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2
마치 병사들이 에워싸듯, 밤바다를 가르는 배를 에워싼 안개는 한치앞을 내다보기 힘들게 만들었고, 달빛마저 가려버린 구름들은 등불의 시야마저 좁히고 있었다.
그렇게 힘겹게 밤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는 배가 파도에 부딪힐 때마다, 선실안에 줄리아는 배가 울렁거리는 배멀미를 느껴 당장이라도 배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더군다나 간신히 든 잠도, 저 시리어인지 뭔지 하는 것들 때문에 깬 뒤로 고통은 배가 되고 있었다.
줄리아는 머리에서 식은 땀까지 흘리며 복통을 느끼고 있었는데, 애써 참아가며 흐르는 식은 땀을 닦아냈다.
그런 줄리아한테는 관심조차 없는 듯 선창으로 바깥을 살피는 레나드는, 안개가 자욱하여 더이상 시리어들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무언가 보이는게 있는지 눈빛이 날카로웠다.
"뭐가 있나요?"
줄리아가 참다 못해 물어보는 말에, 레나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왔다... 다크시리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간, 배가 "쿵!"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휘청거렸다.
"악!"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배위에서 일순 소란이 일어났다.
레나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실 밖으로 나섰고, 줄리아는 겁에 질려 헐레벌떡 그 뒤를 따랐다.
선실밖은 각 선실이 연결된 통로였는데, 레나드 말고도 몇몇 사람들이 선실문을 열고 나와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었고, 통로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다...다크시리어인가?"
"어쩌지? 우린 이제 다 죽는건가?"
다들 두려워 하고 있을 때, 통로 문이 열리며 칼을 든 선원 한명이 소리쳤다.
"다크시리어의 습격이다. 모두 짐을 챙겨가지고 통로 뒤쪽 계단으로 내려가!"
선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각자 짐을 챙겨들고 통로로 쏟아져 나왔고, 레나드 역시 다시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겨 들어서 줄리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짐 잘챙겨서, 사람들 따라 배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거라."
줄리아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레...레나드 경은 어딜 가십니까?"
"난 선원들을 좀 도와야 겠다. 한두마리 습격이라면 이 배의 선원들이 충분히 막겠지만... 보아하니 십여마리 이상이다. 다크 시리어 십여마리라면 이 배의 선원들만으론 역부족이야. 어서!"
레나드가 소리치며, 방을 나가 통로 입구쪽으로 향하고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줄리아는 사람들을 따라 통로 뒤쪽 계단으로 향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평소같으면 버럭버럭 성질을 냈거나, 속으로 궁시렁 거렸을 텐데도, 위험한 상황임을 알자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고분고분 배 아래쪽으로 내려선 줄리아였다.
그녀는 짐을 꼭 부여잡은 체, 어서 레나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부여잡은 손에서는 땀이 흘러내렸고, 신경이 곤두서 배가 아픈 것도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갑판위와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병장기 소리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처참한 비명소리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불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배 아래쪽 선실에 두런두런 모여 앉아 있었다.
게중에는 나이가 어려보이는 아이들부터,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노파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지간한 사람들은 가기를 꺼려하는 하라긴 항구를 애써 찾는 약초쟁이들이란 지독한 가난을 겪는 이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죽을 수도 있다는 극도의 공포심에 빠진 체 귀를 쫑긋이 세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처참한 비명소리에, 아이들이 먼저 울음을 터뜨리고, 공포에 질린 이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뜬 체 입구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줄리아 역시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에 직면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도, 그녀 역시 입구쪽을 바라보며 레나드가 꼭 올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제발 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잠시 조용한 상태가 이어져 다들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를 살피는 와중에 입구쪽 철문이 "철컹"소리를 내며 움직이자, 다들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소스라치케 놀랐다.
줄리아 역시 문이 소리를 내며 삐걱 거리는 순간 몸이 움찔 거리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이 열리고 한 선원이 다친 어깨를 감싸쥔 체, 들어섰다.
"이제 됐수다. 각자 방으로 돌아가슈."
그 선원의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근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줄리아 역시 긴 한숨과 함께 비로소 안심이 외자, 긴장이 풀리며 몸에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정말이지 그 짧은 순간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져, 억장이 다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이런 감정을 처음 느껴본 줄리아 였기에,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람들을 따라 다시 윗층 선실로 가기위해 입구쪽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으아악!"
맨 먼저 입구쪽으로 간 사람의 등을 뚫고 나온 것은 커다란 창같은 것이었는데, 피가 사방으로 튀고 비명소리가 울려퍼지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 아수라장이 됐다.
부상당했던 선원이 낄낄거리듯 웃으며 막 입구에 들어선 한 남자를 창으로 찌른 것이었다.
죽은 남자의 몸이 짐짝처럼 내던져지고, 선원의 눈빛이 검푸른 빛으로 가득 채워진 체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키키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아연실색을 하며 소리쳤다.
"다...다크시리어다."
"키에에엑!"
선원이 괴성을 내지르며 창을 들고 달려들자,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하지만 너무 놀란 줄리아는 도망치려는 생각만 할뿐, 힘빠진 다리는 꼼짝하지 않았다.
"아..."
줄리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저 바라만 보는 사이, 창을 든 선원이 줄리아에게 달려들었다.
"키엑!"
그 순간, 짧은 괴성과 함께 선원의 몸이 쓰러지고, 쓰러진 몸은 줄리아 앞까지 미끄러져왔다.
"뭐...뭐..."
줄리아가 공포에 질려 굳어진 얼굴로 바닥에 널부러진 선원을 보니, 어느새 얼굴 전체가 잿빛으로 변해 기괴한 형상을 하였고, 복부쪽에 휑하니 구멍이 뚫린 체 검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봐, 괜찮아?"
낯익은 목소리. 줄리아가 고개를 들자, 어느틈에 왔는지 레나드가 앞에 서 있었다.
"하여튼 귀찮은 놈들이야... 다크시리어는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으니까 특히 주의해야돼. 괜찮은거야?"
레나드가 줄리아의 표정을 살피는 순간, 줄리아는 레나드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뭐, 뭐야?"
"으아아앙~~"
레나드가 크게 당황해 하는 것도 모르는 체, 줄리아는 레나드 품에 안긴 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 아니 도, 동생이에요 동생..."
당황한 레나드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애써 태연한 척 이야기 하며, 줄리아를 떼어내려 했지만, 아주 죽을 힘을 다해 꼭 껴안은 줄리아는 결코 놓치 않았다.
"으아아앙~"
왠만한 애보다 더 큰 목소리로 울어대는 줄리아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레나드가 씁쓸하게 웃으며 어쩔줄 몰라하자, 그를 보며 몇몇 사람들이 수근거리듯 이야기 했다.
"동생 행색이 왜 저래...? 지만 좋은 옷 입고 동생한테는 걸레짝을 입혀놨구만..."
"형이란 인간이 동생을 하인 부리듯 시켜먹는 모양일세. 몹쓸 녀석같으니라구..."
"쯧쯧... 형제지간에도 저런다나? 겉만 번지르르 해가지고..."
그 소리가 고스란히 레나드의 귓가에 들어오고 점점 얼굴이 굳어지는 레나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줄리아의 귀에 이를 악물고 이야기 했다.
"너 빨리 안떨어지면 콱 죽여버리는 수가 있다...응?"
하지만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한 줄리아는 듣는 둥 마는 둥 여전히 울고 있을 뿐, 레나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끼며 그저 망연자실 서 있을 뿐이었다.
날쌔보이는 배 한척이 파도를 가르며 빠른 속도로 항해하고, 배위로 블루문헌터스의 깃발이 용맹스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에 워렌이 항해사가 잡고 있는 키앞에서, 파도로 인해 심하게 흔들림에도, 전혀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하라긴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워렌이 묻는 말에 항해사가 키를 붙잡은 체 대답했다.
"한 7일 정도가 소요될 것입니다."
"이 배의 속도가 가장 빠른 배인 걸로 아는데? 어제 출항한 배를 쫓는다면 얼마나 걸리겠나?"
항해사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일반적인 뱃길이라면 반나절이면 따라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빠르다 하나 서너시간 정도 따라잡는 게 고작일 겁니다."
워렌이 살짝 고개를 돌려 항해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유는?"
"이 길은 하라긴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저주받은 땅 하라시안에 인접해 있죠. 그 주위에 모든 생명과 정령들이 그 저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것들은 지나가는 배를 사냥하는데, 배가 작을 수록 만만히 보고 덤벼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그것들로부터의 저항은 앞서간 배보다 이 배가 더 심할 거란 점입니다."
"오직 그 이유때문인가?"
"네."
워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시간은 우리가 줄여준다. 항해사를 포함한 선원 전원은 전속력으로 하라긴 항구로 향해라."
워렌이 그렇게 말한 뒤 아래쪽 갑판을 내려다 보니, 금빛 띠를 두른 20명의 사내들이 도열을 한 체, 워렌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10년 넘게 배를 탄 선원들도 흔들리는 배위에서 휘청거리며 뱃일을 보는데, 그들은 마치 배의 한 부분인양 미동도 없었다.
"들어라!"
워렌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금빛 띠의 사내들, 골든헌터즈의 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워렌을 바라보았다.
"이 배의 진로를 방해하는 미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미물도 항해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라!"
"존! 명!"
스무명 대원의 목소리가 거친 파도소리를 뚫고 바다위에 쩌렁쩌렁 울러퍼졌다.
항해사는 그런 대원들의 모습을 보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어느덧 밖으로 나온 선장이 항해사 옆에 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가문내 최고의 엘리트라는 골든헌터즈로군."
항해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더군다나, 수색대장으로 있는 워렌 경은 가문내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아닙니까?"
"그렇지. 삼십여년전 십년전쟁에서 살아남은 몇안되는 장수중에 한명이지. 이미 나이가 오십이 넘었을 텐데, 겉보기엔 아직도 사십대 초반같구만."
항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아니 근데 그정도 공을 세운 장수인데, 어찌 아직도 중가신에 머물러 있는거죠? 상가신은 물론이고 대가신에 오른다 해도 이상할게 없는 사람 아닙니까?"
"그렇지. 그 공으로만 따진다면 대가신이 문제가 아니라 장로의 예우를 받는다 해도 이상할게 없지. 내 듣기론 워렌 경이 거절했다 하더군."
"네에? 워렌 경이 거절했다구요? 아니 왜요?"
선장이 긴 한숨과 함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글세. 나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알다시피 대가신 이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면, 더이상 현장에 나설 일이 없지. 그래서 그냥 중가신에 머물고 싶다 했다고... 그때 그렇게 들었지만... 진짜 이유는 나도 모르지."
선장과 항해사는 상갑판 맨 앞쪽에서 갑판을 내려다 보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워렌 뒷모습을 조금은 측은한 듯 바라보았다.
"항해 상태는?"
선장이 갑작스레 묻는 말에 생각없이 워렌 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항해사가 놀라 대답했다.
"아, 네? 아 항해 상태요. 괜찮습니다."
선장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항해사의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자, "아야" 소리를 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놈아 누가 괜찮다는 대답 듣자고 했냐?"
항해사가 얼른 키에 새겨진 수치와 배 수평 상태를 살폈다.
"파도가 조금 높긴 하지만, 정해진 방향으로 순항중입니다. 항해 13시간째, 목표된 지점보다 약 10분 거리를 더 왔습니다. 배는 좌현으로 3 기울었습니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워렌의 뒷모습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그는 과거의 워렌 모습을 회상하듯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조용히 선실 안으로 돌아갔다.
투덜투덜, 궁시렁 궁시렁, 줄리아는 쉴새 없이 중얼거리며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끄럽다... 아주 입을 꼬메버리기 전에 조용히 하는게 좋을 거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협박조의 말투, 기분이 확 상해 당장이라도 가서 걷어차버리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선실로 돌아오자마자 어찌나 쎄게 꿀밤을 얻어 맞았는지,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앞으로 다시는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레나드는 헝클어진 짐을 정리할 것을 당부해 놓고 자신은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침대에 드러누운 레나드 역시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의아해 하고 있었다.
남자가 품에 안겼음에도 그 포근한 느낌이 결코 싫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싫지않은 느낌이 더 싫었다.
원래 계획은 뱃삯만큼 일을 시키는 거였지만, 아무래도 더 데리고 다니다간 자기 자신이 이상해 질것 같았다.
하라긴에서 도착하는 대로 서둘러 제갈길을 보내야겠다고, 레나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을 청하고 있었고 그런 레나드를 노려보는 줄리아는 궁시렁 궁시렁 거리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 똑 똑 ]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레나드가 고개를 들고 문쪽을 바라보고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방문쪽으로 걸어간 레나드가 방문을 열고, 뒤쪽에서 짐정리를 하던 줄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나드의 등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레나드의 목소리에 나이 지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잖습니까?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아! 벌써 금문해역에 들어섰습니까?"
"네. 지난번처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아무렴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금방 나가겠습니다."
"네, 그럼..."
레나드가 돌아와 겉옷을 챙겨입자, 줄리아가 궁금한 듯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줄리아의 물음에 레나드가 보지도 않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대답했다.
"응."
옷매무새를 다 다듬고 난 레나드가 돌아서서 줄리아를 바라보며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갔다올때까지 짐정리 다 해놔"
그렇게 말한 레나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리자, 줄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짐짝이라고... 하나 사준다 사줘! 쯧..."
하지만 이내 아까 그의 품에 안겼던 기억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는 줄리아였다.
그 느낌은 줄리아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고, 왠지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에잇..."
하지만 이내 괜히 화가 나는 줄리아는 들고 있던 옷가지를 집어던졌다.
애써 그때 생각을 지우며 남은 짐들은 대충 짐상자안에 우겨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의자에 걸터앉아 긴 한숨을 내쉰 줄리아는 문득 선창을 보았다.
아직도 안개가 자욱한 듯 했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개인 상태였다.
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창쪽으로 다가가, 창을 통해 바깥쪽을 살펴보았다.
배의 왼쪽 방에 자리잡아, 왼쪽 바다 풍경을 볼 수 있는 작고 둥근 선창이었는데, 창 너머로 희미한 안개와 함께 끝없이 펼쳐진 바닷물이 보였다.
문득 아래쪽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여 줄리아가 빼꼼히 바라보다가,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궁금증이 떠올랐다.
호기심많은 줄리아가 이런 상황을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줄리아는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더니 주위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통로 입구쪽으로 향했다.
큼지막한 통로문을 살며시 여는 순간, 바깥쪽의 분주한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밧줄 조여~"
들러오는 큼지막한 함성과 함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줄리아는 자신이 있는 위치가 2층 갑판 위라는 것을 알고는 갑판 끄트머리로 다가갔다.
상갑판 너머로 배 맨 앞쪽에 서 있는 레나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뭐하지?"
줄리아가 의아한 듯 그런 레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치며 말했다.
"이봐, 다치기 전에 들어가 있어."
흠칫 놀란 줄리아가 선원을 보고 말했다.
"아, 전 레나드 경 일행인데요, 지금 뭐하는 거죠?"
그 말에 선원이 놀란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레나드 경의 일행이라고? 그래? 왠일이레? 일행이 다 있고?"
줄리아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다시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으응, 여기는 금문해역이라고 해서, 일반적으로 뱃길이 금지된 지역이지. 하지만 레나드경이 있으면 달라, 이 지역을 통과할 수 가 있거든."
"왜 금지된 지역인거죠?"
"응? 너 금문해역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거냐?"
줄리아는 호기심어린 얼굴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흐, 너 좀 귀엽게 생겼구나. 금문해역이란 수룡 오리엔시아의 둥지가 있는 곳이다. 오리엔시아 둥지로 다가갈수록 안개가 짙어지지.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배들이 다닐 수 없도록 금문해역을 정해놓은 거야."
줄리아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수룡이요? 용이 있어요?"
"그래. 용. 알다시피 하라시안은 란스 대륙 동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소크테리아 항구에서 위쪽으로 쭉 올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이 정도 배가 항해하면 5일이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지. 하지만 하라시안에 인접한 해역에 오리엔시아의 둥지가 있어, 그리로 들어간 것은 무엇이 되었던 꽁꽁얼어붙어 산산조각이 나기 때문에, 그 해역을 돌아가도록 하고 있단다. 그래서 5일이면 갈 거리를 10일에 걸쳐 가게 되는 거지."
"그런데요?"
"하지만 레나드 경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단다. 레나드 경이 있으면 그 금문해역을 관통할 수 가 있단다. 보통 우리가 두달에 한번정도 오고, 레나드 경이 일년에 한두번 정도 우리 배를 이용하는데, 레나드 경이 탈때마다 열흘 거리를 닷새만에 오니 우리입장에서도 득이 되는게 많거든. 그래서 레나드경이 탈때면 짐삯도 안받고, 특별히 말도 공짜로 태워주고 하는거란다. 원래 사람 배삯 따로, 짐삯 따로 받거든."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레나드 경이 있으면 괜찮다는거죠?"
그 말에 선원이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글세... 그건 나도 모르지. 일전에 레나드경이 있을 때, 다크시리어들의 집중 공격을 받는 바람에 배가 그만 금문해역에 들어선 적이 있었지... 그때 레나드 경이 지금처럼 저렇게 뱃머리에 서서 갔더니, 그냥 금문해역을 통과해 버린거야. 그 이후로는 레나드경이 탈때마다 특별히 부탁하곤 하지."
줄리아는 레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그의 뒷모습이 꽤나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힘겹게 밤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는 배가 파도에 부딪힐 때마다, 선실안에 줄리아는 배가 울렁거리는 배멀미를 느껴 당장이라도 배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더군다나 간신히 든 잠도, 저 시리어인지 뭔지 하는 것들 때문에 깬 뒤로 고통은 배가 되고 있었다.
줄리아는 머리에서 식은 땀까지 흘리며 복통을 느끼고 있었는데, 애써 참아가며 흐르는 식은 땀을 닦아냈다.
그런 줄리아한테는 관심조차 없는 듯 선창으로 바깥을 살피는 레나드는, 안개가 자욱하여 더이상 시리어들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무언가 보이는게 있는지 눈빛이 날카로웠다.
"뭐가 있나요?"
줄리아가 참다 못해 물어보는 말에, 레나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왔다... 다크시리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간, 배가 "쿵!"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휘청거렸다.
"악!"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배위에서 일순 소란이 일어났다.
레나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실 밖으로 나섰고, 줄리아는 겁에 질려 헐레벌떡 그 뒤를 따랐다.
선실밖은 각 선실이 연결된 통로였는데, 레나드 말고도 몇몇 사람들이 선실문을 열고 나와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었고, 통로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다...다크시리어인가?"
"어쩌지? 우린 이제 다 죽는건가?"
다들 두려워 하고 있을 때, 통로 문이 열리며 칼을 든 선원 한명이 소리쳤다.
"다크시리어의 습격이다. 모두 짐을 챙겨가지고 통로 뒤쪽 계단으로 내려가!"
선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각자 짐을 챙겨들고 통로로 쏟아져 나왔고, 레나드 역시 다시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겨 들어서 줄리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짐 잘챙겨서, 사람들 따라 배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거라."
줄리아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레...레나드 경은 어딜 가십니까?"
"난 선원들을 좀 도와야 겠다. 한두마리 습격이라면 이 배의 선원들이 충분히 막겠지만... 보아하니 십여마리 이상이다. 다크 시리어 십여마리라면 이 배의 선원들만으론 역부족이야. 어서!"
레나드가 소리치며, 방을 나가 통로 입구쪽으로 향하고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줄리아는 사람들을 따라 통로 뒤쪽 계단으로 향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평소같으면 버럭버럭 성질을 냈거나, 속으로 궁시렁 거렸을 텐데도, 위험한 상황임을 알자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고분고분 배 아래쪽으로 내려선 줄리아였다.
그녀는 짐을 꼭 부여잡은 체, 어서 레나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부여잡은 손에서는 땀이 흘러내렸고, 신경이 곤두서 배가 아픈 것도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갑판위와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병장기 소리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처참한 비명소리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불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배 아래쪽 선실에 두런두런 모여 앉아 있었다.
게중에는 나이가 어려보이는 아이들부터,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노파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지간한 사람들은 가기를 꺼려하는 하라긴 항구를 애써 찾는 약초쟁이들이란 지독한 가난을 겪는 이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죽을 수도 있다는 극도의 공포심에 빠진 체 귀를 쫑긋이 세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처참한 비명소리에, 아이들이 먼저 울음을 터뜨리고, 공포에 질린 이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뜬 체 입구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줄리아 역시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에 직면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도, 그녀 역시 입구쪽을 바라보며 레나드가 꼭 올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제발 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잠시 조용한 상태가 이어져 다들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를 살피는 와중에 입구쪽 철문이 "철컹"소리를 내며 움직이자, 다들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소스라치케 놀랐다.
줄리아 역시 문이 소리를 내며 삐걱 거리는 순간 몸이 움찔 거리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이 열리고 한 선원이 다친 어깨를 감싸쥔 체, 들어섰다.
"이제 됐수다. 각자 방으로 돌아가슈."
그 선원의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근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줄리아 역시 긴 한숨과 함께 비로소 안심이 외자, 긴장이 풀리며 몸에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정말이지 그 짧은 순간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져, 억장이 다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이런 감정을 처음 느껴본 줄리아 였기에,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람들을 따라 다시 윗층 선실로 가기위해 입구쪽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으아악!"
맨 먼저 입구쪽으로 간 사람의 등을 뚫고 나온 것은 커다란 창같은 것이었는데, 피가 사방으로 튀고 비명소리가 울려퍼지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 아수라장이 됐다.
부상당했던 선원이 낄낄거리듯 웃으며 막 입구에 들어선 한 남자를 창으로 찌른 것이었다.
죽은 남자의 몸이 짐짝처럼 내던져지고, 선원의 눈빛이 검푸른 빛으로 가득 채워진 체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키키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아연실색을 하며 소리쳤다.
"다...다크시리어다."
"키에에엑!"
선원이 괴성을 내지르며 창을 들고 달려들자,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하지만 너무 놀란 줄리아는 도망치려는 생각만 할뿐, 힘빠진 다리는 꼼짝하지 않았다.
"아..."
줄리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저 바라만 보는 사이, 창을 든 선원이 줄리아에게 달려들었다.
"키엑!"
그 순간, 짧은 괴성과 함께 선원의 몸이 쓰러지고, 쓰러진 몸은 줄리아 앞까지 미끄러져왔다.
"뭐...뭐..."
줄리아가 공포에 질려 굳어진 얼굴로 바닥에 널부러진 선원을 보니, 어느새 얼굴 전체가 잿빛으로 변해 기괴한 형상을 하였고, 복부쪽에 휑하니 구멍이 뚫린 체 검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봐, 괜찮아?"
낯익은 목소리. 줄리아가 고개를 들자, 어느틈에 왔는지 레나드가 앞에 서 있었다.
"하여튼 귀찮은 놈들이야... 다크시리어는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으니까 특히 주의해야돼. 괜찮은거야?"
레나드가 줄리아의 표정을 살피는 순간, 줄리아는 레나드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뭐, 뭐야?"
"으아아앙~~"
레나드가 크게 당황해 하는 것도 모르는 체, 줄리아는 레나드 품에 안긴 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 아니 도, 동생이에요 동생..."
당황한 레나드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애써 태연한 척 이야기 하며, 줄리아를 떼어내려 했지만, 아주 죽을 힘을 다해 꼭 껴안은 줄리아는 결코 놓치 않았다.
"으아아앙~"
왠만한 애보다 더 큰 목소리로 울어대는 줄리아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레나드가 씁쓸하게 웃으며 어쩔줄 몰라하자, 그를 보며 몇몇 사람들이 수근거리듯 이야기 했다.
"동생 행색이 왜 저래...? 지만 좋은 옷 입고 동생한테는 걸레짝을 입혀놨구만..."
"형이란 인간이 동생을 하인 부리듯 시켜먹는 모양일세. 몹쓸 녀석같으니라구..."
"쯧쯧... 형제지간에도 저런다나? 겉만 번지르르 해가지고..."
그 소리가 고스란히 레나드의 귓가에 들어오고 점점 얼굴이 굳어지는 레나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줄리아의 귀에 이를 악물고 이야기 했다.
"너 빨리 안떨어지면 콱 죽여버리는 수가 있다...응?"
하지만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한 줄리아는 듣는 둥 마는 둥 여전히 울고 있을 뿐, 레나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끼며 그저 망연자실 서 있을 뿐이었다.
날쌔보이는 배 한척이 파도를 가르며 빠른 속도로 항해하고, 배위로 블루문헌터스의 깃발이 용맹스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에 워렌이 항해사가 잡고 있는 키앞에서, 파도로 인해 심하게 흔들림에도, 전혀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하라긴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워렌이 묻는 말에 항해사가 키를 붙잡은 체 대답했다.
"한 7일 정도가 소요될 것입니다."
"이 배의 속도가 가장 빠른 배인 걸로 아는데? 어제 출항한 배를 쫓는다면 얼마나 걸리겠나?"
항해사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일반적인 뱃길이라면 반나절이면 따라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빠르다 하나 서너시간 정도 따라잡는 게 고작일 겁니다."
워렌이 살짝 고개를 돌려 항해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유는?"
"이 길은 하라긴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저주받은 땅 하라시안에 인접해 있죠. 그 주위에 모든 생명과 정령들이 그 저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것들은 지나가는 배를 사냥하는데, 배가 작을 수록 만만히 보고 덤벼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그것들로부터의 저항은 앞서간 배보다 이 배가 더 심할 거란 점입니다."
"오직 그 이유때문인가?"
"네."
워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시간은 우리가 줄여준다. 항해사를 포함한 선원 전원은 전속력으로 하라긴 항구로 향해라."
워렌이 그렇게 말한 뒤 아래쪽 갑판을 내려다 보니, 금빛 띠를 두른 20명의 사내들이 도열을 한 체, 워렌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10년 넘게 배를 탄 선원들도 흔들리는 배위에서 휘청거리며 뱃일을 보는데, 그들은 마치 배의 한 부분인양 미동도 없었다.
"들어라!"
워렌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금빛 띠의 사내들, 골든헌터즈의 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워렌을 바라보았다.
"이 배의 진로를 방해하는 미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미물도 항해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라!"
"존! 명!"
스무명 대원의 목소리가 거친 파도소리를 뚫고 바다위에 쩌렁쩌렁 울러퍼졌다.
항해사는 그런 대원들의 모습을 보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어느덧 밖으로 나온 선장이 항해사 옆에 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가문내 최고의 엘리트라는 골든헌터즈로군."
항해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더군다나, 수색대장으로 있는 워렌 경은 가문내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아닙니까?"
"그렇지. 삼십여년전 십년전쟁에서 살아남은 몇안되는 장수중에 한명이지. 이미 나이가 오십이 넘었을 텐데, 겉보기엔 아직도 사십대 초반같구만."
항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아니 근데 그정도 공을 세운 장수인데, 어찌 아직도 중가신에 머물러 있는거죠? 상가신은 물론이고 대가신에 오른다 해도 이상할게 없는 사람 아닙니까?"
"그렇지. 그 공으로만 따진다면 대가신이 문제가 아니라 장로의 예우를 받는다 해도 이상할게 없지. 내 듣기론 워렌 경이 거절했다 하더군."
"네에? 워렌 경이 거절했다구요? 아니 왜요?"
선장이 긴 한숨과 함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글세. 나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알다시피 대가신 이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면, 더이상 현장에 나설 일이 없지. 그래서 그냥 중가신에 머물고 싶다 했다고... 그때 그렇게 들었지만... 진짜 이유는 나도 모르지."
선장과 항해사는 상갑판 맨 앞쪽에서 갑판을 내려다 보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워렌 뒷모습을 조금은 측은한 듯 바라보았다.
"항해 상태는?"
선장이 갑작스레 묻는 말에 생각없이 워렌 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항해사가 놀라 대답했다.
"아, 네? 아 항해 상태요. 괜찮습니다."
선장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항해사의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자, "아야" 소리를 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놈아 누가 괜찮다는 대답 듣자고 했냐?"
항해사가 얼른 키에 새겨진 수치와 배 수평 상태를 살폈다.
"파도가 조금 높긴 하지만, 정해진 방향으로 순항중입니다. 항해 13시간째, 목표된 지점보다 약 10분 거리를 더 왔습니다. 배는 좌현으로 3 기울었습니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워렌의 뒷모습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그는 과거의 워렌 모습을 회상하듯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조용히 선실 안으로 돌아갔다.
투덜투덜, 궁시렁 궁시렁, 줄리아는 쉴새 없이 중얼거리며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끄럽다... 아주 입을 꼬메버리기 전에 조용히 하는게 좋을 거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협박조의 말투, 기분이 확 상해 당장이라도 가서 걷어차버리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선실로 돌아오자마자 어찌나 쎄게 꿀밤을 얻어 맞았는지,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앞으로 다시는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레나드는 헝클어진 짐을 정리할 것을 당부해 놓고 자신은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침대에 드러누운 레나드 역시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의아해 하고 있었다.
남자가 품에 안겼음에도 그 포근한 느낌이 결코 싫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싫지않은 느낌이 더 싫었다.
원래 계획은 뱃삯만큼 일을 시키는 거였지만, 아무래도 더 데리고 다니다간 자기 자신이 이상해 질것 같았다.
하라긴에서 도착하는 대로 서둘러 제갈길을 보내야겠다고, 레나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을 청하고 있었고 그런 레나드를 노려보는 줄리아는 궁시렁 궁시렁 거리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 똑 똑 ]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레나드가 고개를 들고 문쪽을 바라보고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방문쪽으로 걸어간 레나드가 방문을 열고, 뒤쪽에서 짐정리를 하던 줄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나드의 등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레나드의 목소리에 나이 지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잖습니까?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아! 벌써 금문해역에 들어섰습니까?"
"네. 지난번처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아무렴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금방 나가겠습니다."
"네, 그럼..."
레나드가 돌아와 겉옷을 챙겨입자, 줄리아가 궁금한 듯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줄리아의 물음에 레나드가 보지도 않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대답했다.
"응."
옷매무새를 다 다듬고 난 레나드가 돌아서서 줄리아를 바라보며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갔다올때까지 짐정리 다 해놔"
그렇게 말한 레나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리자, 줄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짐짝이라고... 하나 사준다 사줘! 쯧..."
하지만 이내 아까 그의 품에 안겼던 기억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는 줄리아였다.
그 느낌은 줄리아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고, 왠지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에잇..."
하지만 이내 괜히 화가 나는 줄리아는 들고 있던 옷가지를 집어던졌다.
애써 그때 생각을 지우며 남은 짐들은 대충 짐상자안에 우겨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의자에 걸터앉아 긴 한숨을 내쉰 줄리아는 문득 선창을 보았다.
아직도 안개가 자욱한 듯 했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개인 상태였다.
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창쪽으로 다가가, 창을 통해 바깥쪽을 살펴보았다.
배의 왼쪽 방에 자리잡아, 왼쪽 바다 풍경을 볼 수 있는 작고 둥근 선창이었는데, 창 너머로 희미한 안개와 함께 끝없이 펼쳐진 바닷물이 보였다.
문득 아래쪽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여 줄리아가 빼꼼히 바라보다가,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궁금증이 떠올랐다.
호기심많은 줄리아가 이런 상황을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줄리아는 후다닥 달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더니 주위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통로 입구쪽으로 향했다.
큼지막한 통로문을 살며시 여는 순간, 바깥쪽의 분주한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밧줄 조여~"
들러오는 큼지막한 함성과 함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줄리아는 자신이 있는 위치가 2층 갑판 위라는 것을 알고는 갑판 끄트머리로 다가갔다.
상갑판 너머로 배 맨 앞쪽에 서 있는 레나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뭐하지?"
줄리아가 의아한 듯 그런 레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치며 말했다.
"이봐, 다치기 전에 들어가 있어."
흠칫 놀란 줄리아가 선원을 보고 말했다.
"아, 전 레나드 경 일행인데요, 지금 뭐하는 거죠?"
그 말에 선원이 놀란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레나드 경의 일행이라고? 그래? 왠일이레? 일행이 다 있고?"
줄리아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다시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으응, 여기는 금문해역이라고 해서, 일반적으로 뱃길이 금지된 지역이지. 하지만 레나드경이 있으면 달라, 이 지역을 통과할 수 가 있거든."
"왜 금지된 지역인거죠?"
"응? 너 금문해역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거냐?"
줄리아는 호기심어린 얼굴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흐, 너 좀 귀엽게 생겼구나. 금문해역이란 수룡 오리엔시아의 둥지가 있는 곳이다. 오리엔시아 둥지로 다가갈수록 안개가 짙어지지.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배들이 다닐 수 없도록 금문해역을 정해놓은 거야."
줄리아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수룡이요? 용이 있어요?"
"그래. 용. 알다시피 하라시안은 란스 대륙 동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소크테리아 항구에서 위쪽으로 쭉 올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이 정도 배가 항해하면 5일이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지. 하지만 하라시안에 인접한 해역에 오리엔시아의 둥지가 있어, 그리로 들어간 것은 무엇이 되었던 꽁꽁얼어붙어 산산조각이 나기 때문에, 그 해역을 돌아가도록 하고 있단다. 그래서 5일이면 갈 거리를 10일에 걸쳐 가게 되는 거지."
"그런데요?"
"하지만 레나드 경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단다. 레나드 경이 있으면 그 금문해역을 관통할 수 가 있단다. 보통 우리가 두달에 한번정도 오고, 레나드 경이 일년에 한두번 정도 우리 배를 이용하는데, 레나드 경이 탈때마다 열흘 거리를 닷새만에 오니 우리입장에서도 득이 되는게 많거든. 그래서 레나드경이 탈때면 짐삯도 안받고, 특별히 말도 공짜로 태워주고 하는거란다. 원래 사람 배삯 따로, 짐삯 따로 받거든."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레나드 경이 있으면 괜찮다는거죠?"
그 말에 선원이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글세... 그건 나도 모르지. 일전에 레나드경이 있을 때, 다크시리어들의 집중 공격을 받는 바람에 배가 그만 금문해역에 들어선 적이 있었지... 그때 레나드 경이 지금처럼 저렇게 뱃머리에 서서 갔더니, 그냥 금문해역을 통과해 버린거야. 그 이후로는 레나드경이 탈때마다 특별히 부탁하곤 하지."
줄리아는 레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그의 뒷모습이 꽤나 대단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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