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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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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25
읽기 시간 예측: 약 10.51분

60화 - #29


현화가 준비한 저녁 상은 푸짐했다.

소고기에 쌈채소는 물론, 평소 그녀가 즐겨하던 다양한 반찬들이 상 위에 올려졌다.

하지만 여왕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진수성찬 같은 밥상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가시방석 같은 식사 자리였다.

"막상 애를 낳고 키우면서,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했어요."

문득 현화가 꺼낸 이야기에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2인 식탁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올려놔야 할 것들이 많아지니까, 4인 식탁도 비좁더라구요."

그녀는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듯 씁쓸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때, 백하도령의 뒤쪽으로 강림차사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현화는 아직 강림차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 의식하지 못했고, 나타난 강림차사를, 백하도령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물었다.

"잠시... 그와 함께할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강림차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백하도령을 바라보았다.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비록...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그녀의 삶이 측은하기에, 작은 선물을 할까 합니다."

"선물이라 하심은..."

"마지막으로 가족과의 식사 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면 합니다."

백하도령의 말에 강림차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 말없이 서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그런 일이라면, 대별왕께서도 괜찮다 하실 것입니다."

강림차사의 대답에, 백하도령은 양손을 벌려 현화와 여왕의 손을 붙잡았다.

갑자기 자신들의 손을 붙잡은 백하도령을 의아한 듯 바라보던 두 사람 주위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주황빛으로 반짝 거리는 지난 기억의 회상이 주위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뀐 세상에 놀라 현화와 여왕이 눈을 껌뻑 거리는 사이, 그녀들 사이에 앉아있던 백하도령과 나래는 온데 간데없고, 그 자리에 현준이 앉아 있었다.

현준 맞은 편 자리에는 아직 제대로 앉지 못하는 아기들을 위한 유아용 의자에 서찬이가 앉아 있었다.

"뭘 또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화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준을 바라보았고, 현준은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예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어머니 오신다고 무리했구나? 이 사람이 이래요, 어머니."

이번엔 여왕 쪽을 바라보며 넉살을 부리니, 여왕은 그런 현준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현준아..."

그 사이 서찬은 양팔을 휘두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음마마마..."

이상한 소리를 내자, 현준이 자기 맘대로 해석했다.

"빨리 밥 달래, 얼른 먹자. 밥 식겠다."

현준이 너스레를 떨며 밥 한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자, 여왕도 현화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고 있는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두 사람도 식사를 시작했다.

현화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기분으로 눈앞에 놓인 유아식을 서찬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준이 흐뭇하게 웃자, 여왕이 쌈채소에 고기를 쌓서 현준에게 내밀었다.

"너도 얼른 먹어."

"에이, 엄마도 참... 내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내가 알아서 먹을게. 엄마나 많이 드셔요."

살아생전 보여줬던 현준의 넉살에, 쌈채소를 든 여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흐느끼듯 우는 여왕은,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애써 참아내며, 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얼른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었다.

현화는 서찬의 입에 유아식을 넣어주고, 양팔을 번쩍 들며 우물우물 거리는 서찬을 보며 웃음 반 울음 반을 터뜨려야 했다.

"미안해 서찬아... 엄마가 아프게 해서 미안해."

현화는 울면서 떨리는 손으로 서찬의 입에 다시금 유아식을 떠서 먹여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켜보지만,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세재를 넣던 자신의 손이 떠올라, 당장이라도 팔을 잘라내 버리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 지금 이 순간을 깨고 싶지 않았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 팔을 움직였다.

서찬의 입에 넣은 유아식이 입가에 흘러내리자, 자그마한 수저로 흐르는 유아식을 다시 서찬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우리 서찬이가.. 잘 먹네..."

그 말을 하며 다시금 현화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우리 서찬이가 얼마나 잘 먹는데~ 그치 서찬아~"

맞은편에 앉은 현준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서찬이를 바라보자, 서찬이 재밌다는 듯이 까르르 웃으며 양손을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입에 있던 유아식이 도로 튀어나와 버렸지만, 현화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은 멈출 새가 없는데도, 서찬의 앙증맞은 모습에 웃음이 절로 피어났다.

"엄마도 얼른 드셔요."

서찬이 고기반찬을 여왕 앞으로 밀어놓으며 건네는 말에 여왕은 우는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만 괜찮아. 너 많이 먹어."

그리고 비로소 맞은편에 앉은 현화가 눈에 들어왔다.

슬피 울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왕도 그녀에 대한 증오심이 사그러 들었다.

"아가... 너도 먹어라."

힘겹게 꺼낸 여왕의 한마디 말에 현화는 허물어지듯 울음을 터뜨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현화가 통곡하듯 울음을 터뜨리니, 여왕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울며 사과하는 현화를 보면서, 여왕도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에이~ 분위기 왜 이래? 엄마, 이 사람 착해요. 이 사람 나 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현준이 넉살 좋게 이야기를 꺼내며 여왕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자, 여왕이 손을 뻗어 현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 새끼... 이쁜 내 새끼...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엄마도 참... 누가 들으면 내가 갓난애기인줄 알겠다?"

현준의 말은 듣지도 않은 듯, 여왕은 울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 새끼 잃고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얼마나 아팠길래, 제 목숨을 끊었누... 내 새끼... 불쌍한 내 새끼..."

한편 기억의 회상 뒤편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백하도령과 나래 곁에,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강림차사의 오른손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윤현준의 영혼이 담긴 푸른 구슬이 빛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백하도령이 의아한 듯 강림차사를 바라보자, 강림차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백하도령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강림차사는 뭔가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펼쳐 푸른 구슬을 온전히 드러냈다.

여왕이 현준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그때, 현준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어느새 슬픔으로 가득 찬 현준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여왕의 손을 감싸듯이 잡았다.

"미안해요, 엄마."

현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며, 여왕 역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현준이 울며 사과를 하니, 여왕은 그의 손을 붙잡고 몸을 숙여 흐느껴 울었다.

현준의 시선이 현화에게로 향하자, 현화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슬픈 현준의 눈빛을 보면서, 현화는 오열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내가 잘못했어."

현화가 비통한 목소리로 연신 사과를 하자, 현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현화야..."

현준이 부르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현준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너도 아팠잖아. 단지 머리가 아팠을 뿐이야. 아픈 사람이었는데, 내가 몰랐었던 거야. 나도 미안해. 좀 더 이해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현준의 말에 현화가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아냐, 아냐...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현화는 현준의 손을 붙잡은 채로 슬프게 통곡을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래 역시 눈물을 흘렸고, 그녀는 강림차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요? 너무 안타까운데..."

강림차사는 그런 나래를 보며 대답했다.

"모든 죽음은 안타깝습니다. 죽음은 너무도 안타깝기에, 그렇기에, 삶이 가치를 가지는 것이지요."

나래는 슬픈 눈빛으로 현화를 바라보았다.

"결국... 혼자 남게 될 거잖아요."

"그녀에게는 삶이 곧 지옥이 되겠지요."

나래는 왠지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 같아서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백하도령이 들고 있던 손을 거두는 순간, 주황빛의 세상은 사라졌다.

어느새 식탁에는 현화와 여왕만이 남았고, 현준과 서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왕은 계속 오열했고, 현화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백하도령이 여왕에게 타이르듯 말을 하는 사이, 현화는 자리에서 말없이 일어났다.

그녀는 아침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걸어가서는 베란다 문을 열고 나섰다.

"왜..."

나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가가서 물으려는 순간, 현화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열린 베란다 문 너머로 몸을 던졌다.

"안돼!"

나래가 비명을 지르며 만류하려 했지만,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

바깥에서 다른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래가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양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안돼애!"

그리고 그 순간, 현화는 다시 베란다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베란다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나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안돼요!"

나래가 손을 붙잡고 만류하자, 현화가 울음을 터뜨렸다.

"저도... 저도 갈래요, 저도... 전... 살 자격이 없어요."

현화가 울며 놓아달라는 듯 손을 뿌리치려 노력했지만, 나래는 고개를 연신 흔들며 애원했다.

"안돼요, 안돼요. 그러면 안돼요."

이 모습을 지켜본 강림차사의 표정이 서슬 퍼렇게 변했다.

어느새 강림차사는 나래 앞에 나타나 그녀를 응시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죽음은 저승의 몫, 그 누구도 그 일에 관여해서는 안됩니다. 죽음을 부정하여 시간을 되돌리다니요? 이는 저승법을 위반한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강림차사를, 나래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강림차사는 뭔가를 힐끔 보고는 이내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녀에게서 의심을 지워버린 것이 문제의 발단이니, 따지고 보면 지금의 자살도 그녀의 운명에 없던 일이군요. 그녀는 장수할 운명을 타고났으니 말입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나자, 나래는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강림차사는 그녀 너머에서 백하도령의 눈빛이 백안(白眼)으로 변하여 섬찟할 정도로 번득 거리고, 전신에 백뢰(白雷)가 흐르는 것을 잠깐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에이 설마... 그 착한 도령이....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었을 리가...'

분명 자신이 잘못 본거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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