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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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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8.31분

79화 - #1


면류관을 쓴 세자는 푸른 비단옷을 입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적의를 입은 세자빈 홍예령이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눈빛을 하고 있는 세자의 시선은, 흡사 초점 없이 공허해 보였다.

그런 세자를 바라보는 홍예령의 눈빛은, 세자와는 다르게 어딘지 모르게 흥분되어 보였다.

너무 행복하지만 아닌척 애써 감추려 노력하나 겉으로 다 드러나보였고 세자를 바라보는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세자는 그런 홍예령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작은 의구심이 들었다.

'나를 언제 보았다고 저리 기뻐하는 것일까? 드디어 세자빈이 될 수 있어 그러한것인가? 언젠가 이 나라의 국모가 될거라는 바람에 한 없이 기쁜가보군..'

세자는 허탈감에 절로 씁슬한 웃음이 나왔다.

가슴속까지도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세자는 혼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는 체, 그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며 행사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모현례를 마치고, 세자빈과 함께 동궁전에 든 세자는 무의미한 절차들 속에서,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옵니까?"

문득 홍예령이 건네 오는 말에, 비로소 무의식 속에서 자신을 꺼내 든 세자는, 처음으로 제대로 홍예령을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분명하며 단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3년전 세자빈 간택때 잠시 보긴 했으나 특별히 눈길이 가거나 기억속에 남아있던 적은 없었다.

허나 어쩐지 홍예령의 눈빛이 꽤나 낯익게 느껴졌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소."

세자의 부정에 홍예령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하루 종일, 같은 표정이셨습니다."

홍예령의 말에 세자가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랬소? 궁중 행사라는 것이 늘 비슷비슷하다 보니, 내 지루함을 참을 길이 없어 그러했던가 보오. 그동안 병석에 있다가 일어난지 얼마 되지않아 힘들었을텐데.. 세자빈이 오늘 고생이 많았오 "

홍예령이 세자를 보며 물었다.

"저하 께옵서는, 이 혼례가 기쁘지 아니하신 모양이십니다."

걱정스러운 듯 묻는 홍예령을 보며 세자는 살짝 난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런 것은 아니오. 내 큰일을 치른 직후라 경황이 없어 그런 것이니, 세자빈은 괘념치 마시오."

홍예령은 기분이 좋은 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하셨다니, 다행이옵니다. 혹시나 소첩으로 인해 불편하셨을까 염려되었사옵니다."

세자는 왠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때문에 불편했다면 미안하오. 내 경황이 없었을 뿐이니... 큰 행사를 치르느라 피곤할 터인데, 어서 처소로 돌아가 편히 쉬도록 하시오."

그러자 세자빈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오나, 저하. 아직 혼례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처소로 돌아가라 하시옵니까?"

세자빈의 말에 세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혼례가 다 끝나지 않았다니? 무엇이 말이오? 내가 모르는 절차가 아직 남았단 말이오?"

세자의 물음에 세자빈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예, 아직 남았사옵니다. 일전에 저하께옵서 제게 약속하신 것이 있지 않으시옵니까?"

"약속? 세자빈이 쓰러지기 전에 내가 어떤 약속을 했단 말이오?"

"약속을 언제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하께옵서 분명 약속하셨습니다."

당황한 세자는 난처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내 어떤 약조를 하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소. 또다시 미안하게 되었소. 내 앞으로는 세자빈의 말을 새겨듣고 잊지 않을 터이니, 용서해 주고, 무슨 약조였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겠소?"

세자빈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빙그레 웃어 보였다.



***



방을 정리하던 중년 여인은 문득 이부자리 속에 있던 나무 조각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봉혼벽륜이었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봉혼벽륜을 들고 서 있으니, 홍소찬이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리 주시게."

홍소찬이 봉혼벽륜을 얼른 손에서 빼앗아 가자 놀란 여인이 홍소찬을 보며 물었다.

"아니, 대감. 그 물건은...."

그러자 말을 체 다 하기도 전에 홍소찬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아, 이게 있어 예령의 혼이 돌아왔을지 어찌 아는가? 어쨌든 3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아이가 이걸 가져다 놓고 돌아왔으니, 사실이든 아니든, 난 이것을 믿으이. 그러니, 건드리지 말고 고이 놔두시게."

홍소찬이 고집스럽게 쌓여있는 이부자리 맨 밑에 봉혼벽륜을 쓰윽 밀어 넣었다.

"아니 그래도 하필이면 왜 거기에..."

여인, 아니 홍소찬의 부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홍소찬을 바라보았다.

홍소찬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여기가 제일 나아. 안전하고, 또 있던 곳이니 있던 곳에 그대로 두시게. 내 말대로 하고, 얼른, 얼른 나갑시다."

홍소찬이 부인의 등을 떠밀며 재촉하자, 부인은 마지못한 듯 쫓겨나며 궁시렁거렸다.

"아, 아니... 아직 정리를 다 못했는데..."

"어허, 정리는 아랫것들 시키고... 이제 우리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추후에는 국모가 될것인데, 방에서 이깟것 정리하게 생겼소?"

"아니 그래도..."

"어허! 아랫것들 시키라니까 거..."

"알았어요, 알았어. 밀지 좀 마요."

밖으로 나온 홍소찬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하늘 참 곱네. 우리 세자빈 마마는 어질고 심성도 고와서 조상님들이 보살펴 주시는 게야."

그의 말에 부인이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 좋소?"

"그럼, 좋다 마다. 아, 깨어난 것만으로도 내 덩실덩실 춤을 추겠는데, 일어나자마자 세자마마와 혼례를 치렀으니, 춤을 내 두 번은 못 추겠는가?"

웃고있던 부인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런데... 기억을 잃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혹시라도, 잘못되기라도 하면...."

홍소찬이 입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쉬잇! 아랫것들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도 예법 같은 것은 다 기억하고 있었으니, 된 것 아니오? 그저 무탈하게 잘 지내기만 하면, 기억은 차차 살아날 것이오. 말 나온 김에, 이딴 정리정돈말고, 기억 회복에 좋다는 약 좀 찾아 달여 올리시게."

그러자 부인이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내 그 생각을 못했네. 얼른 용하다는 의원 좀 찾아봐야겠어요."

"그래그래."



***



세자는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세자빈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바.... 방금... 뭐...라고 했소?"

세자의 되물음에, 세자빈은 세자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차츰 고요했던 그녀의 두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민들레 가락지 말입니다. 제가 궁궐에 오면 조선 팔도에서 가장 이쁜 민들레로 가락지를 만들어 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연희 이전에 그녀에게 그런 약속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 그것을 어찌...."

세자빈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체, 연신 눈물을 흘리며 세자를 향해 물었다.

"저하의 우물 속 달은... 아직도 가짜이옵니까?"

세자는 너무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다가와 세자빈을 와락 끌어안았다.

"여, 연희인 것이냐? 진정... 진정 너인 것이냐?"

세자빈은 세자의 품에 안긴 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저하... 저이옵니다. 연희입니다."

감격과 흥분이 세자의 온몸에 소용돌이 쳤다.

몸을 일으킨 세자는 세자빈의 양 어깨를 잡고 위아래를 살피며 물었다.

"헌데... 어찌 된 것이냐? 어찌하여, 네가 그 몸에 깃든 것이냐?"

세자빈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모르겠사옵니다. 그때, 저는 더 이상 그 몸에 머물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다시 혼령이 되어 구천을 떠돌게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어느 곳으로 제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눈을 떠보니... 이렇게 이 몸으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세자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세자빈을 살피다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익숙하다 느껴졌던 그 눈빛은, 틀림없는 연희의 눈빛이었다.

눈을 보는 순간, 세자는 그녀가 연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연희야!"

세자는 참을 수 없는 격정에 다시금 연희를 와락 끌어안고는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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