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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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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25
읽기 시간 예측: 약 10분

32화 - #1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긴...."

놀랍게도, 문을 열고 들어선 장소는 틈의 세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 보았던 나래의 비디오 가게였다.

따라 들어온 백하도령이 차분한 어조로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이곳의 유일한 신이었던 시간할망을 소멸시켜, 이 세계는 신이 없게 되었고, 그 순간, 유일한 존재였던 우리가, 이 세계의 신이 된 것이다."

나래는 여전히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백하도령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 우리요?"

"그래. 너와 나. 우린 이제 이 세계의 신이다. 우리가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래는 멍한 표정으로 백하도령을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 그럼... 우리가 이제 뭘 해야 되는 거죠? 뭘 할 수 있는 건데요?"

백하도령은 질문하는 나래를 보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그것을 알아내야 한다. 나는 네가 없는 동안, 이곳에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행해 보았고, 그 과정에서 어렴풋이 이곳에서의 내 능력을 알게 되었다."

"뭔데요?"

"시간할망이 가지고 있던 능력, 바로 타인의 시간을 자유롭게 다루는 능력이다."

"타인의 시간이요?"

"그래. 시간할망이 소멸한 이유는 자기 자신의 시간을 조절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직 타인의 시간, 타인의 기억만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너의 기억에 기인한 것이다."

"그럼..."

나래가 다시 물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백하도령이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그 능력으로, 시간할망이 그랬던 것처럼, 네 기억으로 이 세상을 구현한 것이다. 어떠냐?"

백하도령의 말을 들으며, 나래는 비디오 테이프 앞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연도와 날짜가 적혀 있었고, 비디오 테이프 하나를 꺼내어 보니,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어딘지 침울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포스터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여기 있는 것들을... 봐도 되는 건가요?"

백하도령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물론이다. 이곳에서는 시간의 흐름 또한 내 뜻대로 다룰 수 있으니, 얼마든지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된다."

나래는 비디오테이프를 든 채로 멍하니 있다가, 백하도령을 보며 물었다.

"만약... 만약 제가 이 시간으로 가서, 다른 행동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역사가... 바뀌나요?"

백하도령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기억일 뿐, 흡사 꿈을 꾸는 것과 같다. 꿈속에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래는 어쩐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고는 테이프를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았다.

잠시 말없이 진열대를 바라보던 나래가 백하도령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제 능력은 뭐죠? 어떻게 알아내는 거죠?"

백하도령이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대답했다.

"나도 모른다. 이제부터 알아가야 할 것이다. 이 세계가 네게 어떤 능력을 줄지, 이제부터 하나씩 실험해 봐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의 능력은, 이곳에서만 유효한가요?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다 없어지는 건가요?"

백하도령이 주머니에서 씨앗 하나를 꺼내 보였다.

"보이느냐?"

나래는 그 씨앗을 보며 말했다.

"네. 씨앗 같은데... 무슨 꽃이죠?"

"백합 씨앗이다. 내가 처음 이곳에 올 때는 화분에 담긴 백합이었다."

백하도령의 말에 나래는 "어?" 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곳에 와서 나는 이곳에서 부여받은 시간능력을 이용해, 이 백합을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렸다. 결국 씨앗이 되었고, 나는 이 씨앗을 가지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 보았다."

"어찌 되었나요?"

궁금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묻는 나래를 보며, 백하도령은 살짝 웃음 지어 보였다.

"씨앗 그대로였다."

"와... 그럼?"

"이곳에서 부여받은 능력이 무엇이든 간에, 그 능력으로 변화시킨 그 무엇은, 원래 세계 혹은 다른 세계로 돌아간다 하여도 그 변화 자체는 유효하다."

나래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건 원래 계시던 곳에서도 가지고 있던 능력 아니에요? 절 지금 이 모습으로 바꾸셨잖아요?"

나래의 말에 백하도령은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처음 너를 보았을 때부터, 너는 지금 이 모습이었다."

"예에? 그럼.... 그럼 왜 저는 지금 이 모습인 거죠? 왜 어려진 거죠?"

백하도령은 너털웃음을 짓더니 답했다.

"나도 잘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네가 내가 있는 세계로 넘어오면서, 일종에 너의 바램 같은 것이 표출된 게 아닐까 싶구나."

백하도령의 대답에, 나래는 자신의 그림자와 나누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 자신이 바라던 모습, 그것이 도깨비 마을로 가면서 투영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이 모습이었을까?

대략 15살에서 16, 17살 정도 모습으로 추정되는 외모는, 나래가 돌아가고 싶던 순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진짜 나래가 돌아가고 싶던 순간은 그보다도 더 어렸던 순간이었다.

왜 이 무렵이었을까?

나래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백하도령이 말을 건네 왔다.

"너는 이곳에서 자신의 심연을 바라보았고, 그 심연 속에서 네 자아를 찾아냈다. 어느 누구도 아닌 네 스스로 한 것이다. 또한 너는 기지로써 이곳의 신인 시간할망을 소멸시켰다."

"그건... 총명부인께서 주신 씨앗 덕분인걸요."

"어쨌든, 그것은 너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 너의 용기이니, 이 세계는 분명 나보다는 너에게 더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이라 믿는다. 분명 네게 중요한 능력이 부여됐을 것이란 얘기다."

"중요한... 능력이요?"

"그래. 이 세계는 본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이니, 시간할망이나 내가 가진 능력은 다른 곳, 다른 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손쉽게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지. 그러고 나면, 다음으로 이 세계에 필요한 것이 무얼까?"

난데없이 마지막에 질문이 던져지자, 나래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 글세요... 제가 그걸..."

백하도령은 언제나처럼 빙그레 웃어 보였다.

"걱정마라. 나 역시 모른다. 우리가 함께 알아갈 것이다."

백하도령의 말이 괜스레 나래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럼... 제 능력을 어떻게 알아내야 할까요?"

"나는 이곳에 혼자 있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게 부여된 능력을 알 수 있었다. 허니, 너도 그리 해보거라."

"예? 그 말은...? 이곳에 혼자 있어 보라구요?"

"그렇다. 딱히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거라. 너는 이곳의 신이다."

나래는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왠지 무서울 거 같은데..."

"네 자신을 믿거라. 말했지 않느냐, 너는... 이곳의 신이라고."

나래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백하도령을 응시하다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럼... 백하도령님이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이것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도령님이 만드신 것들?"

"아마도 내가 만든 그 상태 그대로 있을 것이다. 허나, 나는 나가기 전에 내가 만든 모든 것들을 없애, 다시 무(無)의 상태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나래가 놀라 되물었다.

"왜요?"

"그래야 네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래는 멍한 표정으로 백하도령을 바라보다가 무슨 결심이 들었는지 눈빛이 달라지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해볼게요."

진지한 표정이 된 나래를 보며 백하도령이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잘 해낼 것이다. 신으로서의 네 능력을 확인하게 되면, 너와 내가 함께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게 될 것이다."

"도령님과 함께... 라면... 뭐, 뭐든 괜찮을 거 같아요."

뭔가 묘하게 의미심장한 말인 것 같아, 가슴이 쿵쾅 거렸지만, 백하도령은 태연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래. 그럼, 기다리마. 준비가 다 되면, 내가 있는 곳으로 오너라."

그 말에 나래가 황급히 되물었다.

"지, 지금요?"

"어찌 그러느냐?"

"아... 그게... 지금은 좀... 마음의 준비가..."

"이곳은 시간의 개념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무의 공간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며 얼마든지 생각하고 또 고민해도 될 것이다."

순간 주위에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시커먼 어둠 속에 백하도령과 단둘이 남게 되자, 나래가 다급히 다시 물었다.

"어..., 어떻게 도령님이 계신 곳으로 가나요?"

백하도령이 방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신으로서의 능력을 발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뒤이어 백하도령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 아, 아직..."

나래는 안타깝게 그를 불러보았지만, 이미 그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나래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아.... 진짜...."

어쩐지 서운함이 느껴진 나래는, 막연한 마음에 망연자실 서있을 뿐이었다.

"뭘.... 하라고..."

막막했다. 뭘 해야 할지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모르겠다. 뭐든 해보자."

나래는 자신이 초능력자라도 된 듯이, 영화에서 보았던 동작들을 흉내 내며 이것저것을 해보았지만, 그녀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 그렇게 이것저것 해보다 지친 나래는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몰라, 몰라. 뭐 되는 게 없어. 불꽃이라도 멋들어지게 만들어지는 줄 알았더니... 되는 게 없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뭔가 아지랑이 같은 것이 너울 거리는 것이 보였다.

"어?"

나래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만히 보니, 아지랑이가 하나가 아니었다.

색색이 다양한 아지랑이들이 어디서부터 피어오르는 것인지, 기다란 실이 바람에 흩날리듯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게 뭐지?"

나래는 호기심에 수많은 아지랑이 중 하나에 다가갔다.

오렌지 빛으로 반짝 거리는 아지랑이 하나를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려 보려는 찰나, 그녀의 몸이 쑤욱하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뭐얏!"

나래는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어딘가로 한줄기 빛이 되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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