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3
따사로운 햇빛이 마을 전체를 비추고, 이른 아침부터 바쁜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날 무렵, 올렌도 눈을 뜨고 제일 먼저 창밖을 살폈다.
"일어나셨습니까."
먼저 일어난 카누야가 다가와 묻는 말에 올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올렌은 네 남매중 첫째로, 차기 가주에 오를 인물인 만큼 가문내에서도 그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올렌을 보좌하고 있었다.
카누야 역시 그런 인물중 한명으로, 평소 철두철미하고 빈틈없는 행동으로 제라드에게서도 상당한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다.
"컨소울 길드는?"
"아직 움직임이 없습니다. 시간이 이르니, 곧 움직일 겁니다."
올렌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씻기 위해 세면대로 향했다.
카누야는 올렌이 세면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밖으로 나와, 타고온 말들을 살피는 리사 옆으로 다가갔다.
리사 역시 가문내에서 출중한 인재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는데, 가문내 최고 여장부를 꼽으라면 단연 리사가 꼽힐 만큼 인정받고 있었다.
예전에는 리사와 카누야가 항상 제라드를 보좌했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차기 문주로써 대부분의 업무를 보고 있는 올렌을 보좌하고 있었다.
"다른 보고는?"
카누야가 다가와 묻는 말에, 리사가 돌아보며 대답했다.
"없었어요. 일단, 하인 복장을 하고 있는 만큼 하인들을 주시하라고 지시해 놨어요."
리사가 말을 하는 사이, 한쪽에서 이안 일행이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카누야와 리사가 예를 갖추자, 이안이 가볍게 목례로 답하며 물었다.
"아직 컨소울 길드쪽에서 움직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네. 아직은 움직임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방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에서 내리자, 뒤따라온 일행이 그의 말고삐를 잡아주었다.
"올렌 총사관님께서는 일어나셨습니까?"
"네, 방금 일어나셔서 세안 중이십니다."
그 말을 듣고난 후, 이안은 천천히 마을 중앙쪽을 살펴보았다.
전체 면적에 비해 거주하는 인구수가 적은 마을이라 아침 이른 시각의 마을안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고, 마을 중앙에 자그마한 공터가 있었는데, 공터 한가운데 만들어진 분수대에는 물조차 말라버려, 언제 사용했던 것인지 가늠되지 않을 정도였다.
만들어진 분수대는 그 크기도 크고, 관리만 잘 했다면 매우 화려했을 것 같은 것이 한때는 이 마을에도 영광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은 눈앞에 보이는 저 분수대처럼 씁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마을 안쪽 분수대를 살펴보고 있는 사이, 누군가 마차와 말을 이끌고 마을 중앙으로 나왔다.
그리고 여관에서 올렌이 나오며 이안에게 말을 건네었다.
"아, 이안 경, 일찍 일어났군."
이안은 마을 중앙에서 움직이는 마차를 보다가, 막 나오며 말을 거는 올렌을 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네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올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를 한 뒤, 마을 중앙쪽을 바라보았다.
"슬슬 움직일 모양이구만."
그의 말에 다들 마을 중앙쪽을 살폈다.
방금 나타난 마차에는 컨소울 길드의 깃발이 꽃혀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그들 일행이었다.
카누야가 리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리사가 재빨리 말위에 올라 마을 중앙에 있는 하인 일행쪽으로 향했고, 올렌과 이안도 말위에 올라탔다.
"자, 이제 말괄량이를 붙잡고 돌아가자."
다들 올렌의 뒤를 따라 마을 중앙쪽으로 향했다.
먼저 간 리사는 일행중에 가문의 하인 한명을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 루나스 가문의 하인이지?"
리사가 부르자, 하인이 리사를 바라보았고, 이내 그녀를 알아본 하인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네, 네, 리사님. 맞습니다."
"그래, 번트매니저는 지금 어디있느냐?"
"아, 가치 아저씨는 이제 곧 나오실 겁니다. 아, 저기 나오십니다."
하인이 뒤쪽을 가르키자, 가치아저씨가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리사는 재빨리 말고삐를 돌려 가치아저씨에게 다가갔고, 가치아저씨는 이내 리사를 알아보고 허리숙여 인사하였다.
"가치아저씨, 가문에 하인들을 모두 집합시켜 주세요."
리사의 말에 가치아저씨가 다시 허리를 굽히며 "네."하고 대답하고는 부랴부랴 온길을 되돌아 갔다.
리사는 다시 마을 중앙쪽으로 돌아와 하인들을 하나하나 살폈고, 그 사이 올렌 일행이 이르렀다.
"루나스 가문의 하인들은 따로 선다."
올렌이 먼저 소리치자, 두명의 하인이 서둘러 올렌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올렌이 그들을 보며 물었다.
"너희 둘, 혹시 줄리아를 보지 못했느냐?"
둘은 표정이 어두워지며 머뭇머뭇 거렸고, 그 모습을 본 올렌이 눈을 부릅떴다.
"이놈들! 알고 있구나! 그래, 줄리아는 어디있느냐?"
올렌의 호통에 둘은 더더욱 울상이 되어 고개만 푹 숙인체 우물쭈물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올렌이 이번에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물었다.
"너희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테니, 어서 말해보거라."
그제야 머뭇거리던 하인중 하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 지금 여기 없습니다."
그 말에 올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여기 없다니?"
그 사이, 나머지 하인들을 이끌고 나온 가치 아저씨가 올렌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총사관님께서 어인일이십니까?"
올렌은 가치아저씨를 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치, 이번 행렬에 줄리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올렌의 물음에 가치아저씨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주, 줄리아 아가씨가요?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막내 아가씨가 어찌 저희와 같은 행렬에 있다는 것입니까?"
그 말에 올렌이 다시 먼저 하인을 향해 물었다.
"너는 거짓없이 상세히 말해라. 틀림이 있다면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겁을 먹은 하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추, 출발할 때, 아가씨가 하인행색을 하고 따라오셨습니다. 하, 하지만 지금은 안계십니다. 어, 어제 다른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 말에 올렌은 물론 리사와 카누야의 표정이 창백해 졌고, 가치 아저씨는 입이 쩍 벌어지며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어디? 어디로 갔느냐?"
카누야가 황급히 다그쳐 묻는 말에, 하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모, 모릅니다. 다만, 컨소울길드에서 함께 오신 레나드인가 하는 사람을 뒤따라 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올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느쪽? 어느쪽으로 가더냐?"
카누야가 다시 묻는 말에 잠시 망설이던 하인이 마을 뒤편을 가르키며 말했다.
"분명 저쪽 길로 나갔습니다만... 그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올렌은 서둘러 하인이 가르킨 방향으로 내달렸고, 나머지 일행도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하인이 가르킨 마을 북쪽 길로 나오니, 다시 세갈래의 길이 보였다.
서쪽길, 동쪽길, 그리고 북쪽길의 세갈래 길을 보며 올렌은 이를 악물었다.
"미숙했구나! 설마하니 따로 떨어져 갔을 줄이야!"
리사가 다가와 말을 보태었다.
"어제 여관에 묵을 만한 곳이 없어 나뉘어 묵을 때, 레나드 경이 따로 나와 마을을 떠난 모양입니다."
다시 카누야가 다가와 말했다.
"이미 하루밤이 지났다고는 하나, 그들도 분명 어딘가에서 묵었을 겁니다. 서두른다면, 아침나절에 움직이는 그들과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시급한 문제는 빨리 줄리아를 만나는 것이다.
"일행을 셋으로 나눈다. 난 서쪽으로 갈테니, 리사는 북쪽을, 카누야는 동쪽으로 가라."
그때 뒤따라온 이안이 나서 말했다.
"동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카누야님은 올렌 총사관님을 보좌해 주십시오."
그 말에 올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안 경, 동쪽을 부탁하겠네."
"맡겨주십시오."
이어 일행이 서둘러 세갈래 길로 나뉘어 내달렸다.
그 중 동쪽 길을 향해 내달리던 이안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호위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라오! 이쪽으로 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마을이 어딘가?"
언제나 말없이 이안의 뒤를 따르는 라오는 묵직한 느낌에 중년 남자로, 그 겉모습 만큼이나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크테리아 항구가 나옵니다. 란스 동쪽 일대에서 가장 큰 항구입니다."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좋지않다. 가장 큰 항구라면 란스 전체로 퍼져나가는 배가 있을 터, 그곳에서 놓친다면 그 다음엔 찾기 힘들다."
"소크테리아 항구에는 루나스 길드 뿐만 아니라, 저희 엘루인 가문의 길드 사무소도 있습니다. 길드원을 동원해 수색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다. 도착하는대로, 라오는 길드 사무소로 가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길드원을 동원한다. 나는 루나스 가문 길드로 가겠다."
이안이 품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걸 가지고 가라."
이안이 마상위에서 손을 내밀어 라오에게 건네주자, 라오가 조심스레 넘겨받아 물건을 확인해 보았다.
그것은 금으로 만들어진 신분패로, 황금매의 형상과 엘루인의 마법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물건을 건네준 이안이 이어 말했다.
"그것은 엘루인 가문의 차기 가주만이 가질 수 있는 황금매 휘장이다. 그걸 가져가면 길드원을 동원하기 수월할 것이다."
"네."
이안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체로 중얼거렸다.
"왠지 일이 꼬일것 같은데..."
분명 짐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그 짐 자체가 무거웠다.
한참을 걸어온 것 같은데, 도대체 그놈에 항구가 언제쯤 나올런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하인일이란게 이처럼 힘든 일인지 그녀는 새삼스레 하인들이 당연스레 해주던 일들에 대해 고마움까지 느꼈다.
발도 무겁고 땀으로 끈적거리는게, 당장이라도 물속으로 풍덩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체력의 한계를 느낄 무렵, 쭉 뻗은 언덕길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이제 거의 다왔어. 힘내."
센의 말에 줄리아는 힘겨운 웃음을 지어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디어 언덕끝에 올라서는 순간, 줄리아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앞쪽을 바라보았고, 이어 그녀는 놀라움에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다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거대한 배와 부두,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북적거리는 사람들까지, 그야말로 줄리아에게는 굉장한 광경이었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갈매기와 바닷내음 가득한 바닷바람까지,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바다인 만큼 그 모든 것이 놀라움 그 자체였다.
"우와~"
절로 나오는 감탄사에 모두 줄리아를 바라보자, 줄리아는 그 시선을 느끼고 이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가자."
일행은 곧바로 항구쪽으로 향했다.
항구는 언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대형 선박들이 줄지어 선 매우 큰 규모의 항구였다.
소크테리아 항구는 줄리아의 루나스 가문과 산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거대 항구로, 이곳에서 하루동안 출항하거나 입항하는 거대 선박의 수만 100여척에 달했다.
작은 배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수천을 헤아릴만큼, 매우 활성화된 항구였다.
이 항구에서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각 국가, 각 지역으로 향하는 배가 출항하거나 입항하고 있는 란스 대륙 전체를 통틀어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규모의 항구였다.
[ 이제 옷갈아입고~ 어디로든 가야지~ 히히 ]
줄리아는 절로 가슴속에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항구 도시 입구에 이르자, 삼엄한 경계를 서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소크테리아 항구가 포함된 국가, 티리안은 란스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변방국가로 중앙최대국가인 에를로스 황국의 첩자들을 막기 위해 특히 항구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항구의 경계 초소를 지나 선박들을 관리하는 소크테리아 선박 사무소에 도착하자, 레나드가 말에서 내려섰다.
"일단 여기까지로 하지."
레나드의 말에, 지코와 센이 짐을 말 옆에 내려놓았다.
"수고가 많았으니, 품삯은 조금 더 보탰네."
레나드가 말을 하며 지코와 센에게 돈을 건네자, 둘이 가볍게 인사를 하며 작별을 했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줄리아를 보며 레나드가 짧게 인사를 건넸다.
"너도 수고했다. 각 길드의 사무실은 항구 북쪽 끝에 있으니까, 그리 가면 될게다."
레나드를 그 말을 남기고 선박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고, 줄리아는 멍하니 선 체 사무실에 들어가는 레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고했어, 잘가~"
센이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가려하자, 줄리아가 허겁지겁 불러세웠다.
"세, 센! 센! 어디가는거야?"
줄리아의 물음에 센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딜 가냐니? 방금 품삯 계싼하는거 봤잖아. 일한 값을 받았으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센의 말에 줄리아는 그대로 굳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인은 항상 곁을 따라다니는 거로만 생각했던 줄리아에게 돈 계산 끝내고 헤어지는 모습은 무척이나 생소한 모습이었다.
어차피 항구에 도착하면 갈라질 생각이었지만, 이렇듯 도망칠 겨를도 없이 각자 갈길을 가버리니 오히려 줄리아는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줄리아는 떠나가는 지코와 센의 뒷모습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길게 숨을 들이 마셨다.
"그래, 어차피 갈라서기로 한거니까."
줄리아는 천천히 항구도시 주위를 살폈다.
오가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왠지 새로운 세상에 온 거 같은 느낌에 설레임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좋아.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줄리아는 성큼 성큼 걸어가며 항구 도시 주변 건물들을 살폈다.
다양한 건물들이 있었는데, 술집부터 시작해서 각종 장비들을 팔거나 수리하는 곳, 배에 관련된 물건들을 파는 곳은 물론, 경계초소와 각 국가별 행정을 관리하는 사무소까지 다양했다.
그러다가 문득 줄리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다양한 곳에서 수입된 옷들을 진열해 파는 가계였다.
"우와!"
줄리아의 표정이 대번에 환하게 변하더니 가게 앞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이럴수가... 너무 이쁘다."
줄리아는 진열된 드레스를 보며 흥분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 가계문을 열고 들어섰고, 문이 열리자 문에 달려있던 방울소리가 울려퍼지고, 안쪽에 있던 뚱뚱한 가계 주인 아주머니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줄리아를 보았다.
"어서옵셔~ 어떻게 오셨나? 심부름 오셨나?"
그녀가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나오며 묻는 말에 줄리아는 가계 중앙에 걸려있는 드레스를 가르키며 말했다.
"이거 주세요 이거..."
줄리아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드레스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그녀의 모습을 주인 아주머니가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집에서 온 하인인데, 마음대로 옷을 골라? 옷 맡겨놓은거 아니었어? 아니, 우리 가계가 무슨 자선사업 하는데인줄 아나? 돈 먼저 줘야지 돈 먼저!"
그녀의 입에서 쉴새없이 튀어나오는 다그침에 놀란 줄리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가게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돈이요?"
여태까지 살면서 가지고 싶은게 있으면, "저거"라고 가르키기만 하면 되던 줄리아다.
돈이 필요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줄리아이기 때문에, 돈을 달란 말을 언듯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그럼 돈도 없이 왔단 말야? 어느 집이야? 어느 집에서 그딴 소릴 지껄여? 뭐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라고 그딴 소리를 막해? 응? 뭐 루나스 가문이라도 돼?"
그 말에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했다.
"응? 뭐? 루나스 가문에서 왔다고?"
주인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더니 후다닥 문쪽으로 달려가 문밖을 살폈다.
이쪽 저쪽을 살피던 주인 아주머니가 눈을 부릅뜨고 줄리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각문 사칭죄가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거냐? 네년이 루나스 가문에서 나온 하인이라면 어찌 혼자냐? 루나스 가문 누구의 심부름을 나온게야? 어서 말해봐!"
할말을 잃은 줄리아는 당황하여 아무말도 하지 못한체 서 있었고, 주인 아주머니가 성큼성큼 걸어와 줄리아의 손을 낚아채며 말했다.
"이년이... 어디서 거짓말이야! 당장 루나스 길드 사무소로 가자! 네년이 진짜 루나스 가문 하인인지 한번 길드사무소에 가보면 알겠지!"
그녀가 잡아 끌자, 놀란 줄리아가 당황해서 손을 뿌리치려 하며 말했다.
"아, 안되요. 안되요."
자기도 모르게 안된다는 말을 하자, 주인 아주머니는 더욱 확신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흥! 네년이 아주 혼이 단단히 나봐야 알지. 어서 따라와!"
주인아주머니가 더욱 힘을 주어 손을 잡아당기자, 줄리아는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줄리아의 눈에 주인아주머니 뒤로 가계 유리창에 비친 일련의 사람들이 있었다.
[ 맙소사! ]
그들은 다름아닌, 얼마전 엘루인 가문에서 온 이안 일행이었다.
줄리아의 얼굴은 더더욱 창백해지는 순간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먼저 일어난 카누야가 다가와 묻는 말에 올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올렌은 네 남매중 첫째로, 차기 가주에 오를 인물인 만큼 가문내에서도 그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올렌을 보좌하고 있었다.
카누야 역시 그런 인물중 한명으로, 평소 철두철미하고 빈틈없는 행동으로 제라드에게서도 상당한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다.
"컨소울 길드는?"
"아직 움직임이 없습니다. 시간이 이르니, 곧 움직일 겁니다."
올렌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씻기 위해 세면대로 향했다.
카누야는 올렌이 세면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밖으로 나와, 타고온 말들을 살피는 리사 옆으로 다가갔다.
리사 역시 가문내에서 출중한 인재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는데, 가문내 최고 여장부를 꼽으라면 단연 리사가 꼽힐 만큼 인정받고 있었다.
예전에는 리사와 카누야가 항상 제라드를 보좌했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차기 문주로써 대부분의 업무를 보고 있는 올렌을 보좌하고 있었다.
"다른 보고는?"
카누야가 다가와 묻는 말에, 리사가 돌아보며 대답했다.
"없었어요. 일단, 하인 복장을 하고 있는 만큼 하인들을 주시하라고 지시해 놨어요."
리사가 말을 하는 사이, 한쪽에서 이안 일행이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카누야와 리사가 예를 갖추자, 이안이 가볍게 목례로 답하며 물었다.
"아직 컨소울 길드쪽에서 움직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네. 아직은 움직임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방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에서 내리자, 뒤따라온 일행이 그의 말고삐를 잡아주었다.
"올렌 총사관님께서는 일어나셨습니까?"
"네, 방금 일어나셔서 세안 중이십니다."
그 말을 듣고난 후, 이안은 천천히 마을 중앙쪽을 살펴보았다.
전체 면적에 비해 거주하는 인구수가 적은 마을이라 아침 이른 시각의 마을안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고, 마을 중앙에 자그마한 공터가 있었는데, 공터 한가운데 만들어진 분수대에는 물조차 말라버려, 언제 사용했던 것인지 가늠되지 않을 정도였다.
만들어진 분수대는 그 크기도 크고, 관리만 잘 했다면 매우 화려했을 것 같은 것이 한때는 이 마을에도 영광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은 눈앞에 보이는 저 분수대처럼 씁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마을 안쪽 분수대를 살펴보고 있는 사이, 누군가 마차와 말을 이끌고 마을 중앙으로 나왔다.
그리고 여관에서 올렌이 나오며 이안에게 말을 건네었다.
"아, 이안 경, 일찍 일어났군."
이안은 마을 중앙에서 움직이는 마차를 보다가, 막 나오며 말을 거는 올렌을 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네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올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를 한 뒤, 마을 중앙쪽을 바라보았다.
"슬슬 움직일 모양이구만."
그의 말에 다들 마을 중앙쪽을 살폈다.
방금 나타난 마차에는 컨소울 길드의 깃발이 꽃혀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그들 일행이었다.
카누야가 리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리사가 재빨리 말위에 올라 마을 중앙에 있는 하인 일행쪽으로 향했고, 올렌과 이안도 말위에 올라탔다.
"자, 이제 말괄량이를 붙잡고 돌아가자."
다들 올렌의 뒤를 따라 마을 중앙쪽으로 향했다.
먼저 간 리사는 일행중에 가문의 하인 한명을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 루나스 가문의 하인이지?"
리사가 부르자, 하인이 리사를 바라보았고, 이내 그녀를 알아본 하인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네, 네, 리사님. 맞습니다."
"그래, 번트매니저는 지금 어디있느냐?"
"아, 가치 아저씨는 이제 곧 나오실 겁니다. 아, 저기 나오십니다."
하인이 뒤쪽을 가르키자, 가치아저씨가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리사는 재빨리 말고삐를 돌려 가치아저씨에게 다가갔고, 가치아저씨는 이내 리사를 알아보고 허리숙여 인사하였다.
"가치아저씨, 가문에 하인들을 모두 집합시켜 주세요."
리사의 말에 가치아저씨가 다시 허리를 굽히며 "네."하고 대답하고는 부랴부랴 온길을 되돌아 갔다.
리사는 다시 마을 중앙쪽으로 돌아와 하인들을 하나하나 살폈고, 그 사이 올렌 일행이 이르렀다.
"루나스 가문의 하인들은 따로 선다."
올렌이 먼저 소리치자, 두명의 하인이 서둘러 올렌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올렌이 그들을 보며 물었다.
"너희 둘, 혹시 줄리아를 보지 못했느냐?"
둘은 표정이 어두워지며 머뭇머뭇 거렸고, 그 모습을 본 올렌이 눈을 부릅떴다.
"이놈들! 알고 있구나! 그래, 줄리아는 어디있느냐?"
올렌의 호통에 둘은 더더욱 울상이 되어 고개만 푹 숙인체 우물쭈물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올렌이 이번에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물었다.
"너희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테니, 어서 말해보거라."
그제야 머뭇거리던 하인중 하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 지금 여기 없습니다."
그 말에 올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여기 없다니?"
그 사이, 나머지 하인들을 이끌고 나온 가치 아저씨가 올렌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총사관님께서 어인일이십니까?"
올렌은 가치아저씨를 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치, 이번 행렬에 줄리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올렌의 물음에 가치아저씨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주, 줄리아 아가씨가요?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막내 아가씨가 어찌 저희와 같은 행렬에 있다는 것입니까?"
그 말에 올렌이 다시 먼저 하인을 향해 물었다.
"너는 거짓없이 상세히 말해라. 틀림이 있다면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겁을 먹은 하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추, 출발할 때, 아가씨가 하인행색을 하고 따라오셨습니다. 하, 하지만 지금은 안계십니다. 어, 어제 다른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 말에 올렌은 물론 리사와 카누야의 표정이 창백해 졌고, 가치 아저씨는 입이 쩍 벌어지며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어디? 어디로 갔느냐?"
카누야가 황급히 다그쳐 묻는 말에, 하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모, 모릅니다. 다만, 컨소울길드에서 함께 오신 레나드인가 하는 사람을 뒤따라 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올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느쪽? 어느쪽으로 가더냐?"
카누야가 다시 묻는 말에 잠시 망설이던 하인이 마을 뒤편을 가르키며 말했다.
"분명 저쪽 길로 나갔습니다만... 그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올렌은 서둘러 하인이 가르킨 방향으로 내달렸고, 나머지 일행도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하인이 가르킨 마을 북쪽 길로 나오니, 다시 세갈래의 길이 보였다.
서쪽길, 동쪽길, 그리고 북쪽길의 세갈래 길을 보며 올렌은 이를 악물었다.
"미숙했구나! 설마하니 따로 떨어져 갔을 줄이야!"
리사가 다가와 말을 보태었다.
"어제 여관에 묵을 만한 곳이 없어 나뉘어 묵을 때, 레나드 경이 따로 나와 마을을 떠난 모양입니다."
다시 카누야가 다가와 말했다.
"이미 하루밤이 지났다고는 하나, 그들도 분명 어딘가에서 묵었을 겁니다. 서두른다면, 아침나절에 움직이는 그들과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시급한 문제는 빨리 줄리아를 만나는 것이다.
"일행을 셋으로 나눈다. 난 서쪽으로 갈테니, 리사는 북쪽을, 카누야는 동쪽으로 가라."
그때 뒤따라온 이안이 나서 말했다.
"동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카누야님은 올렌 총사관님을 보좌해 주십시오."
그 말에 올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안 경, 동쪽을 부탁하겠네."
"맡겨주십시오."
이어 일행이 서둘러 세갈래 길로 나뉘어 내달렸다.
그 중 동쪽 길을 향해 내달리던 이안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호위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라오! 이쪽으로 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마을이 어딘가?"
언제나 말없이 이안의 뒤를 따르는 라오는 묵직한 느낌에 중년 남자로, 그 겉모습 만큼이나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크테리아 항구가 나옵니다. 란스 동쪽 일대에서 가장 큰 항구입니다."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좋지않다. 가장 큰 항구라면 란스 전체로 퍼져나가는 배가 있을 터, 그곳에서 놓친다면 그 다음엔 찾기 힘들다."
"소크테리아 항구에는 루나스 길드 뿐만 아니라, 저희 엘루인 가문의 길드 사무소도 있습니다. 길드원을 동원해 수색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다. 도착하는대로, 라오는 길드 사무소로 가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길드원을 동원한다. 나는 루나스 가문 길드로 가겠다."
이안이 품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걸 가지고 가라."
이안이 마상위에서 손을 내밀어 라오에게 건네주자, 라오가 조심스레 넘겨받아 물건을 확인해 보았다.
그것은 금으로 만들어진 신분패로, 황금매의 형상과 엘루인의 마법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물건을 건네준 이안이 이어 말했다.
"그것은 엘루인 가문의 차기 가주만이 가질 수 있는 황금매 휘장이다. 그걸 가져가면 길드원을 동원하기 수월할 것이다."
"네."
이안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체로 중얼거렸다.
"왠지 일이 꼬일것 같은데..."
분명 짐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그 짐 자체가 무거웠다.
한참을 걸어온 것 같은데, 도대체 그놈에 항구가 언제쯤 나올런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하인일이란게 이처럼 힘든 일인지 그녀는 새삼스레 하인들이 당연스레 해주던 일들에 대해 고마움까지 느꼈다.
발도 무겁고 땀으로 끈적거리는게, 당장이라도 물속으로 풍덩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체력의 한계를 느낄 무렵, 쭉 뻗은 언덕길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이제 거의 다왔어. 힘내."
센의 말에 줄리아는 힘겨운 웃음을 지어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디어 언덕끝에 올라서는 순간, 줄리아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앞쪽을 바라보았고, 이어 그녀는 놀라움에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다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거대한 배와 부두,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북적거리는 사람들까지, 그야말로 줄리아에게는 굉장한 광경이었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갈매기와 바닷내음 가득한 바닷바람까지,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바다인 만큼 그 모든 것이 놀라움 그 자체였다.
"우와~"
절로 나오는 감탄사에 모두 줄리아를 바라보자, 줄리아는 그 시선을 느끼고 이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가자."
일행은 곧바로 항구쪽으로 향했다.
항구는 언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대형 선박들이 줄지어 선 매우 큰 규모의 항구였다.
소크테리아 항구는 줄리아의 루나스 가문과 산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거대 항구로, 이곳에서 하루동안 출항하거나 입항하는 거대 선박의 수만 100여척에 달했다.
작은 배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수천을 헤아릴만큼, 매우 활성화된 항구였다.
이 항구에서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각 국가, 각 지역으로 향하는 배가 출항하거나 입항하고 있는 란스 대륙 전체를 통틀어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규모의 항구였다.
[ 이제 옷갈아입고~ 어디로든 가야지~ 히히 ]
줄리아는 절로 가슴속에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항구 도시 입구에 이르자, 삼엄한 경계를 서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소크테리아 항구가 포함된 국가, 티리안은 란스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변방국가로 중앙최대국가인 에를로스 황국의 첩자들을 막기 위해 특히 항구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항구의 경계 초소를 지나 선박들을 관리하는 소크테리아 선박 사무소에 도착하자, 레나드가 말에서 내려섰다.
"일단 여기까지로 하지."
레나드의 말에, 지코와 센이 짐을 말 옆에 내려놓았다.
"수고가 많았으니, 품삯은 조금 더 보탰네."
레나드가 말을 하며 지코와 센에게 돈을 건네자, 둘이 가볍게 인사를 하며 작별을 했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줄리아를 보며 레나드가 짧게 인사를 건넸다.
"너도 수고했다. 각 길드의 사무실은 항구 북쪽 끝에 있으니까, 그리 가면 될게다."
레나드를 그 말을 남기고 선박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고, 줄리아는 멍하니 선 체 사무실에 들어가는 레나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고했어, 잘가~"
센이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가려하자, 줄리아가 허겁지겁 불러세웠다.
"세, 센! 센! 어디가는거야?"
줄리아의 물음에 센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딜 가냐니? 방금 품삯 계싼하는거 봤잖아. 일한 값을 받았으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센의 말에 줄리아는 그대로 굳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인은 항상 곁을 따라다니는 거로만 생각했던 줄리아에게 돈 계산 끝내고 헤어지는 모습은 무척이나 생소한 모습이었다.
어차피 항구에 도착하면 갈라질 생각이었지만, 이렇듯 도망칠 겨를도 없이 각자 갈길을 가버리니 오히려 줄리아는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줄리아는 떠나가는 지코와 센의 뒷모습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길게 숨을 들이 마셨다.
"그래, 어차피 갈라서기로 한거니까."
줄리아는 천천히 항구도시 주위를 살폈다.
오가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왠지 새로운 세상에 온 거 같은 느낌에 설레임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좋아.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줄리아는 성큼 성큼 걸어가며 항구 도시 주변 건물들을 살폈다.
다양한 건물들이 있었는데, 술집부터 시작해서 각종 장비들을 팔거나 수리하는 곳, 배에 관련된 물건들을 파는 곳은 물론, 경계초소와 각 국가별 행정을 관리하는 사무소까지 다양했다.
그러다가 문득 줄리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다양한 곳에서 수입된 옷들을 진열해 파는 가계였다.
"우와!"
줄리아의 표정이 대번에 환하게 변하더니 가게 앞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이럴수가... 너무 이쁘다."
줄리아는 진열된 드레스를 보며 흥분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 가계문을 열고 들어섰고, 문이 열리자 문에 달려있던 방울소리가 울려퍼지고, 안쪽에 있던 뚱뚱한 가계 주인 아주머니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줄리아를 보았다.
"어서옵셔~ 어떻게 오셨나? 심부름 오셨나?"
그녀가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나오며 묻는 말에 줄리아는 가계 중앙에 걸려있는 드레스를 가르키며 말했다.
"이거 주세요 이거..."
줄리아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드레스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그녀의 모습을 주인 아주머니가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집에서 온 하인인데, 마음대로 옷을 골라? 옷 맡겨놓은거 아니었어? 아니, 우리 가계가 무슨 자선사업 하는데인줄 아나? 돈 먼저 줘야지 돈 먼저!"
그녀의 입에서 쉴새없이 튀어나오는 다그침에 놀란 줄리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가게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돈이요?"
여태까지 살면서 가지고 싶은게 있으면, "저거"라고 가르키기만 하면 되던 줄리아다.
돈이 필요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줄리아이기 때문에, 돈을 달란 말을 언듯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그럼 돈도 없이 왔단 말야? 어느 집이야? 어느 집에서 그딴 소릴 지껄여? 뭐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라고 그딴 소리를 막해? 응? 뭐 루나스 가문이라도 돼?"
그 말에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했다.
"응? 뭐? 루나스 가문에서 왔다고?"
주인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더니 후다닥 문쪽으로 달려가 문밖을 살폈다.
이쪽 저쪽을 살피던 주인 아주머니가 눈을 부릅뜨고 줄리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각문 사칭죄가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거냐? 네년이 루나스 가문에서 나온 하인이라면 어찌 혼자냐? 루나스 가문 누구의 심부름을 나온게야? 어서 말해봐!"
할말을 잃은 줄리아는 당황하여 아무말도 하지 못한체 서 있었고, 주인 아주머니가 성큼성큼 걸어와 줄리아의 손을 낚아채며 말했다.
"이년이... 어디서 거짓말이야! 당장 루나스 길드 사무소로 가자! 네년이 진짜 루나스 가문 하인인지 한번 길드사무소에 가보면 알겠지!"
그녀가 잡아 끌자, 놀란 줄리아가 당황해서 손을 뿌리치려 하며 말했다.
"아, 안되요. 안되요."
자기도 모르게 안된다는 말을 하자, 주인 아주머니는 더욱 확신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흥! 네년이 아주 혼이 단단히 나봐야 알지. 어서 따라와!"
주인아주머니가 더욱 힘을 주어 손을 잡아당기자, 줄리아는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줄리아의 눈에 주인아주머니 뒤로 가계 유리창에 비친 일련의 사람들이 있었다.
[ 맙소사! ]
그들은 다름아닌, 얼마전 엘루인 가문에서 온 이안 일행이었다.
줄리아의 얼굴은 더더욱 창백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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