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8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으로는 사진 두장을 든 체, 병원 복도 벽에 기대 서 있는 시현은, 남이 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사진 속 차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흐릿하지만 차량 번호를 식별할 수는 있을 정도였다.
다른 사진으로 시선을 넘기니, 거기에는 차에 타기 전 한 남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그때 큰 병실 문이 열리고 의사 한 명이 안에서 마스크를 쓴 체 걸어 나왔다.
이 모습을 본 시현이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황 박사."
자신을 부르는 시현을 본 의사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 이게 누구야? 송반장 아냐?"
"아, 이 사람아, 언제 적 얘기야?"
시현이 떠는 너스레에 황 박사는 장난기로 받아쳤다.
"나한테는 영원한 반장이지 뭐, 웬일이야? 부검 결과 보냈을 텐데?"
"아, 그냥... 황 박사랑 커피 한잔 할까 싶어서."
"커피? 커피는 무슨... 뭐야? 빨리 말해. 나 바빠."
"바쁘면 뭐... 잠깐 병원 한 바퀴 돌면서 얘기나 좀 할까?"
"이 사람... 실없는 건 여전하구만."
황 박사의 장난스러운 구박에, 시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가 먼저 걸어가니, 시현이 옆으로 따라붙어 걸으며 말했다.
"알다시피... 이제 내가 현장 뛸 나이는 지났잖아."
그러자 황 박사가 웃는 얼굴로 투정 부리듯 말했다.
"나도 아직 현역인데, 뭐가 얼마나 힘들다고 벌써 나이 운운이야? 배가 불렀어."
"배가 부르긴... 뛰어도 이제 범인을 못 잡아."
"언젠 뭐 범인을 잡아서 뛰었나? 잡든 못 잡든 일단 뛰고 보는 거지."
시현은 활짝 웃음 지어 보였다.
"이 사람이, 나보다 더 경찰을 잘 아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아. 부검의한게 몇 년인데... 뜸 들이지 말고 얼른 얘기해. 병원 한 바퀴 금방이야."
"알았어. 시골 내려가서 살려고 하다 보니, 뭐 먹고살게 있어야지. 동네 경찰일이나 도울까 싶은데 민폐가 될 것도 같고..."
"잘 아네."
"그래서... 그동안 경험을 토대로 소설이나 써볼까 싶은데..."
"소설? 뭐... 괜찮네. 근데... 글은 쓸 줄 알고?"
"하~!, 황 박사? 몰랐어? 내가 소싯적에 소설가가 꿈이었어."
"아, 그러셨어? 언제 적? 40년 전?"
황 박사의 비아냥에도 시현은 그냥 웃어넘기며 대답했다.
"아, 어쨌든. 그래서 소재를 좀 찾아보고 있는데 말이야... 순수하게 법의학자로써 의견이 궁금한 게 있어서."
"많이도 돌아왔다. 뭐야? 빨리 물어봐."
"그게... 흡혈귀이란 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건가?"
난데없는 시현의 질문에, 돌연 황 박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황 박사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니, 시현도 움찔 놀라 해 하며 따라 멈췄고, 황 박사는 멈춰 서서 시현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돌아보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시현은 괜스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경험을 토대로 쓴다더니, 추리 소설이 아니라 공포 소설이었어?"
황 박사의 물음에, 시현이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니 그냥 소재를 찾다 보니까, 소설로 쓸려면 좀 특별해야 하잖아... 흡혈귀가 실제로 가능하다면 좀 재밌을까 싶어서..."
"재밌긴... 흡혈귀 나오는 소설이 어디 한 두 갠가?"
"아니 그러니까... 법의학자로써의 의견을 묻는 거잖아."
"의견은 개뿔... 자동차 정비소 가서 항공기 엔진에 대해 묻는 거랑 뭐가 달라?"
"그런가?"
시현이 머쓱해하니, 그런 시현을 흘겨보던 황 박사가 기억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거, 뭐...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흡혈귀였을지도 모를 사람들에 대한 의혹들은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뭐... 의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해볼 만한 꺼리가 아니라서... 나도 세세한 건 잘 모르겠고. 뱀파이어의 일부 특징들이 의학적인 관점에서 다뤄진 적은 있지. 정말 궁금한 게 뭐야? 소설 핑계 대지 말고, 진짜로 궁금한 걸 물어봐야 제대로 대답을 해줄 거 아냐?"
시현의 본심을 꿰뚫어 본 황 박사의 질문에, 시현은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이던 시현이 결심한 듯 다시 물었다.
"사람이 30년 넘게 하나도 늙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나?"
"30년? 좀 길다. 글세... 내가 피부과는 아니라서 정확한 답변은 안될지 모르겠지만, 잘 관리하고 신경 쓰면, 늙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순 있겠지. 화장까지 하면 더더욱 그렇고."
"어느 날 말이야... 내가 30년 전에 놓친 범인을 봤는데... 30년 전이랑 바뀐 게 하나도 없다면?"
시현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묻는 말에, 황 박사는 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안과에 가야지. 시력이 문제야."
그 말을 남기고는 다시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자, 시현은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고는 얼른 황 박사를 뒤따랐다.
"적당히 관리 잘하고, 화장까지 해서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거지?"
"여자야?"
확인하듯 묻는 시현의 물음에, 황 박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남자."
"그럼 안돼."
"왜?"
"30년 전 그 사람... 화장했어?"
황 박사의 물음에 시현은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느지막이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남자라며?"
"그렇지."
"30년 전에 화장을 안 했는데, 어떻게 이제와 화장한 모습과 똑같겠어? 화장하는 순간, 얼굴이 달라져. 화장을 했는데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럼 늙은 티가 나겠지. 그러니까 30년 전에 본 남자가 근래에 본 남자와 똑같아 보이려면, 적어도 30년 전에도 화장을 했었어야지."
그러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춰서 시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 때문에 묻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하지 마라."
"뭘?"
"그게 뭐든. 그냥 하지 마. 차라리 소설을 써. 그게 낫겠다."
그 말을 남기고는 황 박사는 돌아서서 다시 걸어가며 말했다.
"나 바빠, 물어볼 거 더 있으면 다음에 물어보든가."
시현은 그런 황 박사의 말에 더 이상 그의 뒤를 쫓지 않았다.
"고마워."
뒤에 대고 아쉬운 듯 인사를 건네보지만, 황 박사는 돌아보지도, 대답도 하지 않은 체 걸어가는 그대로 손만 들어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시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다시 사진을 꺼내 보았다.
사진 속에 흐릿한 남자를 보던 시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
불이 켜지고 난장판이 된 집안 모습이 보이자, 휘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파손된 집기와 핏자국이 널려 있고, 방문은 모두 열린 체였다.
이곳저곳에 놓인 무구들과 독특한 벽그림 들만 봐도, 이곳이 평범한 가정집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휘영의 뒤로 뒤따라 온 다은은 집 열쇠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그날... 그 사람 때문에 이 지경이 된 이후로... 저도 처음 와요."
이곳은 바로 다은의 신당이었다.
"최대한 기억을 살려서, 구체적으로 설명해봐."
허스키한 휘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고, 다은은 문쪽부터 집 안쪽까지 시선을 훑으며 말했다.
"그냥... 어느 날과 똑같이, 손님을 받고 있었어요. 그도 손님인양 들어왔었구요. 그런데... 이상했어요. 묘한 기운, 알 수 없는 이질감... 그때 신의 경고를 받았어요. 위험하다고."
이어 자기가 점을 보던 자리로 향했는데, 병풍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부채까지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방에 들어섰다.
"자기 운세를 보러 왔다면서 말을 건네 왔는데... 제가 나가라고 소리 지르니까, 태도가 변했어요. 눈빛이..."
그때를 생각하며 소름 끼치는 듯, 몸서리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다 제게 덤벼들었어요. 목덜미를 물려고 했지만, 제가 손을 들어 막았죠."
다은은 소매를 걷어 자신의 팔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이빨 자국 4개가 흉터처럼 남아있었다.
"무도(巫刀)로 베려했지만, 베어지지 않았어요. 급히 부적을 날려봐도, 부적이 효력이 없었죠. 그가 저를 다시 물려고 했을 때, 전 강신술(降神術)로 제 몸을 보호했어요. 더 이상 저를 해칠 수 없다는 걸을 눈치채고는 도망가 버렸죠."
다은의 이야기를 다 들은 휘영의 시선이 다은에게로 향하며 물었다.
"그리고?"
다은 역시 휘영을 바라보며 뭔가 갈등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 상태에서 그냥 흡혈귀가 되지는 않을 텐데? 누구 피를 마신 거야?"
휘영의 질문에 다은의 표정에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따라온 슬픔이 그녀의 눈가에 가 눈물로 맺히고, 그녀는 담아뒀던 말을 간신히 꺼냈다.
"용이.... 제가 키우던 개였어요."
다은의 시선이 작은 방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차마 그쪽으로 가지 못한 체 다시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땐... 몰랐어요... 그 욕망... 갈망... 그게 절 집어삼키게 될 거라고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용이가 죽은 뒤였고... 신조차 제게서 떠나간 뒤였어요."
"그래서... 자신이 흡혈귀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 그 길로 성당으로 향한 건가?"
다은은 대답 대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휘영도 더 이상 그때 일을 묻지 않았다.
난장판이 된 방안을 유심히 살피던 휘영은 문득 문 앞에 있는 검은색 천 쪼가리를 보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유심히 살폈다.
조심스럽게 천 쪼가리를 집어 들고 살피자, 이를 알아본 다은이 말했다.
"아... 그때 제 무도에 베여 잘려나간 그자의 옷가지 같아요. 남청색 옷을 입고 있었어요."
어두워서 검은색으로 보였지만, 불빛에 비춰보니 남청색이 확실히 드러났다.
"잘 됐네."
예의 무심한 휘영의 말에, 다은이 그를 보며 물었다.
"이걸로... 뭘 할 수 있는 거죠?"
"그놈을 찾을 수 있지."
"어떻게요?"
휘영은 품 안에서 투명한 위생봉투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담아 밀봉한 뒤 주머니 안에 갈무리 하며 대답했다.
"어떻게든."
그러고는 휘적휘적 방을 나서 바깥으로 향했고, 다은은 그런 휘영의 뒤를 쫓아 걸었다.
집 밖으로 나온 휘영은, 낡은 상가 건물 주위를 살폈다.
인근에 건물들도 하나같이 낡은 건물들 뿐인, 오래된 구시가지였고, 저 멀리 높은 고층 아파트가 보이는 동네였다.
약간 경사진 언덕길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도심지 치고는 한산한 분위기였다.
"좋네. 지대가 높아서 한눈에 다 보이네."
휘영의 말에 다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길 아래로 펼쳐진 동네 풍경을 감상했다.
"네. 오르내리긴 좀 힘들어도... 보이는 풍경은 좋은 동네죠."
이어 휘영의 시선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면도로 위로 설치된 과속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작동하는 거면 좋겠는데... 그자가 찾아왔던 날이 정확히 며칠인지 기억해?"
휘영의 물음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다은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기억해요."
"잘됐네. 가자."
휘영이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다은이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그의 시선은 사진 속 차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흐릿하지만 차량 번호를 식별할 수는 있을 정도였다.
다른 사진으로 시선을 넘기니, 거기에는 차에 타기 전 한 남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그때 큰 병실 문이 열리고 의사 한 명이 안에서 마스크를 쓴 체 걸어 나왔다.
이 모습을 본 시현이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황 박사."
자신을 부르는 시현을 본 의사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 이게 누구야? 송반장 아냐?"
"아, 이 사람아, 언제 적 얘기야?"
시현이 떠는 너스레에 황 박사는 장난기로 받아쳤다.
"나한테는 영원한 반장이지 뭐, 웬일이야? 부검 결과 보냈을 텐데?"
"아, 그냥... 황 박사랑 커피 한잔 할까 싶어서."
"커피? 커피는 무슨... 뭐야? 빨리 말해. 나 바빠."
"바쁘면 뭐... 잠깐 병원 한 바퀴 돌면서 얘기나 좀 할까?"
"이 사람... 실없는 건 여전하구만."
황 박사의 장난스러운 구박에, 시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가 먼저 걸어가니, 시현이 옆으로 따라붙어 걸으며 말했다.
"알다시피... 이제 내가 현장 뛸 나이는 지났잖아."
그러자 황 박사가 웃는 얼굴로 투정 부리듯 말했다.
"나도 아직 현역인데, 뭐가 얼마나 힘들다고 벌써 나이 운운이야? 배가 불렀어."
"배가 부르긴... 뛰어도 이제 범인을 못 잡아."
"언젠 뭐 범인을 잡아서 뛰었나? 잡든 못 잡든 일단 뛰고 보는 거지."
시현은 활짝 웃음 지어 보였다.
"이 사람이, 나보다 더 경찰을 잘 아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아. 부검의한게 몇 년인데... 뜸 들이지 말고 얼른 얘기해. 병원 한 바퀴 금방이야."
"알았어. 시골 내려가서 살려고 하다 보니, 뭐 먹고살게 있어야지. 동네 경찰일이나 도울까 싶은데 민폐가 될 것도 같고..."
"잘 아네."
"그래서... 그동안 경험을 토대로 소설이나 써볼까 싶은데..."
"소설? 뭐... 괜찮네. 근데... 글은 쓸 줄 알고?"
"하~!, 황 박사? 몰랐어? 내가 소싯적에 소설가가 꿈이었어."
"아, 그러셨어? 언제 적? 40년 전?"
황 박사의 비아냥에도 시현은 그냥 웃어넘기며 대답했다.
"아, 어쨌든. 그래서 소재를 좀 찾아보고 있는데 말이야... 순수하게 법의학자로써 의견이 궁금한 게 있어서."
"많이도 돌아왔다. 뭐야? 빨리 물어봐."
"그게... 흡혈귀이란 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건가?"
난데없는 시현의 질문에, 돌연 황 박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황 박사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니, 시현도 움찔 놀라 해 하며 따라 멈췄고, 황 박사는 멈춰 서서 시현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돌아보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시현은 괜스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경험을 토대로 쓴다더니, 추리 소설이 아니라 공포 소설이었어?"
황 박사의 물음에, 시현이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니 그냥 소재를 찾다 보니까, 소설로 쓸려면 좀 특별해야 하잖아... 흡혈귀가 실제로 가능하다면 좀 재밌을까 싶어서..."
"재밌긴... 흡혈귀 나오는 소설이 어디 한 두 갠가?"
"아니 그러니까... 법의학자로써의 의견을 묻는 거잖아."
"의견은 개뿔... 자동차 정비소 가서 항공기 엔진에 대해 묻는 거랑 뭐가 달라?"
"그런가?"
시현이 머쓱해하니, 그런 시현을 흘겨보던 황 박사가 기억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거, 뭐...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흡혈귀였을지도 모를 사람들에 대한 의혹들은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뭐... 의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해볼 만한 꺼리가 아니라서... 나도 세세한 건 잘 모르겠고. 뱀파이어의 일부 특징들이 의학적인 관점에서 다뤄진 적은 있지. 정말 궁금한 게 뭐야? 소설 핑계 대지 말고, 진짜로 궁금한 걸 물어봐야 제대로 대답을 해줄 거 아냐?"
시현의 본심을 꿰뚫어 본 황 박사의 질문에, 시현은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이던 시현이 결심한 듯 다시 물었다.
"사람이 30년 넘게 하나도 늙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나?"
"30년? 좀 길다. 글세... 내가 피부과는 아니라서 정확한 답변은 안될지 모르겠지만, 잘 관리하고 신경 쓰면, 늙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순 있겠지. 화장까지 하면 더더욱 그렇고."
"어느 날 말이야... 내가 30년 전에 놓친 범인을 봤는데... 30년 전이랑 바뀐 게 하나도 없다면?"
시현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묻는 말에, 황 박사는 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안과에 가야지. 시력이 문제야."
그 말을 남기고는 다시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자, 시현은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고는 얼른 황 박사를 뒤따랐다.
"적당히 관리 잘하고, 화장까지 해서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거지?"
"여자야?"
확인하듯 묻는 시현의 물음에, 황 박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남자."
"그럼 안돼."
"왜?"
"30년 전 그 사람... 화장했어?"
황 박사의 물음에 시현은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느지막이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남자라며?"
"그렇지."
"30년 전에 화장을 안 했는데, 어떻게 이제와 화장한 모습과 똑같겠어? 화장하는 순간, 얼굴이 달라져. 화장을 했는데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럼 늙은 티가 나겠지. 그러니까 30년 전에 본 남자가 근래에 본 남자와 똑같아 보이려면, 적어도 30년 전에도 화장을 했었어야지."
그러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춰서 시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 때문에 묻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하지 마라."
"뭘?"
"그게 뭐든. 그냥 하지 마. 차라리 소설을 써. 그게 낫겠다."
그 말을 남기고는 황 박사는 돌아서서 다시 걸어가며 말했다.
"나 바빠, 물어볼 거 더 있으면 다음에 물어보든가."
시현은 그런 황 박사의 말에 더 이상 그의 뒤를 쫓지 않았다.
"고마워."
뒤에 대고 아쉬운 듯 인사를 건네보지만, 황 박사는 돌아보지도, 대답도 하지 않은 체 걸어가는 그대로 손만 들어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시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다시 사진을 꺼내 보았다.
사진 속에 흐릿한 남자를 보던 시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
불이 켜지고 난장판이 된 집안 모습이 보이자, 휘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파손된 집기와 핏자국이 널려 있고, 방문은 모두 열린 체였다.
이곳저곳에 놓인 무구들과 독특한 벽그림 들만 봐도, 이곳이 평범한 가정집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휘영의 뒤로 뒤따라 온 다은은 집 열쇠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그날... 그 사람 때문에 이 지경이 된 이후로... 저도 처음 와요."
이곳은 바로 다은의 신당이었다.
"최대한 기억을 살려서, 구체적으로 설명해봐."
허스키한 휘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고, 다은은 문쪽부터 집 안쪽까지 시선을 훑으며 말했다.
"그냥... 어느 날과 똑같이, 손님을 받고 있었어요. 그도 손님인양 들어왔었구요. 그런데... 이상했어요. 묘한 기운, 알 수 없는 이질감... 그때 신의 경고를 받았어요. 위험하다고."
이어 자기가 점을 보던 자리로 향했는데, 병풍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부채까지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방에 들어섰다.
"자기 운세를 보러 왔다면서 말을 건네 왔는데... 제가 나가라고 소리 지르니까, 태도가 변했어요. 눈빛이..."
그때를 생각하며 소름 끼치는 듯, 몸서리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다 제게 덤벼들었어요. 목덜미를 물려고 했지만, 제가 손을 들어 막았죠."
다은은 소매를 걷어 자신의 팔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이빨 자국 4개가 흉터처럼 남아있었다.
"무도(巫刀)로 베려했지만, 베어지지 않았어요. 급히 부적을 날려봐도, 부적이 효력이 없었죠. 그가 저를 다시 물려고 했을 때, 전 강신술(降神術)로 제 몸을 보호했어요. 더 이상 저를 해칠 수 없다는 걸을 눈치채고는 도망가 버렸죠."
다은의 이야기를 다 들은 휘영의 시선이 다은에게로 향하며 물었다.
"그리고?"
다은 역시 휘영을 바라보며 뭔가 갈등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 상태에서 그냥 흡혈귀가 되지는 않을 텐데? 누구 피를 마신 거야?"
휘영의 질문에 다은의 표정에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따라온 슬픔이 그녀의 눈가에 가 눈물로 맺히고, 그녀는 담아뒀던 말을 간신히 꺼냈다.
"용이.... 제가 키우던 개였어요."
다은의 시선이 작은 방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차마 그쪽으로 가지 못한 체 다시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땐... 몰랐어요... 그 욕망... 갈망... 그게 절 집어삼키게 될 거라고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용이가 죽은 뒤였고... 신조차 제게서 떠나간 뒤였어요."
"그래서... 자신이 흡혈귀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 그 길로 성당으로 향한 건가?"
다은은 대답 대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휘영도 더 이상 그때 일을 묻지 않았다.
난장판이 된 방안을 유심히 살피던 휘영은 문득 문 앞에 있는 검은색 천 쪼가리를 보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유심히 살폈다.
조심스럽게 천 쪼가리를 집어 들고 살피자, 이를 알아본 다은이 말했다.
"아... 그때 제 무도에 베여 잘려나간 그자의 옷가지 같아요. 남청색 옷을 입고 있었어요."
어두워서 검은색으로 보였지만, 불빛에 비춰보니 남청색이 확실히 드러났다.
"잘 됐네."
예의 무심한 휘영의 말에, 다은이 그를 보며 물었다.
"이걸로... 뭘 할 수 있는 거죠?"
"그놈을 찾을 수 있지."
"어떻게요?"
휘영은 품 안에서 투명한 위생봉투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담아 밀봉한 뒤 주머니 안에 갈무리 하며 대답했다.
"어떻게든."
그러고는 휘적휘적 방을 나서 바깥으로 향했고, 다은은 그런 휘영의 뒤를 쫓아 걸었다.
집 밖으로 나온 휘영은, 낡은 상가 건물 주위를 살폈다.
인근에 건물들도 하나같이 낡은 건물들 뿐인, 오래된 구시가지였고, 저 멀리 높은 고층 아파트가 보이는 동네였다.
약간 경사진 언덕길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도심지 치고는 한산한 분위기였다.
"좋네. 지대가 높아서 한눈에 다 보이네."
휘영의 말에 다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길 아래로 펼쳐진 동네 풍경을 감상했다.
"네. 오르내리긴 좀 힘들어도... 보이는 풍경은 좋은 동네죠."
이어 휘영의 시선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면도로 위로 설치된 과속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작동하는 거면 좋겠는데... 그자가 찾아왔던 날이 정확히 며칠인지 기억해?"
휘영의 물음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다은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기억해요."
"잘됐네. 가자."
휘영이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다은이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