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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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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7.28분

77화 - #1


궁궐을 쳐들어왔던 금위영 병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쓰러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얼떨떨해 했다.

수현은 서둘러 당황해하는 금위영 병사들을 수습하며 궁궐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같은 시간 전 예조판서인 홍소찬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딸 예령의 곁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눈을 떴다.

눈을 껌뻑 거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누워있는 예령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 예령아?"

놀란 홍소찬이 예령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더니, 이내 격앙된 목소리로 다시 불렀다.

"예령아? 정신이 드는 게냐? 예령아?"

그의 격앙된 목소리에, 바깥에 있던 부인이 무슨 일인가 하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니, 대감 무슨 일이길래..."

걱정스레 남편을 보던 그녀의 눈에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킨 예령의 모습이 들어오자, 놀라고 믿을 수 없어 자신이 잘못본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 눈을 몇번 깜빡거리다 이내 눈물을 흘리며 예령의 곁으로 달려갔다.

"예령아? 예령아? 정신이 드는 것이냐?"

어리둥절한 표정의 예령은 어찌 된 일인지 모르는 듯, 멍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기만했다.

홍소찬과 부인은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다.

"됐다, 됐어. 이제 깨어났으니 됐다. 이 못난 애비가 욕심을 부려 너를 깊은 잠에 들게 하였으나, 이제 하늘이 용서하신 모양이다."

멍하니 있던 예령이 홍소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송구하오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 이름이... 예령입니까?"

갑작스러운 예령의 말에 홍소찬과 부인은 잠시 당혹스런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다 이내 홍소찬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되었다. 되었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도, 차차 기억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리 일어난 것이 어디냐? 되었어."

홍소찬은 그렇게 말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예령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



쌀쌀한 가운데 햇살이 따사로워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날이었다.

의금부 한가운데 죄인 여러 명이 포승줄에 묶여 형틀에 앉아 있었고, 잠시 후 우렁찬 목소리가 의금부 안에 울려 퍼졌다.

"주상전하 납시오."

이어 임금이 모습을 드러내고, 임금 뒤로 세자와 수현이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임금이 준비된 자리에 앉고, 좌우로 세자와 수현이 서니, 의금부 판의금부사가 임금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뒤, 형틀에 묶여 있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죄인 들은 들으라."

판의금부사가 형틀에 묶여 있는 죄인들의 명단과 그들의 죄목에 대해 낭독하는 사이, 세자는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있었다.

좌상 최준경을 비롯해, 병판, 우상 등 나이가 가장 많고 실세가 없었던 영의정을 제외한 육조판서는 물론 대사헌 윤일호와 그의 아들 윤하령 외에도 곳곳에 포진해 있던 좌상의 친인척을 포함한 당여 40여 명이 이 자리에 잡혀 있었다.

그날의 판결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지막에 금위영의 병사들이 궁궐을 침입한 죄까지 물어, 역모죄를 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과거 억울하게 죽은 중전의 폐비를 폐하여 원복 시키고, 좌상을 포함한 중죄인들에게는 사형이, 그 외 직분이 낮거나 죄가 중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귀향이 내려졌다.

판결이 모두 끝나자 임금은 인사후 돌아서려는 세자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애비와 함께 좀 걷자."

"예, 아바마마."

임금이 걷고, 그 곁을 세자가 따라 걸어가자, 수현을 비롯한 내관들이 거리를 두며 뒤따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네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장하구나."

임금의 칭찬에 세자가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그래. 네가 이리 듬직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네가 참으로 바르게 커주었구나."

"송구하옵니다."

세자는 오랜만에 임금의 용안에서 편안하고 온화한 미소를 보는 것 같았다.

"내게 따로 바라는 것은 없느냐? 응당 네게 상을 주어야 마땅한 것 같구나."

"소자가 어찌 바라는 것이 있겠나이까."

"아니다, 말해 보거라. 상과 벌은 제때 주어야 하는 법이다."

잠시 망설이던 세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하오면, 소자가 생각해 보고 청을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래. 신중히 생각해 보거라. 허나, 너무 오래 걸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관련하여 상을 줄 자들을 정할 것이다."

"그리 하겠사옵니다."

"그래."

임금이 처소로 발걸음을 돌리자, 세자는 고개를 숙여 임금이 멀어질때까지 인사를 올리고 서 있었다.

잠시후 세자 곁으로 수현이 다가와 말했다.

"정신을 차렸다 하옵니다."

그의 말에 세자의 눈빛이 흔들거렸다.

"만나보실 것이옵니까?"

"그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것이다."

세자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수현이 따랐다.

세자가 향한 곳에는 몇몇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그곳에 이미 와 있던 소연이 세자를 보자 바로 서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어떠하냐?"

세자는 급한마음에 소연을 보자마자 상태부터 물어보았다.

소연이 답하기를 망설이자, 세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두 명의 경계병 너머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연희, 아니 세영이 서 있었다.

그녀를 보자 세자는 가슴이 울렁거리며 마음이 진정되지않았다.

세영은 들어선 세자를 보고는 황급히 앞으로 나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래.... 몸은... 어떠하냐?"

조심스럽게 묻는 세자의 물음에, 세영이 고개를 숙인 체 대답했다.

"불편하지 않사옵니다. 저하."

세자는 왠지 모르게 긴장되는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기억... 나는 것이... 있느냐?"

세자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어떤 괴한들에게 잡혀갔던 것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사옵니다."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소녀, 윤세영이라 하옵니다."

세자는 조금이나마 기대감을 갖고 설마설마했던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 다리가 풀릴 것만 같아 애써 힘을 주어 버티고 섰다.

"그래... 고개를 들어 나를 보거라."

윤세영은 세자의 말에 잠시 망설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연희의 얼굴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곁에서 보고 지내던 바로 그 연희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세자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연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눈 너머에, 느껴지는 그 무엇인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 여인이 겉모습은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세자의 영혼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 추스르는 대로 돌아가거라."

세자는 그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더 이상 그대로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잔혹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저하.."

수현이 뒤따르자, 세자가 손을 들며 말했다.

"오지 말거라. 지금은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

내관들까지 물린 세자는 망연자실 걷다가 어느새 우물가 인근까지 걸어와 있었다.

찬바람이 스산하게 우물가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고, 세자의 감은 두눈에 그리움을 담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픔에 젖어있는 세자를 위로하려는 듯, 하늘에서는 자그마한 눈꽃이 나풀거리듯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은 이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기 시작했다.

그 작은 우물가 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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