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4
입궐한 연희는 누구에게 들킬 세라, 고개를 잔뜩 숙인 체 조세춘과 의원을 따라 수현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선 연희는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가 피로 물든 붕대를 가슴에 칭칭 두른 체 누워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수현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먼저 열을 식혀 주거라."
의원의 말에 연희는 얼른 고개 숙여 대답한 뒤, 물수건과 대야를 챙겨들었다.
물수건을 꼭 짜서, 수현의 이마에 올리니 뜨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연희는, 수현이 이러고 있는 것이 꼭 자기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리.'
연희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이며, 물수건으로 수현의 땀을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밤이 더욱 깊어져 가도록, 연희는 쉬지 않고 계속 물수건으로 수현의 얼굴과 목을 닦아 주다 보니, 어느새 본인 이마에도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그만 좀 쉬거라."
다른 의녀가 곁으로 다가와 건네는 말에, 연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한걸음 물러났다.
팔을 더 이상 들기 힘들 만큼 아파왔지만, 아직도 자신 때문에 이렇게 다친것 같은 미안함에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잠시 쉬거라."
상태를 살피던 의원도 온 정성을 다해 수현을 보살핀 연희에게 타이르듯 말하고는 먼저 방을 나섰다.
연희는 수현의 모습을 다시 한번 더 바라본 뒤,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깊은 어둠이 내리깔린 궁궐 안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주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제와 다시 보니, 궁궐은 크고 적막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바람에 땀을 식히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니, 그 거대한 적막 안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평온하게 걸음을 온기던 연희는 또다시 잃어버린 과거의 자신에대해 생각했다.
주동환이 자신에게 보여줬던 관대한 모습들은 그녀의 마음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정녕 둘이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을까?
의문에 대한 해답은 오로지 기억을 찾는 것뿐이었지만, 기억은 쉽사리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거운 목소리에 생각에 빠져 있던 연희는 놀라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마마..."
그녀는 다름 아닌 혜령옹주였다.
연희가 서둘러 공손히 인사하며 고개 숙였지만, 혜령옹주는 이미 불쾌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너에게 그만큼 당부하였거늘, 또다시 궁에 들어오다니... 더군다나..."
혜령옹주는 연희가 입은 의녀의 복색을 보고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는 신분을 속이면서까지 들어오는 것이냐? 정녕 네가 저하께 얼마나 큰 누가 되는지 몰라서 이러는 것이냐?"
혜령옹주의 호통에 연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서 있었다.
"너는 이 궁궐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혜령옹주의 단호한 한마디에, 무슨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혜령옹주 뒤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리하라 명하였다."
연희는 순간 반가움에 고개를 들어 듬직하고 잘생긴 세자의 얼굴을 살짝 쳐다봤다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시간에 볼 수 있을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세자가 혜령옹주 뒤에 걸어오고 있었다.
"저하..."
혜령옹주는 고개를 숙이며 한걸음 물러섰다.
"저하... 어찌..."
혜령옹주가 답답한 듯 세자에게 말을 하려고 하자, 세자가 저지하며 먼저 나서 말했다.
"왜 안된다 하는 것이냐?"
혜령옹주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망연히 세자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안 되는 것이 많은 것이냐? 억울한 백성을 구했고, 그 백성으로 말미암아 사건을 알았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자, 증인이 된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입궁하라 했을 뿐이다. 이제 너마저 뭐가 그리 안된다고 하는 것이냐?"
"정녕 그것뿐이옵니까?"
"그것뿐이라니?"
"정녕 그뿐이라 한들 마찬가지입니다. 좌상대감이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저하의 마음이 순수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왜곡시켜 저하를 궁지로 내몰 것입니다. 티끌만한 터럭이라도 세자로서의 자격을 물으려 할 것입니다."
세자가 혜령옹주를 응시했다.
혜령옹주는 세자가 뻔히 바라보자, 당황한 기색으로 눈빛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그저 백성 한명 살리고자 한 것이, 이리도 문제가 된다는 것이냐?"
씁쓸해하는 세자의 목소리에, 혜령옹주는 다시 고개를 들어 세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하.... 어찌 이러십니까? 이 일은 결코..."
혜령옹주가 말을 체 다하기도 전에, 세자가 다시 말했다.
"금호가 죽을 뻔했고, 금호를 돕던 이가 죽었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 사라졌고, 그 물건은 사교도와 관련이 있는 물건이었다."
"이러한 것은 포도청이 있고 의금부가 있습니다. 어찌 저하께서..."
"그 사교도 무리는 다시 천무방이라는 사술집단과 관련이 있으며, 그 천무방은 좌상대감의 비호를 받고 있다."
세자의 말에 혜령옹주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세자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그것은...."
그런 혜령옹주를 보며 세자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마마마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혜령옹주의 눈은 더욱더 커져,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하.... 하오나, 그 일은.... 그 일을 들추시게 되면, 저하가 위험해지옵니다."
"피하지 않을 것이다."
"예?"
"오롯이 바로 설 것이다. 이 나라의 세자로써, 이 나라의 국본으로써, 자기 부모의 죽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대서야 어찌 바로 설 수 있겠느냐? 모든 죄상을 낱낱이 밝혀 죄인들이 벌을 받게 할 것이다."
혜령옹주는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자를 바라보았다.
"저하... 마마께서는.... 역모죄로 참수되셨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거기엔 분명 밝혀지지 않은 음모가 있다. 나는 그것을 알아야겠다."
혜령옹주는 더 이상 세자를 설득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제가 도울 일이 없겠습니까?"
"아니다. 내 어찌 너마저 이 일에 끌어들이겠느냐? 다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너만이라도 믿어 주길 바란다."
혜령옹주의 시선이 다시 연희에게로 향하자, 연희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 아이는... 저하께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혜령옹주의 물음에 세자도 연희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아이다."
"그 이후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이후라니?"
"저 아이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을 때 말입니다."
세자는 슬쩍 연희의 눈치를 살피고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대답했다.
"흠, 그것은 그때 가서 내가 알아서 할것이다."
혜령옹주는 세자를 보며 슬며시 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하께옵서는, 다른 이의 세세한 마음까지 살피려 하시지요. 하지만, 여인의 마음까지 세세히 살필 줄은 모르십니다. 저 아이를 생각하신다면, 헛된 희망은 가지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
세자의 대답에 더이상 소용없음을 느낀 혜령옹주는 공손히 인사를 올린 뒤 자신의 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멀어지는 혜령옹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자는 옹주의 모습이 사라진것을 확인하고서야 연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래저래, 네가 신경이 많이 쓰이겠구나."
"아니옵니다, 저하. 그저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세자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이 나라의 근본을 흔들고 있음이다. 이 어찌 망국의 길이 아닐 수 있겠느냐? 어렵고 힘들겠지만, 너도 이 나라의 백성이니,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돕기를 바란다."
뭔가 조금 과장된 느낌이 있었지만, 연희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예, 저하. 비록 보잘것없사오나,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세자는 뭔가 더 말을 하려는 듯 보였지만, 이내 헛기침만 연이어 해댔다.
"어디 불편하시옵니까?"
자꾸 기침하는 세자를 보며 걱정스레 묻는 연희의 물음에, 세자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이어 언제 그랬냐는듯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의 음모가 날이 갈수록 도를 넘고 있지 않느냐? 우리도 이대로 당할 수 만은 없으니, 차비를 해야겠지."
뜬금없는 세자의 말에 순간 연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응? 뭐가?"
"아, 아니옵니다."
고개를 숙인 연희는 괜스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흠, 그래... 금호는 좀 괜찮아 보이느냐?"
"기색이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네가 잘 좀 보살펴 주거라. 우리에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예, 저하."
연희는 연신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것을 더이상 참기 힘들었다.
"어찌... 그러느냐?"
웃음을 참는 연희의 모습을 보며 세자가 의아한 듯 묻자, 연희가 얼른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아니옵니다."
세자는 의심스럽다는듯 고개숙인 연희의 얼굴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한동안 쳐다보았다.
말없이 서 있는 세자와 연희는 둘을 둘러싼 어두운 궁궐의 적막한 고요함 속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그래, 그럼... 수고하거라."
세자는 따뜻하고 낮은 음성으로 연희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돌아섰다.
"예, 저하."
연희는 돌아서서 걸어가는 세자의 굳건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혜령옹주에게 자신을 그저 백성 한명이라고 했을때는 가슴이 미어지는것 같았다.
그저 자신은 세자에게 어머니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것인가 싶은 생각에 마음이 애려오는듯 했다.
허나 '우리라고 하셨다.'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았어도 세자가 무의식중에 말한 '우리'라는 말은 연희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또다시 입술이 벌어지며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이내 정색을 한 연희는 피곤이 조금은 씻겨나간 몸을 틀어 수현의 방으로 뛰어가다시피 돌아갔다.
***
아무도 없는 빈청에 홀로 앉은 좌의정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곧 빈청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오니, 대사헌 윤일호였다.
"좌상대감, 찾아계셨습니까?"
윤일호가 다가와 물으니, 좌의정 최준경이 지긋이 눈을 뜨며 윤일호를 바라보았다.
"오셨습니까? 이리 앉으시지요."
최준경의 손짓에 윤일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준경의 맞은편에 자리를잡고 앉았다.
"어찌... 찾으셨습니까?"
윤일호의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최준경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이 찾는 것이 이상하셨습니까?"
최준경의 농같은 말에, 윤일호 역시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허허..."
어색한 웃음을 거두고, 최준경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최근 조정 대신들이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해, 비리가 들끓는다는 상소가 오르고 있습니다."
윤일호의 표정이 굳어지며 되물었다.
"예? 사, 상소요?"
"그렇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 하여, 이 사람과 적을 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적당히 접어둔 것들이 한둘이 아닐진대, 언제까지 그렇게 편을 들어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 사람과 적을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드니.... 이렇게 봐주다가는 의금부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상소라도 올라오면, 대사헌께서 난처하시지 않겠습니까?"
윤일호는 최준경의 말을 들으며 점점 표정이 창백해져 갔다.
"무, 물론 그렇지요. 예, 예..."
"그렇다고 원칙대로 처벌했다가는, 또 원망이 만만치 않을 듯 하니, 크게 벌 받지 않을 만한 사람들을 몇 명 뽑아서, 적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게 하십시다. 그래야 대사헌 면도 좀 서고, 국정이 바로 잡혀 조정 대신들이 일을 바르게 한다는 인식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 예예, 그리하겠습니다. 좌상대감..."
"그럼 이번 일을 끝까지 맡아서 진행할만한 사람을 보내주세요. 내 명단을 작성해서 전달해 드리리다."
"예예, 좌상대감... 곧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좌상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태연히 밖으로 나갔고, 윤일호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으로 들어선 연희는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가 피로 물든 붕대를 가슴에 칭칭 두른 체 누워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수현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먼저 열을 식혀 주거라."
의원의 말에 연희는 얼른 고개 숙여 대답한 뒤, 물수건과 대야를 챙겨들었다.
물수건을 꼭 짜서, 수현의 이마에 올리니 뜨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연희는, 수현이 이러고 있는 것이 꼭 자기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리.'
연희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이며, 물수건으로 수현의 땀을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밤이 더욱 깊어져 가도록, 연희는 쉬지 않고 계속 물수건으로 수현의 얼굴과 목을 닦아 주다 보니, 어느새 본인 이마에도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그만 좀 쉬거라."
다른 의녀가 곁으로 다가와 건네는 말에, 연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한걸음 물러났다.
팔을 더 이상 들기 힘들 만큼 아파왔지만, 아직도 자신 때문에 이렇게 다친것 같은 미안함에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잠시 쉬거라."
상태를 살피던 의원도 온 정성을 다해 수현을 보살핀 연희에게 타이르듯 말하고는 먼저 방을 나섰다.
연희는 수현의 모습을 다시 한번 더 바라본 뒤,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깊은 어둠이 내리깔린 궁궐 안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주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제와 다시 보니, 궁궐은 크고 적막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바람에 땀을 식히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니, 그 거대한 적막 안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평온하게 걸음을 온기던 연희는 또다시 잃어버린 과거의 자신에대해 생각했다.
주동환이 자신에게 보여줬던 관대한 모습들은 그녀의 마음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정녕 둘이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을까?
의문에 대한 해답은 오로지 기억을 찾는 것뿐이었지만, 기억은 쉽사리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거운 목소리에 생각에 빠져 있던 연희는 놀라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마마..."
그녀는 다름 아닌 혜령옹주였다.
연희가 서둘러 공손히 인사하며 고개 숙였지만, 혜령옹주는 이미 불쾌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너에게 그만큼 당부하였거늘, 또다시 궁에 들어오다니... 더군다나..."
혜령옹주는 연희가 입은 의녀의 복색을 보고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는 신분을 속이면서까지 들어오는 것이냐? 정녕 네가 저하께 얼마나 큰 누가 되는지 몰라서 이러는 것이냐?"
혜령옹주의 호통에 연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서 있었다.
"너는 이 궁궐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혜령옹주의 단호한 한마디에, 무슨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혜령옹주 뒤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리하라 명하였다."
연희는 순간 반가움에 고개를 들어 듬직하고 잘생긴 세자의 얼굴을 살짝 쳐다봤다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시간에 볼 수 있을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세자가 혜령옹주 뒤에 걸어오고 있었다.
"저하..."
혜령옹주는 고개를 숙이며 한걸음 물러섰다.
"저하... 어찌..."
혜령옹주가 답답한 듯 세자에게 말을 하려고 하자, 세자가 저지하며 먼저 나서 말했다.
"왜 안된다 하는 것이냐?"
혜령옹주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망연히 세자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안 되는 것이 많은 것이냐? 억울한 백성을 구했고, 그 백성으로 말미암아 사건을 알았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자, 증인이 된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입궁하라 했을 뿐이다. 이제 너마저 뭐가 그리 안된다고 하는 것이냐?"
"정녕 그것뿐이옵니까?"
"그것뿐이라니?"
"정녕 그뿐이라 한들 마찬가지입니다. 좌상대감이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저하의 마음이 순수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왜곡시켜 저하를 궁지로 내몰 것입니다. 티끌만한 터럭이라도 세자로서의 자격을 물으려 할 것입니다."
세자가 혜령옹주를 응시했다.
혜령옹주는 세자가 뻔히 바라보자, 당황한 기색으로 눈빛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그저 백성 한명 살리고자 한 것이, 이리도 문제가 된다는 것이냐?"
씁쓸해하는 세자의 목소리에, 혜령옹주는 다시 고개를 들어 세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하.... 어찌 이러십니까? 이 일은 결코..."
혜령옹주가 말을 체 다하기도 전에, 세자가 다시 말했다.
"금호가 죽을 뻔했고, 금호를 돕던 이가 죽었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 사라졌고, 그 물건은 사교도와 관련이 있는 물건이었다."
"이러한 것은 포도청이 있고 의금부가 있습니다. 어찌 저하께서..."
"그 사교도 무리는 다시 천무방이라는 사술집단과 관련이 있으며, 그 천무방은 좌상대감의 비호를 받고 있다."
세자의 말에 혜령옹주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세자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그것은...."
그런 혜령옹주를 보며 세자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마마마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혜령옹주의 눈은 더욱더 커져,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하.... 하오나, 그 일은.... 그 일을 들추시게 되면, 저하가 위험해지옵니다."
"피하지 않을 것이다."
"예?"
"오롯이 바로 설 것이다. 이 나라의 세자로써, 이 나라의 국본으로써, 자기 부모의 죽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대서야 어찌 바로 설 수 있겠느냐? 모든 죄상을 낱낱이 밝혀 죄인들이 벌을 받게 할 것이다."
혜령옹주는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자를 바라보았다.
"저하... 마마께서는.... 역모죄로 참수되셨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거기엔 분명 밝혀지지 않은 음모가 있다. 나는 그것을 알아야겠다."
혜령옹주는 더 이상 세자를 설득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제가 도울 일이 없겠습니까?"
"아니다. 내 어찌 너마저 이 일에 끌어들이겠느냐? 다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너만이라도 믿어 주길 바란다."
혜령옹주의 시선이 다시 연희에게로 향하자, 연희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 아이는... 저하께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혜령옹주의 물음에 세자도 연희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아이다."
"그 이후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이후라니?"
"저 아이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을 때 말입니다."
세자는 슬쩍 연희의 눈치를 살피고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대답했다.
"흠, 그것은 그때 가서 내가 알아서 할것이다."
혜령옹주는 세자를 보며 슬며시 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하께옵서는, 다른 이의 세세한 마음까지 살피려 하시지요. 하지만, 여인의 마음까지 세세히 살필 줄은 모르십니다. 저 아이를 생각하신다면, 헛된 희망은 가지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
세자의 대답에 더이상 소용없음을 느낀 혜령옹주는 공손히 인사를 올린 뒤 자신의 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멀어지는 혜령옹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자는 옹주의 모습이 사라진것을 확인하고서야 연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래저래, 네가 신경이 많이 쓰이겠구나."
"아니옵니다, 저하. 그저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세자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이 나라의 근본을 흔들고 있음이다. 이 어찌 망국의 길이 아닐 수 있겠느냐? 어렵고 힘들겠지만, 너도 이 나라의 백성이니,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돕기를 바란다."
뭔가 조금 과장된 느낌이 있었지만, 연희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예, 저하. 비록 보잘것없사오나,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세자는 뭔가 더 말을 하려는 듯 보였지만, 이내 헛기침만 연이어 해댔다.
"어디 불편하시옵니까?"
자꾸 기침하는 세자를 보며 걱정스레 묻는 연희의 물음에, 세자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이어 언제 그랬냐는듯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의 음모가 날이 갈수록 도를 넘고 있지 않느냐? 우리도 이대로 당할 수 만은 없으니, 차비를 해야겠지."
뜬금없는 세자의 말에 순간 연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응? 뭐가?"
"아, 아니옵니다."
고개를 숙인 연희는 괜스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흠, 그래... 금호는 좀 괜찮아 보이느냐?"
"기색이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네가 잘 좀 보살펴 주거라. 우리에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예, 저하."
연희는 연신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것을 더이상 참기 힘들었다.
"어찌... 그러느냐?"
웃음을 참는 연희의 모습을 보며 세자가 의아한 듯 묻자, 연희가 얼른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아니옵니다."
세자는 의심스럽다는듯 고개숙인 연희의 얼굴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한동안 쳐다보았다.
말없이 서 있는 세자와 연희는 둘을 둘러싼 어두운 궁궐의 적막한 고요함 속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그래, 그럼... 수고하거라."
세자는 따뜻하고 낮은 음성으로 연희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돌아섰다.
"예, 저하."
연희는 돌아서서 걸어가는 세자의 굳건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혜령옹주에게 자신을 그저 백성 한명이라고 했을때는 가슴이 미어지는것 같았다.
그저 자신은 세자에게 어머니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것인가 싶은 생각에 마음이 애려오는듯 했다.
허나 '우리라고 하셨다.'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았어도 세자가 무의식중에 말한 '우리'라는 말은 연희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또다시 입술이 벌어지며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이내 정색을 한 연희는 피곤이 조금은 씻겨나간 몸을 틀어 수현의 방으로 뛰어가다시피 돌아갔다.
***
아무도 없는 빈청에 홀로 앉은 좌의정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곧 빈청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오니, 대사헌 윤일호였다.
"좌상대감, 찾아계셨습니까?"
윤일호가 다가와 물으니, 좌의정 최준경이 지긋이 눈을 뜨며 윤일호를 바라보았다.
"오셨습니까? 이리 앉으시지요."
최준경의 손짓에 윤일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준경의 맞은편에 자리를잡고 앉았다.
"어찌... 찾으셨습니까?"
윤일호의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최준경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이 찾는 것이 이상하셨습니까?"
최준경의 농같은 말에, 윤일호 역시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허허..."
어색한 웃음을 거두고, 최준경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최근 조정 대신들이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해, 비리가 들끓는다는 상소가 오르고 있습니다."
윤일호의 표정이 굳어지며 되물었다.
"예? 사, 상소요?"
"그렇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 하여, 이 사람과 적을 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적당히 접어둔 것들이 한둘이 아닐진대, 언제까지 그렇게 편을 들어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 사람과 적을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드니.... 이렇게 봐주다가는 의금부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상소라도 올라오면, 대사헌께서 난처하시지 않겠습니까?"
윤일호는 최준경의 말을 들으며 점점 표정이 창백해져 갔다.
"무, 물론 그렇지요. 예, 예..."
"그렇다고 원칙대로 처벌했다가는, 또 원망이 만만치 않을 듯 하니, 크게 벌 받지 않을 만한 사람들을 몇 명 뽑아서, 적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게 하십시다. 그래야 대사헌 면도 좀 서고, 국정이 바로 잡혀 조정 대신들이 일을 바르게 한다는 인식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 예예, 그리하겠습니다. 좌상대감..."
"그럼 이번 일을 끝까지 맡아서 진행할만한 사람을 보내주세요. 내 명단을 작성해서 전달해 드리리다."
"예예, 좌상대감... 곧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좌상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태연히 밖으로 나갔고, 윤일호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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