~"
선장의 지시에 맞춰 함께 구령하며 돛을 올리고, 각자 위치로 가서 빠른 항해를 진행하고 있었다.
여전히 앞쪽에서 상황을 살피던 레나드가 선장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남는 선원들을 모두 동원해서 다크시리어의 핏기를 닦아내라 하세요."
돛을 올리자 배가 탄력을 받아 빠른 속도로 물위를 미끄러지고 있었고, 레나드의 말에 따라 선장은 일사불란하게 선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서둘러, 빨리!"
선장의 재촉에 선원들은 진땀을 빼가며 배 겉면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레나드는 오직 앞만을 응시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자, 레나드의 얼굴에도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레나드는 돌아서서 선실로 돌아가려다 말고 멈춰서서 잠시 고민했다.
왠지 지금은 줄리아를 마주하는게 망설여졌다.
"좀 더 상황을 볼까..."
혼잣말로 중얼거린 레나드는 다시 뱃머리에 서서 전방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선원들의 지시를 마친 선장이 돌아서서 레나드를 보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제 빠져나온 것 같은데, 그만 선실로 돌아가서 쉬시죠. 이대로라면 내일 저녁 무렵에 도착할 겁니다."
"아, 그래요."
레나드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실쪽으로 몸을 돌리자 선장이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그 또다른 포식자란 건 뭘 말한거죠?"
레나드가 다시 돌아서 선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갈리하메시에 대해서 들어봤어요?"
선장이 놀란 얼굴이 되서 물었다.
"갈리하메시...라면 그 커다란 바닷뱀 말인가요?"
레나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요. 갈리하메시는 하라시안 인근 해역에서 그렌디아를 제외하고 가장 큰 종입니다. 그놈들은 주로 다크시리어들을 잡아먹고 사는데, 다크시리어의 피냄새에 특히 민감한 편이죠. 만약 우리가 갈리하메시를 만났다면, 그렌디아 못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렌디아를 빨리 지나칠 수 있었던게 다행입니다. 그렌디아를 피하려고 피칠을 했다가 갈리하메시를 만났다면 큰 낭패였을 겁니다."
선장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레나드는 다시 선실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줄리아를 만난 것도 아닌데, 왠지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 에이, 진짜... 불편하네, 거... 내리면 바로 갈길 가라 해야겠구만. ]
레나드는 괜한 선심을 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선실로 돌아갔다.
선실에 막 들어서자, 어느새 새근 새근 잠이 들어버린 줄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에혀..."
레나드가 다가가 잠결에 제쳐버린 이불을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자기 침대로 돌아온 레나드는 침대에 누웠지만, 눈이 감기질 않았다.
고개를 돌려 잠자는 줄리아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내자식이...쯧..."
안개가 조금 짙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안개가 보이지 않았다.
배는 순항을 하고 있었고, 빠른 속도로 물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가만히 물길을 바라보고 있던 워렌이 돌연 몸을 돌려 선장실쪽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안에서 가만히 해도를 살피던 선장이 놀란 얼굴로 들어서는 워렌을 바라보았다.
"워렌 경 무슨 일이십니까?"
워렌이 선장 코앞까지 다가와 묵직하지만,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왜 항로를 바꿨소?"
그의 질문에 선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날 바보로 아는가? 비록 뱃길은 모르지만, 적어도 아직 안개가 개일 시기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단 말이다!"
산만한 덩치에 워렌이 버럭 소리쳤지만, 선장은 조금도 물러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언행을 조심하시오, 워렌경! 이 배의 선장은 나요. 가주님은 물론 국왕폐하가 탄다해도, 어떤 뱃길을 이용할 지는 선장인 내가 결정할 문제요. 선장의 고유권한을 존중하시오!"
워렌이 그 말을 듣고 버럭 소리질렀다.
"선장! 당장 죽어도 그 따위 말을 할텐가!"
어느새 워렌의 도끼가 선장의 목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선장은 물러서지 않고 맞서 소리쳤다.
"확인되지도, 믿기지도 않는 그대의 호언장담만 가지고 배와 내 선원들을 사지로 몰아갈 순 없소! 천번만번을 다시 간다 해도, 내 결정은 하나요. 블러드문에는 하라시안의 해역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오!"
워렌은 도끼로 선장의 목을 겨눈 체,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지만 선장 역시 지지않고 맞서 응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몇일이나 걸리는가?"
워렌이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묻자, 선장 역시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배로 간다면 열흘... 하지만 우리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돌아갈 것이요. 그쪽 배는 크기가 큰 범선이니 적어도 십이일은 걸릴 터, 하루 먼저 출발 했다 해도, 하라긴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워렌이 잠시 선장을 응시하고 있다가 비로소 도끼를 거두었다.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선장에게 말했다.
"만약 그들을 놓친다면... 하라긴 항구가 그대의 묫자리가 될 것이네."
워렌이 돌아서 선장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자,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장이 이내 다리힘이 풀린 듯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는 이마에 땀을 훔쳤다.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막무가내구만."
선장은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선착장에 이르러 우렁찬 함성과 함께 밧줄 하나가 부두가로 날아들었고, 부두가에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밧줄을 받아 당기자, 미리 내려와 있던 보다 두꺼운 밧줄이 따라왔다.
두꺼운 밧줄을 부두가에 있는 두꺼운 돌기둥에 걸자, 이어 선상에서 또 다른 밧줄이 날아들었다.
다시 날아오는 밧줄 하나를 받아든 사내는 부산하게 잡아당겨 두꺼운 밧줄을 다음 돌기둥에 걸고 있었다.
그렇게 부두에 배를 대는 풍경을 줄리아는 신기한 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면..."
어느새 옆으로 레나드가 다가와 서며 말했다.
"니 갈길 가도 좋다. 배삯을 받을 때까지 부려먹을 생각이었지만... 뭐 선심쓴셈 칠테니까...갈길가라."
레나드의 말에 줄리아는 오히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니 가라니? 어딜? 어떻게? 여기서? 저주받은 땅 하라시안 인접지역으로 도적떼가 들끓는다는 여기서?
순식간에 오만 생각이 다 떠오르며 줄리아가 망연자실하게 서 있지만, 레나드는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체 부두가에서 배가 완전히 멈추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디 가시는데요?"
줄리아가 묻는 말에 레나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내가 어딜 가든, 네가 알바 아니다."
줄리아는 레나드가 그렇게 나오자 갑자기 막막함이 느껴졌다.
저주받은 땅 하라시안과 인접한 항구인 하라긴 항구. 딱 보기에도 벌써 깝깝하게 생겨먹은(?) 마을에서 뭘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그나마 의지하고 있던 레나드가 제갈길 가라고 하니 섭섭하기 까지 했다.
사실 집안 교육 받기 싫어 도망나오기 급급했지, 막상 나와서 뭘할지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더욱이 탈출(?) 초반부터 하라시안 인접 해역을 지나면서 세상을 떠돈다는게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터라 이제와서 혼자서 어딜 가기는 무서웠다.
배가 부두에 완전히 닿고, 다리가 놓이자 한 선원이 소리쳤다.
"하선하시오!"
이어 기다렸다는 듯 갑판에 줄지어선 사람들이 우르르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레나드 역시 그들과 함께 배에서 내리는데, 줄리아는 망연자실 여전히 배 갑판에 서서 내려가는 레나드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 어떡하지... 어떡하지... ]
줄리아는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문득 그런 그녀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언제나 당차고, 거세기만한 자신을 요리조리 잘 다루던 하녀 질렌이 떠오른 것이었다.
이윽고 줄리아는 주먹을 꽉쥐고 뭔가 결심했다.
"레나드 경~~!"
갑작스레 고함치듯 소리치르며, 줄리아가 레나드에게 쪼르르 달려가자, 레나드가 돌아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뭐냐? 이제 볼일 없을 텐데?"
줄리아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여, 여긴 좀 위험하고... 또... 전 여길 잘 모릅니다. 리베니아로 가신다고 했죠? 거기 갈때까지만, 제가 짐을 들어드리면 안될까요?"
줄리아는 나름대로 절박했다. 이대로 다시 혼자되는건 왠지 무서웠다.
도대체 무슨 용기로 가출을 한건지... 자기 스스로도 앞뒤안가리는 자기 성격이 싫을 때가 종종 있는 줄리아였다.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문제다. 기왕지사 바깥세상을 경험할 거라면 마음 단단히 먹기로 결심한 것이다.
"제발요, 네?"
간절한 줄리아의 부탁,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빌어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비는 사람은 많았다.
억쎈 줄리아의 고집에 언니 오빠는 물론 하녀나 가신들까지, 그녀를 달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빈적이 어디 한두번이던가?
한편 그런 줄리아를 보는 레나드는 등골이 오싹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간청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에 오히려 등골이 오싹해 지는 기분이 든 것이었다.
"그... 그건..."
당황한 레나드가 대답을 못하고 서 있는 사이, 부둣가 일행 사이를 뚫고 누군가 레나드에게 다가왔다.
"뭐야? 왠일로 일행이 다 있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칼칼한 소리에 줄리아가 먼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보았다.
레나드 허리에도 오지 않는 작달만한 키에 구부정한 등, 흰 수염과 숱이 없는 머리를 한 작은 노인 한명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체 레나드와 줄리아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 왔어요?"
레나드는 그 노인을 알고 있는지, 퉁명스레 대답하며 줄리아에게 무어라 얘기하려 할 때, 노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왠일이야? 돈 좀 벌었어? 여기까지 하인을 대동하고 오게?"
레나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게..."
하지만 이번엔 줄리아가 말을 가로챘다.
"제가 특별히 품삯이 아주아주 싸거든요. 히히"
줄리아는 재빨리 레나드가 든 짐과 말고삐를 낚아채듯 넘겨 받고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지금 줄리아는 가문에서 자신의 비위를 맞추며 언제나 일을 열심히 하던 질렌의 모습을 떠올리며 흉내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그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는 꽤나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 어디로 가면 되요?"
줄리아가 묻자 노인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줄리아와 레나드를 번갈아 보고는 이야기 했다.
"응? 아... 따라오면 돼."
노인이 앞장서서 성큼 성큼 걸어가자, 줄리아가 레나드를 돌아보며 씨익 웃고는 노인을 따라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레나드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이내 그 뒤를 따르며 소리쳤다.
"야, 너 진짜..."
레나드와 줄리아는 그렇게 노인을 따라 하라긴 항구의 선착장을 빠져나가고, 서산에 걸친 해는 마지막 햇빛을 뿌리며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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