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2
문득 눈을 뜬 주동환은, 흐릿하고 불분명한 시야때문에,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던 주동환은 촛불이 많이 밝혀져 있는 밀실 같은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는 듯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천으로 가려진 방문을 열고 나갔다.
바깥은 제법 환했고, 널찍한 마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마당 한가운데, 천태호가 서 있었다.
천태호는 뒷짐을 진 체 등을 보이며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몸을 올려 주동환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좀 드냐?"
천태호의 물음에, 주동환은 고개 숙여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도대체 뭐에 당한 것이야? 홍여립은 약속대로 제거했지만, 정작 중요한 세자를 놓치지 않았느냐? 더욱이 왜구들의 육신이 모두 불에 타 버려서 못쓰게 돼버렸다. 이렇게 당할 술수가 아니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야?"
주동환은 세자와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지만, 어쩐지 그 순간의 기억이 흐릿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세자를 제거하려 했던 순간, 뜻하지 않은 세자의 공격을 받긴 했으나..."
자신의 뺨에 나있는 상처를 손으로 만져보던 주동환은 다시 말을 이었다.
"딱히 제가 쓰러질만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천태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너는 기생령 술수를 부린 이래로, 두 번째 결과물이다. 아직 주술이 불완전할 때였을 수도 있고, 봉인의 위치가 문제 됐을 수도 있다. 왜구들 역시 금령제중술은 이번에 처음 사용해 본 것이니, 아직 불완전해서 그럴 수도 있다. 허나... 다음번에도 같은 문제가 발생해서는 안되니, 이번에는 보다 강력한 주술을 걸 것이다."
주동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강력한 주술이요? 왜구들의 육신이 불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천태호가 피식 웃어 보였다.
"육신이 불탔을 뿐, 왜령들은 그대로다. 문제는 육신 없이 이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적으니, 이제 결정을 해야겠지."
"결정이라뇨?"
"이대로 궁궐로 쳐들어가 싹 다 죽여버리고, 새롭게 출발할지. 아니면, 네놈 말 따나 좌상을 죽이고, 안영군의 몸을 취할지.... 그런데... 그러기엔 세자가 살아있고, 세자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잠시 생각하던 주동환이 천태호를 보며 말했다.
"허면, 계책을 하나 내어드리겠습니다."
"계책? 뭐냐? 말해봐라."
"방주님께서는... 이미 죽은 시신도, 조종하실 수 있으시지요?"
"이미 죽은 시신?"
되물은 천태호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가능은 하지... 몇 가지 제약사항이 있긴 하지만... 또 죽은 지 너무 오래된 시신은, 여러 가지로 신경 써야 할게 많아."
"괜찮습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이니깐요. 제 계책은 이렇습니다. 어찌 되었든 왜구들을 토벌하였으니, 세자에게는 상이 내려질 것입니다. 이때 좌상이 이의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세자의 계략이며, 왕의 측근인 홍여립을 제거하기 위한 술책이었다고 말입니다."
그 말에 천태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 말을 누가 믿겠어?"
"아무도 안 믿겠지요. 허나, 죽은 홍여립이 나타나서 억울하다 하소연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천태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홍여립이?"
"예. 마치 꿈에 나타난 듯, 임금의 앞에 나타나, 세자로 인해 자신이 죽었다 고변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왕이.. 믿지 않을 수 있을까요?"
천태호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반색을 하며 말했다.
"으하하, 그거 참 재밌겠구나. 죽은 홍여립이 나타나 세자가 자신을 죽였다 말하라? 이거야 말로 임금에게는 믿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 으하하하. 좋다. 한번 해보자."
"남은 언령들을 최대한 집중해서 여론을 조성해야 합니다. 단순히 홍여립이 나타나 보여주기 이전에, 권력의 정점에 있는 좌상의 힘도 한번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그래그래, 그런데.... 그리 되면 어찌 되는 것인가? 세자를 죽이게 되는 것인가?"
"아마... 죽이진 않을 것입니다. 허나, 세자의 자리에 더 이상 머물지는 못하겠지요. 위배령이 내려질 가능성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래, 뭐, 위배 보내 놨다가, 천천히 제거해도 되지. 좋아. 한번 해보자. 네놈 계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으하하하."
***
늦은 시간, 침통한 표정으로 술잔을 비우고 있는 수현을, 세자는 객잔 입구에 서서 다가가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만보고 있었다.
안타까워하는 세자의 곁에는 연희가 함께하고 있었다.
수현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던 소연은 두 사람을 발견하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하..."
그러자, 수현이 고개를 돌려 세자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세자 저하 아니시옵니까?"
수현이 과장된 웃음과 행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절을 하니, 그 모양새가 이미 술에 잔뜩 취해 흐느적 거렸다.
"금호 나리..."
연희가 서둘러 달려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수현을 부축하여 일으키자, 소연도 따라 함께 수현을 부축했다.
"이곳까지 어인 행차 시옵니까?"
장난스럽게 웃으며 묻는 수현의 말에, 세자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며 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아... 제가 오늘은 술을 꼭 마셔야 했기에... 입궐치 못하였습니다. 저하."
수현이 히죽히죽 웃으며 하는 말에, 세자는 마음이 아파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어떤 말도 수현에게는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하다."
세자의 짤막한 말에, 수현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예?"
"지켜주지 못했다. 그리 쓰러질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네게도, 아바마마께도, 더없는 죄인이 된 마음이다."
수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하. 무인으로써 전장에서 죽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 아니옵니까? 아니옵니다."
하지만, 이내 수현의 얼굴은 짙은 슬픔으로 일그러지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아니옵... 니다..."
흐느껴 우는 수현을 내려다보는 세자는, 마치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고, 소연과 연희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수현을 바라보며 세자가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왜구들은... 이미 산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살아있을지언정, 제정신이 아니었다. 또한 그들을 이끄는 자는, 다름 아닌 표영호란 자였다."
수현이 고개를 번쩍 들어 세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영호... 사형 말입니까?"
"그래. 그것이 아마도... 도총관이 패한 이유인 것 같다."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것입니까? 사형은... 사형이 왜?"
"알지 않느냐? 그는... 도총관을 원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죽인 것은 좌상이 아닙니까? 어째서 정작 자신을 죽인 좌상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아비처럼 키워준 스승님을 원망한단 말입니까?"
세자가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그 점이 의문스러우나, 알 수 없구나. 어쨌든 그가 영호라는 이유로, 도총관이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그가 도총관을 뛰어넘었을 수도 있겠지."
수현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럴리는 없습니다. 그는... 그는 결코 스승님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수현은 괴로운 듯 비틀거리다가 다시 술상이 있는 곳으로 가 앉았다.
술잔을 들려는 것을 소연이 달려가 붙잡으며 만류했다.
"이제 그만 드십시오. 더 드시다가는 정말 큰일납니다.."
소연에게 떠밀리듯 술잔을 내려놓은 수현이 다시금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그런 수현을 모두가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갚을 것입니다. 이 빚을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
복수를 다짐하는 수현을 보며 연희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들이 말하는 영호가 누구인지 연희 역시 알고 있었다.
그가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 이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마치 자신도 공범이 돼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 또한 이 육신의 주인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가시지 않았다.
연희가 그렇게 말없이 죄책감에 빠져있을때 세자가 수현을 보며 말했다.
"내일 주상전하께 아뢰어, 천무방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할 것이다. 그리하여 천태호란 자를 반드시 잡을 것이며, 또한 표영호 역시 추포 하여 그 죄를 물을 것이다."
수현이 분노에 충혈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세자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영호 사형은... 추포 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수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제 손으로 죽일 것입니다."
세자는 그런 수현을 보며 수락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세자는 수현 말고 걱정되는 한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이미 시각이 꽤 늦어 주위가 어두워졌음에도 익숙한 발걸음으로 궁궐 어딘가로 향했다.
궁궐 안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우물가에 다다르자, 그가 예상한 대로 임금의 행차가 그곳에 있었다.
세자는 임금에게 다가갔고, 지척 거리에 이르자 임금이 그를 바라보았다.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고개를 들어 임금을 쳐다보던 세자는 , 임금의 표정이 한없이 쓸쓸해 보여,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사옵니다, 전하."
세자의 걱정스런 말에, 임금이 시선을 다시 우물가로 돌렸다.
"그래, 시간이 참으로 빠르구나."
그 말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이란, 평소 그가 느끼던 임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를 지키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세자가 죄스러운 마음으로 임금에게 말하자, 임금이 살짝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를 지키라고 보낸 사람이거늘, 네가 지키지 못해 미안할 것 있겠느냐?"
"전하께옵서 가장 아끼던 사람이 아니옵니까?"
임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랬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참으로 많이 의지했었구나. 청렴하고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조선제일검이라 불렸지만, 스스로를 단 한 번도 조선제일검이라 말한 적이 없지. 항상 스스로 갈고닦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신하였으나, 또한 내게 스승 같은 사람이었다."
"제게도 그리하였습니다, 항상 청렴하고 올곧아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게도, 이 나라에게도, 훌륭한 인재를 잃었음이구나."
이어 고개를 돌려 세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현은 어떠하냐? 네게 믿음을 주느냐?"
"예, 도총관을 꼭 빼닮은 제자입니다."
임금이 살짝 웃어 보였다.
"그래, 다행이다. 그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다."
그 말을 끝으로 임금은 천천히 몸을 돌려 침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런 임금의 뒤에서 세자는 조심스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는 한참을 더 그대로 서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던 주동환은 촛불이 많이 밝혀져 있는 밀실 같은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는 듯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천으로 가려진 방문을 열고 나갔다.
바깥은 제법 환했고, 널찍한 마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마당 한가운데, 천태호가 서 있었다.
천태호는 뒷짐을 진 체 등을 보이며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몸을 올려 주동환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좀 드냐?"
천태호의 물음에, 주동환은 고개 숙여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도대체 뭐에 당한 것이야? 홍여립은 약속대로 제거했지만, 정작 중요한 세자를 놓치지 않았느냐? 더욱이 왜구들의 육신이 모두 불에 타 버려서 못쓰게 돼버렸다. 이렇게 당할 술수가 아니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야?"
주동환은 세자와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지만, 어쩐지 그 순간의 기억이 흐릿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세자를 제거하려 했던 순간, 뜻하지 않은 세자의 공격을 받긴 했으나..."
자신의 뺨에 나있는 상처를 손으로 만져보던 주동환은 다시 말을 이었다.
"딱히 제가 쓰러질만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천태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너는 기생령 술수를 부린 이래로, 두 번째 결과물이다. 아직 주술이 불완전할 때였을 수도 있고, 봉인의 위치가 문제 됐을 수도 있다. 왜구들 역시 금령제중술은 이번에 처음 사용해 본 것이니, 아직 불완전해서 그럴 수도 있다. 허나... 다음번에도 같은 문제가 발생해서는 안되니, 이번에는 보다 강력한 주술을 걸 것이다."
주동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강력한 주술이요? 왜구들의 육신이 불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천태호가 피식 웃어 보였다.
"육신이 불탔을 뿐, 왜령들은 그대로다. 문제는 육신 없이 이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적으니, 이제 결정을 해야겠지."
"결정이라뇨?"
"이대로 궁궐로 쳐들어가 싹 다 죽여버리고, 새롭게 출발할지. 아니면, 네놈 말 따나 좌상을 죽이고, 안영군의 몸을 취할지.... 그런데... 그러기엔 세자가 살아있고, 세자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잠시 생각하던 주동환이 천태호를 보며 말했다.
"허면, 계책을 하나 내어드리겠습니다."
"계책? 뭐냐? 말해봐라."
"방주님께서는... 이미 죽은 시신도, 조종하실 수 있으시지요?"
"이미 죽은 시신?"
되물은 천태호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가능은 하지... 몇 가지 제약사항이 있긴 하지만... 또 죽은 지 너무 오래된 시신은, 여러 가지로 신경 써야 할게 많아."
"괜찮습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이니깐요. 제 계책은 이렇습니다. 어찌 되었든 왜구들을 토벌하였으니, 세자에게는 상이 내려질 것입니다. 이때 좌상이 이의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세자의 계략이며, 왕의 측근인 홍여립을 제거하기 위한 술책이었다고 말입니다."
그 말에 천태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 말을 누가 믿겠어?"
"아무도 안 믿겠지요. 허나, 죽은 홍여립이 나타나서 억울하다 하소연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천태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홍여립이?"
"예. 마치 꿈에 나타난 듯, 임금의 앞에 나타나, 세자로 인해 자신이 죽었다 고변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왕이.. 믿지 않을 수 있을까요?"
천태호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반색을 하며 말했다.
"으하하, 그거 참 재밌겠구나. 죽은 홍여립이 나타나 세자가 자신을 죽였다 말하라? 이거야 말로 임금에게는 믿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 으하하하. 좋다. 한번 해보자."
"남은 언령들을 최대한 집중해서 여론을 조성해야 합니다. 단순히 홍여립이 나타나 보여주기 이전에, 권력의 정점에 있는 좌상의 힘도 한번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그래그래, 그런데.... 그리 되면 어찌 되는 것인가? 세자를 죽이게 되는 것인가?"
"아마... 죽이진 않을 것입니다. 허나, 세자의 자리에 더 이상 머물지는 못하겠지요. 위배령이 내려질 가능성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래, 뭐, 위배 보내 놨다가, 천천히 제거해도 되지. 좋아. 한번 해보자. 네놈 계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으하하하."
***
늦은 시간, 침통한 표정으로 술잔을 비우고 있는 수현을, 세자는 객잔 입구에 서서 다가가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만보고 있었다.
안타까워하는 세자의 곁에는 연희가 함께하고 있었다.
수현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던 소연은 두 사람을 발견하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하..."
그러자, 수현이 고개를 돌려 세자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세자 저하 아니시옵니까?"
수현이 과장된 웃음과 행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절을 하니, 그 모양새가 이미 술에 잔뜩 취해 흐느적 거렸다.
"금호 나리..."
연희가 서둘러 달려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수현을 부축하여 일으키자, 소연도 따라 함께 수현을 부축했다.
"이곳까지 어인 행차 시옵니까?"
장난스럽게 웃으며 묻는 수현의 말에, 세자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며 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아... 제가 오늘은 술을 꼭 마셔야 했기에... 입궐치 못하였습니다. 저하."
수현이 히죽히죽 웃으며 하는 말에, 세자는 마음이 아파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어떤 말도 수현에게는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하다."
세자의 짤막한 말에, 수현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예?"
"지켜주지 못했다. 그리 쓰러질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네게도, 아바마마께도, 더없는 죄인이 된 마음이다."
수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하. 무인으로써 전장에서 죽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 아니옵니까? 아니옵니다."
하지만, 이내 수현의 얼굴은 짙은 슬픔으로 일그러지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아니옵... 니다..."
흐느껴 우는 수현을 내려다보는 세자는, 마치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고, 소연과 연희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수현을 바라보며 세자가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왜구들은... 이미 산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살아있을지언정, 제정신이 아니었다. 또한 그들을 이끄는 자는, 다름 아닌 표영호란 자였다."
수현이 고개를 번쩍 들어 세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영호... 사형 말입니까?"
"그래. 그것이 아마도... 도총관이 패한 이유인 것 같다."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것입니까? 사형은... 사형이 왜?"
"알지 않느냐? 그는... 도총관을 원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죽인 것은 좌상이 아닙니까? 어째서 정작 자신을 죽인 좌상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아비처럼 키워준 스승님을 원망한단 말입니까?"
세자가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그 점이 의문스러우나, 알 수 없구나. 어쨌든 그가 영호라는 이유로, 도총관이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그가 도총관을 뛰어넘었을 수도 있겠지."
수현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럴리는 없습니다. 그는... 그는 결코 스승님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수현은 괴로운 듯 비틀거리다가 다시 술상이 있는 곳으로 가 앉았다.
술잔을 들려는 것을 소연이 달려가 붙잡으며 만류했다.
"이제 그만 드십시오. 더 드시다가는 정말 큰일납니다.."
소연에게 떠밀리듯 술잔을 내려놓은 수현이 다시금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그런 수현을 모두가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갚을 것입니다. 이 빚을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
복수를 다짐하는 수현을 보며 연희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들이 말하는 영호가 누구인지 연희 역시 알고 있었다.
그가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 이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마치 자신도 공범이 돼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 또한 이 육신의 주인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가시지 않았다.
연희가 그렇게 말없이 죄책감에 빠져있을때 세자가 수현을 보며 말했다.
"내일 주상전하께 아뢰어, 천무방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할 것이다. 그리하여 천태호란 자를 반드시 잡을 것이며, 또한 표영호 역시 추포 하여 그 죄를 물을 것이다."
수현이 분노에 충혈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세자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영호 사형은... 추포 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수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제 손으로 죽일 것입니다."
세자는 그런 수현을 보며 수락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세자는 수현 말고 걱정되는 한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이미 시각이 꽤 늦어 주위가 어두워졌음에도 익숙한 발걸음으로 궁궐 어딘가로 향했다.
궁궐 안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우물가에 다다르자, 그가 예상한 대로 임금의 행차가 그곳에 있었다.
세자는 임금에게 다가갔고, 지척 거리에 이르자 임금이 그를 바라보았다.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고개를 들어 임금을 쳐다보던 세자는 , 임금의 표정이 한없이 쓸쓸해 보여,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사옵니다, 전하."
세자의 걱정스런 말에, 임금이 시선을 다시 우물가로 돌렸다.
"그래, 시간이 참으로 빠르구나."
그 말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이란, 평소 그가 느끼던 임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를 지키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세자가 죄스러운 마음으로 임금에게 말하자, 임금이 살짝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를 지키라고 보낸 사람이거늘, 네가 지키지 못해 미안할 것 있겠느냐?"
"전하께옵서 가장 아끼던 사람이 아니옵니까?"
임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랬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참으로 많이 의지했었구나. 청렴하고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조선제일검이라 불렸지만, 스스로를 단 한 번도 조선제일검이라 말한 적이 없지. 항상 스스로 갈고닦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신하였으나, 또한 내게 스승 같은 사람이었다."
"제게도 그리하였습니다, 항상 청렴하고 올곧아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게도, 이 나라에게도, 훌륭한 인재를 잃었음이구나."
이어 고개를 돌려 세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현은 어떠하냐? 네게 믿음을 주느냐?"
"예, 도총관을 꼭 빼닮은 제자입니다."
임금이 살짝 웃어 보였다.
"그래, 다행이다. 그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다."
그 말을 끝으로 임금은 천천히 몸을 돌려 침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런 임금의 뒤에서 세자는 조심스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는 한참을 더 그대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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