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3
편전 중앙 상석인 용상에 앉아 있는 임금의 용안은 피곤함으로 가득했다.
임금의 앞에 좌우로 기립한 신하들은 열심히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임금이 애써 피곤한 기색을 지우려 미간을 주무르며 자세를 고쳐 앉자, 병판이 목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전하, 병조판서 김승수 아뢰옵니다. 금번 왜구들을 토벌함에 있어, 도총관의 전사가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사오나, 공과 사는 분명히 하여야 함에 따라, 세자 저하의 공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사료되옵니다."
병판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좌상이 나서며 이야기했다.
"전하, 신 좌의정 최준경 아뢰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부관들의 말에 따르면, 세자 저하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명명백백히 한 후에 논공행상을 논함이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그의 말에 임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그를 응시했다.
"의혹이라니? 어떤 의혹 말인가?"
"부관들의 말에 따르면, 세자 저하께옵서, 도총관으로 하여금 소수의 병력만으로 먼저 왜구들과 싸우게 하고, 도총관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보고가 있었사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령의 영의정이 나서 말했다.
"좌상, 말을 삼가하세요. 그 무슨 해괴망측한 이야기입니까? 세자 저하께옵서 어찌 도총관을 일부러 죽게 했다는 말입니까?"
"소신은 자세히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그러한 보고가 있었기에, 이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공을 치하한다면, 그로 인한 오해가 더욱 커질 것이 우려되어 말씀 올린 것이옵니다."
"허허, 그게 말이나 되는..."
영의정이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임금이 말을자르며 명했다.
"부관들의 보고가 있었다고 하니, 오해가 없도록 충분히 살피도록 하시오."
그 말에 영의정이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임금을 바라보니,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 숙인 좌상은 보이지 않게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편전 인근에 있던 세자는 이러한 편전의 소식을 빠르게 접하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를 전하는 수현 조차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분기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의 죽음을 악용하고자 하는 짓입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작자들입니다."
수현이 분통을 떠트리자,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그러한 자들임을 알고 있었지 않는가? 그보다는 부관들을 단속해야 할 것이네."
"염려치 마십시오. 전투에 참여했던 부관들은 모두 스승님을 충실히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혹여나 좌상이 뇌물을 주지 않는지, 꾀임에 넘어가지 않는지 단단히 살펴놓도록 하겠습니다."
수현의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시빗거리만 만들 수 있을 뿐,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 저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스승님의 죽음을 그냥 넘기기 아쉬우니, 그걸 빌미로 저하를 흔들어 보려는 속셈이 아니겠습니까?"
세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단순한 방법을 쓸 자들이 아니다. 분명 무슨 속셈이 있음이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단단히 방비해야 한다."
"예, 염려 마시옵소서."
곁에 있던 조세춘도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을 거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저들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설령, 부관들이 그리했다 이야기한다 한들, 부관 모두를 포섭할 수 없을 것이니, 의견이 갈라질 것이요, 의혹만 가지고는 저하를 처벌치 못할 것이니, 저들에게 그다지 득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이 수가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네. 이것을 통해 다른 것을 노리고 있음일 수 있고, 혹은 다른 수를 감추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네."
"당장 저들은 전하의 최측근인 도총관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셈입니다. 저들로써는 축배를 들일이지요. 그러나 쉴 틈 없이 이러한 의혹을 제기했다는 것은, 당시의 목표가 도총관이 아닌 세자 저하이옵고, 세자 저하를 죽이지 못한 것이니, 실패한 것이라 보고 있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뭔가 다른 수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것은 그 수와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정황상 그러하네만. 정녕 도총관의 죽음으로 나를 흔들 수 있으리라 보고 있단 말인가?"
"작금에 좌상이라면 그리 못할 것도 없지요. 없는 죄도 만들고, 증좌도 만들어 능히 죄인을 만들고도 남을 위인입니다."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세자가 수현을 보며 말했다.
"말한 대로 당시 부관들을 단속하고, 좌상 주변을 살피도록 하게."
"예, 저하."
세자는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편전 쪽을 바라보았다.
***
문득 어수선한 소리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잠자리를 뒤척인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게 무슨 일이길래,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이 나라의 임금이라는 위치에 있는 그였기에, 언제나 부르면 답하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허나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임금은 정신을 차리고자 눈을 깜빡 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주위는 그저 고요한 침묵과 짙은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문 밖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임금은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으나, 어둠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임금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임금은 이 예사롭지 않는 상황에 뚫어져라 그를 응시했다.
"누구냐? 어서 네 신분을 밝히지 못할까?"
임금이 버럭 소리치니, 상대가 일순 멈추어 섰다.
그리고 어디서 비춰오는 불빛인지 알길 없는 푸르스름한 빛이, 다가선 이의 뒤편에서 후광처럼 비쳤다.
"아니?"
임금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이는, 피투성이 갑옷을 입고 있는 홍여립이었기 때문이었다.
"도.... 도총관?"
임금이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부르니, 도총관이 돌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하.... 소신, 억울하옵니다."
"어, 억울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도총관?"
"소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사옵니다."
"그... 그대가 왜구들과 싸우다 죽은 것은 알고 있소. 내 진심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웠소. 내 당장 내일이라도 위령제를 지내라..."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전하, 소신은 왜구들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옵니다."
그의 말에 임금은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왜구들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전하... 소신은 배신 당해 죽은 것이옵니다."
"배신을 당해?"
"그러하옵니다, 전하. 소신은 조선 팔도에 당해낼 자가 없다 하는 조선제일검이옵니다. 그런 소신이 어찌 왜구 따위에게 죽을 리 있겠사옵니까?"
도총관의 말에 임금의 표정은 삽시에 굳어졌다.
"소신은, 세자마마에게 배신당해 억울하게 죽었사옵니다."
"세, 세자가? 그게 무슨 말이오?"
"세자 저하는 저를 적들 한가운데 버려두고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전하, 소신 너무 억울하여 눈을 감을 수 없나이다."
임금은 그대로 굳어진 체 도총관을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이내 쓰러져 버렸다.
정신을 잃고 누워버린 임금을 보며, 도총관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 되었다.
심지어 그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서 방을 나서자, 문 앞에는 좌상이 서 있었다.
"시킨 대로 잘했으렷다?"
좌상, 아니 좌상의 몸속으로 들어간 천태호가 묻는 말에 도총관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예,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
"됐다. 수고했다. 지난번에는 이 늙은이 몸을, 이번에는 죽은 자의 몸을 빌렸으니, 다음에는 젊은 녀석의 몸을 주마."
"감사합니다, 방주님."
"돌아가자."
그들은 대화를 마치고, 그곳을 나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이른 새벽 세자를 따라나선 연희는 좌포청에서 세자를 도와 그간 조사한 내용들을 정리했다.
이 내용을 토대로 상소를 작성할 것이고, 임금에게 아뢰어 사교도를 조장한 천무방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을 제언할 것이다.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세자는, 연희와 함께 다시 궁궐로 돌아가기위해 좌포청을 나섰다.
"이제 그러면, 율교가 아닌 천무방을 조사하는 것입니까?"
함께 걷던 연희의 물음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좌상에게 한걸음 더 다가간 것이라고 봐야겠지. 그 천태호란 작자를 직접 겨냥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자를 무력화시키면, 결국 좌상의 죄상도 낱낱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연희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되면... 그자는... 참수... 되는 것입니까?"
연희가 조심스럽게 묻자, 세자가 웃어 보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설마 그자를 걱정하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연희가 황급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황해하는 연희를 보며 세자가 껄껄 거리며 웃었다.
"아마도 사형당할 것이다. 그 방법이 어찌 될지는 아직 내가 알 수 없구나. 허나 분명한 것은, 그런 사악한 자를 살려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
"말해보거라. 어찌 그리 근심이 어린것이냐? 그자가 죽는 것이, 혹 네게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냐?"
세자가 이내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우며 진지하게 연희에게 물음을 던졌다.
연희는 또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닙니다. 그저 혹여나 저하께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염려되어 그런 것입니다."
"염려할 것 없다. 내 이 한 몸 못 지킬 듯싶으냐? 내 반드시 이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을 것이다."
"네, 반드시 그러하실 것이옵니다."
연희가 씩씩하게 웃어 보이니, 세자도 기분이 좋은 듯 환하게 웃었다.
왠지 연희의 말 몇 마디에 앞으로의 일이 더욱 술술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궁궐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돌연 세자 일행 앞으로 병졸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놀란 세자 일행이 발걸음을 멈추고, 세자의 호위무사들이 칼을 빼들며 앞을 가로막았다.
"웬놈 들이냐?"
세자가 소리치자, 병졸들의 수장인 듯한 자가 나서며 말했다.
"저하, 소신 의금부 동지사 윤하령이라 하옵니다."
세자가 윤하령을 알아보며 손을 들어 보이자, 칼을 빼들었던 호위무사들이 도로 칼을 넣으며 뒤로 물러섰다.
"의금부 동지사가 어찌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저하, 송구하오나, 당장 세자 저하를 추포 하라는 어명이옵니다."
그의 말에 세자는 물론 연희의 표정까지 놀라 황망해졌다.
"어명? 어명이라니? 정녕 아바마마께서 나를 잡아오라는 명을 내리셨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저하."
세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런 세자를 보며 윤하령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세자 저하를 뫼시거라."
"예."
수하들이 다가오자, 세자가 손을 들어 보였고,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내 발로 갈 것이다. 그전에 전하를 뵈올 것이니, 앞장 서거라."
"예, 저하."
세자가 걸어가려 하자, 연희는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세자의 소매를 붙잡았다.
세자는 소매끝를 잡고 있는 연희의 떨리는 손을 쳐다보다, 고개를 들어 걱정이 가득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마치 괜찮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연희는 자신의 손끝에서 떨어져 나가는 세자의 옷소매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임금의 앞에 좌우로 기립한 신하들은 열심히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임금이 애써 피곤한 기색을 지우려 미간을 주무르며 자세를 고쳐 앉자, 병판이 목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전하, 병조판서 김승수 아뢰옵니다. 금번 왜구들을 토벌함에 있어, 도총관의 전사가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사오나, 공과 사는 분명히 하여야 함에 따라, 세자 저하의 공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사료되옵니다."
병판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좌상이 나서며 이야기했다.
"전하, 신 좌의정 최준경 아뢰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부관들의 말에 따르면, 세자 저하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명명백백히 한 후에 논공행상을 논함이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그의 말에 임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그를 응시했다.
"의혹이라니? 어떤 의혹 말인가?"
"부관들의 말에 따르면, 세자 저하께옵서, 도총관으로 하여금 소수의 병력만으로 먼저 왜구들과 싸우게 하고, 도총관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보고가 있었사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령의 영의정이 나서 말했다.
"좌상, 말을 삼가하세요. 그 무슨 해괴망측한 이야기입니까? 세자 저하께옵서 어찌 도총관을 일부러 죽게 했다는 말입니까?"
"소신은 자세히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그러한 보고가 있었기에, 이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공을 치하한다면, 그로 인한 오해가 더욱 커질 것이 우려되어 말씀 올린 것이옵니다."
"허허, 그게 말이나 되는..."
영의정이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임금이 말을자르며 명했다.
"부관들의 보고가 있었다고 하니, 오해가 없도록 충분히 살피도록 하시오."
그 말에 영의정이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임금을 바라보니,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 숙인 좌상은 보이지 않게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편전 인근에 있던 세자는 이러한 편전의 소식을 빠르게 접하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를 전하는 수현 조차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분기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의 죽음을 악용하고자 하는 짓입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작자들입니다."
수현이 분통을 떠트리자,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그러한 자들임을 알고 있었지 않는가? 그보다는 부관들을 단속해야 할 것이네."
"염려치 마십시오. 전투에 참여했던 부관들은 모두 스승님을 충실히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혹여나 좌상이 뇌물을 주지 않는지, 꾀임에 넘어가지 않는지 단단히 살펴놓도록 하겠습니다."
수현의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시빗거리만 만들 수 있을 뿐,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 저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스승님의 죽음을 그냥 넘기기 아쉬우니, 그걸 빌미로 저하를 흔들어 보려는 속셈이 아니겠습니까?"
세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단순한 방법을 쓸 자들이 아니다. 분명 무슨 속셈이 있음이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단단히 방비해야 한다."
"예, 염려 마시옵소서."
곁에 있던 조세춘도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을 거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저들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설령, 부관들이 그리했다 이야기한다 한들, 부관 모두를 포섭할 수 없을 것이니, 의견이 갈라질 것이요, 의혹만 가지고는 저하를 처벌치 못할 것이니, 저들에게 그다지 득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이 수가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네. 이것을 통해 다른 것을 노리고 있음일 수 있고, 혹은 다른 수를 감추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네."
"당장 저들은 전하의 최측근인 도총관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셈입니다. 저들로써는 축배를 들일이지요. 그러나 쉴 틈 없이 이러한 의혹을 제기했다는 것은, 당시의 목표가 도총관이 아닌 세자 저하이옵고, 세자 저하를 죽이지 못한 것이니, 실패한 것이라 보고 있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뭔가 다른 수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것은 그 수와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정황상 그러하네만. 정녕 도총관의 죽음으로 나를 흔들 수 있으리라 보고 있단 말인가?"
"작금에 좌상이라면 그리 못할 것도 없지요. 없는 죄도 만들고, 증좌도 만들어 능히 죄인을 만들고도 남을 위인입니다."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세자가 수현을 보며 말했다.
"말한 대로 당시 부관들을 단속하고, 좌상 주변을 살피도록 하게."
"예, 저하."
세자는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편전 쪽을 바라보았다.
***
문득 어수선한 소리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잠자리를 뒤척인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게 무슨 일이길래,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이 나라의 임금이라는 위치에 있는 그였기에, 언제나 부르면 답하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허나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임금은 정신을 차리고자 눈을 깜빡 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주위는 그저 고요한 침묵과 짙은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문 밖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임금은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으나, 어둠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임금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임금은 이 예사롭지 않는 상황에 뚫어져라 그를 응시했다.
"누구냐? 어서 네 신분을 밝히지 못할까?"
임금이 버럭 소리치니, 상대가 일순 멈추어 섰다.
그리고 어디서 비춰오는 불빛인지 알길 없는 푸르스름한 빛이, 다가선 이의 뒤편에서 후광처럼 비쳤다.
"아니?"
임금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이는, 피투성이 갑옷을 입고 있는 홍여립이었기 때문이었다.
"도.... 도총관?"
임금이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부르니, 도총관이 돌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하.... 소신, 억울하옵니다."
"어, 억울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도총관?"
"소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사옵니다."
"그... 그대가 왜구들과 싸우다 죽은 것은 알고 있소. 내 진심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웠소. 내 당장 내일이라도 위령제를 지내라..."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전하, 소신은 왜구들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옵니다."
그의 말에 임금은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왜구들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전하... 소신은 배신 당해 죽은 것이옵니다."
"배신을 당해?"
"그러하옵니다, 전하. 소신은 조선 팔도에 당해낼 자가 없다 하는 조선제일검이옵니다. 그런 소신이 어찌 왜구 따위에게 죽을 리 있겠사옵니까?"
도총관의 말에 임금의 표정은 삽시에 굳어졌다.
"소신은, 세자마마에게 배신당해 억울하게 죽었사옵니다."
"세, 세자가? 그게 무슨 말이오?"
"세자 저하는 저를 적들 한가운데 버려두고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전하, 소신 너무 억울하여 눈을 감을 수 없나이다."
임금은 그대로 굳어진 체 도총관을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이내 쓰러져 버렸다.
정신을 잃고 누워버린 임금을 보며, 도총관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 되었다.
심지어 그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서 방을 나서자, 문 앞에는 좌상이 서 있었다.
"시킨 대로 잘했으렷다?"
좌상, 아니 좌상의 몸속으로 들어간 천태호가 묻는 말에 도총관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예,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
"됐다. 수고했다. 지난번에는 이 늙은이 몸을, 이번에는 죽은 자의 몸을 빌렸으니, 다음에는 젊은 녀석의 몸을 주마."
"감사합니다, 방주님."
"돌아가자."
그들은 대화를 마치고, 그곳을 나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이른 새벽 세자를 따라나선 연희는 좌포청에서 세자를 도와 그간 조사한 내용들을 정리했다.
이 내용을 토대로 상소를 작성할 것이고, 임금에게 아뢰어 사교도를 조장한 천무방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을 제언할 것이다.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세자는, 연희와 함께 다시 궁궐로 돌아가기위해 좌포청을 나섰다.
"이제 그러면, 율교가 아닌 천무방을 조사하는 것입니까?"
함께 걷던 연희의 물음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좌상에게 한걸음 더 다가간 것이라고 봐야겠지. 그 천태호란 작자를 직접 겨냥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자를 무력화시키면, 결국 좌상의 죄상도 낱낱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연희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되면... 그자는... 참수... 되는 것입니까?"
연희가 조심스럽게 묻자, 세자가 웃어 보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설마 그자를 걱정하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연희가 황급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황해하는 연희를 보며 세자가 껄껄 거리며 웃었다.
"아마도 사형당할 것이다. 그 방법이 어찌 될지는 아직 내가 알 수 없구나. 허나 분명한 것은, 그런 사악한 자를 살려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
"말해보거라. 어찌 그리 근심이 어린것이냐? 그자가 죽는 것이, 혹 네게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냐?"
세자가 이내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우며 진지하게 연희에게 물음을 던졌다.
연희는 또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닙니다. 그저 혹여나 저하께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염려되어 그런 것입니다."
"염려할 것 없다. 내 이 한 몸 못 지킬 듯싶으냐? 내 반드시 이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을 것이다."
"네, 반드시 그러하실 것이옵니다."
연희가 씩씩하게 웃어 보이니, 세자도 기분이 좋은 듯 환하게 웃었다.
왠지 연희의 말 몇 마디에 앞으로의 일이 더욱 술술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궁궐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돌연 세자 일행 앞으로 병졸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놀란 세자 일행이 발걸음을 멈추고, 세자의 호위무사들이 칼을 빼들며 앞을 가로막았다.
"웬놈 들이냐?"
세자가 소리치자, 병졸들의 수장인 듯한 자가 나서며 말했다.
"저하, 소신 의금부 동지사 윤하령이라 하옵니다."
세자가 윤하령을 알아보며 손을 들어 보이자, 칼을 빼들었던 호위무사들이 도로 칼을 넣으며 뒤로 물러섰다.
"의금부 동지사가 어찌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저하, 송구하오나, 당장 세자 저하를 추포 하라는 어명이옵니다."
그의 말에 세자는 물론 연희의 표정까지 놀라 황망해졌다.
"어명? 어명이라니? 정녕 아바마마께서 나를 잡아오라는 명을 내리셨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저하."
세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런 세자를 보며 윤하령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세자 저하를 뫼시거라."
"예."
수하들이 다가오자, 세자가 손을 들어 보였고,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내 발로 갈 것이다. 그전에 전하를 뵈올 것이니, 앞장 서거라."
"예, 저하."
세자가 걸어가려 하자, 연희는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세자의 소매를 붙잡았다.
세자는 소매끝를 잡고 있는 연희의 떨리는 손을 쳐다보다, 고개를 들어 걱정이 가득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마치 괜찮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연희는 자신의 손끝에서 떨어져 나가는 세자의 옷소매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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