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9
작은 쟁반에 커피 두 잔을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노크하자, 안쪽에서 "들어와"하는 휘영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며시 방문을 열고 고개 먼저 빼꼼히 들이밀자, 돌아보지도 않은 체 책상에 앉아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휘영의 넓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 드시고 하세요."
다은이 다가와 책상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보니, 꽤나 두꺼운 책에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쓰여있는 게 보였다.
"범어네요?"
다은이 글자를 알아보자, 휘영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볼 줄 알아?"
"조금은요."
그러더니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아직 신을 모시고 있었다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쉬워하는 다은을, 휘영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금 뭘 하려고 하는 건지는 알아?"
휘영의 질문에 다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흔술(靈痕術)같은거 아닌가요?"
"맞아."
"저도 해본 적 있어요."
휘영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단순한 무당인 줄 알았더니? 주술도 제법이네?"
말을 하며 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고 느낀 다은이 얼른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 다은을 주시하며 휘영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자, 괜히 머쓱해진 다은이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왜..., 왜요?"
"어쩌면... 효과가 있을 지도..."
알아듣기 힘든 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서랍을 열어 검은색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서 작은 나무 함을 꺼냈는데, 함의 표면에도 아까 책에서 보았던 범어 글자가 써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함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붉은 천 위에 곱게 놓여있는 금빛 침 세 개가 보였다.
"침이네요?"
침을 알아본 다은의 말에, 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유심히 살펴본 뒤, 다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만히 서 있어. 움직이지 말고."
휘영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낮게 깔리고, 다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거 있는데, 휘영이 다가와 다은의 머리 꼭대기에 침을 놓고 있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괜스레 겁먹은 다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지만, 휘영은 무심하게 두 번째 침을 들고 와서 다은의 미간에 꽂고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 침은 목과 가슴 사이에 놓았고, 잠시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됐네. 기의 흐름이 바뀌고 있어. 잠깐만 그대로 있어."
이어 다은이 뭔가 물어보려고 하자, 휘영이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쉿~ 말하면 안 돼. 가만히... 꼼짝 말고 있어. 까딱 잘못하면 기혈이 뒤틀려서 죽어... 아참, 이미 죽었던가? 가만있어보자."
갑자기 휘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죽었는데... 기가 흐르나? 그럼 흡혈귀가 되었다고 해도 죽었다고 말할 수 없는 건가? 뭐지?"
그때였다. 돌연 휘영 뒤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일어나더니 늑대 머리에 사람 몸을 한 거무스름한 형상으로 변하였다.
이를 본 다은의 두 눈이 그만큼 커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휘둥그레졌지만, 휘영은 태연할 뿐이었다.
"놀라지 마... 그냥 기생충이야."
휘영은 별일 아니란 듯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고, 모습을 드러낸 산은 특유의 음산한 웃음소리를 냈다.
- 크흐흐흐, 네놈의 머리를 씹어먹는 그날, 이 지겨운 기생의 운명도 끝을 보겠지.
"왜 나왔어? 손님 놀라게..."
휘영은 산이 하는 말에 관심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 네놈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하도 기가 차서 말이야. 네놈이나 저 계집애나,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은 매 한 가지인데 말이지.
휘영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저주 그 자체인 네가... 어쩌면 이 아가씨의 상태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겠네? 아닌가?"
그러더니 꽤나 무시 어린 시선으로 산을 보며 말했다.
"뭐 아는 게 있긴 하던가?"
- 크크크, 그 밥맛 떨어지는 목소리로 비명 지를 날을 기대하마. 물론 잘 알지. 흡혈귀도 결국 피의 저주... 나와 유사한 면이 있지. 저주에 걸렸다곤 하지만, 그 근본은 여전히 인간. 네놈이 저 계집애의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뚫어주려 한 것은, 꽤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휘영이 다시 다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저주에 걸린 육신 치고는 기의 흐름이 너무 좋았어. 임독양맥(任督兩脈)도 태어날 때 그대로라고 할 만큼 맑은 상태였으니까."
말을 하며 다은에게 다가선 휘영은 다은의 두 눈을 유심히 살폈다.
다은은 자기 바로 코앞에서 휘영이 자신의 두 눈을 응시하니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뭐 하는 거냐고 소리라도 질러야 할 테지만,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니 큰 눈만 껌뻑 거리며 있을 뿐이었다.
"다 됐네."
휘영이 돌연 그렇게 말하고는 다은의 몸에 꽃은 침을 순식간에 빼내갔다.
그는 깨끗한 천 하나를 서랍에서 꺼내 들어 침을 닦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목함에 집어넣었고, 그 모습을 보며 다은이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움직이고는 물었다.
"이제... 움직여도 되는 건가요?"
"응. 어때? 개운하지?"
휘영의 물음에 다은은 몸을 움직여 보았다.
과연, 이전과는 달리 몸이 꽤나 가볍게 느껴졌고, 흡혈귀가 된 이후로 느껴졌던 우울하고 음습한 기분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네... 아주..."
문득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독특한 기운과 더불어, 그녀의 눈에 익숙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신안(神眼)이 돌아왔어요. 신께서..."
다은이 놀라 말하다 말고 말끝을 흐리자, 휘영이 목함을 다시 제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네가 가지고 있던 능력 대부분은 원래 네 능력이야. 신이 빌려준 게 아니고, 신은 네게 네 능력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정도였어."
이어 다은을 돌아보며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흡혈귀가 되면서, 탁기(濁氣)로 인해 능력이 소실되자, 더 이상 네 존재가 필요 없게 돼서 신이 떠난 거야. 난 방금 네 생사현관을 뚫어 탁기를 몰아냈고, 그로 인해 네가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되면서 원래의 능력이 더욱 강력해진 거고."
말을 하며 휘영이 다은 앞으로 다가섰다.
"이제 몸에 기운이 강해져서, 네게 걸린 저주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게 될 거야. 그만큼 피에 대한 갈망이 줄어들고,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있어. 몸을 보호하는 강기(罡氣)로 인해 햇빛에 노출된다고 해서 타 죽거나 하진 않을 거야. 다만 조심할 게 있어."
다은이 눈빛을 반짝거리며 휘영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뭐죠?"
"네 기운이 약해지면 그 저주가 너 자신을 집어삼킬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너를 지켜주던 강기도 없어지게 될 거야. 기운이 약해졌을 땐, 여느 흡혈귀처럼 햇빛도 피해야 하고, 피에 대한 갈망도 경계해야 해."
다은이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네.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그때 산이 휘영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며 다은에게 말했다.
- 재밌군. 흡혈귀가 된 상태에서 환골탈태라니... 네놈과 놀랍도록 비슷한 운명을 만들어 버렸구나.
다은은 그런 산을 보고는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아볼 수 있어요. 당신은... 저주 그 자체군요."
다은의 말에 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 그래, 영안(靈眼)을 넘어 신안을 얻었으니, 나를 알아보는 모양이구나. 맞다. 나는 죽음의 저주다. 오롯이 이놈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지.
그러더니 자신의 목에 뭔가를 움켜잡는데, 잡고 보니 그것은 쇠사슬 같은 형태였다.
산은 자신의 목에 채워진 쇠사슬을 움켜쥔 체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 안타깝게도... 저주 그 자체인 나에게 또 다른 저주가 씌웠으니... 저놈의 목숨줄을 내 손에 거머쥔 체로, 저놈을 죽일 수 없는 저주에 걸렸구나. 크흐흐흐
산은 실성한 듯 웃어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은이 놀란 눈으로 그런 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산이 사라지고 난 뒤에 휘영을 보며 말했다.
"그게.. 가능한 건가요? 저주에 저주를 건다는 게?"
휘영은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꽤 뛰어난 무녀(巫女)였던가, 아니면 처음부터 이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하여튼 그녀는 내게 걸린 죽음의 저주를 형상화했고, 형상화된 죽음의 저주, 그 자체에 다시 저주를 걸었지. 날 죽일 수 없도록. 그래서 내 목숨줄을 가진 사신(死神)이 날 죽일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리는 바람에,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체로 살아왔지."
다은은 여전히 놀랍다는 듯한 표정으로 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굉장하네요. 어때요? 불멸의 삶을 산다는 건...?"
휘영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너도 살아보면 알게 될 거야."
휘영의 말에 다은은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불멸이라든가, 불사신이 되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해봤었는데... 어쩐지 그리 기쁜 것 같지는 않네요."
"어떤 면에서는 지독한 저주고, 어떤 면에서는 신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
휘영은 보고 있던 책을 덮어 책장에 꼽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한 건... 타인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거야."
휘영의 말에 다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휘영이 그런 다은을 돌아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와 가까웠던, 혹은 친했던 그 누군가가, 늙고, 병들고, 그렇게 변해가고, 또 죽고, 사라지고, 잊혀지고..."
어쩐지 씁쓸하게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다은은 처음으로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휘영은 한숨을 천천히 내쉬며, 지난날을 회상하듯 회한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렇게 한 명 두 명 세명, 곁에 있던 이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나니, 또 다른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게... 두렵게 느껴지곤 했어. 때론 나로 인한 죽음도 보았고, 나와 무관한 죽음도 보았지만, 어느 쪽이든 죽음이란 건, 똑같이 무겁다는 걸 알았지."
그러자 다은이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아버지 장례 모두 제가 치렀거든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다은의 말에 휘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히 그런 게 아냐. 누군가의 죽음이 슬프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게 아니야."
휘영의 말에 다은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다은을 보며, 휘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알던, 그 시간대의 모든 사람이 죽고 나면... 마치 내 시대가 저물어 버린 듯한 기분이 들지. 그 모두가 죽고 나면... 나 홀로 남겨진 기분, 나 혼자 떠나지 못한 기분이 들곤 했어. 내가 알던 세상이 사라져 버린 기분 말이야. 그렇게 도시가 생겨나고, 기계가 생겨나고, 스마트폰이 생겨났지. 한시대가 저물 때마다 세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어."
문득 휘영이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았다. 그만 나가봐. 커피 고마워."
갑자기 휘영이 태도를 바꾸자, 다은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휘영은 다은이 나가자마자 방문을 닫고서, 그 방문에 기댄 채 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는 거냐... 멍청아..."
문에 기댄 채, 휘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슬며시 방문을 열고 고개 먼저 빼꼼히 들이밀자, 돌아보지도 않은 체 책상에 앉아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휘영의 넓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 드시고 하세요."
다은이 다가와 책상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보니, 꽤나 두꺼운 책에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쓰여있는 게 보였다.
"범어네요?"
다은이 글자를 알아보자, 휘영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볼 줄 알아?"
"조금은요."
그러더니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아직 신을 모시고 있었다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쉬워하는 다은을, 휘영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금 뭘 하려고 하는 건지는 알아?"
휘영의 질문에 다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흔술(靈痕術)같은거 아닌가요?"
"맞아."
"저도 해본 적 있어요."
휘영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단순한 무당인 줄 알았더니? 주술도 제법이네?"
말을 하며 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고 느낀 다은이 얼른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 다은을 주시하며 휘영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자, 괜히 머쓱해진 다은이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왜..., 왜요?"
"어쩌면... 효과가 있을 지도..."
알아듣기 힘든 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서랍을 열어 검은색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서 작은 나무 함을 꺼냈는데, 함의 표면에도 아까 책에서 보았던 범어 글자가 써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함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붉은 천 위에 곱게 놓여있는 금빛 침 세 개가 보였다.
"침이네요?"
침을 알아본 다은의 말에, 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유심히 살펴본 뒤, 다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만히 서 있어. 움직이지 말고."
휘영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낮게 깔리고, 다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거 있는데, 휘영이 다가와 다은의 머리 꼭대기에 침을 놓고 있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괜스레 겁먹은 다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지만, 휘영은 무심하게 두 번째 침을 들고 와서 다은의 미간에 꽂고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 침은 목과 가슴 사이에 놓았고, 잠시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됐네. 기의 흐름이 바뀌고 있어. 잠깐만 그대로 있어."
이어 다은이 뭔가 물어보려고 하자, 휘영이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쉿~ 말하면 안 돼. 가만히... 꼼짝 말고 있어. 까딱 잘못하면 기혈이 뒤틀려서 죽어... 아참, 이미 죽었던가? 가만있어보자."
갑자기 휘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죽었는데... 기가 흐르나? 그럼 흡혈귀가 되었다고 해도 죽었다고 말할 수 없는 건가? 뭐지?"
그때였다. 돌연 휘영 뒤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일어나더니 늑대 머리에 사람 몸을 한 거무스름한 형상으로 변하였다.
이를 본 다은의 두 눈이 그만큼 커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휘둥그레졌지만, 휘영은 태연할 뿐이었다.
"놀라지 마... 그냥 기생충이야."
휘영은 별일 아니란 듯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고, 모습을 드러낸 산은 특유의 음산한 웃음소리를 냈다.
- 크흐흐흐, 네놈의 머리를 씹어먹는 그날, 이 지겨운 기생의 운명도 끝을 보겠지.
"왜 나왔어? 손님 놀라게..."
휘영은 산이 하는 말에 관심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 네놈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하도 기가 차서 말이야. 네놈이나 저 계집애나,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은 매 한 가지인데 말이지.
휘영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저주 그 자체인 네가... 어쩌면 이 아가씨의 상태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겠네? 아닌가?"
그러더니 꽤나 무시 어린 시선으로 산을 보며 말했다.
"뭐 아는 게 있긴 하던가?"
- 크크크, 그 밥맛 떨어지는 목소리로 비명 지를 날을 기대하마. 물론 잘 알지. 흡혈귀도 결국 피의 저주... 나와 유사한 면이 있지. 저주에 걸렸다곤 하지만, 그 근본은 여전히 인간. 네놈이 저 계집애의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뚫어주려 한 것은, 꽤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휘영이 다시 다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저주에 걸린 육신 치고는 기의 흐름이 너무 좋았어. 임독양맥(任督兩脈)도 태어날 때 그대로라고 할 만큼 맑은 상태였으니까."
말을 하며 다은에게 다가선 휘영은 다은의 두 눈을 유심히 살폈다.
다은은 자기 바로 코앞에서 휘영이 자신의 두 눈을 응시하니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뭐 하는 거냐고 소리라도 질러야 할 테지만,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니 큰 눈만 껌뻑 거리며 있을 뿐이었다.
"다 됐네."
휘영이 돌연 그렇게 말하고는 다은의 몸에 꽃은 침을 순식간에 빼내갔다.
그는 깨끗한 천 하나를 서랍에서 꺼내 들어 침을 닦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목함에 집어넣었고, 그 모습을 보며 다은이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움직이고는 물었다.
"이제... 움직여도 되는 건가요?"
"응. 어때? 개운하지?"
휘영의 물음에 다은은 몸을 움직여 보았다.
과연, 이전과는 달리 몸이 꽤나 가볍게 느껴졌고, 흡혈귀가 된 이후로 느껴졌던 우울하고 음습한 기분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네... 아주..."
문득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독특한 기운과 더불어, 그녀의 눈에 익숙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신안(神眼)이 돌아왔어요. 신께서..."
다은이 놀라 말하다 말고 말끝을 흐리자, 휘영이 목함을 다시 제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네가 가지고 있던 능력 대부분은 원래 네 능력이야. 신이 빌려준 게 아니고, 신은 네게 네 능력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정도였어."
이어 다은을 돌아보며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흡혈귀가 되면서, 탁기(濁氣)로 인해 능력이 소실되자, 더 이상 네 존재가 필요 없게 돼서 신이 떠난 거야. 난 방금 네 생사현관을 뚫어 탁기를 몰아냈고, 그로 인해 네가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되면서 원래의 능력이 더욱 강력해진 거고."
말을 하며 휘영이 다은 앞으로 다가섰다.
"이제 몸에 기운이 강해져서, 네게 걸린 저주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게 될 거야. 그만큼 피에 대한 갈망이 줄어들고,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있어. 몸을 보호하는 강기(罡氣)로 인해 햇빛에 노출된다고 해서 타 죽거나 하진 않을 거야. 다만 조심할 게 있어."
다은이 눈빛을 반짝거리며 휘영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뭐죠?"
"네 기운이 약해지면 그 저주가 너 자신을 집어삼킬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너를 지켜주던 강기도 없어지게 될 거야. 기운이 약해졌을 땐, 여느 흡혈귀처럼 햇빛도 피해야 하고, 피에 대한 갈망도 경계해야 해."
다은이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네.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그때 산이 휘영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며 다은에게 말했다.
- 재밌군. 흡혈귀가 된 상태에서 환골탈태라니... 네놈과 놀랍도록 비슷한 운명을 만들어 버렸구나.
다은은 그런 산을 보고는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아볼 수 있어요. 당신은... 저주 그 자체군요."
다은의 말에 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 그래, 영안(靈眼)을 넘어 신안을 얻었으니, 나를 알아보는 모양이구나. 맞다. 나는 죽음의 저주다. 오롯이 이놈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지.
그러더니 자신의 목에 뭔가를 움켜잡는데, 잡고 보니 그것은 쇠사슬 같은 형태였다.
산은 자신의 목에 채워진 쇠사슬을 움켜쥔 체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 안타깝게도... 저주 그 자체인 나에게 또 다른 저주가 씌웠으니... 저놈의 목숨줄을 내 손에 거머쥔 체로, 저놈을 죽일 수 없는 저주에 걸렸구나. 크흐흐흐
산은 실성한 듯 웃어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은이 놀란 눈으로 그런 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산이 사라지고 난 뒤에 휘영을 보며 말했다.
"그게.. 가능한 건가요? 저주에 저주를 건다는 게?"
휘영은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꽤 뛰어난 무녀(巫女)였던가, 아니면 처음부터 이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하여튼 그녀는 내게 걸린 죽음의 저주를 형상화했고, 형상화된 죽음의 저주, 그 자체에 다시 저주를 걸었지. 날 죽일 수 없도록. 그래서 내 목숨줄을 가진 사신(死神)이 날 죽일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리는 바람에,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체로 살아왔지."
다은은 여전히 놀랍다는 듯한 표정으로 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굉장하네요. 어때요? 불멸의 삶을 산다는 건...?"
휘영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너도 살아보면 알게 될 거야."
휘영의 말에 다은은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불멸이라든가, 불사신이 되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해봤었는데... 어쩐지 그리 기쁜 것 같지는 않네요."
"어떤 면에서는 지독한 저주고, 어떤 면에서는 신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
휘영은 보고 있던 책을 덮어 책장에 꼽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한 건... 타인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거야."
휘영의 말에 다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휘영이 그런 다은을 돌아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와 가까웠던, 혹은 친했던 그 누군가가, 늙고, 병들고, 그렇게 변해가고, 또 죽고, 사라지고, 잊혀지고..."
어쩐지 씁쓸하게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다은은 처음으로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휘영은 한숨을 천천히 내쉬며, 지난날을 회상하듯 회한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렇게 한 명 두 명 세명, 곁에 있던 이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나니, 또 다른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게... 두렵게 느껴지곤 했어. 때론 나로 인한 죽음도 보았고, 나와 무관한 죽음도 보았지만, 어느 쪽이든 죽음이란 건, 똑같이 무겁다는 걸 알았지."
그러자 다은이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아버지 장례 모두 제가 치렀거든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다은의 말에 휘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히 그런 게 아냐. 누군가의 죽음이 슬프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게 아니야."
휘영의 말에 다은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다은을 보며, 휘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알던, 그 시간대의 모든 사람이 죽고 나면... 마치 내 시대가 저물어 버린 듯한 기분이 들지. 그 모두가 죽고 나면... 나 홀로 남겨진 기분, 나 혼자 떠나지 못한 기분이 들곤 했어. 내가 알던 세상이 사라져 버린 기분 말이야. 그렇게 도시가 생겨나고, 기계가 생겨나고, 스마트폰이 생겨났지. 한시대가 저물 때마다 세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어."
문득 휘영이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았다. 그만 나가봐. 커피 고마워."
갑자기 휘영이 태도를 바꾸자, 다은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휘영은 다은이 나가자마자 방문을 닫고서, 그 방문에 기댄 채 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는 거냐... 멍청아..."
문에 기댄 채, 휘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