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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가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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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10.26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21.23분

2화 - #2


수풀도 똑같은 수풀이요, 나무도 똑같은 나무지만, 가문 밖에 있는 수풀은 왠지 더 생기 있는 것 같고, 가문 밖에 있는 나무는 왠지 더 튼튼한 것만 같았다.

모든 것 하나하나가 집안에서 볼때와는 완전히 달라보이는 것 같았고, 날아갈 것만 같은 해방감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해방감도 잠시, 험한 일이라고는 한번 해본적도 없는 줄리아가 무거운 짐을 짊어메고 오랫동안 걸을 수 있을리 만무했다.

금새 지쳐버린 줄리아는 다리가 다 후들거리는 것만 같았으니, 주위 풍경같은 건 어느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아, 힘들어... 언제까지 가야하는거지?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난 죽을게 분명해... ]

마음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같이 가는 저 짐마차에라도 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번트매니저로 따라온 가치 아저씨한테 걸렸다가는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 뻔했다.

가치 아저씨라면 줄리아가 하는 협박(?)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은 불보듯 자명한 일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이 짐부터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 그래, 조금씩 버리자! ]

줄리아는 뒤로 멘 짐의 아랫쪽을 살짝 풀어 헤친 뒤, 수중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짧고 두꺼운 단도는 푸른빛이 흐르는, 매우 귀해보이는 단도였는데, 칼날 몸체쪽에 푸른 원형 세개가 그려져 있었으니, 바로 블루문헌터스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집을 나오면서 가지고 나온 물건이라고는 이 단도 하나가 고작이었지만, 정작 줄리아는 이 단도가 가지는 의미를 알지 못했다.

줄리아는 단도로 짐상자 아래쪽을 살살 긁어 틈을 만들고, 짐안에 있는 포트리아 찻잎을 조금씩 버리기 시작했다.

찻잎을 버리기 시작하니, 조금씩 짐이 가벼워 졌고, 얼마 후엔 매우 가벼워져 줄리아는 다시 평온한 마음으로 주위를 구경할 수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도 훔치고, 한결 가뿐해진 발걸음을 걸으며 여전히 찻잎을 조금씩 버리는 그녀는, 자신이 버리고 있는 포트리아 찻잎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포트리아 찻잎은 루나스 가문을 포함해 극히 일부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귀한 찻잎임에도, 귀하게만 자란 줄리아 눈에는 그저 흔하디 흔한 찻잎에 불과했던 것이다.

루나스 가문이 엄격한 가문이긴 하지만, 여자인데다가 막내로 태어난 줄리아는 상대적으로 평온하게 자랐고, 실질적인 수련은 16살이 되어 수련원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험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줄리아였다.

그렇게 찻잎을 버리며 가기를 한참,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그 모습을 감출 무렵, 행렬의 앞쪽에서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뒤편으로 오며 소리쳤다.

"인근 마을에서 오늘 밤을 묵는다."

말을 타고 소리치던 남자가 이내 앞장서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무렵, 줄리아는 등뒤에 멘 짐에 마지막 포트리아 찻잎을 버리고 있었으니, 이젠 빈 껍데기 뿐인 짐이었다.

가벼워진 짐 만큼이나 홀가분한 마음이 된 줄리아는 마냥 발걸음이 가벼웠다.

컨소울길드에서 온 길드인 십여명을 포함해, 길드 하인들 20여명, 거기에 루나스 가문에서 차출되어 따라온 하인 10여명까지 총 40여명에 이르는 인원인 만큼 그 행렬이 작지 않았다.

이렇듯 작지 않은 행렬이 작은 마을안에 들어서자, 마을사람들이 놀라 수근 대며 행렬을 구경하고 있었다.

지어진지 오래되어 보이는 목조 건물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사람들의 행색이 조금 초라해 보이는 것이, 루나스 가문 인근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보기엔 너무 가난해 보이는 마을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주로 왕래가 빈번한 방향이 아닌, 동남쪽으로 내려오는 외진 길목에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왕래라고는 컨소울 길드같은 동남쪽 지역 길드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이곳 저곳에 쓰지 않는 듯한 큼지막한 건물들이, 폐물이 되어 버려진 흔적들이 남아 과거에 이 마을에도 영광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것이 전부였다.

줄리아가 신기한 듯 그런 마을 풍경을 구경하고 있을 즈음 앞쪽에서는 묵을 곳을 찾아 사람들이 이곳 저곳을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 묵기에는 인원이 많아 마땅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묵을 곳을 찾는 하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나드가 나서 마스터인 요한에게 말했다.

"인원이 인원이니 만큼, 다 같이 묵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 하니, 이만 제 하인들과 함께 제 갈길을 가겠습니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게. 이번 루나스가 방문에 함께 해주어서 감사하네. 어떤가? 자네는 다음번 전투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가?"

레나드가 긴 한숨과 함께 주위를 살피고나서 대답했다.

"글세요. 전 그런 정치 싸움판에는 끼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이렇게 방랑하며 사는 것이 좋습니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듯 이야기 했다.

"안타깝구만. 자네같은 인재와 함께 전투를 벌인다면, 그것 또한 행운일 터인데 말이야."

레나드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허먼 저는 다른 곳을 알아 보겠습니다. 나머지 인원들도 꼭 한군데 묵으려 하지 마시고, 일단 분산시켜 묵도록 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게 말일세. 안그래도 그리할 생각이었네. 그럼 수고하게. 그리고 잊지말고 꼭 한번 길드에 들리시게."

"꼭 그리하겠습니다."

레나드가 말고삐를 돌려 가려 하자, 요한이 뒤에서 말했다.

"아참, 포트리아 한상자를 가져가시게."

그 말에 레나드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본디 차같은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아, 아닐세. 내 루나스 가문에 이야기 할테니, 하인 한명을 데리고 가시게. 어차피 블루문헌터스의 지역길드가 전 대륙에 퍼져 있으니 문제 없을것이네."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줄리아는, 그 얘기에 얼른 손을 들어 보였다.

"저, 저요!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갑작스런 줄리아의 말에, 이야기를 나누던 레나드와 요한은 물론 번트매니저인 가치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너 이놈, 누구냐?"

가치아저씨가 눈살을 찌푸려 줄리아를 자세히 보려 하자, 줄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 저는..."

순간 아까 들었던 하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 줄리아는 당황하여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고, 그 모습을 가치 아저씨가 눈살을 찌푸린 체 바라보고 있었다.

"아, 누구냐니까?"

가치아저씨가 다그쳐 묻자, 요한이 나서 말했다.

"이보시게, 내 제라드 가주님께 따로 말씀드리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할테니, 저 하인 한명을 이 친구에게 붙여주게나."

요한의 말에 가치아저씨가 허리를 굽혀 말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가치아저씨는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줄리아를 눈살을 찌푸린체 보면서 이야기 했다.

"짐을 다 나르고 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길드 사무실을 찾아가거라. 그곳에서 가문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 가치아저씨가 무어라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줄리아는 황급히 레나드 옆으로 바짝 다가서며 "네네, 알고 있습니다." 라고 대충 대답했다.

가치아저씨는 아직도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듯 눈살을 찌푸린체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사이 레나드는 요한에게 말했다.

"그럼 일단 데리고 가겠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지요."

레나드가 인사를 하고 움직이자, 레나드를 따르던 하인 두명이 움직였고, 그 뒤를 줄리아가 황급히 뒤따랐다.

떠나가는 레나드와 줄리아를 바라보던 가치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뒤편에 서 있는 다른 하인들에게 물었다.

"지금 따라간 녀석이 누구냐?"

다른 하인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 거리자, 가치가 이상한 듯 되물었다.

"이놈들, 너희는 같이 일하는 녀석, 이름도 모르냐?"

그때 한 하인이 나서 둘러대듯 말했다.

"하인이야 매달 들어오는데, 어찌 이름을 꼬박 꼬박 외우겠습니까?"

가치아저씨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만 끄덕거렸고, 이어 요한이 사람들을 나누어 묵게 하자, 금새 잊어버렸다.

한편, 레나드를 뒤따르던 줄리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미남자를 따라온 것도 좋지만, 이대로 컨소울길드 일행을 따라가게 되면, 도로 붙잡힐 것은 뻔한 일, 그 일행에서 떨어져 나왔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가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앞서가던 레나드가 줄리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냐?"

갑작스레 묻는 말에, 한참 기쁨에 젖어있던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선뜻 대답했다.

"네, 전 줄리..."

그러나 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정신을 차린 줄리아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앙...이라고 합니다."

레나드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줄리앙?"

"네에..."

레나드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줄리아를 위아래로 살펴보며 말했다.

"사내놈이 기운이 그리 없어보여서 쓰겠냐? 그 체격으로 하인일을 하고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구나."

퉁명스러운 말에 줄리아가 입을 삐죽거리고 있을 때, 다른 하인이 말했다.

"이 녀석 생긴 것도 아주 곱상합니다."

이미 날이 어두운데다가, 얼굴에 검불까지 묻히고 있었지만 줄리아의 용모가 출중하다 보니 다른 하인들이 그녀의 미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인의 말에 줄리아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애써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딴 소리 처음 듣습니다. 남에 얼굴에 관심 끄시죠?"

줄리아의 말에 먼저 말을 꺼낸 하인이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돌려 레나드 뒤를 따랐다.

평소대로라면 당장 이 하인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 차고는 엉엉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서, 다음부터 자길 보면 쩔쩔 매게 만들었겠지만, 지금은 남장을 하고있고 신분도 하인으로 속이고 있는 만큼 참아야만 했다.

줄리아는 속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그 뒤를 따라고 있었는데, 레나드가 주위를 한번 살펴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 곳에 묵기엔 여관이 부족할 듯 하니 좀 힘들더라도, 다른 마을에 가서 묵도록 하자."

레나드가 말을 하며, 들어온 방향과는 반대쪽의 길로 향했다.

줄리아는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 따듯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었지만, 일단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있는 만큼 꾹 참았다.

뭐가 이렇게 참아야할 것이 많은지, 남장도 불편하지만 하인행색을 하고 있는 것도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 최대한 빨리 옷을 갈아입고 하인 흉내를 때려쳐야겠어. ]

줄리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고, 어느새 마을에서 훌쩍 멀어지자 방금 떠나온 마을을 뒤돌아 보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서 짠한 기분이 드는 것이 코끝이 찡해졌지만, 이내 씩씩하게 용기를 내어 뒤따랐다.

얼마지나지 않아 날이 완전히 어두워 졌고, 아까 줄리아에게 말을 걸었던 키 큰 하인이 짐속에서 등불하나를 꺼내 불을 밝히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그 뒤를 레나드가 탄 말이 터벅터벅 뒤따르고, 다시 그 뒤를 줄리아와 다른 하인 하나가 따라 걸었다.

"무거워 보이는데, 바꿔 들까?"

줄리아 곁에 같이 걷던 하인이 건네오는 말에 줄리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 아뇨 괜찮아요."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센이라고 해. 17살이야, 넌 몇살이니?"

"전... 16살이요."

센은 온화한 표정과 말투가 호감형이었는데, 그래서인가 줄리아는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센이란 하인이 자신에게 말을 낮추고 있는 것이 왠지 기분 나빴다.

"저 앞에 가는 형은 24살이야. 이름은 지코고, 저 형이 좀 딱딱하긴 해도 이것 저것 잘 챙겨주니까, 친하게 지내."

줄리아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지만, 사실 아까 자신에게 한 말에 살짝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루나스 가문에 있다고 했지? 좋겠다. 그런 곳에서 일하면 품삯도 많이 주고, 떠돌지 않으니까 좋은 곳에서 잘 수 있을 거 아냐?"

줄리아는 마지못해 웃고 있었다.

"아...네..."

줄리아의 말에 센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냐아냐, 그냥 말 놔도 돼. 우린 소개소를 통해서 레나드경을 따라오게 됐는데, 아까 길드 봤지? 컨소울길드라고 남쪽지역에서는 제법 유명하거든. 길드쪽에서 소개소를 통해 우릴 레나드경한테 붙여준거야."

줄리아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센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썩 편치만은 않았다.

듣는 척 해주는게 이렇게 불편한 일인지, 줄리아는 새삼 자신의 수다를 들어주던 질렌에게 고마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마을 하나가 먼 발치에서 눈에 들어왔다.

"일단 저곳에서 묵자."

레나드의 말에 일행은 마을 입구쪽 길로 들어섰고, 이내 마을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늦긴 했지만, 몇몇 행인들과 불켜진 술집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마을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아까 마을보다도 좀 더 작은 마을이긴 했지만, 오히려 마을 전체 분위기는 생기 있는 것이 네사람이 묵을 곳 정도는 충분히 있을 듯 싶었다.

앞장서 있던 하인 지코가 밝은 곳에 이르자 불을 끄고, 먼저 달려가 이곳 저곳을 알아보고 와서는 일행을 한 여관집으로 안내했다.

[ 짜식, 빠릿빠릿한걸? ]

지코의 그런 행동을 보며 줄리아는 내심 그를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좀 허름한 여관집인데다가 장사도 잘 안되는지 1층에서 손님을 받는 주인의 태도는 시큰둥하기 그지 없었다.

"네명이서 함께 묵을 방이 필요합니다."

레나드 역시 딱딱하기 이를데 없는 말투로 주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주인은 감기에 걸렸는지 이따금씩 훌쩍 거리며 퉁명스런 말투로 대답했다.

"3층 끝방 쓰슈. 오실버요."

"공화국 화폐로 합시다."

레나드의 말에 주인이 눈을 살짝 치켜 뜨고 레나드를 살펴 보더니, 이내 다시 퉁명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5천레나주슈."

레나드가 품안에서 지폐 다섯장을 꺼내어 내밀자, 주인이 받아 금액을 확인한 뒤, 뒤편에서 서서 기다리고 있는 시종에서 고개를 끄덕거리자, 시종이 후다닥 달려왔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시종은 친절한 태도로 레나드의 짐을 들어주며 먼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섰다.

레나드가 일행과 함께 3층으로 올라서자 여관 시종이 한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방은 이 여관에서도 거의 제일 큰 방에 해당하는 방이었고, 레나드 일행이 천천히 방안에 들어섰다.

"그럼 쉬시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안내해준 여관 시종이 말을 마치고 돌아가자, 모두들 짐을 내려놓고 방안을 살폈다.

좀 넓은 방이었고, 큼지막한 침대가 하나 놓여있었지만 줄리아가 보기엔 좁고 허름할 뿐이었다.

왜 이 방에 네명이 다 들어오는지, 침대는 왜 또 하나뿐인지, 이렇게 너저분한 곳에서 자야하는지 등등 줄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걸 모르는 레나드는 태연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일단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새벽에 바로 출발한다. 내일중으로 소크테리아항구로 가서 배편을 구해, 라니아로 갈거니까 서둘러 눈 좀 붙여놔라."

그렇게 말한 레나드는 말을 마치고 나서 대충 옷가지를 집어 던지다 시피하고는 침대위에 풀썩 누워버리자, 다른 하인 둘이 한쪽에 놓여진 이부가지를 가져와 대충 바닥에 깔고 누웠다.

줄리아는 마음속으로 따듯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자기 침대위에서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아니 하다못해 각자 방 하나씩 잡고 자라고 하면 아쉬운대로 좀 씻고 잤을 거 같은데, 난생 처음으로 남자들 틈에 섞여 씻지도 못한 체 바닥에서 자야할 판이었다.

지코와 센 옆자리에 어정쩡하게 눕긴 했지만, 걱정도 걱정이고 씻지도 않고 자는 하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원래 하인들은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땀냄새에 당장이라도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다.

마지못해 잠자리를 청하는 줄리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지저분한 것들이랑 오래다니다간 제명에 못살겠다고...





수풀길을 내달리던 말들이 어느 갈랫길에서 일제히 멈춰섰다.

말들의 거친 울음소리가 수풀너머로 울려퍼지고, 앞장서 달리고 있던 올렌이 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포트리아 찻잎이 여기서 끊어졌다. 다 떨어뜨린 모양이군."

올렌이 길을 살피니, 한쪽 길은 컨소울길드로 향하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먼길이고, 다른 한길은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보이는 길이었다.

"이곳에서 묵은 모양이군. 가자."

일행들이 서둘러 마을로 향하여 들어서니, 몇몇 행인들이 보일 뿐 늦은 시간이라 조용하기 이를데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일제히 말을 타고 기세 등등하게 들어서는 이들을 보고 놀라 몸을 숨기기까지 했다.

"컨소울길드 일행이 어디서 묵는지 알아보도록 해라."

올렌의 지시에 몇몇 수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마을을 살피고 돌아온 수하들이 카누야에게 보고하고, 보고를 모두 수집한 카누야가 올렌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몇몇 여관에서 컨소울길드 것으로 보이는 말과 마차를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묵는 것이 확실합니다."

올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원이 많은 만큼 한곳에서 묵지 못하고 나누어서 묵은 모양이구나."

"어떻하죠? 이 시간에 여관들을 뒤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부관인 카누야가 말하자, 리사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무리해서 여관들을 뒤지다가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하인 복색을 한 아가씨 혼자서 길드 일행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을 테고, 내일 아침이 되면 자연스레 모두 모일 테니, 오늘은 우리도 이곳에서 묵고, 내일 길드 사람들이 모이면 그때 아가씨를 찾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생을 찾자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수는 없는 일. 묵을 곳을 찾아보고, 인원들을 나누어 각 여관들을 돌아가며 감시토록 해라. 내일 아침이 되면, 줄리아를 찾아서 본가로 신속히 복귀한다."

"존명."

일행은 곧바로 나뉘어져 묵을 곳과 각 여관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올렌은 방향을 바꾸어 이안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네도 오늘은 이곳에서 쉬게. 내일 아침 줄리아를 찾는대로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세나."

이안이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예. 인원이 많으니, 저는 수하들과 함께 따로 묵을 곳을 찾겠습니다."

"그러게."

이안이 곧 일행과 함께 다른 곳으로 묵을 곳을 찾아 움직이고, 올렌은 카누야와 리사를 따라 어느 여관으로 향했다.

"그리 큰 마을이 아니니, 마을 전체를 4인 1조로 하여 2시간마다 돌아가며 경계서도록 했습니다."

카누야가 다가와 보고하자, 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괄량이 동생때문에 다들 고생이 많구나. 내 이번에 이 녀석을 데리고 가면 따끔하게 혼내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곳에 당연히 줄리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별다른 걱정없이 그 마을에서 묵었다.

한편, 줄리아는 노곤함에 지쳐 잠들었지만, 누가 자기얘기 하는 것을 아는지 귀를 후벼파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잤을까, 꿀맛같은 잠에 한참 빠져들었을 때, 누군가 줄리아를 흔들어 깨웠다.

"줄리앙... 줄리앙... 일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조심 부르는 목소리였다.

"으음...뭐야? 질렌, 물부터 데워놔...."

줄리아가 잠결에 중얼거리며 몸을 뒤척이자, 그녀를 깨우던 센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뭐라는거야? 야, 줄리앙, 얼른 일어나!"

줄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더니, 돌연 눈을 확 부릅뜨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뭐야?"

줄리아가 갑작스레 일어나자 센이 화들짝 놀라해 하며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다.

"뭐가 뭐야? 오늘 새벽에 출발한다고 어제 못들었어? 어서 짐챙겨..."

센은 줄리아가 깬 것을 확인하고는 자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만, 돌아서서 자기 짐을 챙기던 센은 줄리아를 흔들어 깨우던 손의 촉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줄리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과 함께 얼른 이부자리를 제껴놓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짐 챙겨야지."

센이 포트리아 찻상자를 들어주려 하자, 줄리아가 황급히 만류하며 말했다.

"아아아아~, 아냐아냐, 하...하하... 내가 들게."

센이 포트리아 찻상자를 들어보면 그 상자가 빈 것을 알테고, 그럼 입장이 난처할 수도 있었다.

일단 항구에 간다니, 헤어지더라도 항구까지는 가서 헤어지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그러고나면 줄리아는 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옷도 마음에 드는 옷으로 갈아입고, 더이상 하인 행색도, 또 남장도 하지 않고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줄리아는 그런 생각에 웃으며 자기 짐을 챙겨 등뒤로 메었고, 센은 어깨를 한번 으슥해 보이고는 자기 짐을 챙겨 들었다.

[ 기왕이면 드레스로 입어야지, 이쁜 드레스 히히 ]

그런 생각을 하며 짐을 챙겨든 줄리아 앞에 레나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일어났는지 세안까지 마친 레나드는 여전히 빛나는(?) 외모를 자랑하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 역시 잘 생겼어. 라니아로 간다고 했는데... 거기까지만 따라갈까... ]

줄리아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레나드를 바라보지만, 정작 레나드는 그런건 알지 못한 체

"준비됐으면 가자."

레나드의 말에 하인들이 고개숙여 대답을 대신하고, 줄리아도 황급히 센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푸르스름한 여명이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를 알리는 새벽녘, 레나드 일행은 갈길을 재촉하며 마을 밖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소크테리아 항구까지는 거리가 꽤 되니까 서둘러 가자."

레나드의 말에 하인들이 발길을 재촉하자, 줄리아도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항구에 도착하면 어디로 여행을 떠날지, 줄리아는 기대를 한가득 품고 레나드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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