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2
편전에 신료들이 모여 있고, 한쪽에는 세자도 서 있었다.
임금이 용상에 앉아 좌우 신료들을 내려다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큰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이와 같이 모든 것들이 다시 자리를 찾았으니, 그대들의 노고가 크다."
임금의 말에 신료들이 다 같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고 답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논공행상은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되, 보태어 할말이 있으면 이야기해보라."
임금의 말에 영의정이 한걸음 나서 말했다.
"늙으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는 예는 예로부터 이어져 왔고,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두 조정을 섬겼으나, 이제 회고해 보니 털끝만큼도 갚음이 없어, 그저 성상을 만나 치우치게 우로 같은 은혜를 받았나이다. 이제 나이가 팔순을 넘어 조정에 부끄럽고, 굽어보아 벗들에게 부끄럽사오니, 바라건대, 신을 불쌍히 여기시어 치세의 평화 속에서 편히 지내기를 윤허하여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뜻밖에도 영의정이 사직을 청하자, 임금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 그동안 여러 어려움이 있어 경을 살피지 못하였음을 알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내 두루 살필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사직부터 청하는가?"
"소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그저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전하."
임금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허면,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라. 내 영의정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힘써 볼 것이다."
임금의 청에 잠시 망설이던 영의정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소신이 어찌 바라는 것이 있겠사옵니까, 다만... 세자마마의 혼례를 끝내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옵니다."
영의정의 말에 망연히 서 있던 세자는 당황스러움에 미쳐 표정관리를 못하고 그만 얼굴을 찌푸렸다.
"바라옵건대, 근자에 듣자 하니 전 예조판서 홍소찬 대감의 여식이 기적같이 깨어났다 들었사옵니다. 비록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나, 엄연히 세자빈으로써 간택을 받은 사람으로, 이제 병환을 이겨내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소신이 떠나기 전 세자마마의 혼례를 보고 갈 수 있다면, 소신, 더 바랄 것이 없사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당혹해하는 세자의 표정을 임금이 흘낏 살폈으나, 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말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잠시 난감해하던 임금이 너털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다. 서둘러 진행토록 하라."
임금의 말에 세자는 살짝 원망스러운 마음에 임금을 바라보았으나, 임금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체 묘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답답한 세자의 마음을 알길없는 신하들의 시원한 답변이 편전을 가득 메웠다.
***
임금이 홀로 교태전 주변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임금의 발걸음은 느슨했고, 또한 미련이 남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산책을 하며 생각에 빠져있는 임금을 향해 세자가 성큼성큼 다가가 인사를 올리며 화급히 말했다.
"아바마마, 소자 아직은 혼례에 생각이 없사옵니다."
다짜고짜 혼례를 거부하는 말을 꺼내니, 임금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세자를 바라보다 이내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것은 네 생각과 무관한 것이다."
묵뚝뚝한 임금의 대답에 세자는 난처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소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잠시만 말미를 주시옵소서."
"그것 또한 걱정할 것 없다. 준비는 다른 사람들이 할 것이니, 너는 그저 때가 되면 거기에 맞는 옷을 입으면 될 뿐이다."
세자는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항변을 하려 하였으나,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굳은 세자의 얼굴을 보며 임금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엇이 되었든 혼례를 미룰 수는 없다. 이미 3년 전에 하고도 남았을 일이며, 많이 늦은 일이다. 보았다시피 편전에서 이미 명을 내렸으니, 너는 그 명을 따르면 될 것이다."
"하오나..."
"어허...! 네가 정녕 이 아비의 말을 못 알아 드는 것이냐?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혼례를 한다고 네가 하고픈 것을 못하는 것은 아닐 터, 형식적인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말라."
임금의 호통에 세자는 더 이상 말문을 열지 못했고, 임금은 짧은 한숨으로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며 부드럽고 온화한 말을 보태었다.
"형식적인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저 왕궁의 행사일 뿐이다."
그 말을 남기고 임금은 몸을 돌려 강녕전으로 향했다.
세자는 돌아선 임금의 등 뒤에서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는 무겁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좌절감에 빠진 세자의 곁으로 수현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하, 어찌 그러십니까?"
세자가 기운없는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혼례를 올리라는구나."
수현도 짐짓 놀란 듯 잠시 눈이 휘둥그레 졌다가 이내 수긍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듣긴 했습니다. 홍 대감댁 애기씨가 깨어나셨다고요. 듣자 하니, 세자빈 간택 때 쓰러진 것이 천태호의 술수 중 하나였던 모양입니다. 천태호가 죽을 때 주술이 풀린 게지요."
세자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렇다고 이리 급하게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구나. 아직... 내 마음을 다 추스르지 못했건만..."
이어 세자가 수현을 보며 물었다.
"그래... 세영은? 잘 돌아갔느냐?"
세자의 물음에 수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윤대감의 신원이 복건 되었다고는 하나, 이미 집안이 풍비박살이 난 터라, 그 오라비가 돌아와 수습하고 있긴 합니다만... 충격이 큰 것 같았습니다."
세자도 안타까운 듯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 기억을 잃고 쓰러졌다가 깨어나 보니 아비가 죽고, 집안이 몰락해 있을 터이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도와줄만한 일이 있거든 꼭 도와주게나."
"예, 저하."
"그래, 그럼 소연이는 어찌하고 있느냐?"
"홍 대감댁 애기씨...아, 아니지. 세자빈 마마께옵서 깨어나셨다는 얘기를 듣고, 마마의 신주를 모셨던 법당을 찾아간다 했습니다. 그곳을 정리하고 돌아온다 했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여 보인 세자는 터벅터벅 동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체념한듯한 세자의 뒷모습을 수현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세자가 멈춰 서서 몸을 돌려 수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 연희의 영을 다시 살펴본 적 있다더냐?"
"그때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승천한 것 같다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그 이후로 들어본 적은 없으나, 다시 한번 물어보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래... 꼭 다시 한번 살펴봐달라 하거라. 행여나 승천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으면 마땅히 내가 거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꼭 다시 살펴보라 이르거라."
"예, 저하."
세자는 다시금 동궁전을 향해 느릿느릿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임금이 용상에 앉아 좌우 신료들을 내려다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큰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이와 같이 모든 것들이 다시 자리를 찾았으니, 그대들의 노고가 크다."
임금의 말에 신료들이 다 같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고 답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논공행상은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되, 보태어 할말이 있으면 이야기해보라."
임금의 말에 영의정이 한걸음 나서 말했다.
"늙으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는 예는 예로부터 이어져 왔고,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두 조정을 섬겼으나, 이제 회고해 보니 털끝만큼도 갚음이 없어, 그저 성상을 만나 치우치게 우로 같은 은혜를 받았나이다. 이제 나이가 팔순을 넘어 조정에 부끄럽고, 굽어보아 벗들에게 부끄럽사오니, 바라건대, 신을 불쌍히 여기시어 치세의 평화 속에서 편히 지내기를 윤허하여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뜻밖에도 영의정이 사직을 청하자, 임금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 그동안 여러 어려움이 있어 경을 살피지 못하였음을 알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내 두루 살필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사직부터 청하는가?"
"소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그저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전하."
임금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허면,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라. 내 영의정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힘써 볼 것이다."
임금의 청에 잠시 망설이던 영의정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소신이 어찌 바라는 것이 있겠사옵니까, 다만... 세자마마의 혼례를 끝내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옵니다."
영의정의 말에 망연히 서 있던 세자는 당황스러움에 미쳐 표정관리를 못하고 그만 얼굴을 찌푸렸다.
"바라옵건대, 근자에 듣자 하니 전 예조판서 홍소찬 대감의 여식이 기적같이 깨어났다 들었사옵니다. 비록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나, 엄연히 세자빈으로써 간택을 받은 사람으로, 이제 병환을 이겨내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소신이 떠나기 전 세자마마의 혼례를 보고 갈 수 있다면, 소신, 더 바랄 것이 없사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당혹해하는 세자의 표정을 임금이 흘낏 살폈으나, 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말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잠시 난감해하던 임금이 너털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다. 서둘러 진행토록 하라."
임금의 말에 세자는 살짝 원망스러운 마음에 임금을 바라보았으나, 임금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체 묘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답답한 세자의 마음을 알길없는 신하들의 시원한 답변이 편전을 가득 메웠다.
***
임금이 홀로 교태전 주변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임금의 발걸음은 느슨했고, 또한 미련이 남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산책을 하며 생각에 빠져있는 임금을 향해 세자가 성큼성큼 다가가 인사를 올리며 화급히 말했다.
"아바마마, 소자 아직은 혼례에 생각이 없사옵니다."
다짜고짜 혼례를 거부하는 말을 꺼내니, 임금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세자를 바라보다 이내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것은 네 생각과 무관한 것이다."
묵뚝뚝한 임금의 대답에 세자는 난처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소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잠시만 말미를 주시옵소서."
"그것 또한 걱정할 것 없다. 준비는 다른 사람들이 할 것이니, 너는 그저 때가 되면 거기에 맞는 옷을 입으면 될 뿐이다."
세자는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항변을 하려 하였으나,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굳은 세자의 얼굴을 보며 임금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엇이 되었든 혼례를 미룰 수는 없다. 이미 3년 전에 하고도 남았을 일이며, 많이 늦은 일이다. 보았다시피 편전에서 이미 명을 내렸으니, 너는 그 명을 따르면 될 것이다."
"하오나..."
"어허...! 네가 정녕 이 아비의 말을 못 알아 드는 것이냐?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혼례를 한다고 네가 하고픈 것을 못하는 것은 아닐 터, 형식적인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말라."
임금의 호통에 세자는 더 이상 말문을 열지 못했고, 임금은 짧은 한숨으로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며 부드럽고 온화한 말을 보태었다.
"형식적인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저 왕궁의 행사일 뿐이다."
그 말을 남기고 임금은 몸을 돌려 강녕전으로 향했다.
세자는 돌아선 임금의 등 뒤에서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는 무겁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좌절감에 빠진 세자의 곁으로 수현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하, 어찌 그러십니까?"
세자가 기운없는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혼례를 올리라는구나."
수현도 짐짓 놀란 듯 잠시 눈이 휘둥그레 졌다가 이내 수긍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듣긴 했습니다. 홍 대감댁 애기씨가 깨어나셨다고요. 듣자 하니, 세자빈 간택 때 쓰러진 것이 천태호의 술수 중 하나였던 모양입니다. 천태호가 죽을 때 주술이 풀린 게지요."
세자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렇다고 이리 급하게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구나. 아직... 내 마음을 다 추스르지 못했건만..."
이어 세자가 수현을 보며 물었다.
"그래... 세영은? 잘 돌아갔느냐?"
세자의 물음에 수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윤대감의 신원이 복건 되었다고는 하나, 이미 집안이 풍비박살이 난 터라, 그 오라비가 돌아와 수습하고 있긴 합니다만... 충격이 큰 것 같았습니다."
세자도 안타까운 듯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 기억을 잃고 쓰러졌다가 깨어나 보니 아비가 죽고, 집안이 몰락해 있을 터이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도와줄만한 일이 있거든 꼭 도와주게나."
"예, 저하."
"그래, 그럼 소연이는 어찌하고 있느냐?"
"홍 대감댁 애기씨...아, 아니지. 세자빈 마마께옵서 깨어나셨다는 얘기를 듣고, 마마의 신주를 모셨던 법당을 찾아간다 했습니다. 그곳을 정리하고 돌아온다 했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여 보인 세자는 터벅터벅 동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체념한듯한 세자의 뒷모습을 수현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세자가 멈춰 서서 몸을 돌려 수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 연희의 영을 다시 살펴본 적 있다더냐?"
"그때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승천한 것 같다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그 이후로 들어본 적은 없으나, 다시 한번 물어보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래... 꼭 다시 한번 살펴봐달라 하거라. 행여나 승천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으면 마땅히 내가 거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꼭 다시 살펴보라 이르거라."
"예, 저하."
세자는 다시금 동궁전을 향해 느릿느릿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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