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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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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25
읽기 시간 예측: 약 10.12분

55화 - #24


다시 한번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 이후에, 나래와 백하도령은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여긴 어디죠?"

나래가 묻는 말에, 백하도령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기억 속, 심경의 변화가 가장 컸던 기억, 가장 아팠던 기억을 꺼내었다."

나래가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병원의 복도 풍경인 것 같았다.

"병원인가 봐요. 그녀는..."

나래는 현준 아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몇몇 사람들이 내리는 와중에 아주 낯이 익은 듯한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내려섰다.

"현준 씨 아내예요."

나래는 그 여자아이가 바로 현준의 아내임을 알 수 있었다.

나래는 현준의 아내를 쫓아갔다.

현준 아내는 익숙한 듯 병원 복도를 따라 걷다가, 어느 병실 앞에 이르렀다.

그런데 열린 병실 너머로 누군가를 보더니, 빈자리 커튼 뒤로 얼른 몸을 숨겼다.

그녀가 몸을 숨긴 곳 너머에는 누워있는 환자 곁으로 중년이 조금 지나 보이는 남자가 서서, 병원 의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당분간은 약물치료와 함께 물리치료도 병행하셔야 합니다. 일단 가족분들의 노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의사의 말에 중년 남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치료가 된다는 거요, 안된다는 거요?"

남자의 물음에 의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래 뇌졸중이란 병 자체가 쉬이 치료되지 않는 병입니다. 낫는다 해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써는 낫기를 바라면서 치료하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의사의 말에 남자는 인상을 썼다.

"낫지도 않을 병에 돈을 갔다 쓰라는 소리 아냐? 그딴 거면 됐소."

남자의 말에 의사의 표정이 굳어졌고, 의사는 인상을 쓴 체 총총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누워있는 중년 여인을 내려다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어도 더럽게 죽는 구만. 갈 거면 깔끔하게 가야지,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남자의 잔인한 말에, 커튼 뒤에 숨어있는 현준 아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엔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고,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체 눈물을 흘렸다.

남자도 이내 총총히 병실을 나섰고,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현준 아내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어머? 벌써 나오시는 거예요?"

남자에 비해 훨씬 어려 보이는 한 여인이 나오는 남자를 보며 놀라 묻자, 남자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한없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 뭐 별거 있나. 오늘내일하는 사람, 언제 갈지 보는 거지. 이 의사 놈들이 어떻게든 치료비 받아먹으려고, 낫지도 않을 사람 데리고 별별 걸 다 하라고 해. 나쁜 놈들."

남자의 말에 여자는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깐요. 의사들이 순 엉터리예요. 괜한데 돈 쓰지 마요."

"나도 그럴 생각이야. 입원비도 아까워 죽겠구만."

여자가 남자의 팔에 매달려 팔짱을 끼며 아양을 떨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우리 맛있는 거 먹고 가요. 네?"

여자의 애교에 남자는 금세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여기 뭐 맛있는 것 좀 있나?"

"이 근처 설렁탕 기가 막히게 하는 곳이 있다던데, 우리 거기 가요."

"설렁탕? 좋지."

남자와 여자가 떠나가며 나누는 대화를, 숨어있는 현준 아내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겨듣고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체 노려보고 있다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밖으로 나와 누워있는 중년 여인의 병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 여인을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숙여 여인의 품에 안기듯이 얼굴을 파묻고는 엉엉 통곡하기 시작했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나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뇌졸중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여인은 현준 아내의 엄마였고, 아까 그 남자는 아빠인 것이다.

어린 시절 아픈 엄마를 놔두고 내연녀를 보란 듯이 만나고 있는 아빠에 대한 증오가 현준 아내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어린 시절의 이 기억이... 그녀의 내면을 갉아먹고 있는 건가요?"

나래의 물음에 백하도령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것 같구나. 아비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그녀에게 끝없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들고 있다."

"끝없는 의심... 그럼... 그녀는 의부증을 앓고 있는 거군요."

잠시 생각하던 나래가 의혹 어린 표정으로 백하도령을 보며 물었다.

"그럼 현준 씨는요? 대체 어디 간 거죠?"

백하도령은 굳은 표정으로 나래를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처음... 그의 기를 찾을 수 없을 때부터 예상했었다."

"네?"

"그는... 아마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구나."

백하도령의 답을 들은 나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 그게 무슨... 무슨 소리예요?"

"다시 이 장소의 기억을 되돌아보자... 이 장소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백하도령의 말을 끝으로 주위에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니, 어느새 다시 현준 아내가 잠들어 있던 그 아파트 허공에 떠 있었다.

"다시 장소의 기억으로 바꾼 건가요?"

"그렇다. 저길 보거라."

그가 가리키는 곳은 아파트 옥상이었고, 옥상 문을 열고 초췌한 표정의 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 있나 봐요."

나래는 그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그는 초췌한 표정으로 건물 옥상에 서 있다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나래가 창백한 표정으로 백하도령을 돌아보았으나, 백하도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 현준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라고 해줘요."

나래의 간곡한 부탁에도, 백하도령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래가 다시 현준을 봤을 때, 현준은 아파트 옥상 난간에 올라서고 있었다.

"안돼, 그러지 마!"

나래가 소리쳐 보지만, 기억 속의 그는 듣지 못했다.

그는 서글픈 표정으로 위태롭게 서 있었다.

위태롭게 서 있는 그는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신호음이 들리다가, 신호음이 끊기며 녹취 모드로 넘어가자 흐느껴 울며 말했다.

"엄마, 미안해... 미안해, 엄마... 서찬아... 미안해..."

그게 끝이었다. 그걸 끝으로 그는 아파트 아래로 몸을 던졌고, 나래는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안돼!"

소용없었다. 그의 몸은 떨어져 내렸고, 옥상에는 그가 마지막 통화를 하고 던진 핸드폰이 떨어지며 깨진 액정 조각이 흩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여왕에게 말해야 할지 암담할 따름이었다.

백하도령은 굳은 표정으로 이 모든 모습을 보고 있다가, 울고 있는 나래를 보며 말했다.

"나와 함께 그를 만나러 가자."

울던 나래가 고개를 들어 백하도령을 바라보았다.

"그를 만나러 간다구요? 어디로요?"

"죽은 이들이 가는 곳. 명계다."

"그곳에 가면... 그를 되살릴 수 있나요?"

백하도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다. 다만, 그가 왜 죽었는지는 알 수 있겠지. 적어도 그가 어떻게 해서 죽게 됐는지 알아야, 여왕에게 이야기해줄 것이 아니냐."

"하지만... 이제 곧 날이 밝을 텐데... 우릴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명계 또한 시간의 개념이 없는 곳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명계는... 어떻게 가나요?"

"그거라면 염려 말거라. 나는 신(神)이니, 명계에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래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을까요? 전 산 사람인데,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간다니 좀 무서워요."

백하도령이 나래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걱정 말거라. 이제는 너도 어엿한 신(神)이니, 명계의 어느 누구도 너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네가 가진 부정의 힘은, 그 어떤 힘보다도 강한 힘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백하도령의 말에 나래가 씩씩하게 웃어 보이자, 백하도령은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래는 지체없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손을 통해 따스한 백하도령의 온기가 느껴지자, 그녀의 몸이 백하도령을 따라 어딘가로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둘은 땅속으로 파고들듯 날아가, 어둠을 뚫고 어딘가로 한참을 내려가더니, 이어 시커먼 어둠이 끈적하게 늘어지는 기괴한 곳에 이르렀다.

백하도령이 나래를 데리고 그 끈적한 어둠 너머로 향하니, 저 멀리 검고 커다란 동굴 입구가 보였다.

"아..."

나래는 그것을 알아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저 밑으로는 익숙한 도깨비 버스가 달려가고 있었다.

"여길 다시 오네요."

나래의 말에 백하도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명계에... 온 적 있느냐?"

나래가 그를 슬며시 흘겨보며 말했다.

"음... 그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명계에는 어찌 올 수 있었느냐?"

"뭐... 귀수산 청의동자님이 보내주셨죠. 아토님하고 초코님 덕에 다녀올 수 있었어요."

"아토와 초코라... 그들이 아는데 내가 모르는 일이라니... 대체 언제 다녀온 것이냐?"

백하도령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괜스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얘기하자면 길어요. 얼른 볼일이나 봐요."

백하도령은 그대로 날아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을 빠르게 날아서 지나가니, 나래는 아토와 함께 힘겹게 지나갔던 일이 떠올랐다.

"이렇게 쉽게 지나갈 수 있구나."

나래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사이, 백하도령은 동굴 너머의 세상으로 나와, 어느새 무지개다리를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웬일로 그슨대들이 안 보이네요?"

나래의 말에 백하도령이 살짝 웃어 보였다.

"본디 공포심을 먹고사는 것들이라, 신(神)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진 것들이다."

나래는 백하도령의 말을 들으며 "아하..." 하고는 왜인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백하도령은 나래가 왜 그러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느새 둘은 거대한 문 앞에 다다랐고, 그곳을 지키는 산만한 덩치의 사내 앞에 이르렀다.

"아... 인정."

나래의 말에 백하도령이 그녀를 보자, 나래가 백하도령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인정이 있어야 지나갈 수 있어요. 인정이 없으면 들여보내 주지 않아요."

나래의 말에 백하도령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성큼성큼 거구의 사내 앞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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