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4
소크테리아 항구에 도착한 이안 일행은, 일단 속도를 늦춰 천천히 항구 행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워낙에 큰 항구도시이다 보니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을 일일이 살펴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라오!"
이안이 라오를 부르자, 라오가 다가와 대답했다.
"예."
"먼저 가서 길드원들을 소집해라."
"예."
라오가 말을 몰아 먼저 소크테리아 항구 북쪽에 있는 길드사무소쪽으로 내달렸다.
라오를 보낸 뒤 다른 부관 한명을 불렀다.
"갈릭, 나는 루나스 가문 길드에 다녀올테니, 특히 선착장 주변을 잘 살펴라. 일단 배에 오르면 찾을 수 없으니, 배에 오르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이안이 지시하자, 부관인 갈릭이 나서 대답했다.
"예."
지시를 한 이안이 먼저 갈길을 재촉하고, 갈릭 부관이 수하들을 이끌고 선착장 쪽으로 향하는 순간 인근 옷가게 문이 열리며 줄리아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아, 안되요."
줄리아가 하소연을 하고 있을 때, 주인아주머니가 더욱 화를 내며 말했다.
"이년이?! 길거리에서 혼나봐야 정신을 차릴려나? 당장 안따라와?"
주인아주머니가 기세등등하게 소리치자, 주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낏 바라보며 발걸음을 멈췄다.
줄리아는 당황하여 혹시라도 엘루인 가문 사람들이 올까 가슴이 쿵쾅거렸다.
주인아주머니의 힘에 이끌려 질질 끌려가는 줄리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며 어떻게든 손을 뿌리치려고 애를 쓰는 한편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다.
"오해하신거에요, 그런거 아니에요. 놔주세요."
당황한 줄리아의 말에 주인 아주머니가 더욱 화를 냈다.
"흥, 누가 속을 줄 알고? 이참에 아주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놔야지. 응?"
주인아주머니가 더욱 세게 당기려는 순간, 묵직한 힘과 함께 그녀의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주인아주머니는 자신의 손을 돌아보았는데, 줄리아의 가녀린 손목을 잡은 그녀의 팔목을 잡은 또 다른 손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하다시피한, 검은 복색에 꽤나 준수한 용모의 사내가 주인아주머니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한 힘으로, 체격이 큰 주인아주머니의 손을 꼼짝못하게 하고 있었다.
"뉘... 뉘슈?"
주인아주머니가 당황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를 보며 묻자, 그 남자는 묵뚝뚝한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아이를 아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요?"
그는 다름아닌 레나드였다. 막 뱃표를 구해 가던 레나드의 눈에 아주머니에게 끌려가는 줄리아를 본 것이었다.
줄리아는 레나드를 보자 구원자를 만난 듯 반가웠고, 당황한 주인 아주머니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가 글세 루나스 가문의 하인이라고 가문 사칭을 했수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체 다 듣기도 전에 레나드가 딱딱한 어투로 말을 잘랐다.
"이 아이는 루나스 가문의 하인이 맞소."
그 말에 아주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루...루나스 가문의 하인이 맞다구요?"
"그렇소. 난 어제 루나스 가문을 방문한 무사로, 이 아이는 어제 루나스 가문을 나올때, 가문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날라준 가문의 하인이었소."
아주머니는 당황한 표정이 되어 조심스레 줄리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줄리아는 손이 자유롭게 놓이자, 재빨리 한걸음 물러나 잡혔던 손목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레나드고 곧 아주머니의 손을 놓아주었고, 아주머니는 믿기지 않는 듯 레나드에게 물었다.
"그...그게 사실인가요?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레나드가 그녀를 여전히 묵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끌고온 말위에 얹어진 짐을 가르켰다.
"저기 저짐 보이시오?"
레나드가 가르키는 방향을 본 아주머니 눈에 말위에 얹어진 짐들이 보였다.
"거기 있는 짐중에 나무짝으로된 통이 보이죠? 그게 어제 루나스 가문에서 받은 포트리아 찻잎이고, 그 찻잎을 여기까지 날라준 아이가 바로 저 아이요. 이 아이는 일을 마치고 길드 사무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소."
주인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어 말위에 얹어진 짐을 살폈다.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가문이자, 란스 대륙을 통틀어 4대 가문중 하나로 꼽히는 루나스 가문이고, 그 가문이 손님들에게 곧잘 내어주는 선물중 하나가 바로 포트리아 찻잎이라 이곳 항구에서 포트리아 찻잎 나무상자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과연, 나무상자에 새겨진 문양은 루나스 가문의 문양이었고, 이미 그와 같이 포장된 포트리아 찻잎을 여러차례 본적 있는 주인아주머니는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저 포트리아 찻잎을 날라다준 하인이라면 루나스 가문의 하인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내 보아하니 저 아이가 가문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 잘 모르는 모양이던데... 그렇다 해도...가문의 하인을 욕보이면, 해당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터... 처신을 잘 하시는게 좋을 거요."
그 말을 남긴 레나드가 터벅터벅 가버리자, 주인 아주머니는 표정이 굳어져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내 씨익 웃어보이며 줄리아에게 다가갔고, 줄리아는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아, 미안해 미안해. 요즘 가문을 사칭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가지고 말야. 어, 어디봐? 다쳤니? 너는 무슨 남자애가 이리 야들야들하게 생겼니, 꼭 여자애처럼..."
주인 아주머니 호들갑을 떨며 갑작스레 호의적으로 나오자, 줄리아는 속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아, 아까 갑작스럽게 다그치니까 생각이 안났었는데... 저는 막내이신 줄리아 아가씨 심부름을 나온 거였다구요. 사무실에 가서 당장 고하겠어요!"
줄리아가 돌변하자, 주인 아주머니가 더더욱 놀랐다.
줄리아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는 몇차례 들어본 적이 있고, 또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하인을 보내 옷을 가지고 간 뒤 나중에 길드사무소를 통해 지불한 경험이 몇차례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나스 가문이 바로 옆이고, 란스 대륙을 호령하는 대가문이니 만큼 잘못보였다가는 이곳에서 장사하기는 힘들수도 있었다.
"아, 아니, 미, 미안하다. 얘야, 응?"
주인 아주머니가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며 줄리아는 속으로 고소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다 가문사람들에게 들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멀어져 가는 레나드의 뒷모습을 보며 줄리아는 서둘러 말했다.
"아 됐어요. 몰라서 그런거니까 용서해 줄께요... 하지만 앞으로 이 가게로 물건 사러 오진 않을꺼에요."
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드의 뒤를 헐레벌떡 뒤따라 가고, 주인 아주머니는 안도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줄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급히 레나드의 뒤를 따라붙은 줄리아가 그를 불러세웠다.
"레나드경, 레나드경..."
줄리아가 부르자 레나드가 멈춰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묵뚝뚝한 표정이지만, 왠지 모르게 묘한 매력이 있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냐?"
여전히 묵뚝뚝하고 무감정한 목소리. 하지만 지금 줄리아에겐 그 어느말보다 따뜻한 말이었다.
"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 레나드가 여전히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못믿겠으면 같이 길드 사무소로 가면 될것을... 내가 보기에도 넌 왠지 수상한 녀석이구나."
그렇게 말을 한 레나드는 관심없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돌려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놀란 줄리아가 얼른 그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아, 그...그게 말못할 사정이 좀 있어서요. 그리고...저... 어, 어디로 가신다고 했죠? 제가 품삯은 받지 않을테니까...저도 좀 데려가 주시면 안될까요?"
당황한 줄리아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른체 하는 말에, 걸어가던 레나드가 멈춰서서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 너 참 이상한 녀석이구나. 가문의 하인이 가문에 허락도 없이 자기 맘대로 다른 국가로 가겠다고 하질 않나, 하인일을 한다는 녀석이 품삯이 필요없다고?"
줄리아가 바로 대답못하고 우물우물 거리자, 레나드가 이내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며 말했다.
"난 하인을 항시 대동할 만큼 돈도 없고, 그럴만큼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거라."
레나드가 다시 걸어가자 그 뒤를 줄리아가 얼른 뒤따랐다.
"저...저기..."
하지만 막상 무어라 말을 해야할지 줄리아도 알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한 척의 배가 놓여진 선착장에 이르렀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주위를 경계하는 몇몇 경계병들이 눈에 띄었다.
경계병들이 줄리아를 알아볼리 만무하지만, 그들을 보자 왠지 더 조급함을 느끼는 줄리아였다.
"제...제발 저 좀 데리고 가주세요. 네?"
레나드가 다시 줄리아를 돌아보았다.
"너 정말 루나스 가문의 하인이 맞긴 한거냐? 그런 대가문에 하인으로 들어기가 쉽지 않아, 저마다 들어가지 못해 발버둥인데... 되려 넌 나오려고 발버둥이구나.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 두면 될 것을, 굳이 날더러 데려가 달라하는 이유가 뭐냐?"
줄리아가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자, 레나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돌아섰다.
레나드가 돌아서는 모습을 보자 다급하진 줄리아가 말했다.
"사, 사정이 있습니다. 당장 말하긴 힘들지만 일단 데려가 주시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줄리아가 사정을 하는데도 레나드는 듣는척 마는척, 배에 오르고 있었다.
배 입구에서 서있던 선원이 뱃표를 확인하고 레나드를 들여보내주었지만, 그 뒤를 따르는 줄리아는 막아섰다.
"표!"
선원이 뱃표를 요구하자 당황한 줄리아가 묵뚝뚝하게 걸어가는 레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레나드경! 제발!"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멀찍이서 이안의 수하인 갈릭 부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줄리아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레나드경!"
줄리아는 선원의 제지를 받아 배에 오르지 못한 체 배위에 올라탄 레나드의 윗모습을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그를 불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 개자식... 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어버려라! ]
줄리아가 분을 삼키며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있다가는 엘루인 가문 사람들에게 잡힐 판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돌아선 줄리아는 막상 돌아서니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이윽고 멀찍이서, 일련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맨 앞에 선 이안을 필두로 엘루인 가문의 깃발과 루나스 가문의 깃발을 휘날리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젠 오도가도 못하고 이대로 잡혀 다시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아버지, 어머니한테 혼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가문 사람들 앞에서 망신까지 당하고, 십년동안 지긋지긋한 사냥꾼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고, 괜시리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봐!"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배위에서 레나드가 부르고 있었다.
"표없이 배 타기가 쉬운지 아느냐? 올라오거라!"
레나드가 부르자, 그의 옆에 서 있던 한 선원이 입구를 지키는 선원에게 소리쳤다.
"이봐, 돈은 지불 됐으니까 저 꼬마녀석 태워~"
그 선원의 말에 줄리아의 표정이 밝아지며 재빨리 배위에 올라탔다.
당장이라도 물에 빠뜨려 혼쭐을 내주고 싶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레나드를 바라보며 감사해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안이 이끌고 온 일행이, 이안의 지시를 받고 사방으로 흩어져 행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간신히 잡혀갈뻔한 상황을 모면한 줄리아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줄리앙!"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레나드가 고개를 까딱이며 자신의 짐을 가르켰다.
"뱃표를 사서 탄게 아니라, 뱃삯을 비싸게 치웠으니 일을 해야지.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말을 쉬게 할테니, 짐을 챙겨라."
그렇게 말하고는 레나드가 배 안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버리자, 당황한 줄리아가 서둘러 말고삐를 잡고 그 뒤를 따랐다.
그때 배의 출항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울려퍼지고, 줄리아는 배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자 선착장쪽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떠나 항구에서 서서히 벗어나자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과 서운함이 가슴속에 젖어들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에 품을 떠나고 있는 줄리아였다.
막상 그저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지던 곳이, 이제는 오히려 따뜻한 품을 떠나오는 듯한 느낌에 서운함을 느끼고 있으니 자신도 의아했다.
이제 무얼 어찌해야할지, 또 언제까지 남자행색을 한 체 다녀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앞으로 겪게될 일들이 마치 이야기속 영웅들의 모험담처럼 자신도 뭔가 대단한 여행을 할 것같은 기대감이 가슴속에 가득했다.
"미안해요..."
줄리아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며 나즈막히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레나드의 뒤를 따라 배 안쪽으로 들어갔다.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초저녁 무렵, 항구 전체를 수색하던 이안은 부관인 갈릭의 보고를 받고 어느 옷가게로 달려왔다.
옷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중년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갈릭이 이안이 오자, 그에게 다가와 보고를 했다.
"줄리아 아가씨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하인복장의 아이를 보았다고 합니다."
"확실한가?"
"줄리아 아가씨의 초상을 배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고 이야기 한 것이니,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언제 보았다고 하던가?"
"오늘 이른 낮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안은 선착장 쪽에서 기적을 울리며 출항하는 배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출항한 배편만 수백척이 아닌가? 코앞에서 놓치다니..."
이안이 다시 갈릭과 라오를 돌아보며 이야기 했다.
"항구쪽에서 소집한 루나스 가문과 우리 길드원들을 해산시켜라. 이미 항구를 벗어났다면, 이를 최대한 빨리 알려 대책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네."
갈릭과 라오가 동시에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집합해 있는 길드원쪽으로 향했다.
이안은 다시 선착장 쪽을 돌아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말괄량이 아가씨로구만..."
이안은 말고삐를 돌려 발길을 루나스 가문쪽으로 향했다.
이제 가문으로 돌아가 어디로 갔을지 모를 줄리아를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을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이안은 이 말괄량이 아가씨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일전에 가문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그 빼어난 용모가 마음에 들었지만 말수가 적고 낯을 가리는 듯 하여 소심한 성격일줄 알았는데, 이처럼 큰일을 저지르다니, 그녀와 함께 한다면 꽤나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안이었다.
"가문마다 차고 넘치는 그런 요조숙녀보다야 훨씬 생기있고 좋지."
이안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까지 지었다.
워낙에 큰 항구도시이다 보니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을 일일이 살펴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라오!"
이안이 라오를 부르자, 라오가 다가와 대답했다.
"예."
"먼저 가서 길드원들을 소집해라."
"예."
라오가 말을 몰아 먼저 소크테리아 항구 북쪽에 있는 길드사무소쪽으로 내달렸다.
라오를 보낸 뒤 다른 부관 한명을 불렀다.
"갈릭, 나는 루나스 가문 길드에 다녀올테니, 특히 선착장 주변을 잘 살펴라. 일단 배에 오르면 찾을 수 없으니, 배에 오르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이안이 지시하자, 부관인 갈릭이 나서 대답했다.
"예."
지시를 한 이안이 먼저 갈길을 재촉하고, 갈릭 부관이 수하들을 이끌고 선착장 쪽으로 향하는 순간 인근 옷가게 문이 열리며 줄리아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아, 안되요."
줄리아가 하소연을 하고 있을 때, 주인아주머니가 더욱 화를 내며 말했다.
"이년이?! 길거리에서 혼나봐야 정신을 차릴려나? 당장 안따라와?"
주인아주머니가 기세등등하게 소리치자, 주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낏 바라보며 발걸음을 멈췄다.
줄리아는 당황하여 혹시라도 엘루인 가문 사람들이 올까 가슴이 쿵쾅거렸다.
주인아주머니의 힘에 이끌려 질질 끌려가는 줄리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며 어떻게든 손을 뿌리치려고 애를 쓰는 한편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다.
"오해하신거에요, 그런거 아니에요. 놔주세요."
당황한 줄리아의 말에 주인 아주머니가 더욱 화를 냈다.
"흥, 누가 속을 줄 알고? 이참에 아주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놔야지. 응?"
주인아주머니가 더욱 세게 당기려는 순간, 묵직한 힘과 함께 그녀의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주인아주머니는 자신의 손을 돌아보았는데, 줄리아의 가녀린 손목을 잡은 그녀의 팔목을 잡은 또 다른 손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하다시피한, 검은 복색에 꽤나 준수한 용모의 사내가 주인아주머니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한 힘으로, 체격이 큰 주인아주머니의 손을 꼼짝못하게 하고 있었다.
"뉘... 뉘슈?"
주인아주머니가 당황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를 보며 묻자, 그 남자는 묵뚝뚝한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아이를 아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요?"
그는 다름아닌 레나드였다. 막 뱃표를 구해 가던 레나드의 눈에 아주머니에게 끌려가는 줄리아를 본 것이었다.
줄리아는 레나드를 보자 구원자를 만난 듯 반가웠고, 당황한 주인 아주머니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가 글세 루나스 가문의 하인이라고 가문 사칭을 했수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체 다 듣기도 전에 레나드가 딱딱한 어투로 말을 잘랐다.
"이 아이는 루나스 가문의 하인이 맞소."
그 말에 아주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루...루나스 가문의 하인이 맞다구요?"
"그렇소. 난 어제 루나스 가문을 방문한 무사로, 이 아이는 어제 루나스 가문을 나올때, 가문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날라준 가문의 하인이었소."
아주머니는 당황한 표정이 되어 조심스레 줄리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줄리아는 손이 자유롭게 놓이자, 재빨리 한걸음 물러나 잡혔던 손목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레나드고 곧 아주머니의 손을 놓아주었고, 아주머니는 믿기지 않는 듯 레나드에게 물었다.
"그...그게 사실인가요?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레나드가 그녀를 여전히 묵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끌고온 말위에 얹어진 짐을 가르켰다.
"저기 저짐 보이시오?"
레나드가 가르키는 방향을 본 아주머니 눈에 말위에 얹어진 짐들이 보였다.
"거기 있는 짐중에 나무짝으로된 통이 보이죠? 그게 어제 루나스 가문에서 받은 포트리아 찻잎이고, 그 찻잎을 여기까지 날라준 아이가 바로 저 아이요. 이 아이는 일을 마치고 길드 사무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소."
주인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어 말위에 얹어진 짐을 살폈다.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가문이자, 란스 대륙을 통틀어 4대 가문중 하나로 꼽히는 루나스 가문이고, 그 가문이 손님들에게 곧잘 내어주는 선물중 하나가 바로 포트리아 찻잎이라 이곳 항구에서 포트리아 찻잎 나무상자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과연, 나무상자에 새겨진 문양은 루나스 가문의 문양이었고, 이미 그와 같이 포장된 포트리아 찻잎을 여러차례 본적 있는 주인아주머니는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저 포트리아 찻잎을 날라다준 하인이라면 루나스 가문의 하인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내 보아하니 저 아이가 가문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 잘 모르는 모양이던데... 그렇다 해도...가문의 하인을 욕보이면, 해당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터... 처신을 잘 하시는게 좋을 거요."
그 말을 남긴 레나드가 터벅터벅 가버리자, 주인 아주머니는 표정이 굳어져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내 씨익 웃어보이며 줄리아에게 다가갔고, 줄리아는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아, 미안해 미안해. 요즘 가문을 사칭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가지고 말야. 어, 어디봐? 다쳤니? 너는 무슨 남자애가 이리 야들야들하게 생겼니, 꼭 여자애처럼..."
주인 아주머니 호들갑을 떨며 갑작스레 호의적으로 나오자, 줄리아는 속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아, 아까 갑작스럽게 다그치니까 생각이 안났었는데... 저는 막내이신 줄리아 아가씨 심부름을 나온 거였다구요. 사무실에 가서 당장 고하겠어요!"
줄리아가 돌변하자, 주인 아주머니가 더더욱 놀랐다.
줄리아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는 몇차례 들어본 적이 있고, 또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하인을 보내 옷을 가지고 간 뒤 나중에 길드사무소를 통해 지불한 경험이 몇차례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나스 가문이 바로 옆이고, 란스 대륙을 호령하는 대가문이니 만큼 잘못보였다가는 이곳에서 장사하기는 힘들수도 있었다.
"아, 아니, 미, 미안하다. 얘야, 응?"
주인 아주머니가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며 줄리아는 속으로 고소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다 가문사람들에게 들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멀어져 가는 레나드의 뒷모습을 보며 줄리아는 서둘러 말했다.
"아 됐어요. 몰라서 그런거니까 용서해 줄께요... 하지만 앞으로 이 가게로 물건 사러 오진 않을꺼에요."
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드의 뒤를 헐레벌떡 뒤따라 가고, 주인 아주머니는 안도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줄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급히 레나드의 뒤를 따라붙은 줄리아가 그를 불러세웠다.
"레나드경, 레나드경..."
줄리아가 부르자 레나드가 멈춰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묵뚝뚝한 표정이지만, 왠지 모르게 묘한 매력이 있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냐?"
여전히 묵뚝뚝하고 무감정한 목소리. 하지만 지금 줄리아에겐 그 어느말보다 따뜻한 말이었다.
"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 레나드가 여전히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못믿겠으면 같이 길드 사무소로 가면 될것을... 내가 보기에도 넌 왠지 수상한 녀석이구나."
그렇게 말을 한 레나드는 관심없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돌려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놀란 줄리아가 얼른 그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아, 그...그게 말못할 사정이 좀 있어서요. 그리고...저... 어, 어디로 가신다고 했죠? 제가 품삯은 받지 않을테니까...저도 좀 데려가 주시면 안될까요?"
당황한 줄리아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른체 하는 말에, 걸어가던 레나드가 멈춰서서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 너 참 이상한 녀석이구나. 가문의 하인이 가문에 허락도 없이 자기 맘대로 다른 국가로 가겠다고 하질 않나, 하인일을 한다는 녀석이 품삯이 필요없다고?"
줄리아가 바로 대답못하고 우물우물 거리자, 레나드가 이내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며 말했다.
"난 하인을 항시 대동할 만큼 돈도 없고, 그럴만큼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거라."
레나드가 다시 걸어가자 그 뒤를 줄리아가 얼른 뒤따랐다.
"저...저기..."
하지만 막상 무어라 말을 해야할지 줄리아도 알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한 척의 배가 놓여진 선착장에 이르렀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주위를 경계하는 몇몇 경계병들이 눈에 띄었다.
경계병들이 줄리아를 알아볼리 만무하지만, 그들을 보자 왠지 더 조급함을 느끼는 줄리아였다.
"제...제발 저 좀 데리고 가주세요. 네?"
레나드가 다시 줄리아를 돌아보았다.
"너 정말 루나스 가문의 하인이 맞긴 한거냐? 그런 대가문에 하인으로 들어기가 쉽지 않아, 저마다 들어가지 못해 발버둥인데... 되려 넌 나오려고 발버둥이구나.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 두면 될 것을, 굳이 날더러 데려가 달라하는 이유가 뭐냐?"
줄리아가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자, 레나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돌아섰다.
레나드가 돌아서는 모습을 보자 다급하진 줄리아가 말했다.
"사, 사정이 있습니다. 당장 말하긴 힘들지만 일단 데려가 주시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줄리아가 사정을 하는데도 레나드는 듣는척 마는척, 배에 오르고 있었다.
배 입구에서 서있던 선원이 뱃표를 확인하고 레나드를 들여보내주었지만, 그 뒤를 따르는 줄리아는 막아섰다.
"표!"
선원이 뱃표를 요구하자 당황한 줄리아가 묵뚝뚝하게 걸어가는 레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레나드경! 제발!"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멀찍이서 이안의 수하인 갈릭 부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줄리아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레나드경!"
줄리아는 선원의 제지를 받아 배에 오르지 못한 체 배위에 올라탄 레나드의 윗모습을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그를 불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 개자식... 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어버려라! ]
줄리아가 분을 삼키며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있다가는 엘루인 가문 사람들에게 잡힐 판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돌아선 줄리아는 막상 돌아서니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이윽고 멀찍이서, 일련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맨 앞에 선 이안을 필두로 엘루인 가문의 깃발과 루나스 가문의 깃발을 휘날리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젠 오도가도 못하고 이대로 잡혀 다시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아버지, 어머니한테 혼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가문 사람들 앞에서 망신까지 당하고, 십년동안 지긋지긋한 사냥꾼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고, 괜시리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봐!"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배위에서 레나드가 부르고 있었다.
"표없이 배 타기가 쉬운지 아느냐? 올라오거라!"
레나드가 부르자, 그의 옆에 서 있던 한 선원이 입구를 지키는 선원에게 소리쳤다.
"이봐, 돈은 지불 됐으니까 저 꼬마녀석 태워~"
그 선원의 말에 줄리아의 표정이 밝아지며 재빨리 배위에 올라탔다.
당장이라도 물에 빠뜨려 혼쭐을 내주고 싶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레나드를 바라보며 감사해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안이 이끌고 온 일행이, 이안의 지시를 받고 사방으로 흩어져 행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간신히 잡혀갈뻔한 상황을 모면한 줄리아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줄리앙!"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레나드가 고개를 까딱이며 자신의 짐을 가르켰다.
"뱃표를 사서 탄게 아니라, 뱃삯을 비싸게 치웠으니 일을 해야지.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말을 쉬게 할테니, 짐을 챙겨라."
그렇게 말하고는 레나드가 배 안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버리자, 당황한 줄리아가 서둘러 말고삐를 잡고 그 뒤를 따랐다.
그때 배의 출항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울려퍼지고, 줄리아는 배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자 선착장쪽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떠나 항구에서 서서히 벗어나자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과 서운함이 가슴속에 젖어들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에 품을 떠나고 있는 줄리아였다.
막상 그저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지던 곳이, 이제는 오히려 따뜻한 품을 떠나오는 듯한 느낌에 서운함을 느끼고 있으니 자신도 의아했다.
이제 무얼 어찌해야할지, 또 언제까지 남자행색을 한 체 다녀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앞으로 겪게될 일들이 마치 이야기속 영웅들의 모험담처럼 자신도 뭔가 대단한 여행을 할 것같은 기대감이 가슴속에 가득했다.
"미안해요..."
줄리아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며 나즈막히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레나드의 뒤를 따라 배 안쪽으로 들어갔다.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초저녁 무렵, 항구 전체를 수색하던 이안은 부관인 갈릭의 보고를 받고 어느 옷가게로 달려왔다.
옷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중년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갈릭이 이안이 오자, 그에게 다가와 보고를 했다.
"줄리아 아가씨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하인복장의 아이를 보았다고 합니다."
"확실한가?"
"줄리아 아가씨의 초상을 배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고 이야기 한 것이니,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언제 보았다고 하던가?"
"오늘 이른 낮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안은 선착장 쪽에서 기적을 울리며 출항하는 배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출항한 배편만 수백척이 아닌가? 코앞에서 놓치다니..."
이안이 다시 갈릭과 라오를 돌아보며 이야기 했다.
"항구쪽에서 소집한 루나스 가문과 우리 길드원들을 해산시켜라. 이미 항구를 벗어났다면, 이를 최대한 빨리 알려 대책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네."
갈릭과 라오가 동시에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집합해 있는 길드원쪽으로 향했다.
이안은 다시 선착장 쪽을 돌아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말괄량이 아가씨로구만..."
이안은 말고삐를 돌려 발길을 루나스 가문쪽으로 향했다.
이제 가문으로 돌아가 어디로 갔을지 모를 줄리아를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을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이안은 이 말괄량이 아가씨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일전에 가문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그 빼어난 용모가 마음에 들었지만 말수가 적고 낯을 가리는 듯 하여 소심한 성격일줄 알았는데, 이처럼 큰일을 저지르다니, 그녀와 함께 한다면 꽤나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안이었다.
"가문마다 차고 넘치는 그런 요조숙녀보다야 훨씬 생기있고 좋지."
이안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까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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