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28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은 아침이 찾아왔다.
그 아침은 뼈가 시리도록 차디찬 공기와 냉기를 품은 냉혹한 바람으로 현준 아내를 맞이했다.
넋을 놓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현준 아내는 전화벨이 울리는 자신의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천히, 아주 느린 동작으로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저 건너로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남부경찰서 서동혁 형사입니다.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
현준 아내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 표정만큼이나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
"저희가 수사협조..."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공허하게 들려왔다.
경찰 조사를 위해 몇 차례나 경찰서로 출석해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번번이 거절하자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는 그 형사의 말을 간신히 알아들었다.
더 이상 지체하면 자기들이 강제로 연행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어렵게 꺼내는 그 형사에게, 현준 아내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갈게요."
형사는 말을 하다 말고 현준 아내의 대답에 "네?"하고 반문했다.
여느 때 같으면 이상한 괴변으로 길길이 날뛰었어야 할 현준 아내의 반응이 오늘은 상이하니, 형사는 놀랄 따름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현준 아내는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옷장 문을 열어, 걸려 있는 몇 안 되는 옷들 중에서 가장 아끼던 외출복을 꺼내 들었다.
벌써 10년도 훌쩍 넘은 그 정장은 대학교 졸업하면서 당시 연애 중이던 현준이 사줬던 옷이었다.
현준 아내는 그 옷을 꺼내 들고 옷방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차분하게 화장을 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체, 마치 매일같이 겪어왔던 일상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현준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작은 가방 안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넣고 있었다.
지갑을 열어 신분증이 있는지를 확인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신분증을 꺼내보았다.
만든 지 제법 오래됐는지, 빛바랜 신분증 사진 옆으로 그녀의 이름인 '서현화'가 적혀 있었다.
나래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 그녀는 오랜만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현준 씨랑은 대학교 때 만났어요. 둘 다 이름 가운데 현자가 있어서, 친구들이 '투현 커플'이라고 부르곤 했었는데..."
그녀는 말끝을 흐리고는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경찰서에서 오라고 하네요. 다녀올게요."
현화가 그렇게 말을 하며 나래의 눈길을 피해 서둘러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거실에는 넋을 놓고 앉아있는 여왕이 그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체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나래가 백하도령에게 물었다.
"제가 따라가 볼까요?"
백하도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녀가 다녀오고 나면, 우린 그녀의 회상을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밖으로 나온 현화는 처음에는 운전을 할까 하다가, 운전을 할 자신이 없어 택시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가 향하는 경찰서는 집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고,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방문 목적을 간단히 설명한 다음 서동혁 형사가 있는 수사과 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작달막한 키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그는 마지못한 듯 애써 친절함을 가장한 인사를 건네 왔다.
그리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선 현화는 작고 좁은 취조실에 들어서야 했다.
맞은편에 앉은 서동혁 형사는 노트북을 펼쳐 놓고 늘 있는 일인 듯, 지루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제부터 제가 물어보는 내용은 형식적인..."
그는 마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내용을 어쩔 수 없이 설명해야 하는 사람인양, 성의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정한 톤의 목소리는 감흥 없이 귓가에 날아들었고, 이미 충분히 건조해진 현화의 마음을 더욱 메마르게 만들고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윤현준 씨와는 언제 만나셨습니까?"
현화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로 조금 부담스러울 만큼 적극적으로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눈가에 선했다.
"마지막 대화를 나눈 건 언제였죠?"
마지막... 마지막이 언제였을까, 언제 마지막이었을까, 무엇이 마지막이었을까, 마지막에 나는... 무엇을 했었던가...
현화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벌써부터 히끄무레해진 기억은 정말로 잊은 것인지, 잊고 싶어 감추어 두고 싶었던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거침없이 불어오는 저항의 바람을 뚫고 이읔코 비밀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 같은 그녀는, 그 상자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억들에 온몸이 전율하듯 떨려왔다.
- 내 자식 내놔, 내 자식! 니 자식 말고 내 자식 내놓으라고!
- 또 바람 폈지? 이번엔 또 누구야? 이 번호 누구냐고!
- 차라리 죽어 버려, 죽어!
누가 했던 말일까? 어떤 사람이 한 말일까, 현화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쥐었고, 굳어버린 표정 위로 눈물이 흘러 떨어져 내렸다.
고통스러워하는 현준의 얼굴이, 슬퍼하는 그 사람의 눈빛이,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이 떠올라 버렸다.
"으으...."
대답하지 못한 현화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움켜 잡은 체, 어떻게든 참아내 보려 안간힘을 쓰는 듯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슬픔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진정하시고, 마지막으로 한 대화가 언제인지 기억해 보시죠."
사무적인 목소리로 건네 오는 서동혁 형사의 목소리에, 현화는 애써 슬픔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이가 죽기... 이틀 전이요."
"자녀분인 서찬군이 사망했을 때요?"
서찬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번엔 참기 힘든 슬픔을 있는 힘껏 막아내느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네...."
간신히 그 한마디를 대답하고, 눈물이 쉴 새 없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서찬군의 몸에서 다량의 세제가 나온 건 알고 계시죠? 조사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셨죠?"
현화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터져 나오는 슬픔을 막을 길이 없었기에, 손으로라도 막아야 했다.
서찬의 분유에 세재를 타는 자신의 손이 떠올랐다.
소리치듯 우는 그 자그마한 아이를 죽이려고 표독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자신이 떠올랐다.
"끄으윽...."
참아내지 못한 슬픔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무슨 의미시죠?"
서동혁 형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뭔가를 발견한 듯 집요하게 물었다.
"방금 전 그건 무슨 의미시죠? 어떤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으신 겁니까?"
"제가...."
차마 할 수 없는 그 말을, 현화는 간신히 꺼내놓았다.
"...했어요..."
서동혁 형사의 눈빛이 번득거렸다.
"본인이 하셨다구요? 자백하시는 겁니까? 지금 하신 말씀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현화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대답을 할 수 없는 그녀를 보며, 서동혁 형사는 빠르게 노트북에다가 뭔가를 입력했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오늘 날짜와 자백을 한 현재 시간을 알려주며, 다시 한번 자백 여부를 확인했다.
현화는 마찬가지로 대답 없이 간신히 고개만 끄덕여 보였고, 서동혁 형사는 취조실 천정 구석에 설치된 CCTV를 힐끔 보고는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윤현준 씨와 마지막 대화 또는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 없으신가요? 혹은 그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것 없으신가요?"
현화는 이후로 계속 터져 나오는 울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서동혁 형사는 그녀가 마음을 바꿔 서찬의 사망에 대해 자백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해서,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오늘 조사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내일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내 모셔올 테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지요."
서동혁 형사는 취조를 중단하고, 현화를 취조실에서 데리고 나왔다.
현화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그는, 그녀가 힘겹게 떠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 젊은 형사 한 명을 향해 손짓으로 불렀다.
"쫓아가 봐. 혹시라도 엄한 짓 못하게, 잘 감시해."
젊은 형사는 "네."하는 짧은 대답을 뒤로하고 서둘러 현화의 뒤를 쫓았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지도 모르는 체, 현화는 터벅터벅 힘겨운 걸음을 내딛었다.
현준과 서찬의 죽음이 눈앞에 현실이 되어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음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무념(無念)의 상태에서 그녀는 넋 나간 사람처럼 그저 걷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그녀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다다랐다.
그녀는 현준이 뛰어내렸던 아파트 옥상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아파트 입구에 있는 마트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쫓아 마트로 들어간 젊은 형사는 티 나지 않게 마트 안을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내 현화가 물건을 한 아름 사 가지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나가자, 형사는 재빨리 다시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쪽으로 가는 현화를 보면서 젊은 형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보고를 하기 위해 서동혁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트에서 고기랑 쌈채소 같은 걸 잔뜩 사서 집으로 갔습니다. 지금 혼자 사는 걸로 아는데, 혼자 먹을 양이 아닌 거 같은데요?"
- 알았어, 일단 밖에서 대기해.
"네."
현화는 장을 본 것들을 품에 꼭 안고 집에 들어섰다.
집안에 들어서니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나래, 백하도령, 그리고 여왕이 거실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가자, 나래가 놀라 얼른 그 뒤를 쫓았다.
"뭘 이렇게 사와?"
여왕이 굳은 표정으로 묻는 말에, 현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머니 계신데... 제대로 된 식사라도 대접해야죠."
여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그딴 거 먹고 싶다고 했니?"
여왕이 눈을 부릅뜨며 따지듯 건네는 말에, 현화는 받아치는 기색 없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래도... 밥이라도 따뜻하게 대접하기를... 현준 씨도 바랄 것 같아서요."
현준의 이름이 거론되자, 여왕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몸을 돌려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현화는 잠시 머뭇거리듯 서 있다가, 장을 봐온 것들을 가지고 부엌으로 향했다.
나래가 걱정스레 쫓아오자, 현화는 나래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준비할게요."
나래는 그런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이는 그녀는, 흡사 무채색의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가, 존재 자체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자신이 힘을 잘못 사용한 탓이란 생각에,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아침은 뼈가 시리도록 차디찬 공기와 냉기를 품은 냉혹한 바람으로 현준 아내를 맞이했다.
넋을 놓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현준 아내는 전화벨이 울리는 자신의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천히, 아주 느린 동작으로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저 건너로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남부경찰서 서동혁 형사입니다.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
현준 아내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 표정만큼이나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
"저희가 수사협조..."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공허하게 들려왔다.
경찰 조사를 위해 몇 차례나 경찰서로 출석해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번번이 거절하자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는 그 형사의 말을 간신히 알아들었다.
더 이상 지체하면 자기들이 강제로 연행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어렵게 꺼내는 그 형사에게, 현준 아내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갈게요."
형사는 말을 하다 말고 현준 아내의 대답에 "네?"하고 반문했다.
여느 때 같으면 이상한 괴변으로 길길이 날뛰었어야 할 현준 아내의 반응이 오늘은 상이하니, 형사는 놀랄 따름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현준 아내는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옷장 문을 열어, 걸려 있는 몇 안 되는 옷들 중에서 가장 아끼던 외출복을 꺼내 들었다.
벌써 10년도 훌쩍 넘은 그 정장은 대학교 졸업하면서 당시 연애 중이던 현준이 사줬던 옷이었다.
현준 아내는 그 옷을 꺼내 들고 옷방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차분하게 화장을 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체, 마치 매일같이 겪어왔던 일상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현준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작은 가방 안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넣고 있었다.
지갑을 열어 신분증이 있는지를 확인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신분증을 꺼내보았다.
만든 지 제법 오래됐는지, 빛바랜 신분증 사진 옆으로 그녀의 이름인 '서현화'가 적혀 있었다.
나래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 그녀는 오랜만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현준 씨랑은 대학교 때 만났어요. 둘 다 이름 가운데 현자가 있어서, 친구들이 '투현 커플'이라고 부르곤 했었는데..."
그녀는 말끝을 흐리고는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경찰서에서 오라고 하네요. 다녀올게요."
현화가 그렇게 말을 하며 나래의 눈길을 피해 서둘러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거실에는 넋을 놓고 앉아있는 여왕이 그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체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나래가 백하도령에게 물었다.
"제가 따라가 볼까요?"
백하도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녀가 다녀오고 나면, 우린 그녀의 회상을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밖으로 나온 현화는 처음에는 운전을 할까 하다가, 운전을 할 자신이 없어 택시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가 향하는 경찰서는 집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고,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방문 목적을 간단히 설명한 다음 서동혁 형사가 있는 수사과 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작달막한 키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그는 마지못한 듯 애써 친절함을 가장한 인사를 건네 왔다.
그리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선 현화는 작고 좁은 취조실에 들어서야 했다.
맞은편에 앉은 서동혁 형사는 노트북을 펼쳐 놓고 늘 있는 일인 듯, 지루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제부터 제가 물어보는 내용은 형식적인..."
그는 마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내용을 어쩔 수 없이 설명해야 하는 사람인양, 성의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정한 톤의 목소리는 감흥 없이 귓가에 날아들었고, 이미 충분히 건조해진 현화의 마음을 더욱 메마르게 만들고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윤현준 씨와는 언제 만나셨습니까?"
현화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로 조금 부담스러울 만큼 적극적으로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눈가에 선했다.
"마지막 대화를 나눈 건 언제였죠?"
마지막... 마지막이 언제였을까, 언제 마지막이었을까, 무엇이 마지막이었을까, 마지막에 나는... 무엇을 했었던가...
현화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벌써부터 히끄무레해진 기억은 정말로 잊은 것인지, 잊고 싶어 감추어 두고 싶었던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거침없이 불어오는 저항의 바람을 뚫고 이읔코 비밀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 같은 그녀는, 그 상자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억들에 온몸이 전율하듯 떨려왔다.
- 내 자식 내놔, 내 자식! 니 자식 말고 내 자식 내놓으라고!
- 또 바람 폈지? 이번엔 또 누구야? 이 번호 누구냐고!
- 차라리 죽어 버려, 죽어!
누가 했던 말일까? 어떤 사람이 한 말일까, 현화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쥐었고, 굳어버린 표정 위로 눈물이 흘러 떨어져 내렸다.
고통스러워하는 현준의 얼굴이, 슬퍼하는 그 사람의 눈빛이,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이 떠올라 버렸다.
"으으...."
대답하지 못한 현화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움켜 잡은 체, 어떻게든 참아내 보려 안간힘을 쓰는 듯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슬픔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진정하시고, 마지막으로 한 대화가 언제인지 기억해 보시죠."
사무적인 목소리로 건네 오는 서동혁 형사의 목소리에, 현화는 애써 슬픔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이가 죽기... 이틀 전이요."
"자녀분인 서찬군이 사망했을 때요?"
서찬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번엔 참기 힘든 슬픔을 있는 힘껏 막아내느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네...."
간신히 그 한마디를 대답하고, 눈물이 쉴 새 없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서찬군의 몸에서 다량의 세제가 나온 건 알고 계시죠? 조사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셨죠?"
현화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터져 나오는 슬픔을 막을 길이 없었기에, 손으로라도 막아야 했다.
서찬의 분유에 세재를 타는 자신의 손이 떠올랐다.
소리치듯 우는 그 자그마한 아이를 죽이려고 표독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자신이 떠올랐다.
"끄으윽...."
참아내지 못한 슬픔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무슨 의미시죠?"
서동혁 형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뭔가를 발견한 듯 집요하게 물었다.
"방금 전 그건 무슨 의미시죠? 어떤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으신 겁니까?"
"제가...."
차마 할 수 없는 그 말을, 현화는 간신히 꺼내놓았다.
"...했어요..."
서동혁 형사의 눈빛이 번득거렸다.
"본인이 하셨다구요? 자백하시는 겁니까? 지금 하신 말씀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현화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대답을 할 수 없는 그녀를 보며, 서동혁 형사는 빠르게 노트북에다가 뭔가를 입력했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오늘 날짜와 자백을 한 현재 시간을 알려주며, 다시 한번 자백 여부를 확인했다.
현화는 마찬가지로 대답 없이 간신히 고개만 끄덕여 보였고, 서동혁 형사는 취조실 천정 구석에 설치된 CCTV를 힐끔 보고는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윤현준 씨와 마지막 대화 또는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 없으신가요? 혹은 그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것 없으신가요?"
현화는 이후로 계속 터져 나오는 울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서동혁 형사는 그녀가 마음을 바꿔 서찬의 사망에 대해 자백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해서,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오늘 조사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내일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내 모셔올 테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지요."
서동혁 형사는 취조를 중단하고, 현화를 취조실에서 데리고 나왔다.
현화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그는, 그녀가 힘겹게 떠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 젊은 형사 한 명을 향해 손짓으로 불렀다.
"쫓아가 봐. 혹시라도 엄한 짓 못하게, 잘 감시해."
젊은 형사는 "네."하는 짧은 대답을 뒤로하고 서둘러 현화의 뒤를 쫓았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지도 모르는 체, 현화는 터벅터벅 힘겨운 걸음을 내딛었다.
현준과 서찬의 죽음이 눈앞에 현실이 되어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음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무념(無念)의 상태에서 그녀는 넋 나간 사람처럼 그저 걷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그녀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다다랐다.
그녀는 현준이 뛰어내렸던 아파트 옥상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아파트 입구에 있는 마트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쫓아 마트로 들어간 젊은 형사는 티 나지 않게 마트 안을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내 현화가 물건을 한 아름 사 가지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나가자, 형사는 재빨리 다시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쪽으로 가는 현화를 보면서 젊은 형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보고를 하기 위해 서동혁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트에서 고기랑 쌈채소 같은 걸 잔뜩 사서 집으로 갔습니다. 지금 혼자 사는 걸로 아는데, 혼자 먹을 양이 아닌 거 같은데요?"
- 알았어, 일단 밖에서 대기해.
"네."
현화는 장을 본 것들을 품에 꼭 안고 집에 들어섰다.
집안에 들어서니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나래, 백하도령, 그리고 여왕이 거실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가자, 나래가 놀라 얼른 그 뒤를 쫓았다.
"뭘 이렇게 사와?"
여왕이 굳은 표정으로 묻는 말에, 현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머니 계신데... 제대로 된 식사라도 대접해야죠."
여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그딴 거 먹고 싶다고 했니?"
여왕이 눈을 부릅뜨며 따지듯 건네는 말에, 현화는 받아치는 기색 없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래도... 밥이라도 따뜻하게 대접하기를... 현준 씨도 바랄 것 같아서요."
현준의 이름이 거론되자, 여왕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몸을 돌려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현화는 잠시 머뭇거리듯 서 있다가, 장을 봐온 것들을 가지고 부엌으로 향했다.
나래가 걱정스레 쫓아오자, 현화는 나래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준비할게요."
나래는 그런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이는 그녀는, 흡사 무채색의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가, 존재 자체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자신이 힘을 잘못 사용한 탓이란 생각에,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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