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2
수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던 주동환은 정확히 열두 걸음 앞에 멈춰 섰다.
수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동환을 응시하며 검을 치켜들고는 손에 힘을 주었다.
수현을 주시하던 주동환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믿을 거라고는, 그 잘난 십보장 밖에 없더냐?"
수현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것뿐이다."
주동환은 싸늘한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죽어야지."
그리고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이 움직였다.
열두 걸음 앞에 있던 주동환은 어느새 수현의 뒤에 서 있었고, 수현은 어느새 몸을 앞으로 숙인 체 칼을 뻗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상태로 굳어져 있기를 잠시, 주동환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수현을 돌아보자, 칼에 묻은 피를 바닥에 흩뿌리며 수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 떻게..."
의아함에 눈빛이 흔들리는 주동환을 바라보다 수현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소. 사형의 십보일참..., 그 파쇄법을..."
수현은 주동환을 보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십보일참은... 네 사형인 영호가 만든, 십보장의 파쇄 무공이다."
홍여립이 부상에서 막 회복하여 수련을 하고 있던 수현을 찾아와 건넨 말이었다.
"십보장의... 파쇄 무공... 허나... 사형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자가 영호 사형의 기술을 쓸 수 있는 것입니까?"
홍여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어찌 이 무공을 아는 것일까... 나도 그것이 궁금하구나."
굳어진 표정의 홍여립을, 수현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홍여립은 등을 돌려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그렇게 얼마간 걸어가던 홍여립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참..."
할 말이 남은 듯 고개 돌린 홍여립을, 수현은 그 자리에서 서서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는... 십보일참의 파쇄법을 아느냐?"
난데없는 질문에 수현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되물었다.
"십보일참의 파쇄법이요? 그건..."
수현이 말끝을 흐리자, 홍여립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수현 앞으로 다가왔다.
"십보장을 파쇄하기 위한 무공, 십보일참. 그 십보일참의 파쇄법은... 바로 십보장이다."
홍여립의 알 수 없는 말에 수현은 더욱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예에? 십보장을 깨기 위한 무공이 십보일참인데, 그런 십보일참을 다시 십보장으로 깬단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홍여립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을 이었다.
"영호는 기질이 뛰어난 아이였다. 십보장을 십보장 밖에서부터 공격할 수 있다면, 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피나는 노력 끝에, 십보장 밖에서 단번에 공격할 수 있는 십보일참을 만들어낸 것이다. 허나, 그 기질이 뛰어난 영호도 수많은 시간 동안 피나는 노력 끝에 십보일참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십보일참의 십보(十步)는 그 무공이 발현할 수 있는 최대치를 의미한다. 반면, 십보장은 십보 안에 들어온 상대의 움직임을 보지도 않고 본 것처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무공으로, 만약 이를 이십보, 삼십보로 늘린다면 너무 많은 것들을 느끼게 되어, 도리어 시전자의 주의를 방해하게 될 것이다. 즉, 십보장의 십보는 적정치를 의미한다."
이야기를 듣던 수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되뇌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래, 단순히 십보장의 거리를 십이보, 십삼보로 늘려 십보일참이 가능한 거리를 뛰어넘는 것만으로도, 이미 십보일참을 파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십보일참은 그 거리를 단숨에 좁힐 만큼 쾌검에 집중했다. 그걸 상대가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발검과 동시에 상대를 베어 버림으로써, 십보장으로 공격을 가늠하기 전에 베어 버리는 것이다. 허나, 거리를 넓힌 십보장을 통해, 공격의 순간을 알아낸다면..."
홍여립이 말끝을 흐리자, 수현이 이어 말했다.
"단순히 발검을 하는 정도의 공격만으로도, 십보일참의 시전자를 꺾을 수 있겠군요."
"그렇다. 이미 자신의 속도가 극한에 이르렀으니, 거기에 상대의 속도까지 더해진다면, 설령 알고 있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건 언제 아신 겁니까?"
수현의 물음에 홍여립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처음... 영호가 십보일참을 나에게 보여줬을 때 알았다."
"헌데, 어찌 알려주지 않으신 겁니까?"
씁쓸하게 웃던 홍여립이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게 기뻐하는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잠시 동안... 모르는 척, 그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수현도 알고 있었다. 홍여립에게 영호는 아들 같은 존재라는 것을.
그 말을 남기고 무겁게 돌아서던 홍여립의 뒷모습을, 수현은 오랜 시간 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수현의 이야기를 들은 주동환, 아니 표영호는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눈시울을 붉혔다.
"알고... 있었다고...? 파쇄법을...?"
"그렇소. 스승님께서는... 알면서도... 맞아주신 것이었소."
표영호는 허망한 듯 웃음 짓다가,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그가 쓰러지고 난 뒤,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멍청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병사들 한가운데로 말 한필이 걸어 들어왔다.
그 말 위에는 놀랍게도 왜구들의 수장이 앉아 있었다.
그가 병사들 맨 앞에 서서,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이 영호의 사제라는 그 수현이란 놈인가 보구나. 멍청한 놈..."
수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짐작되는 듯 그를 향해 물었다.
"네놈은 천태호란 놈이렸다? 이번엔 왜구들의 수장 몸을 가져다 쓴 것이냐?"
수현의 말에 수장, 아니 천태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래, 이런 일이 있을 까 봐, 내 진작에 이놈 몸을 빌려 따라온 것이다. 네놈이 제아무리 십보장인지 뭔지 걸출한 무공이 있다 한들, 과연 내 주술을 이길 수 있을까?"
그의 말에 끝나기 무섭게, 말없이 서 있던 금위영 병사를 포함하여 왜구들에게 씌워진 병사들이, 가열차게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수현이 내력을 실어 병사들을 뒤로 물러나게 해 보지만, 500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홀로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으하하하, 결국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으하하하하"
천태호의 웃음소리가 넓게 퍼져나가는 가운데, 궁궐의 담을 넘어 밖으로 빠져나온 세자와 연희 일행은 서둘러 궁궐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자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느냐?"
세자의 물음에 소연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오래전부터 그자를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스승님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는, 주술로 자신의 거처를 가려놔 일반 사람들은 찾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 포도청의 병사들을 모두 동원해도 찾을 수 없었다."
"허나, 저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다행인 듯합니다. 주술의 힘이 강하게 집중되는 곳, 그렇기에 제가 찾기에는 더 수월한 곳입니다. 다만..."
"다만?"
"주술의 힘도 워낙 다양하고, 땅의 지세에 따라 본래부터 강한 기운을 띤 곳도 있기에, 그냥 찾기에는 막연하였습니다. 다행히 근래에 그 힘들 가운데, 찾아낼 방도를 알아내었습니다. 바로 연희 소저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소연의 말에 세자는 물론 연희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제가 어찌... 도우면 되는 것입니까?"
소연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그저 연희 소저의 몸에 깃든 주술의 힘이 천태호 그자의 힘이니, 같은 기운이 강하게 모여있는 곳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세자는 연희를 한번 쳐다보고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위험하지 않은 것이냐?"
소연이 안심하라는듯 미소를 지어보이자 세자는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럼 어서 시행해 보거라."
"예."
소연이 수인을 맺고 무어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연희의 손을 잡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잠시, 소연이 눈을 번쩍 뜨더니 어딘가를 응시했다.
"이쪽입니다. 이쪽에 같은 기운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서두르자."
세자와 일행은 소연이 말한 방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마을을 가로질러 달려가던 일행이 마을을 거의 벗어날 무렵, 세자가 돌연 방향을 바꿨다.
"이쪽으로 오너라."
세자의 말에 일행은 물론 소연도 의아스러움에, 뒤따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소연이 묻는 말에 체 대답하기도 전, 세자 일행은 역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아!"
소연은 비로소 왜 이쪽으로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어서 말을 내오너라."
다급한 세자의 말에 역마지기가 어리둥절해하다가, 세자의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는 서둘러 인사를 한 뒤 말을 내왔다.
말이 두필밖에 없자, 세자가 먼저 한필의 말위에 오르며 물었다.
"연희가 꼭 있어야 하느냐? 위험할 수도 있다."
세자의 물음에 소연이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난감해진 소연은 간곡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연희의 얼굴에 결심한 듯 세자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연희 소저의 기운이 있어야 찾아갈 수 있습니다."
소연의 말에 세자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연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는 나와 함께 타고 가자."
연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세자의 손을 잡고 말에 오르자, 부관이 말위에 올라 소연을 태웠다.
"너희들은 궁궐로 가서 동태를 살피거라."
세자의 명령에 뒤따르던 병사들이 "예." 하며 대답과 함께 서둘러 궁궐을 향해 발길을 돌렸고, 세자도 일행과 곧바로 말을 몰아 소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수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동환을 응시하며 검을 치켜들고는 손에 힘을 주었다.
수현을 주시하던 주동환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믿을 거라고는, 그 잘난 십보장 밖에 없더냐?"
수현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것뿐이다."
주동환은 싸늘한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죽어야지."
그리고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이 움직였다.
열두 걸음 앞에 있던 주동환은 어느새 수현의 뒤에 서 있었고, 수현은 어느새 몸을 앞으로 숙인 체 칼을 뻗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상태로 굳어져 있기를 잠시, 주동환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수현을 돌아보자, 칼에 묻은 피를 바닥에 흩뿌리며 수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 떻게..."
의아함에 눈빛이 흔들리는 주동환을 바라보다 수현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소. 사형의 십보일참..., 그 파쇄법을..."
수현은 주동환을 보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십보일참은... 네 사형인 영호가 만든, 십보장의 파쇄 무공이다."
홍여립이 부상에서 막 회복하여 수련을 하고 있던 수현을 찾아와 건넨 말이었다.
"십보장의... 파쇄 무공... 허나... 사형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자가 영호 사형의 기술을 쓸 수 있는 것입니까?"
홍여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어찌 이 무공을 아는 것일까... 나도 그것이 궁금하구나."
굳어진 표정의 홍여립을, 수현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홍여립은 등을 돌려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그렇게 얼마간 걸어가던 홍여립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참..."
할 말이 남은 듯 고개 돌린 홍여립을, 수현은 그 자리에서 서서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는... 십보일참의 파쇄법을 아느냐?"
난데없는 질문에 수현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되물었다.
"십보일참의 파쇄법이요? 그건..."
수현이 말끝을 흐리자, 홍여립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수현 앞으로 다가왔다.
"십보장을 파쇄하기 위한 무공, 십보일참. 그 십보일참의 파쇄법은... 바로 십보장이다."
홍여립의 알 수 없는 말에 수현은 더욱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예에? 십보장을 깨기 위한 무공이 십보일참인데, 그런 십보일참을 다시 십보장으로 깬단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홍여립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을 이었다.
"영호는 기질이 뛰어난 아이였다. 십보장을 십보장 밖에서부터 공격할 수 있다면, 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피나는 노력 끝에, 십보장 밖에서 단번에 공격할 수 있는 십보일참을 만들어낸 것이다. 허나, 그 기질이 뛰어난 영호도 수많은 시간 동안 피나는 노력 끝에 십보일참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십보일참의 십보(十步)는 그 무공이 발현할 수 있는 최대치를 의미한다. 반면, 십보장은 십보 안에 들어온 상대의 움직임을 보지도 않고 본 것처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무공으로, 만약 이를 이십보, 삼십보로 늘린다면 너무 많은 것들을 느끼게 되어, 도리어 시전자의 주의를 방해하게 될 것이다. 즉, 십보장의 십보는 적정치를 의미한다."
이야기를 듣던 수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되뇌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래, 단순히 십보장의 거리를 십이보, 십삼보로 늘려 십보일참이 가능한 거리를 뛰어넘는 것만으로도, 이미 십보일참을 파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십보일참은 그 거리를 단숨에 좁힐 만큼 쾌검에 집중했다. 그걸 상대가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발검과 동시에 상대를 베어 버림으로써, 십보장으로 공격을 가늠하기 전에 베어 버리는 것이다. 허나, 거리를 넓힌 십보장을 통해, 공격의 순간을 알아낸다면..."
홍여립이 말끝을 흐리자, 수현이 이어 말했다.
"단순히 발검을 하는 정도의 공격만으로도, 십보일참의 시전자를 꺾을 수 있겠군요."
"그렇다. 이미 자신의 속도가 극한에 이르렀으니, 거기에 상대의 속도까지 더해진다면, 설령 알고 있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건 언제 아신 겁니까?"
수현의 물음에 홍여립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처음... 영호가 십보일참을 나에게 보여줬을 때 알았다."
"헌데, 어찌 알려주지 않으신 겁니까?"
씁쓸하게 웃던 홍여립이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게 기뻐하는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잠시 동안... 모르는 척, 그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수현도 알고 있었다. 홍여립에게 영호는 아들 같은 존재라는 것을.
그 말을 남기고 무겁게 돌아서던 홍여립의 뒷모습을, 수현은 오랜 시간 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수현의 이야기를 들은 주동환, 아니 표영호는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눈시울을 붉혔다.
"알고... 있었다고...? 파쇄법을...?"
"그렇소. 스승님께서는... 알면서도... 맞아주신 것이었소."
표영호는 허망한 듯 웃음 짓다가,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그가 쓰러지고 난 뒤,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멍청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병사들 한가운데로 말 한필이 걸어 들어왔다.
그 말 위에는 놀랍게도 왜구들의 수장이 앉아 있었다.
그가 병사들 맨 앞에 서서,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이 영호의 사제라는 그 수현이란 놈인가 보구나. 멍청한 놈..."
수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짐작되는 듯 그를 향해 물었다.
"네놈은 천태호란 놈이렸다? 이번엔 왜구들의 수장 몸을 가져다 쓴 것이냐?"
수현의 말에 수장, 아니 천태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래, 이런 일이 있을 까 봐, 내 진작에 이놈 몸을 빌려 따라온 것이다. 네놈이 제아무리 십보장인지 뭔지 걸출한 무공이 있다 한들, 과연 내 주술을 이길 수 있을까?"
그의 말에 끝나기 무섭게, 말없이 서 있던 금위영 병사를 포함하여 왜구들에게 씌워진 병사들이, 가열차게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수현이 내력을 실어 병사들을 뒤로 물러나게 해 보지만, 500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홀로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으하하하, 결국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으하하하하"
천태호의 웃음소리가 넓게 퍼져나가는 가운데, 궁궐의 담을 넘어 밖으로 빠져나온 세자와 연희 일행은 서둘러 궁궐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자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느냐?"
세자의 물음에 소연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오래전부터 그자를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스승님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는, 주술로 자신의 거처를 가려놔 일반 사람들은 찾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 포도청의 병사들을 모두 동원해도 찾을 수 없었다."
"허나, 저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다행인 듯합니다. 주술의 힘이 강하게 집중되는 곳, 그렇기에 제가 찾기에는 더 수월한 곳입니다. 다만..."
"다만?"
"주술의 힘도 워낙 다양하고, 땅의 지세에 따라 본래부터 강한 기운을 띤 곳도 있기에, 그냥 찾기에는 막연하였습니다. 다행히 근래에 그 힘들 가운데, 찾아낼 방도를 알아내었습니다. 바로 연희 소저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소연의 말에 세자는 물론 연희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제가 어찌... 도우면 되는 것입니까?"
소연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그저 연희 소저의 몸에 깃든 주술의 힘이 천태호 그자의 힘이니, 같은 기운이 강하게 모여있는 곳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세자는 연희를 한번 쳐다보고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위험하지 않은 것이냐?"
소연이 안심하라는듯 미소를 지어보이자 세자는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럼 어서 시행해 보거라."
"예."
소연이 수인을 맺고 무어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연희의 손을 잡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잠시, 소연이 눈을 번쩍 뜨더니 어딘가를 응시했다.
"이쪽입니다. 이쪽에 같은 기운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서두르자."
세자와 일행은 소연이 말한 방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마을을 가로질러 달려가던 일행이 마을을 거의 벗어날 무렵, 세자가 돌연 방향을 바꿨다.
"이쪽으로 오너라."
세자의 말에 일행은 물론 소연도 의아스러움에, 뒤따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소연이 묻는 말에 체 대답하기도 전, 세자 일행은 역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아!"
소연은 비로소 왜 이쪽으로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어서 말을 내오너라."
다급한 세자의 말에 역마지기가 어리둥절해하다가, 세자의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는 서둘러 인사를 한 뒤 말을 내왔다.
말이 두필밖에 없자, 세자가 먼저 한필의 말위에 오르며 물었다.
"연희가 꼭 있어야 하느냐? 위험할 수도 있다."
세자의 물음에 소연이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난감해진 소연은 간곡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연희의 얼굴에 결심한 듯 세자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연희 소저의 기운이 있어야 찾아갈 수 있습니다."
소연의 말에 세자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연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는 나와 함께 타고 가자."
연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세자의 손을 잡고 말에 오르자, 부관이 말위에 올라 소연을 태웠다.
"너희들은 궁궐로 가서 동태를 살피거라."
세자의 명령에 뒤따르던 병사들이 "예." 하며 대답과 함께 서둘러 궁궐을 향해 발길을 돌렸고, 세자도 일행과 곧바로 말을 몰아 소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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