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 #1
빛바랜 피터팬 책의 표지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알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같을, 하루의 시작을 의미하는 알람을 수백 일째 끄고 있다.
머리가 아파온다. 매일 아침마다 후회하는 그것은, 아마도 '어제 좀만 더 일찍 잘걸' 하는 것이리라.
그것도 벌써 수백 일째, 의지인지, 의지와 상관없는 생존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반복하고 있었다.
깨지 않는 머리를 깨우기 위해, 손은 간절하게 얼굴을 비벼댔다.
'조금만 더'라는 금단의 마법으로 눈꺼풀을 짓누르는 의식을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 옆에 붙어있는 보일러 스위치를 눌러 온수를 켜놓고, 밖으로 나와 제일 먼저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일단 물부터 한 컵 마시고 나니, 한결 살 것 같았다.
몇 시간이나 잔 걸까? 시계는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으니, 대략 5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저녁의 자신에게, 오늘은 제발 잠 좀 자라고 화풀이를 한번 하고는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섰다.
7시 무렵, 출근을 위해 옷을 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 은근 아니 대놓고 티나기 시작하는 주름을 가리기위해 정성스레 화장을 했다.
기운이 빠진다. 몸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오늘 하루만 쉬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서른여섯이란 나이의 무게감이 육체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걸까? 이전에는 밤을 새도 이렇게까지는 피곤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 습관적인 한숨이 종종 튀어나왔다.
몸도, 마음도, 꽤나 지쳐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만, 별다르게 손쓸 방법이 없다.
그저 주말이 빨리 오기를 기도할 뿐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예전처럼 화장이 쉬이 끝나지 않았다.
전에는 10분만에도 뚝딱 화장을 마치고 출근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게 했다가는 출근 도중 들뜬 화장을 보기 일쑤였다.
그래도 대충 그럭저럭 화장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 있는 분무기를 집어 들고, 창가 쪽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몇몇 화분에 물을 뿌려 주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에는 이렇게 분무기로 화분을 적셔 주지 않으면, 잎이 건조해져서 말라비틀어졌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니, 괜찮은 것을 보고, 이제는 습관적인 일상이 되어버렸다.
죽는 것이 안타깝다기보다, 주고산 돈이 아까웠다.
무슨 생각으로 산 건지, 이제 와서 가끔 후회스럽다. 그저 귀찮은 일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니까.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겨 어제저녁에 좀 보다만 프린트물을 챙겨 들었다.
문득 책상 위에 장식된 산타클로스 장식 위로 하얗게 쌓여있는 먼지가 눈에 들어온다.
청소도 해야 하는데. 주말이면 청소해야지, 냉장고 정리해야지, 빨래해야지. 생각은 한가득인데 정작 하는 건 없다.
닥쳐서야 부랴부랴 하기 일쑤다 보니,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바쁜 일상을 보내야 했다.
도대체 주말에 뭘 하느라고 아무것도 못하는 걸까?
정말 자기 자신에게 묻고싶은 부분이지만, 진실은 그저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릴 뿐이란 거다. 그리고 컴퓨터 또는 핸드폰.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하자.
그녀의 시선이 향한, 식탁 위에 걸려 있는 벽시계는 회사에서 선물 받은 시계였다.
네모난 테두리 한가운데 회사이름이 적혀 있는 그 시계는, 어느새 7시 20분을 훌쩍 지나고 있었다.
서둘러 나서지 않으면 늦겠다 싶은 생각에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그녀가 나선 집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식탁 위에 놓인 시계만이 똑딱 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하루의 전쟁은 출근과 동시에 시작이다.
구석진 동네에 허름한 빌라를 하나 빌려서 살고 있다 보니, 교통편이 좋지 못했다.
다행히 집 근처에서 탈 수 있는 마을버스가 있긴 하지만, 이 마을버스 타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일찍 나와야 덜 붐비는 차를 탈 수 있는지라, 원래 출근해야 할 시간보다 서둘러 나온다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을버스 종점인 지하철 역에 도착하면, 이번에는 훨씬 더 많은 인파 속에 묻히게 된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밀리면서 간신히 올라탄 지하철에서, 흔들리지 않게 자리를 잡고서는, 누구나 그렇듯 핸드폰을 꺼내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어 버린다.
출근이라는 이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건, 이 조그만 물건 속 세상뿐이기 때문일까?
그녀가 아니라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그 작은 물건 속 세상을 주시할 뿐이다.
그 작은 세상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샌가 지하철 안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려서 환승해야 할 때를 알려주는 노래다.
다시 무수히 많은 인파에 휩쓸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딘가로 흘러가다 보면, 다음에 타야 할 지하철을 타게 된다.
이 거대한 무리의 흐름에 저항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흘러가도록 운명 지어진 것일까?
또다시 핸드폰 속 작은 세상에 심취해, 그저 지금 이 현실의 고통을 잊고자 할 뿐이다.
그 작은 핸드폰이 삶에 주어지는 모르핀 주사 같았다.
내려서 걷기 시작하면 한결 낫다. 이제 다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른 아침의 시원한 공기가 그나마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다.
물론 사무실에 들어가면 또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아침 중에 가장 상쾌한 시간 이리라.
시계를 보니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다행히 커피숍에 들려 커피 한잔으로 텅 빈 뱃속을 달래줄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
그렇게 회사 근처의 커피숍으로 총총히 발걸음을 향했다.
***
출근 체크를 하고 자리를 정돈하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 로그인을 하니, 새로운 공지사항 하나가 떠 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워크숍 공지라니...
불쾌하고 불안한 기분에 조심스럽게 워크숍 공지를 클릭해 보았다.
맙소사. 진짜 워크숍이다. 더군다나 전 직원 참석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템플스테이고 나발이고, 워크숍이라고 하면 진절머리가 난다.
이딴 것 좀 안 하고, 그냥 일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어째 다른 직원들은 신이 나 있는 것 같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이런 단체 활동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웬걸? 그들이 더 신나 하는 게, 의외의 반응이다.
이제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녀는 종종 자신을 '젊은 사람들'이라는 부류에서 제외하곤 했다.
스스로 그래 놓고 어쩐지 착잡한 기분과 왠지 모를 우울감에 의욕마저 꺾였다.
대체 난 서른 여섯 살 먹도록 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또다시 습관적인 한숨이 폭풍처럼 몰아친다.
"나래 씨."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대리가 웃는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나래보다 5살 연상인 유부녀고, 애도 둘이나 있다.
내가 과연 그녀 나이가 되었을 때, 애가 두명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워크숍 공지 봤어?"
"예. 안 그래도 방금 봤어요."
"왜 자꾸 이런 거 한데? 하여튼 사장님 어디 놀러 가는 거 되게 좋아한다니까..."
불만 어린 표정으로 궁시렁 거리지만, 어쩐지 그녀도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예... 저도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냥 일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치? 난 신랑한테 또 애들 부탁해야 해서... 벌써부터 투덜거릴 표정이 눈에 선하다."
나래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나래 씨는 절대 결혼하지 마. 애들이고 남편이고, 지긋지긋하다."
또 저 소리다.
"전 하고 싶어도 못해요. 할 사람이 있어야 하죠. 그리고 솔직히 사람이 있다 해도 못할 거 같아요. 돈이 있어야 하죠."
이건 진심이다. 현실적인 문제들로 연애고 결혼이고 마음 비운 지 오래였다.
"뭐 결혼이 꼭 돈 있어야 하나? 그냥 저지르는 거지."
저렇게 말을 하지만, 얼마 전에 시부모님이 시골 내려가시면서 살던 집을 넘겨주셨단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세 빼고 나면 꽤 좋은 차를 산다는 소리도, 함께 들었었다.
나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전 못 저지를 거 같아요. 뭐 어디 비빌 데가 있어야죠."
"하긴... 그래도 부모님이 보태주시는 게 은근히 크지."
은근히가 아닌데...
"그런데 템플 스테이가 뭐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슨 절이나 사찰 같은 데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거 아니에요?"
"그래? 뭐 가도 그런델 간데? 차라리 바닷가를 가던가..."
그때 문득 뒤쪽에서 이대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씨!"
이대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홱 돌려 얼른 대답했다.
"네."
그녀는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겼고, 나래는 예의 습관적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을 하자. 오늘 해야 할 일이 또 수북하게 쌓여 있다.
오후에 미팅까지 예정되어 있어, 오전 중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회사 메일로 들어온 내역을 확인하고, 어제 확인했던 거래처 자료들을 다운 받아 인쇄하기 시작했다.
인쇄를 걸어놓고 공용 프린터 쪽으로 걸어가 보니, 양 과장이 수북이 쌓여있는 인쇄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래가 양 과장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자, 양 과장은 눈살을 찌푸린 체, 꽤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아 바빠 죽겠는데..."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하고 확인하고는, 나래를 보며 말했다.
"나래 씨, 이거 인쇄 다 되면, 철 좀 해서 회의실로 가져다 줄래요? 지금 부장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10부거든?"
나래는 기분이 나빴다.
오늘 아침 회의에 사용할 자료면 어제 저녁에 준비를 해놨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바빠 죽겠는데,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떠넘기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예...."
기분은 나쁘지만,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고마워요."
그는 밝아진 표정으로 무미건조하게 고마움을 표하고는 서둘러 회의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어차피 회의에서 그다지 중요한 위치도 아니면서, 본인이 해도 될 거 같은데, 꼭 저런다.
얄밉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런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더 원망스러웠다.
이놈의 소심함이란 정말... 끝이 없다. 끝이 없어.
프린터기 앞에 서서 인쇄되어 나오는 종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는데, 돌연 사람들의 인사 소리가 꽤 크게 들려왔다.
이런 경우는 오직 하나의 경우만이다. 바로 사장님의 출근이다.
다른 이들보다 늦게 출근한 사장님이 성큼성큼 걸어오자, 사람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큰 소리로 인사하였고, 나래 역시 사장님이 앞을 지나가자 얼른 꾸뻑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응. 최대리, 나 커피 한잔만 갔다 줘."
사장님이 스쳐 지나가며,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건네는 말에, 나래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커피 정도는 지가 타 먹을 일이지, 하는 생각에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이내 언제나 그렇듯 사그러 들었다.
아니 저기 시퍼렇게 젊은 애들도 많은데... 그런데 이놈들이 눈치가 빠른지 모두 눈길을 피하고 바쁜 척하고 있다.
커피 심부름시키는 사장도, 눈치 보며 피하는 후배들도 죄다 밉기는 마찬가지였다.
커피를 가지러 가서 종이컵에 커피를 타고, 종이컵 홀더에 끼워서 쟁반에 받쳐 들었다.
사장님 방으로 가서 커피를 건네주지만, 누군가와 통화 중인 사장은 고맙다는 표현은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딱히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연하게 여기는 저 태도는 밉상의 극치다.
쟁반을 제자리에 갔다 놓으려 발걸음을 옮기던 나래의 표정이 휘둥그레졌다.
프린터기의 인쇄물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인쇄물이 많아 나중에 나온 종이가 먼저 인쇄된 종이를 밀어내며 일부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어머?"
놀란 나래가 부랴부랴 달려가 들고 있던 쟁반을 프린터기 위에 올려놓고 바닥에 떨어진 용지들을 주웠다.
이렇게 종이가 떨어지면 누가 좀 와서 손 좀 써주지, 모두 제 일 아니란 듯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와중에, 떨어진 용지들과 이미 인쇄되어 나온 뭉치들을 들어 옆 빈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다행히 그리 많이 떨어진 건 아니라서, 먼저 인쇄되어 나온 걸 보고, 흩어진 종이들을 맞출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정리하고 있는 찰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최대리."
고개를 돌려보니, 사내에서 마녀라는 악명을 얻고 있는 김실장이 앙칼진 눈으로 프린터기 앞에 서서, 그녀가 올려놓았던 쟁반을 들고 있다.
"물건 항상 제자리 놓으란 소리 못 들었어요?"
"아... 죄송합니다. 인쇄물이 떨어져서..."
"규칙 좀 지키면서 일합시다. 쫌!"
"죄송합니다."
나래는 연신 꾸벅이며 다가가 김실장 손에 쥐어진 쟁반을 넘겨받았다.
잠깐 거기 놓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리 호들갑인지...
나래는 쟁반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다시 인쇄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대리, 아직 안 끝났어?"
회의실에서 나온 양 과장이 묻는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속으로 삭이며 대답했다.
"예, 지금 정리하고 있어요."
"뭐, 그거 하는데 하루 종일 하고 있어?"
양 과장이 투덜거리듯 말하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중요하면 어제저녁에 해놓을 것이지, 왜 나한테 이러냔 말이다!
속으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또 참는다. 참을 수밖에.
한숨이 또 습관적으로 흘러나왔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같을, 하루의 시작을 의미하는 알람을 수백 일째 끄고 있다.
머리가 아파온다. 매일 아침마다 후회하는 그것은, 아마도 '어제 좀만 더 일찍 잘걸' 하는 것이리라.
그것도 벌써 수백 일째, 의지인지, 의지와 상관없는 생존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반복하고 있었다.
깨지 않는 머리를 깨우기 위해, 손은 간절하게 얼굴을 비벼댔다.
'조금만 더'라는 금단의 마법으로 눈꺼풀을 짓누르는 의식을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 옆에 붙어있는 보일러 스위치를 눌러 온수를 켜놓고, 밖으로 나와 제일 먼저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일단 물부터 한 컵 마시고 나니, 한결 살 것 같았다.
몇 시간이나 잔 걸까? 시계는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으니, 대략 5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저녁의 자신에게, 오늘은 제발 잠 좀 자라고 화풀이를 한번 하고는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섰다.
7시 무렵, 출근을 위해 옷을 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 은근 아니 대놓고 티나기 시작하는 주름을 가리기위해 정성스레 화장을 했다.
기운이 빠진다. 몸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오늘 하루만 쉬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서른여섯이란 나이의 무게감이 육체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걸까? 이전에는 밤을 새도 이렇게까지는 피곤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 습관적인 한숨이 종종 튀어나왔다.
몸도, 마음도, 꽤나 지쳐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만, 별다르게 손쓸 방법이 없다.
그저 주말이 빨리 오기를 기도할 뿐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예전처럼 화장이 쉬이 끝나지 않았다.
전에는 10분만에도 뚝딱 화장을 마치고 출근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게 했다가는 출근 도중 들뜬 화장을 보기 일쑤였다.
그래도 대충 그럭저럭 화장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 있는 분무기를 집어 들고, 창가 쪽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몇몇 화분에 물을 뿌려 주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에는 이렇게 분무기로 화분을 적셔 주지 않으면, 잎이 건조해져서 말라비틀어졌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니, 괜찮은 것을 보고, 이제는 습관적인 일상이 되어버렸다.
죽는 것이 안타깝다기보다, 주고산 돈이 아까웠다.
무슨 생각으로 산 건지, 이제 와서 가끔 후회스럽다. 그저 귀찮은 일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니까.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겨 어제저녁에 좀 보다만 프린트물을 챙겨 들었다.
문득 책상 위에 장식된 산타클로스 장식 위로 하얗게 쌓여있는 먼지가 눈에 들어온다.
청소도 해야 하는데. 주말이면 청소해야지, 냉장고 정리해야지, 빨래해야지. 생각은 한가득인데 정작 하는 건 없다.
닥쳐서야 부랴부랴 하기 일쑤다 보니,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바쁜 일상을 보내야 했다.
도대체 주말에 뭘 하느라고 아무것도 못하는 걸까?
정말 자기 자신에게 묻고싶은 부분이지만, 진실은 그저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릴 뿐이란 거다. 그리고 컴퓨터 또는 핸드폰.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하자.
그녀의 시선이 향한, 식탁 위에 걸려 있는 벽시계는 회사에서 선물 받은 시계였다.
네모난 테두리 한가운데 회사이름이 적혀 있는 그 시계는, 어느새 7시 20분을 훌쩍 지나고 있었다.
서둘러 나서지 않으면 늦겠다 싶은 생각에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그녀가 나선 집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식탁 위에 놓인 시계만이 똑딱 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하루의 전쟁은 출근과 동시에 시작이다.
구석진 동네에 허름한 빌라를 하나 빌려서 살고 있다 보니, 교통편이 좋지 못했다.
다행히 집 근처에서 탈 수 있는 마을버스가 있긴 하지만, 이 마을버스 타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일찍 나와야 덜 붐비는 차를 탈 수 있는지라, 원래 출근해야 할 시간보다 서둘러 나온다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을버스 종점인 지하철 역에 도착하면, 이번에는 훨씬 더 많은 인파 속에 묻히게 된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밀리면서 간신히 올라탄 지하철에서, 흔들리지 않게 자리를 잡고서는, 누구나 그렇듯 핸드폰을 꺼내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어 버린다.
출근이라는 이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건, 이 조그만 물건 속 세상뿐이기 때문일까?
그녀가 아니라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그 작은 물건 속 세상을 주시할 뿐이다.
그 작은 세상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샌가 지하철 안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려서 환승해야 할 때를 알려주는 노래다.
다시 무수히 많은 인파에 휩쓸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딘가로 흘러가다 보면, 다음에 타야 할 지하철을 타게 된다.
이 거대한 무리의 흐름에 저항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흘러가도록 운명 지어진 것일까?
또다시 핸드폰 속 작은 세상에 심취해, 그저 지금 이 현실의 고통을 잊고자 할 뿐이다.
그 작은 핸드폰이 삶에 주어지는 모르핀 주사 같았다.
내려서 걷기 시작하면 한결 낫다. 이제 다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른 아침의 시원한 공기가 그나마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다.
물론 사무실에 들어가면 또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아침 중에 가장 상쾌한 시간 이리라.
시계를 보니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다행히 커피숍에 들려 커피 한잔으로 텅 빈 뱃속을 달래줄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
그렇게 회사 근처의 커피숍으로 총총히 발걸음을 향했다.
***
출근 체크를 하고 자리를 정돈하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 로그인을 하니, 새로운 공지사항 하나가 떠 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워크숍 공지라니...
불쾌하고 불안한 기분에 조심스럽게 워크숍 공지를 클릭해 보았다.
맙소사. 진짜 워크숍이다. 더군다나 전 직원 참석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템플스테이고 나발이고, 워크숍이라고 하면 진절머리가 난다.
이딴 것 좀 안 하고, 그냥 일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어째 다른 직원들은 신이 나 있는 것 같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이런 단체 활동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웬걸? 그들이 더 신나 하는 게, 의외의 반응이다.
이제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녀는 종종 자신을 '젊은 사람들'이라는 부류에서 제외하곤 했다.
스스로 그래 놓고 어쩐지 착잡한 기분과 왠지 모를 우울감에 의욕마저 꺾였다.
대체 난 서른 여섯 살 먹도록 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또다시 습관적인 한숨이 폭풍처럼 몰아친다.
"나래 씨."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대리가 웃는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나래보다 5살 연상인 유부녀고, 애도 둘이나 있다.
내가 과연 그녀 나이가 되었을 때, 애가 두명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워크숍 공지 봤어?"
"예. 안 그래도 방금 봤어요."
"왜 자꾸 이런 거 한데? 하여튼 사장님 어디 놀러 가는 거 되게 좋아한다니까..."
불만 어린 표정으로 궁시렁 거리지만, 어쩐지 그녀도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예... 저도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냥 일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치? 난 신랑한테 또 애들 부탁해야 해서... 벌써부터 투덜거릴 표정이 눈에 선하다."
나래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나래 씨는 절대 결혼하지 마. 애들이고 남편이고, 지긋지긋하다."
또 저 소리다.
"전 하고 싶어도 못해요. 할 사람이 있어야 하죠. 그리고 솔직히 사람이 있다 해도 못할 거 같아요. 돈이 있어야 하죠."
이건 진심이다. 현실적인 문제들로 연애고 결혼이고 마음 비운 지 오래였다.
"뭐 결혼이 꼭 돈 있어야 하나? 그냥 저지르는 거지."
저렇게 말을 하지만, 얼마 전에 시부모님이 시골 내려가시면서 살던 집을 넘겨주셨단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세 빼고 나면 꽤 좋은 차를 산다는 소리도, 함께 들었었다.
나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전 못 저지를 거 같아요. 뭐 어디 비빌 데가 있어야죠."
"하긴... 그래도 부모님이 보태주시는 게 은근히 크지."
은근히가 아닌데...
"그런데 템플 스테이가 뭐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슨 절이나 사찰 같은 데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거 아니에요?"
"그래? 뭐 가도 그런델 간데? 차라리 바닷가를 가던가..."
그때 문득 뒤쪽에서 이대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씨!"
이대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홱 돌려 얼른 대답했다.
"네."
그녀는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겼고, 나래는 예의 습관적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을 하자. 오늘 해야 할 일이 또 수북하게 쌓여 있다.
오후에 미팅까지 예정되어 있어, 오전 중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회사 메일로 들어온 내역을 확인하고, 어제 확인했던 거래처 자료들을 다운 받아 인쇄하기 시작했다.
인쇄를 걸어놓고 공용 프린터 쪽으로 걸어가 보니, 양 과장이 수북이 쌓여있는 인쇄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래가 양 과장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자, 양 과장은 눈살을 찌푸린 체, 꽤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아 바빠 죽겠는데..."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하고 확인하고는, 나래를 보며 말했다.
"나래 씨, 이거 인쇄 다 되면, 철 좀 해서 회의실로 가져다 줄래요? 지금 부장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10부거든?"
나래는 기분이 나빴다.
오늘 아침 회의에 사용할 자료면 어제 저녁에 준비를 해놨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바빠 죽겠는데,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떠넘기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예...."
기분은 나쁘지만,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고마워요."
그는 밝아진 표정으로 무미건조하게 고마움을 표하고는 서둘러 회의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어차피 회의에서 그다지 중요한 위치도 아니면서, 본인이 해도 될 거 같은데, 꼭 저런다.
얄밉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런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더 원망스러웠다.
이놈의 소심함이란 정말... 끝이 없다. 끝이 없어.
프린터기 앞에 서서 인쇄되어 나오는 종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는데, 돌연 사람들의 인사 소리가 꽤 크게 들려왔다.
이런 경우는 오직 하나의 경우만이다. 바로 사장님의 출근이다.
다른 이들보다 늦게 출근한 사장님이 성큼성큼 걸어오자, 사람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큰 소리로 인사하였고, 나래 역시 사장님이 앞을 지나가자 얼른 꾸뻑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응. 최대리, 나 커피 한잔만 갔다 줘."
사장님이 스쳐 지나가며,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건네는 말에, 나래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커피 정도는 지가 타 먹을 일이지, 하는 생각에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이내 언제나 그렇듯 사그러 들었다.
아니 저기 시퍼렇게 젊은 애들도 많은데... 그런데 이놈들이 눈치가 빠른지 모두 눈길을 피하고 바쁜 척하고 있다.
커피 심부름시키는 사장도, 눈치 보며 피하는 후배들도 죄다 밉기는 마찬가지였다.
커피를 가지러 가서 종이컵에 커피를 타고, 종이컵 홀더에 끼워서 쟁반에 받쳐 들었다.
사장님 방으로 가서 커피를 건네주지만, 누군가와 통화 중인 사장은 고맙다는 표현은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딱히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연하게 여기는 저 태도는 밉상의 극치다.
쟁반을 제자리에 갔다 놓으려 발걸음을 옮기던 나래의 표정이 휘둥그레졌다.
프린터기의 인쇄물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인쇄물이 많아 나중에 나온 종이가 먼저 인쇄된 종이를 밀어내며 일부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어머?"
놀란 나래가 부랴부랴 달려가 들고 있던 쟁반을 프린터기 위에 올려놓고 바닥에 떨어진 용지들을 주웠다.
이렇게 종이가 떨어지면 누가 좀 와서 손 좀 써주지, 모두 제 일 아니란 듯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와중에, 떨어진 용지들과 이미 인쇄되어 나온 뭉치들을 들어 옆 빈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다행히 그리 많이 떨어진 건 아니라서, 먼저 인쇄되어 나온 걸 보고, 흩어진 종이들을 맞출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정리하고 있는 찰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최대리."
고개를 돌려보니, 사내에서 마녀라는 악명을 얻고 있는 김실장이 앙칼진 눈으로 프린터기 앞에 서서, 그녀가 올려놓았던 쟁반을 들고 있다.
"물건 항상 제자리 놓으란 소리 못 들었어요?"
"아... 죄송합니다. 인쇄물이 떨어져서..."
"규칙 좀 지키면서 일합시다. 쫌!"
"죄송합니다."
나래는 연신 꾸벅이며 다가가 김실장 손에 쥐어진 쟁반을 넘겨받았다.
잠깐 거기 놓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리 호들갑인지...
나래는 쟁반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다시 인쇄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대리, 아직 안 끝났어?"
회의실에서 나온 양 과장이 묻는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속으로 삭이며 대답했다.
"예, 지금 정리하고 있어요."
"뭐, 그거 하는데 하루 종일 하고 있어?"
양 과장이 투덜거리듯 말하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중요하면 어제저녁에 해놓을 것이지, 왜 나한테 이러냔 말이다!
속으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또 참는다. 참을 수밖에.
한숨이 또 습관적으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