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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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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05
◀ 이전화 목차
읽기 시간 예측: 약 9.71분

2화 - #3


아득했던 의식이 조금씩 모여들어 덩어리를 이루자, 무거웠던 눈꺼풀이 힘겹게 들어 올려졌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짙은 파란색의 하늘과 짙은 경계선의 흰 구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한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똘망똘망한 눈은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희고 맑은 피부는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것만 같은 용모였다.

산들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에 뒤로 꼭꼭 묶어놓은 머리카락 중 일부가 빠져나와 자유로운 흔들거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신이 드느냐?"

소년의 맑고 깨끗한 음성이 귓속을 간지럽히듯 들려왔다.

나래는 눈살을 찌푸리며 흐릿한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고, 동시에 나이 어린 소년이 자신을 향해 노인네 같은 어투로 말하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나래는 자신이 누워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먼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래가 일어나려 하자, 나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소년이 뒤로 물러섰고, 자리에 앉은 나래는 얕은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내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주위는 산으로 보이는 산자락 그 어디쯤에 놓여있는 길 한가운데였고, 길옆으로는 작지 않은 내천 하나가 졸졸 흐르고 있었으며, 눈앞에 소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나래가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소년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기억이 안 나느냐?"

아까부터 할아버지들이나 할것 같은 말투의 소년을, 나래는 눈살을 찌푸리며 보았다.

곱게 다려진 듯, 주름이 거의 없는 하얀색 옷에, 소매 끝과 발끝, 그리고 허리춤에는 금빛으로 장식된 띠를 두르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을 하였지만, 키가 나래보다 컸고 사내아이인가 의심스러울 만큼 붉은 입술이 반짝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에서나 볼법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어디 사극 촬영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다시 한번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지만, 사람은 커녕 문명에 기인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얘, 여기가 어디니?"

나래가 소년을 보며 묻는 말에, 소년은 방긋이 웃는 표정으로 답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어제저녁에 너는 각군이에게 잡혀가고 있었다."

소년의 말에 나래는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어린애가 아까부터..."

그러다가 나래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 아... 목소리가..."

손으로 목을 누르며 목소리를 확인한 나래는 뭔가 이상함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원래도 딱히 거친 손은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달랐다.

이렇게 작고 아담한 손이 내손이라니... 나래는 놀란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져 보려 했다.

맙소사. 옷도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소년이 입고 있는 옷과 비슷한 느낌의 옷을 자신도 입고 있었다.

놀라 어안이 벙벙한 나래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흐르는 냇물 소리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후다닥 냇가로 달려간 나래는 냇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입에서 저절로 "헉!" 하는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열댓 살이나 되었을 것 같은 소녀가 수면 위로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은 자신의 중학생 시절 모습을 고스란히 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나래는 어려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믿기지 않는 지금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볼을 꼬집어 보지만, 아픈 통증만 느껴질 뿐이었다.

"꿈.... 꿈 아니야? 아픈데... 이럴 리가 없는데..."

나래가 혼란스러움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고있자, 그런 나래 곁으로 소년이 다가왔다.

"괜찮은 것이냐? 혹, 기억을 잃어 당황스러운 것이라면 내가 도울 것이니, 염려치 말거라."

소년의 말에 나래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당장 몇 살이냐고 따져 물을까 하다가, 지금 자신의 용모대로라면 저렇게 말하는 것이 이해되기도 했다.

"저기... 제가 누구한테 잡혀가고 있었다고 했죠?"

나래가 묻는 말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각군이에게 잡혀가고 있는 것을, 내가 그들을 내쫓았다."

나래는 흐릿한 기억 속에, 절에서 자신을 잡아가려 했던 괴물들을 떠올렸다.

덩치가 산만했던 것 같은데, 이런 조그마한 소년이 자신을 구했다니,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그... 절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절? 절에 있었느냐?"

"...네, 뭐..."

자신도 말을 놓을까 싶으면서도, 이 소년의 행색이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아, 괜스레 말이 쉬이 놓아지지가 않았다.

"그... 각군이란 괴물이 어느 쪽에서 오고 있었나요?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소년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각군이는 한달음에 백리를 가는 녀석이니, 어디를 얼마만큼 가야 할지 모른다면, 원하는 곳에 당도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소년의 말에 나래는 "아..." 소리를 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나래의 표정을 살피다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내 너를 도울 것이니 너무 염려치 말거라. 네가 원하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마."

선뜻 선의를 내비치는 소년을 보며, 비록 반말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본인 말로는 각군인지 뭔지 하는 괴물도 내쫓았다고 하니, 어쩌면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제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래의 푸념 섞인 말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혹, 네가 있던 곳이 어떤 곳인지 내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나래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떠올랐다.

현대 사회를 이 소년에게 어찌 알려줘야 할까? 그리고 정작 이곳이 어딘지 모르니,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인지도 몰랐다.

"아!"

나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보다... 여기가 어딘가요? 대체 어느 나라죠? 대한민국은 맞는 건가요?"

나래의 연이은 질문에 소년은 큰 눈을 껌뻑거리며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대한... 민국?"

"네. 한국이요. 한국말하고 있잖아요?"

나래가 당연하다는 듯이 묻는 말에,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답했다.

"글세, 나는 네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다만, 이곳은 선인도(仙人都)의 외각인 매산(魅山)골 마을 자락이다. 선인들이 머무는 소선기(小仙基)가 머지않은 곳에 있으니, 일단 저녁이 되기 전에 그곳으로 먼저 가보자꾸나."

소년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나래는 멍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대체 선인도는 뭐고, 매산골은 무엇이며, 선인들이라니....

"저... 저기, 그러니까... 여기가 그러니까... 저, 하, 한국이 아니란 건가요?"

"한국이란 곳을 나는 알지 못하니, 그곳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한국이 아니면 어디죠? 나라 이름이 어떻게 되죠?"

"나라?"

"아니... 저기... 그러니까, 여기 사, 사람 사는 곳은 맞는 거죠? 저기..."

나래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대체 조선시대 같은 이곳은 어디며, 자신은 왜 어려진 것일까?

시공을 뛰어넘어 다른 차원에 오기라도 한 걸까?

4차원 같은 곳에 떨어진 걸까? 문득 버뮤다 삼각지역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소년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 다음, 당황해하는 나래를 바라보았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가야 한다. 이제 곧 매산골의 도깨비들이 나올 시간이다."

도깨비라니,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나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자, 소년이 다시 말했다.

"선인도는 금왕의 통제에서 벗어난 곳이니,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소선기까지만 가도, 당장 위태로움은 없을 것이니, 어서 나를 따라 가자구나. 네가 돌아갈 곳은 그 이후에 찾아봄이 좋을 듯하다."

"도, 도깨비들이 나온다구요?"

"그래, 도깨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 매산골을 위시하여 선인도를 둘러싸고 있는 각각의 마을에는 요괴부터 삿된 것들까지, 인간을 탐하는 것들이 많으니,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나래는 소년의 말에 덜컥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도깨비도 무서운데 요괴까지 있다니, 아직도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으면서도,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래의 되물음에 소년은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게 깔린 붉은 노을을 보면서, 소년은 뭔가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지체하면 늦는다, 서두르자."

소년은 갑자기 나래의 손을 덥석 움켜잡더니,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고, 소년에게 이끌린 나래는 저항하지 못한 체 이끌려 갔다.

"자, 잠깐만요... 아니 얘가..."

나래가 놀라 뭔가 말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나래의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나래를 잡고 달리는 소년은 한줄기 바람처럼 내달리고 있었고, 나래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엄청난 광경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어느덧 초록으로 물든 나무들이 발아래 펼쳐지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덜컥 겁이 났다가, 마치 새처럼 자신이 날고 있는 것을 느끼니, 어쩐지 묘한 상쾌함이 가슴속을 뻥 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제야 느껴지는 짙은 풀내음은 발밑의 숲에서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듯했고,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 따로 없었다.

"우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은 나래는 저 아래 펼쳐진 수풀 사이를 뛰어노는 토끼와 멧돼지 가족, 사슴이나 고라니 따위의 것들을 내려다보며 어느새 하늘을 날아오른 두려움 같은 것은 잊어버렸다.

머릿속 가득 차 있어 지워지지 않고,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수많은 고민들이,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잊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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