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1
대륙 란스의 동쪽 끝에는 수풀이 우거진 땅위로 커리나라고 불리우는 작은 왕국이 하나 있었다.
커리나의 수도 베네루치아 중심부에는 커리나 왕가를 상징하는 왕궁말고도 또 하나의 상징적 건축물이 있으니, 당대 최고의 명문세가 중 하나인 루나스 일가였다.
루나스 일가는 오래전 마족들의 침략에 맞서 인간들을 규합해 싸웠던 네명의 영웅중 한명인 에이프릴 루나스가 세운 가문이다.
대대로 오직 사냥꾼의 길만을 걸어온 루나스 가문은 블루문헌터스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사냥꾼 집단을 이끄는 수장의 가문이기도 했다.
현재에 이르러 루나스가문의 최고 어른이자 블루문헌터스의 수장인 제라드 루나스에게는 두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 중 막내딸 줄리아 루나스는 올해로 16살이 되어 오늘 가문에 대대로 행해지는 사냥꾼의 세례를 받을 예정이었다.
사냥꾼의 세례는 16살이 되는 해 생일날에 행해지게 되는데, 세례를 받고 나면 10년에 걸친 교육 끝에 세상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제 세례를 받아야할 줄리아 입장에서는 그 10년은 감옥과도 같은 생활로 느껴질 뿐이었다.
이미 두 오빠와 언니가 사냥꾼의 세례을 받고 험난한 교육을 받던 모습을 본 줄리아는 겁도 나고, 또 그 지긋지긋한 10년이란 시간을 어찌 보낼지도 걱정이 됐다.
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파왔고,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줄리아는 사냥꾼보다 세상을 방랑하며 이곳 저것을 구경하고 새로운 것들을 접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하아~"
줄리아는 답답한 마음에 창가에 턱을 괸 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아버지나 어머니나, 하기싫은 걸 왜 하라고 강요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이른 오후의 시간,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긴 체 훨훨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넋놓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일련의 행렬이 있었다.
앞뒤로 가문에 사병들이 경계하는 가운데, 대략 십여명의 사람들이 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서고 있었다.
"뭐지?"
줄리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어서는 십여명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다양한 연령층에 사람들이었는데, 대부분은 회색빛 바탕에 가슴 한가운데 붉은 원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고, 두명 만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줄리아의 방은 3층에 있어 들어서는 사람들을 손쉽게 볼 수 있었는데, 그들 중 유독 눈에 띄는 한사람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단단한 체격, 준수한 용모가 멀리서도 눈에 띄는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색 옷으로만 갖춰 입은, 언듯 보기에도 무언가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누구지?"
이 갇힌 새장속에서 지긋지긋한 일상에 지쳐가는 줄리아에게 낯선 이방인들의 행렬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루나스 가문 한가운데 위치한 이 본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총 5개의 거대한 성벽을 지나와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입에 위치한 귀빈관에서 응대를 하기 때문에, 외부 사람이 직접적으로 본관에 올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줄리아를 비롯해, 나이가 어린 가문의 여자들과 대부분의 하녀들은 이 본관 밖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외부인을 만나보기가 쉽지 않았으니, 지금 본관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신기할 뿐이었다.
줄리아는 재빨리 방문을 열고 2층으로 내려서려는데, 막 올라서던 하녀 질렌과 마주쳤다.
"어머? 아가씨... 어딜..."
"아, 잠깐 잠깐!"
줄리아가 헐레벌떡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옷가지를 들고 올라서던 하녀 질렌은 화들짝 놀라 줄리아의 뒤를 따라 달렸다.
"아...아가씨, 아가씨!"
줄리아가 2층 계단앞에 이르러 멈춰서서는 뒤따라온 질렌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하며 주의를 주자, 뒤따라온 질렌이 놀라 그 자리에 멈춰섰다.
줄리아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계단 아래쪽 거실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완전하지 않아, 사람들의 어깨와 신발 정도만 보는게 고작이지만, 제일 큰 오빠인 올렌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저희 가문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렌은 줄리아보다 10살이나 위여서, 최근에 사냥꾼의 수련을 모두 마치고, 가주인 아버지 다음 서열인 총사관이 되어 가문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조금씩 맡아서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루나스 가문에서 불러주신 것인데, 오히려 영광입니다."
다소 나이가 많아보이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줄리아는 살금살금 계단쪽으로 걸어가, 한계단 살짝 내려선 다음 몸을 낮춰서 좀 더 시야를 확보해 보았다.
오빠인 올렌의 뒷모습과 그 맞은 편에 서 있는 한 나이 지긋한 노인, 그리고 그 옆으로 아까 눈여겨 봐두었던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묵뚝뚝한 표정으로 노인과 올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러실게 아니라,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이미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올렌의 말에 모두들 자리에 앉았고, 곧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이 다가와 각자 앞에 찻잔을 놓아두고 물러갔다.
막상 자리에 앉으니, 그 남자의 모습이 좀 더 확실하게 보였는데, 다시 보아도 참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줄리아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자 더더욱 그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포트리아 차입니다. 포트린들의 선물이라 불리죠. 차의 향이 일품입니다."
올렌이 먼저 차에 대해 소개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차의 향을 맡아보았다.
"과연..."
"정말 향이 좋군요."
다들 차의 향에 감탄하자, 올렌이 말을 이었다.
"포트린은 숲의 수호자 입니다. 그들이 내어준 포트리아 찻잎은 정신을 맑게하고 기력을 회복하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습니다. 차를 마시실 땐, 차의 향을 먼저 맡으십시오. 그리고 입안에 넣은 뒤 바로 삼키지 마시고 일단 입안에서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한 뒤 아주 천천히 삼키시면 포트리아의 특유의 매끄러움과 함께 독특한 내음을 좀 더 깊이 느껴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들 올렌의 말에 따라 차를 마시며 다시금 놀라워 했다.
"정말 차의 향도, 맛도 일품입니다. 이처럼 향기로운 차는 처음 봅니다."
나이 많은 노인이 연신 감탄해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자 올렌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그저 포트린들이 준 것을 여러분들께 드렸을 뿐입니다. 오늘 대화를 모두 마치고 나면, 따로 포장하여 드릴테니, 가시는 길에 챙겨가시지요. 짐을 나를 하인들을 따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올렌이 차에 대해 설명하는 사이 누군가 거실에 들어섰다.
"안녕들 하십니까~"
누군가 호쾌한 인사말과 함께 나타나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십니까, 가주님..."
"안녕하십니까..."
다들 허리숙여 인사하며, 들어서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었는데, 바로 루나스 가문의 가주인 제라드 루나스였다.
"다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자리에들 앉으시지요."
제라드가 의자에 앉고 나자,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 앉았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일단 이곳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는 모두들 알고 계실 겁니다. 특히나..."
제라드가 사람들과 함께 서둘러 이야기를 시작했고, 대충 이야기를 듣던 줄리아는 지루한 듯 고개를 들어 질렌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 누군지 알아?"
줄리아의 물음에 질렌이 조심스레 계단 아랫쪽을 살펴본 뒤 줄리아를 바라보며 조금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까 얼핏 듣기로 자벨룬과 작은 전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자문을 구하러 온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다시 계단 아래쪽을 살펴 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아... 여기저기 다 따분한 소리 뿐이구나..."
줄리아가 이내 방으로 다시 돌아가려다가 질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저기 아래 층에 있는 사람들중에 키 크고 잘생긴 남자 보이지? 검은 옷 입은 사람 말야."
질렌이 그 말을 듣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계단 아래쪽 거실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네에... 뭐, 쫌... 잘생기긴 했습니다만..."
질렌은 벌써 낌새를 눈치 챘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줄리아는 그런 그녀의 표정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생기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 누군지 좀 알아봐줘. 얼른."
질렌은 역시나 하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고, 그 표정을 본 줄리아가 살살 웃으며 말했다.
"질렌... 알아봐 줄꺼지?"
줄리아는 문득 질렌이 들고 있는 옷가지를 보더니, 거의 뺏다시피 가져가며 말했다.
"부탁이야, 대신 옷은 내가 알아서 입을께~ 알아보고 내 방으로 와? 응?"
줄리아는 대답도 듣는 둥 마는 둥 후다닥 3층으로 올라가 버리고 질렌은 그런 줄리아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섰다.
조심조심 태연하게 계단에서 내려선 질렌은 황급히 집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입구쪽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쪽에는 집사가 한 하인 소년과 함께 서서, 안쪽에 가주인 제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 나오는 질렌을 흘낏 바라본 집사는 그녀가 자기 앞에서 머뭇머뭇 하자, 의아한 듯 그녀쪽으로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질렌이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집사님, 저기 손님들 중에 저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집사가 질렌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더니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글세. 잘은 모르겠는데, 같이온 컨소울길드의 마스터님과 안면이 있는 친구인 모양이다. 이름이 레나드라고 했던가, 마스터님말로는 무예가 출중하여 남쪽 지역에서는 제법 명성이 있다고 들었는데..."
집사가 다시금 질렌을 위아래로 흘겨보고는 말했다.
"아직 나이가 젊은 친구라서 그런가, 여자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니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말거라."
질렌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런거 아닙니다. 올렌 총사님께서 포트리아를 선물할 거라고 하셨는데 복색이 다르셔서 그 분 몫을 빼야하나 해서 여쭤보았습니다."
집사가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아니다, 엄연히 손님이니 그분 것도 준비해야지. 다른 아이에게 시킬 것이니, 너는 오늘 있을 아가씨 행사 준비에나 신경쓰거라."
"네~"
뾰루퉁한 표정에 질렌이 퉁명스레 대답하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서 줄리아의 방으로 가기위해 조심조심 거실을 지나쳐 올라섰다.
그 사이 자기방으로 돌아온 줄리아는 허겁지겁 옷부터 침대위에 펼쳐 놓고,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침대위에 펼쳐진 옷을 보고 그대로 굳어졌다.
짙푸른 녹색과 흰색이 배합된 옷, 그것은 사냥꾼의 세례때 입는 예복이었다.
방금전까지 호기심 가득했던 줄리아의 마음속이 찬물 끼얹은 듯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그대로 예복을 바라보던 줄리아는 창밖에 해가 뜬 위치를 한번 확인해 보더니, 창가쪽으로 달려가 성문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막 성문을 통과한 마차 세대가 푸른 하늘색의 삼륜 장식을 한 깃발을 꽃고 천천히 본관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깃발은 바로 블루문헌터스의 깃발로, 세례를 받을 줄리아를 데리고 수련원으로 가기 위해 본관으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줄리아는 그 마차가, 마치 감옥에 자신을 가두기 위해 오고 있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줄리아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막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마님께서 준비가 되는 대로 본관 뒤쪽으로 오시라는 분부십니다."
소년은 말을 하다 말고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처음엔 침울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줄리아의 표정이 점점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이름이 뭐니?"
소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방문을 열고 하녀 질렌이 들어섰다.
"어, 아가씨 아직도 옷 안입으셨어요?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어서 옷을 입으셔야죠."
질렌이 놀라해 하며 묻는 말에 줄리아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방긋 웃어보였다.
소년과 질렌은 서로 얼굴을 돌아보며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사람은 누구라던?"
줄리아가 묻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질렌이 정신 차린 듯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이야기 했다.
"레나드... 라고 합니다. 오늘 온 손님들이 컨소울길드 분들이신데, 그쪽 지역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무예가라고 합니다. 길드마스터님과 함께 오셨다고 하네요."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나드...? 아버지 이름이랑 비슷하네? 레나드...제라드... 뭐 어쨌든,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아까 올렌 오빠가 저분들한테 포트리아를 선물한다고 했지?"
"네...에..."
질렌이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대체 또 뭘 하시려는 겁니까?"
질렌이 걱정스레 묻는 말에 줄리아가 씨익 웃어보이고는 각오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난 죽어도 수련원에 들어가진 않을꺼야. 여기서 도망치기로 결심했어. 질렌이 좀 도와줘. 그리고, 너 이름이 뭐니?"
질렌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버리고, 소년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야스라고 합니다. 아가씨."
줄리아가 야스 옆으로 다가서자, 야스가 흠칫 놀라해 하며 움츠러 들었다.
"놀랄 것 없어. 가만히 있어봐."
줄리아는 야스의 옆에 서서 키를 재보고 체격을 비교해 보았다.
"좋아! 질렌, 보통 포트리아를 선물할 땐 남자 하인들이 날라주지?"
질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렇긴 합니다만... 다른 것도 아니고 짐을 날라야 하는데다가, 아시다시피 여자들은 이 본관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또 멀리 나갈 경우에는 번트매니저가 따라나섰다가, 하인들을 이끌고 다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뭔가 확인한 듯,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일단 여길 벗어날 수 있다는게 중요해. 이번 달 번트매니저는 누구지?"
번트매니저는 집사 밑에서 하인들을 관리하는, 관리장격 인물이었는데 보통 하인들중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이가 월마다 돌아가며 번트매니저를 맡고 있었다.
"이번달은 가치 아저씨일겁니다."
줄리아가 주먹을 꼭 쥐며 환호했다.
"가치아저씨?! 그 아저씨 눈도 어둡고 귀도 잘 안들리자나? 잘됐어 잘됐어!"
줄리아의 말에 질렌은 어이가 없었다.
[ 얘는 그걸 말이라고 하나... ]
그렇게 질렌이 속으로 궁시렁 거리고 있는 사이, 줄리아가 그녀에게 말했다.
"질렌, 저 옷은 니가 입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청천벽력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이련가, 오늘따라 질렌의 얼굴은 창백함의 연속이었다.
질렌이 질색을 하며 고개를 내리 흔들며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들켰다가는 제가 큰일납니다."
줄리아는 문제될게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아, 내가 강제로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 내 말 안들으면... 저 옷 걸레통에 넣고, 니가 흘려서 그랬다고 할꺼야!"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단 말인가? 질렌과 줄리아는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온 터라, 질렌은 나름대로 줄리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인적은 처음인지라, 질렌은 당황스럽기 까지 했다.
질렌이 창백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줄리아를 망연자실 바라보다 포기한듯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래, 혼날때 혼나더라도 일단 이 말괄량이를 내보내야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보내고 혼나는거야 한번 혼나고 말면 그만이지만, 안내보내서 이 인간에게 시달림 당할 걸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수련원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일주일에 두번은 집에 돌아오기 때문에 말을 안들어줬다가는, 일주일에 두번은 공포의 날이 될 판이었다.
그 사이, 질렌이 수긍했다고 생각한 줄리아가 말했다.
"일단 질렌이 먼저 옷가지고 옷방 들어가서 갈아입어. 얼른, 시간없어. 그리고 질렌 옷은 야스가 입고, 야스 옷은 내가 입는다."
야스도 놀라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시간없어! 당장!"
손님들이 자리에서 물어나고, 찻잔을 치우는 하녀들을 뒤로 한 체 본관 건물 밖으로 나선 제라드는 올렌에게 손님들을 배웅케 하고 자신은 막내딸이 오늘 치루게 될 사냥꾼의 세례를 시행하기 위해 본관 뒤편으로 향했다.
이미 와 있는 3대의 마차 행렬에 한대의 마차만이 문이 열려진 체 집사가 문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줄리아는?"
제라드가 다가와 묻는 말에, 옆에 서 있던 집사가 간략하게 대답했다.
"이미 마차에 오르셨습니다."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서두르세."
집사가 "네"하는 짧은 대답과 함께 마차의 문을 닫고, 마부석 옆자리에 올라섰다.
"출발한다."
세대의 마차가 출발하고, 그 모습을 멀리서 숨어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바로 줄리아였는데, 그녀는 지금 자신의 방에 들어왔던 하인 야스의 옷으로 바꿔 입은 상태였다.
모자를 하나 구해온 줄리아는 모자를 살짝 눌러쓰고, 얼굴에 대충 검불을 조금 묻힌 상태였는데, 체구가 작은 편이었던 줄리아가 허름한 하인옷을 입고 있으니 영락없는 하인이었다.
다만 원래 미모가 특출난 줄리아였던 지라, 검불로 얼굴을 가린다 해도 그 미모가 쉽게 가려지지는 않았다.
정작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거울을 보고 완벽하다며 스스로 자화자찬할 뿐, 누군가 조금만 신경쓰고 바라본다면 금방 탄로날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겉치레가 하인 행색이라 어느 누구도 신경써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미소년이 된 줄리아는 이내 집 앞쪽에 손님들이 내왕할때 사용하는 길쪽으로 내달렸다.
멀지 않은 곳에 일련에 하인 일행들이 보였고, 줄리아가 다가가자 하인들은 줄리아를 보고 놀란 표정들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하인들을 눈여겨 보지 않으니 잘 모르지만, 하인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니 당연히 줄리아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막내 아가씨가 어떻게..."
줄리아는 하인들이 단번에 자신을 알아보자 내심 실망을 하고 있었다.
하인들이 놀라 황망해 하는 모습을 보며, 줄리아가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힘주어 이야기 했다.
"쉿! 난 지금 이 순간부터 야스를 대신할 것이니, 어느 누구도 티내지 마라. 티내면, 평생토록 내 괴롭힘을 당할줄 알아!"
줄리아의 엄포에 다들 그저 황망한 표정을 지을 뿐이지만, 그중 한 하인이 나서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 야스는 이번 짐차 일행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금번 일행은 이미 모두 모여 있습니다."
줄리아가 그 말에 잠시 하인들을 살피더니, 제일 체격이 작아보이는 하인을 가르키며 말했다.
"너, 이름이 뭐니?"
"네? 아, 전 자마라고 합니다."
"자마? 그래 지금부터 내가 자마다. 넌 빠져."
그 말에 자마가 놀라 "네?"하고 되묻자, 줄리아가 버럭 성질을 내며 말했다.
"넌 빠지라고. 내 방으로 가면 야스가 있을꺼야. 둘이 방안에 있다가 이따 해지고 나면 나와. 그땐 내가 이미 여기 없을테니까. 사실대로 말해도 돼. 전부 내가 강요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
자마가 대답하지 못하고 황망하게 있을 때,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줄리아가 황급히 자마를 떠밀며 말했다.
"얼른!"
자마는 마지못해 본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줄리아는 하인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자, 손님들이 출발하신다."
나타난 사람은 금번 번트매니저를 맡은 가치였다.
가치는 하인들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눈이 좀 침침하고 귀가 잘 안들리는 경향이 있지만 경험이 풍부해서 아직까지 번트매니저를 맡고 있었다.
"모두 짐을 챙겨들어라. 바로 출발한다."
하인들이 짐을 각자 하나씩 등에 짊어 메자, 줄리아도 눈치껏 하나를 짚어 등뒤로 메었다.
일행은 곧 손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짐마차 하나가 있어, 번트매니저 가치는 짐마차 마부석에 올라섰다.
줄리아는 마치 감옥에서 탈출하는 사람인양, 기분이 설레이고 흥분되어 좀처럼 진정되지가 않았다.
들킬까봐 조마조마해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신나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 가문을 벗어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길을 따라 얼마 안가서 일련의 사람들이 보였다.
바로 아까 내왕했던 외부 손님들과 그들을 따라온 하인 일행이었다.
일부는 말위에, 일부는 마차에 올라 출발하고, 짐꾼들이 그 뒤를 따르니 행렬은 어렵지 않게 성문을 차례차례 통과하고 있었다.
성문 하나를 통과할때마다 왠지모를 성취감에 줄리아는 짜릿함을 맛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성문을 통과하여 태어나 처음으로 집을 벗어나고 있었다.
왠지 밖으로 나오니 공기부터가 달라지는 것 같았고,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이유없는 기대감까지 가슴속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은 상황에서, 맨 앞쪽에서 일행을 안내하던 올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희는 여기까지 배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고, 다음에도 또 뵙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나이 지긋한 컨소울길드 마스터의 인사를 끝으로 맏오빠인 올렌의 모습이 멀어져 갔다.
줄리아는 괜시리 올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멀어져가는 올렌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야기 했다.
[ 오빠 미안... ]
그렇게 줄리아는 16년을 살아온 그녀의 집을 떠나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 가솔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가주인 제라드가 성큼성큼 걸어와 강당 단상위로 올라 서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단상위로 올라선 제라드가 좌중을 한번 살펴본 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줄리아가 가율을 어기고 집을 나갔다. 금번 일에 대한 관련된 자들에 대한 문책은 줄리아가 집에 돌아온 이 후, 그 경중을 따져 물을 것이다. 일단 중요한 건 줄리아를 당장 데리고 오는 일이다. 총사관 올렌을 필두로 리사와 카누야가 올렌을 보좌한다. 올렌은 수색조 20명을 차출하여 당장 줄리아를 데리고 와라."
올렌이 한걸음 나서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총사관 올렌, 가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올렌이 나서 대답하고 나자, 다른 누군가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가주님..."
제라드가 바라보니, 가솔이 아닌 손님으로 와 있는 이안이었다.
이안은 빼어난 용모는 물론 루나스 가문과 함께 당대 최고 명문세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엘루인 가문의 아들이었다.
"제가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니나, 한가지 가주님께 청이 있습니다."
제라드가 이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말해보시게..."
이안이 좌중을 한번 살펴보고는 제라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한가지 확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주님과 저희 아버님께서는 줄리아와 저의 혼약에 대해 이미 논의를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제라드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이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금번 수색조에 저와 제 수행원들도 포함시켜 주십시오. 약혼자로써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좋네. 이안 경이 나서준다면 나와 내 가문에게 있어 더할나위없이 큰 힘이 될 터, 호의에 감사할 따름이네."
이안이 허리숙여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이어 제라드가 좌중을 살피며 호령했다.
"수색조는 준비되는대로 바로 출발한다. 줄리아는 낮에 출발한 컨소울길드의 일행을 따라갔으니, 서두르면 저녁무렵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존명!"
제라드가 물러나고 나서, 올렌이 이안에게 다가왔다.
"힘을 보태준다니, 더없이 감사합니다."
올렌이 먼저 호감을 표하자, 이안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닙니다. 응당 도와드려야지요. 어차피 삼사개월 정도는 이곳에 머물 생각으로 왔으니, 이 정도는 이벤트라고 생각해도 될 듯 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요."
"네."
이내 하인들이 말을 가져오자, 올렌과 이안이 마상위에 오르고, 이어 수하들도 모두 마상위에 올랐다.
"전속력으로 컨소울길드를 따라잡는다."
올렌의 외침과 동시에, 올렌과 루나스 가문의 수색조, 그리고 이안과 그의 수행원들이 곧바로 루나스 가문을 벗어나 컨소울길드가 향한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커리나의 수도 베네루치아 중심부에는 커리나 왕가를 상징하는 왕궁말고도 또 하나의 상징적 건축물이 있으니, 당대 최고의 명문세가 중 하나인 루나스 일가였다.
루나스 일가는 오래전 마족들의 침략에 맞서 인간들을 규합해 싸웠던 네명의 영웅중 한명인 에이프릴 루나스가 세운 가문이다.
대대로 오직 사냥꾼의 길만을 걸어온 루나스 가문은 블루문헌터스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사냥꾼 집단을 이끄는 수장의 가문이기도 했다.
현재에 이르러 루나스가문의 최고 어른이자 블루문헌터스의 수장인 제라드 루나스에게는 두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 중 막내딸 줄리아 루나스는 올해로 16살이 되어 오늘 가문에 대대로 행해지는 사냥꾼의 세례를 받을 예정이었다.
사냥꾼의 세례는 16살이 되는 해 생일날에 행해지게 되는데, 세례를 받고 나면 10년에 걸친 교육 끝에 세상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제 세례를 받아야할 줄리아 입장에서는 그 10년은 감옥과도 같은 생활로 느껴질 뿐이었다.
이미 두 오빠와 언니가 사냥꾼의 세례을 받고 험난한 교육을 받던 모습을 본 줄리아는 겁도 나고, 또 그 지긋지긋한 10년이란 시간을 어찌 보낼지도 걱정이 됐다.
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파왔고,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줄리아는 사냥꾼보다 세상을 방랑하며 이곳 저것을 구경하고 새로운 것들을 접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하아~"
줄리아는 답답한 마음에 창가에 턱을 괸 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아버지나 어머니나, 하기싫은 걸 왜 하라고 강요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이른 오후의 시간,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긴 체 훨훨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넋놓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일련의 행렬이 있었다.
앞뒤로 가문에 사병들이 경계하는 가운데, 대략 십여명의 사람들이 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서고 있었다.
"뭐지?"
줄리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어서는 십여명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다양한 연령층에 사람들이었는데, 대부분은 회색빛 바탕에 가슴 한가운데 붉은 원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고, 두명 만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줄리아의 방은 3층에 있어 들어서는 사람들을 손쉽게 볼 수 있었는데, 그들 중 유독 눈에 띄는 한사람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단단한 체격, 준수한 용모가 멀리서도 눈에 띄는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색 옷으로만 갖춰 입은, 언듯 보기에도 무언가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누구지?"
이 갇힌 새장속에서 지긋지긋한 일상에 지쳐가는 줄리아에게 낯선 이방인들의 행렬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루나스 가문 한가운데 위치한 이 본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총 5개의 거대한 성벽을 지나와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입에 위치한 귀빈관에서 응대를 하기 때문에, 외부 사람이 직접적으로 본관에 올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줄리아를 비롯해, 나이가 어린 가문의 여자들과 대부분의 하녀들은 이 본관 밖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외부인을 만나보기가 쉽지 않았으니, 지금 본관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신기할 뿐이었다.
줄리아는 재빨리 방문을 열고 2층으로 내려서려는데, 막 올라서던 하녀 질렌과 마주쳤다.
"어머? 아가씨... 어딜..."
"아, 잠깐 잠깐!"
줄리아가 헐레벌떡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옷가지를 들고 올라서던 하녀 질렌은 화들짝 놀라 줄리아의 뒤를 따라 달렸다.
"아...아가씨, 아가씨!"
줄리아가 2층 계단앞에 이르러 멈춰서서는 뒤따라온 질렌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하며 주의를 주자, 뒤따라온 질렌이 놀라 그 자리에 멈춰섰다.
줄리아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계단 아래쪽 거실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완전하지 않아, 사람들의 어깨와 신발 정도만 보는게 고작이지만, 제일 큰 오빠인 올렌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저희 가문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렌은 줄리아보다 10살이나 위여서, 최근에 사냥꾼의 수련을 모두 마치고, 가주인 아버지 다음 서열인 총사관이 되어 가문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조금씩 맡아서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루나스 가문에서 불러주신 것인데, 오히려 영광입니다."
다소 나이가 많아보이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줄리아는 살금살금 계단쪽으로 걸어가, 한계단 살짝 내려선 다음 몸을 낮춰서 좀 더 시야를 확보해 보았다.
오빠인 올렌의 뒷모습과 그 맞은 편에 서 있는 한 나이 지긋한 노인, 그리고 그 옆으로 아까 눈여겨 봐두었던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묵뚝뚝한 표정으로 노인과 올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러실게 아니라,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이미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올렌의 말에 모두들 자리에 앉았고, 곧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이 다가와 각자 앞에 찻잔을 놓아두고 물러갔다.
막상 자리에 앉으니, 그 남자의 모습이 좀 더 확실하게 보였는데, 다시 보아도 참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줄리아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자 더더욱 그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포트리아 차입니다. 포트린들의 선물이라 불리죠. 차의 향이 일품입니다."
올렌이 먼저 차에 대해 소개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차의 향을 맡아보았다.
"과연..."
"정말 향이 좋군요."
다들 차의 향에 감탄하자, 올렌이 말을 이었다.
"포트린은 숲의 수호자 입니다. 그들이 내어준 포트리아 찻잎은 정신을 맑게하고 기력을 회복하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습니다. 차를 마시실 땐, 차의 향을 먼저 맡으십시오. 그리고 입안에 넣은 뒤 바로 삼키지 마시고 일단 입안에서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한 뒤 아주 천천히 삼키시면 포트리아의 특유의 매끄러움과 함께 독특한 내음을 좀 더 깊이 느껴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들 올렌의 말에 따라 차를 마시며 다시금 놀라워 했다.
"정말 차의 향도, 맛도 일품입니다. 이처럼 향기로운 차는 처음 봅니다."
나이 많은 노인이 연신 감탄해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자 올렌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그저 포트린들이 준 것을 여러분들께 드렸을 뿐입니다. 오늘 대화를 모두 마치고 나면, 따로 포장하여 드릴테니, 가시는 길에 챙겨가시지요. 짐을 나를 하인들을 따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올렌이 차에 대해 설명하는 사이 누군가 거실에 들어섰다.
"안녕들 하십니까~"
누군가 호쾌한 인사말과 함께 나타나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십니까, 가주님..."
"안녕하십니까..."
다들 허리숙여 인사하며, 들어서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었는데, 바로 루나스 가문의 가주인 제라드 루나스였다.
"다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자리에들 앉으시지요."
제라드가 의자에 앉고 나자,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 앉았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일단 이곳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는 모두들 알고 계실 겁니다. 특히나..."
제라드가 사람들과 함께 서둘러 이야기를 시작했고, 대충 이야기를 듣던 줄리아는 지루한 듯 고개를 들어 질렌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 누군지 알아?"
줄리아의 물음에 질렌이 조심스레 계단 아랫쪽을 살펴본 뒤 줄리아를 바라보며 조금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까 얼핏 듣기로 자벨룬과 작은 전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자문을 구하러 온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다시 계단 아래쪽을 살펴 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아... 여기저기 다 따분한 소리 뿐이구나..."
줄리아가 이내 방으로 다시 돌아가려다가 질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저기 아래 층에 있는 사람들중에 키 크고 잘생긴 남자 보이지? 검은 옷 입은 사람 말야."
질렌이 그 말을 듣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계단 아래쪽 거실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네에... 뭐, 쫌... 잘생기긴 했습니다만..."
질렌은 벌써 낌새를 눈치 챘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줄리아는 그런 그녀의 표정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생기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 누군지 좀 알아봐줘. 얼른."
질렌은 역시나 하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고, 그 표정을 본 줄리아가 살살 웃으며 말했다.
"질렌... 알아봐 줄꺼지?"
줄리아는 문득 질렌이 들고 있는 옷가지를 보더니, 거의 뺏다시피 가져가며 말했다.
"부탁이야, 대신 옷은 내가 알아서 입을께~ 알아보고 내 방으로 와? 응?"
줄리아는 대답도 듣는 둥 마는 둥 후다닥 3층으로 올라가 버리고 질렌은 그런 줄리아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섰다.
조심조심 태연하게 계단에서 내려선 질렌은 황급히 집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입구쪽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쪽에는 집사가 한 하인 소년과 함께 서서, 안쪽에 가주인 제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 나오는 질렌을 흘낏 바라본 집사는 그녀가 자기 앞에서 머뭇머뭇 하자, 의아한 듯 그녀쪽으로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질렌이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집사님, 저기 손님들 중에 저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집사가 질렌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더니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글세. 잘은 모르겠는데, 같이온 컨소울길드의 마스터님과 안면이 있는 친구인 모양이다. 이름이 레나드라고 했던가, 마스터님말로는 무예가 출중하여 남쪽 지역에서는 제법 명성이 있다고 들었는데..."
집사가 다시금 질렌을 위아래로 흘겨보고는 말했다.
"아직 나이가 젊은 친구라서 그런가, 여자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니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말거라."
질렌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런거 아닙니다. 올렌 총사님께서 포트리아를 선물할 거라고 하셨는데 복색이 다르셔서 그 분 몫을 빼야하나 해서 여쭤보았습니다."
집사가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아니다, 엄연히 손님이니 그분 것도 준비해야지. 다른 아이에게 시킬 것이니, 너는 오늘 있을 아가씨 행사 준비에나 신경쓰거라."
"네~"
뾰루퉁한 표정에 질렌이 퉁명스레 대답하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서 줄리아의 방으로 가기위해 조심조심 거실을 지나쳐 올라섰다.
그 사이 자기방으로 돌아온 줄리아는 허겁지겁 옷부터 침대위에 펼쳐 놓고,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침대위에 펼쳐진 옷을 보고 그대로 굳어졌다.
짙푸른 녹색과 흰색이 배합된 옷, 그것은 사냥꾼의 세례때 입는 예복이었다.
방금전까지 호기심 가득했던 줄리아의 마음속이 찬물 끼얹은 듯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그대로 예복을 바라보던 줄리아는 창밖에 해가 뜬 위치를 한번 확인해 보더니, 창가쪽으로 달려가 성문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막 성문을 통과한 마차 세대가 푸른 하늘색의 삼륜 장식을 한 깃발을 꽃고 천천히 본관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깃발은 바로 블루문헌터스의 깃발로, 세례를 받을 줄리아를 데리고 수련원으로 가기 위해 본관으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줄리아는 그 마차가, 마치 감옥에 자신을 가두기 위해 오고 있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줄리아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막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마님께서 준비가 되는 대로 본관 뒤쪽으로 오시라는 분부십니다."
소년은 말을 하다 말고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처음엔 침울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줄리아의 표정이 점점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이름이 뭐니?"
소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방문을 열고 하녀 질렌이 들어섰다.
"어, 아가씨 아직도 옷 안입으셨어요?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어서 옷을 입으셔야죠."
질렌이 놀라해 하며 묻는 말에 줄리아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방긋 웃어보였다.
소년과 질렌은 서로 얼굴을 돌아보며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사람은 누구라던?"
줄리아가 묻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질렌이 정신 차린 듯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이야기 했다.
"레나드... 라고 합니다. 오늘 온 손님들이 컨소울길드 분들이신데, 그쪽 지역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무예가라고 합니다. 길드마스터님과 함께 오셨다고 하네요."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나드...? 아버지 이름이랑 비슷하네? 레나드...제라드... 뭐 어쨌든,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아까 올렌 오빠가 저분들한테 포트리아를 선물한다고 했지?"
"네...에..."
질렌이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대체 또 뭘 하시려는 겁니까?"
질렌이 걱정스레 묻는 말에 줄리아가 씨익 웃어보이고는 각오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난 죽어도 수련원에 들어가진 않을꺼야. 여기서 도망치기로 결심했어. 질렌이 좀 도와줘. 그리고, 너 이름이 뭐니?"
질렌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버리고, 소년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야스라고 합니다. 아가씨."
줄리아가 야스 옆으로 다가서자, 야스가 흠칫 놀라해 하며 움츠러 들었다.
"놀랄 것 없어. 가만히 있어봐."
줄리아는 야스의 옆에 서서 키를 재보고 체격을 비교해 보았다.
"좋아! 질렌, 보통 포트리아를 선물할 땐 남자 하인들이 날라주지?"
질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렇긴 합니다만... 다른 것도 아니고 짐을 날라야 하는데다가, 아시다시피 여자들은 이 본관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또 멀리 나갈 경우에는 번트매니저가 따라나섰다가, 하인들을 이끌고 다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뭔가 확인한 듯,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일단 여길 벗어날 수 있다는게 중요해. 이번 달 번트매니저는 누구지?"
번트매니저는 집사 밑에서 하인들을 관리하는, 관리장격 인물이었는데 보통 하인들중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이가 월마다 돌아가며 번트매니저를 맡고 있었다.
"이번달은 가치 아저씨일겁니다."
줄리아가 주먹을 꼭 쥐며 환호했다.
"가치아저씨?! 그 아저씨 눈도 어둡고 귀도 잘 안들리자나? 잘됐어 잘됐어!"
줄리아의 말에 질렌은 어이가 없었다.
[ 얘는 그걸 말이라고 하나... ]
그렇게 질렌이 속으로 궁시렁 거리고 있는 사이, 줄리아가 그녀에게 말했다.
"질렌, 저 옷은 니가 입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청천벽력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이련가, 오늘따라 질렌의 얼굴은 창백함의 연속이었다.
질렌이 질색을 하며 고개를 내리 흔들며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들켰다가는 제가 큰일납니다."
줄리아는 문제될게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아, 내가 강제로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 내 말 안들으면... 저 옷 걸레통에 넣고, 니가 흘려서 그랬다고 할꺼야!"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단 말인가? 질렌과 줄리아는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온 터라, 질렌은 나름대로 줄리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인적은 처음인지라, 질렌은 당황스럽기 까지 했다.
질렌이 창백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줄리아를 망연자실 바라보다 포기한듯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래, 혼날때 혼나더라도 일단 이 말괄량이를 내보내야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보내고 혼나는거야 한번 혼나고 말면 그만이지만, 안내보내서 이 인간에게 시달림 당할 걸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수련원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일주일에 두번은 집에 돌아오기 때문에 말을 안들어줬다가는, 일주일에 두번은 공포의 날이 될 판이었다.
그 사이, 질렌이 수긍했다고 생각한 줄리아가 말했다.
"일단 질렌이 먼저 옷가지고 옷방 들어가서 갈아입어. 얼른, 시간없어. 그리고 질렌 옷은 야스가 입고, 야스 옷은 내가 입는다."
야스도 놀라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시간없어! 당장!"
손님들이 자리에서 물어나고, 찻잔을 치우는 하녀들을 뒤로 한 체 본관 건물 밖으로 나선 제라드는 올렌에게 손님들을 배웅케 하고 자신은 막내딸이 오늘 치루게 될 사냥꾼의 세례를 시행하기 위해 본관 뒤편으로 향했다.
이미 와 있는 3대의 마차 행렬에 한대의 마차만이 문이 열려진 체 집사가 문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줄리아는?"
제라드가 다가와 묻는 말에, 옆에 서 있던 집사가 간략하게 대답했다.
"이미 마차에 오르셨습니다."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서두르세."
집사가 "네"하는 짧은 대답과 함께 마차의 문을 닫고, 마부석 옆자리에 올라섰다.
"출발한다."
세대의 마차가 출발하고, 그 모습을 멀리서 숨어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바로 줄리아였는데, 그녀는 지금 자신의 방에 들어왔던 하인 야스의 옷으로 바꿔 입은 상태였다.
모자를 하나 구해온 줄리아는 모자를 살짝 눌러쓰고, 얼굴에 대충 검불을 조금 묻힌 상태였는데, 체구가 작은 편이었던 줄리아가 허름한 하인옷을 입고 있으니 영락없는 하인이었다.
다만 원래 미모가 특출난 줄리아였던 지라, 검불로 얼굴을 가린다 해도 그 미모가 쉽게 가려지지는 않았다.
정작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거울을 보고 완벽하다며 스스로 자화자찬할 뿐, 누군가 조금만 신경쓰고 바라본다면 금방 탄로날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겉치레가 하인 행색이라 어느 누구도 신경써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미소년이 된 줄리아는 이내 집 앞쪽에 손님들이 내왕할때 사용하는 길쪽으로 내달렸다.
멀지 않은 곳에 일련에 하인 일행들이 보였고, 줄리아가 다가가자 하인들은 줄리아를 보고 놀란 표정들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하인들을 눈여겨 보지 않으니 잘 모르지만, 하인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니 당연히 줄리아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막내 아가씨가 어떻게..."
줄리아는 하인들이 단번에 자신을 알아보자 내심 실망을 하고 있었다.
하인들이 놀라 황망해 하는 모습을 보며, 줄리아가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힘주어 이야기 했다.
"쉿! 난 지금 이 순간부터 야스를 대신할 것이니, 어느 누구도 티내지 마라. 티내면, 평생토록 내 괴롭힘을 당할줄 알아!"
줄리아의 엄포에 다들 그저 황망한 표정을 지을 뿐이지만, 그중 한 하인이 나서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 야스는 이번 짐차 일행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금번 일행은 이미 모두 모여 있습니다."
줄리아가 그 말에 잠시 하인들을 살피더니, 제일 체격이 작아보이는 하인을 가르키며 말했다.
"너, 이름이 뭐니?"
"네? 아, 전 자마라고 합니다."
"자마? 그래 지금부터 내가 자마다. 넌 빠져."
그 말에 자마가 놀라 "네?"하고 되묻자, 줄리아가 버럭 성질을 내며 말했다.
"넌 빠지라고. 내 방으로 가면 야스가 있을꺼야. 둘이 방안에 있다가 이따 해지고 나면 나와. 그땐 내가 이미 여기 없을테니까. 사실대로 말해도 돼. 전부 내가 강요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
자마가 대답하지 못하고 황망하게 있을 때,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줄리아가 황급히 자마를 떠밀며 말했다.
"얼른!"
자마는 마지못해 본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줄리아는 하인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자, 손님들이 출발하신다."
나타난 사람은 금번 번트매니저를 맡은 가치였다.
가치는 하인들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눈이 좀 침침하고 귀가 잘 안들리는 경향이 있지만 경험이 풍부해서 아직까지 번트매니저를 맡고 있었다.
"모두 짐을 챙겨들어라. 바로 출발한다."
하인들이 짐을 각자 하나씩 등에 짊어 메자, 줄리아도 눈치껏 하나를 짚어 등뒤로 메었다.
일행은 곧 손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짐마차 하나가 있어, 번트매니저 가치는 짐마차 마부석에 올라섰다.
줄리아는 마치 감옥에서 탈출하는 사람인양, 기분이 설레이고 흥분되어 좀처럼 진정되지가 않았다.
들킬까봐 조마조마해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신나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 가문을 벗어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길을 따라 얼마 안가서 일련의 사람들이 보였다.
바로 아까 내왕했던 외부 손님들과 그들을 따라온 하인 일행이었다.
일부는 말위에, 일부는 마차에 올라 출발하고, 짐꾼들이 그 뒤를 따르니 행렬은 어렵지 않게 성문을 차례차례 통과하고 있었다.
성문 하나를 통과할때마다 왠지모를 성취감에 줄리아는 짜릿함을 맛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성문을 통과하여 태어나 처음으로 집을 벗어나고 있었다.
왠지 밖으로 나오니 공기부터가 달라지는 것 같았고,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이유없는 기대감까지 가슴속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은 상황에서, 맨 앞쪽에서 일행을 안내하던 올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희는 여기까지 배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고, 다음에도 또 뵙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나이 지긋한 컨소울길드 마스터의 인사를 끝으로 맏오빠인 올렌의 모습이 멀어져 갔다.
줄리아는 괜시리 올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멀어져가는 올렌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야기 했다.
[ 오빠 미안... ]
그렇게 줄리아는 16년을 살아온 그녀의 집을 떠나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 가솔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가주인 제라드가 성큼성큼 걸어와 강당 단상위로 올라 서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단상위로 올라선 제라드가 좌중을 한번 살펴본 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줄리아가 가율을 어기고 집을 나갔다. 금번 일에 대한 관련된 자들에 대한 문책은 줄리아가 집에 돌아온 이 후, 그 경중을 따져 물을 것이다. 일단 중요한 건 줄리아를 당장 데리고 오는 일이다. 총사관 올렌을 필두로 리사와 카누야가 올렌을 보좌한다. 올렌은 수색조 20명을 차출하여 당장 줄리아를 데리고 와라."
올렌이 한걸음 나서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총사관 올렌, 가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올렌이 나서 대답하고 나자, 다른 누군가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가주님..."
제라드가 바라보니, 가솔이 아닌 손님으로 와 있는 이안이었다.
이안은 빼어난 용모는 물론 루나스 가문과 함께 당대 최고 명문세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엘루인 가문의 아들이었다.
"제가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니나, 한가지 가주님께 청이 있습니다."
제라드가 이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말해보시게..."
이안이 좌중을 한번 살펴보고는 제라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한가지 확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주님과 저희 아버님께서는 줄리아와 저의 혼약에 대해 이미 논의를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제라드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이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금번 수색조에 저와 제 수행원들도 포함시켜 주십시오. 약혼자로써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좋네. 이안 경이 나서준다면 나와 내 가문에게 있어 더할나위없이 큰 힘이 될 터, 호의에 감사할 따름이네."
이안이 허리숙여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이어 제라드가 좌중을 살피며 호령했다.
"수색조는 준비되는대로 바로 출발한다. 줄리아는 낮에 출발한 컨소울길드의 일행을 따라갔으니, 서두르면 저녁무렵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존명!"
제라드가 물러나고 나서, 올렌이 이안에게 다가왔다.
"힘을 보태준다니, 더없이 감사합니다."
올렌이 먼저 호감을 표하자, 이안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닙니다. 응당 도와드려야지요. 어차피 삼사개월 정도는 이곳에 머물 생각으로 왔으니, 이 정도는 이벤트라고 생각해도 될 듯 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요."
"네."
이내 하인들이 말을 가져오자, 올렌과 이안이 마상위에 오르고, 이어 수하들도 모두 마상위에 올랐다.
"전속력으로 컨소울길드를 따라잡는다."
올렌의 외침과 동시에, 올렌과 루나스 가문의 수색조, 그리고 이안과 그의 수행원들이 곧바로 루나스 가문을 벗어나 컨소울길드가 향한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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