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26
그것은 쉼 없이 몰아치는 모래바람 같은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래가 아닐지도 몰랐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무언가 휘날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추웠다. 차디찬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어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내손을 잡거라."
백하도령이 손을 내밀자, 나래는 얼른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백하도령의 손을 통해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고, 그의 주위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와 주위를 밝혀주었다.
어느샌가 휘몰아치는 바람은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다.
백하도령의 따스한 기운이 마치 보호막처럼 그와 나래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심연(深淵)인가요?"
나래의 물음에 백하도령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 저승의 심연은 나도 처음 보는구나."
현준을 만나고 싶다는 나래의 청에, 강림차사는 백하도령과 나래에게 현준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심연으로 안내해 주었다.
참척 이후에 죽은 부모의 영혼들은 이곳 심연 속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소멸되거나 혹은 환생을 한다고 들었다.
그들이 선택한 지옥인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영겁의 시간 동안 되새김질하는 지옥, 그것이 바로 심연이었다.
모래바람을 뚫고 백하도령과 나래는 심연의 그 어딘가에 있을 현준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두 사람 앞에 저 멀리 소실되어 가는 푸른빛의 영혼을 찾을 수 있었다.
온몸이 옅은 잿빛으로 변해버린 그는, 날아드는 날카로운 모래바람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듯, 영혼이 파여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동공이 사라진 백안(白眼)은 서글프기 그지없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방황하고 있었다.
"현준씨..."
나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파왔다.
자식 잃은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아, 속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저 심연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죽은 자식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 그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그저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현준씨!"
나래가 있는 힘껏 불러보지만, 현준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떡하죠?"
나래가 걱정스레 묻는 말에, 백하도령은 담담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의 영혼이 붕괴되어 가고 있구나."
"되돌릴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려울 것이다. 애초에 그렇기에 이 심연에 온 것인지, 심연에 있기에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그 말을 들은 나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죠."
그러고는 다시 현준을 바라보았다.
모래 바람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현준의 몸은 그 모래바람에 뜯겨 날아가며 옅어져 가고 있었다.
나래가 백하도령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이를... 아이를 회상시킬 수 있을까요?"
백하도령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진중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해봐야 알 것 같구나. 붕괴되고 있는 영혼으로부터 과거의 기억을 회상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는... 나도 가늠하기 힘들구나."
"해봐요. 해봐야 아는 거라면... 해봐야죠."
나래의 간곡한 부탁에 백하도령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둘은 방황하는 현준에게 다가갔다.
부서져 내리는 현준의 영혼 지척까지 다가간 백하도령은 손을 뻗어 그의 영혼 안에서 지나간 기억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 영혼에서 뽑아져 나오는 것은 미미하고 흐릿한 기억들 뿐이었다.
회상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백하도령이 집중하여 온 힘을 다하자 영혼에서 뽑혀 나오는 기억이 차츰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백하도령이 힘겹게 기억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래는 양손을 모아 기도하듯 애원했다. 제발...
어느 정도 기억이 모이자, 백하도령은 반대쪽 손을 현준 앞으로 뻗어 기억을 형상화시켰다.
드디어 현준 앞에 보랏빛 기억의 형상이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한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아이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기 무섭게, 아이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앙~"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순간 방황하던 현준을 그 자리에 멈춰 세웠다.
현준의 영혼은 멈춰 서서 멍하니 앞쪽을 응시했다.
"아아아앙~~"
아기의 울음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현준의 영혼은 망연자실하게 멈춰 서있을 뿐이었다.
나래는 현준의 뒤쪽으로 바짝 다가서서 소리쳤다.
"서찬이가... 서찬이가, 울어요!"
순간 현준의 눈동자가 돌아왔다.
"서찬아..."
현준은 멍한 표정으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내 잠에서 깨어나듯 움찔하고는 후다닥 달려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서찬아, 울지마... 울지마..."
현준이 아기를 달래자, 아기는 이내 울음을 그쳤고, 아빠를 알아본 듯 방긋이 웃었다.
비로소 현준의 얼굴에 미소가 찾아왔다.
"우리 서찬이가 왜 울었을까? 배고파서 울었을까?"
현준이 웃는 얼굴로 장난스레 물으며 아기 배에 얼굴을 부비적거리자, 아기가 까르르하고 웃기 시작했다.
그 사이 현준의 몸은 점차 완전한 형태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효과가 있는 것 같구나."
백하도령의 말에 나래는 다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왕자님, 우리 왕자님은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될까요? 어떤 사람이 될까요?"
현준은 서찬을 안고서 빙글빙글 돌며 연신 웃는 얼굴로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서찬은 현준의 품에 안겨 재밌다는 듯이 방긋방긋 까르르거렸다.
그 모습이 오히려 나래의 눈물샘을 자극해, 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 서찬이, 많이 아팠지?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우리 서찬이 아프지 않게 지켜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서찬아~"
현준은 웃으며 아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눈물을 흘리며 아기에게 잇따라 자꾸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은 현준의 눈에서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연신 웃어대며 꺄르르 거릴 뿐이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찬아..."
아이를 품안에 꼭안고 현준은 흐느껴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래 역시 따라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아기를 꼭 안아주며,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현준은, 아기에게 용서를 구하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느새 주위에서 불던 모래바람은 사그라들고 없었다.
짙은 회색빛의 세계는 이제 보랏빛의 오로라들이 넘실거리는 기묘한 세계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현준은 아기를 꼭 끌어안은 체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듯, 굳어져 있었다.
어언간 나래와 백하도령 뒤에서 강림차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뜻밖이군요."
강림차사의 말에 나래와 백하도령이 돌아보자, 그가 다가와 곁에 서며 말했다.
"스스로를 용서한 것 같군요."
"스스로를 용서해요?"
"네. 이곳 심연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스스로를 용서하는 겁니다."
"그럼...."
강림차사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하얗고 환한 빛을 내뿜는 손바닥만한 구슬이었다.
"이건... 아기의 영혼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금방 죽었기 때문에, 순수한 영혼인 체로 다음 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강림차사의 말에 나래는 그 영혼의 구슬을 바라보았다.
은은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그 영혼의 구슬은 어쩐지 따뜻한 온기를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이제 선택해야 지요."
"선택이요?"
"둘 다 환생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되어 태어날 것입니다. 또는 현생의 수호신이 될 수도 있지요."
이어 나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길 바라십니까?"
강림차사의 물음에 나래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좋은 것일까?
고민하던 나래는 이내 강림차사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어찌 그러시죠?"
"이 문제 대한 답은 저희가 아니라 다른 분이 내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게 누구죠?"
나래가 현준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저분의... 어머니요."
백하도령과 강림차사가 동시에 현준을 바라보았다.
"그래 주실 수 있나요?"
나래의 물음에 강림차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이 신이 되신 분께서 간청하시니, 들어드려야지요."
강림차사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온 세상이 한순간에 휘몰아치는 것 같더니, 어느새 그들은 저승전의 강림차사 사무실로 돌아와 있었다.
강림차사가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자, 그의 손에는 또 다른 구슬이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은... 윤현준씨의 영혼입니다."
강림차사의 반대쪽 손에는 아기의 영혼이 여전히 은은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 두 영혼은 지금 시간이 멈춰 있을 것입니다. 그 어머니란 분을 만나러 가볼까요?"
나래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백하도령이 다가와 나래의 손을 붙잡았다.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강림차사가 말을 함과 동시에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백하도령과 나래도 뒤이어 문 너머로 걸어들어갔다.
문 너머의 세상은 뜻밖에도 현실 세계였다.
저승전 강림차사의 사무실에 있던 문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이어져 있었고, 창고의 육중한 철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어머?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래는 놀라서 그 철문을 다시 열어보았지만, 철문 너머에는 그저 지저분한 창고가 있을 뿐, 저승전의 사무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래가 신기해 하자, 백하도령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해 주었다.
"저승사자들이 문을 열면, 그곳이 어디든,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의 문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아하..."
나래가 감탄하며 신기해하는 동안, 먼저 나온 강림차사가 하늘 위를 살피다가 말했다.
"저기 계시군요."
강림차사의 시선을 따라 나래와 백하도령이 고개를 들어보자, 자신들이 기억 너머로 떠나올 때 뒤에 두고 온 여왕의 모습이 보였다.
이어 강림차사가 나래를 돌아보며 물었다.
"직접 얘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얘기할까요?"
나래는 주먹을 꽉 쥐며 한걸음 나서 대답했다.
"제가 얘기할게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 허공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왕을 응시했다.
"함께 가자꾸나."
백하도령이 나래의 손을 잡아주었다.
손을 통해 그의 온기가 전해졌고, 그것은 이내 나래의 마음속에 용기를 꽃피웠다.
나래가 씩씩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자, 백하도령은 그녀와 함께 허공 위로 솟구쳐 올라 여왕에게로 향했다.
아니 어쩌면 모래가 아닐지도 몰랐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무언가 휘날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추웠다. 차디찬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어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내손을 잡거라."
백하도령이 손을 내밀자, 나래는 얼른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백하도령의 손을 통해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고, 그의 주위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와 주위를 밝혀주었다.
어느샌가 휘몰아치는 바람은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다.
백하도령의 따스한 기운이 마치 보호막처럼 그와 나래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심연(深淵)인가요?"
나래의 물음에 백하도령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 저승의 심연은 나도 처음 보는구나."
현준을 만나고 싶다는 나래의 청에, 강림차사는 백하도령과 나래에게 현준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심연으로 안내해 주었다.
참척 이후에 죽은 부모의 영혼들은 이곳 심연 속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소멸되거나 혹은 환생을 한다고 들었다.
그들이 선택한 지옥인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영겁의 시간 동안 되새김질하는 지옥, 그것이 바로 심연이었다.
모래바람을 뚫고 백하도령과 나래는 심연의 그 어딘가에 있을 현준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두 사람 앞에 저 멀리 소실되어 가는 푸른빛의 영혼을 찾을 수 있었다.
온몸이 옅은 잿빛으로 변해버린 그는, 날아드는 날카로운 모래바람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듯, 영혼이 파여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동공이 사라진 백안(白眼)은 서글프기 그지없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방황하고 있었다.
"현준씨..."
나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파왔다.
자식 잃은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아, 속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저 심연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죽은 자식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 그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그저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현준씨!"
나래가 있는 힘껏 불러보지만, 현준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떡하죠?"
나래가 걱정스레 묻는 말에, 백하도령은 담담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의 영혼이 붕괴되어 가고 있구나."
"되돌릴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려울 것이다. 애초에 그렇기에 이 심연에 온 것인지, 심연에 있기에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그 말을 들은 나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죠."
그러고는 다시 현준을 바라보았다.
모래 바람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현준의 몸은 그 모래바람에 뜯겨 날아가며 옅어져 가고 있었다.
나래가 백하도령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이를... 아이를 회상시킬 수 있을까요?"
백하도령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진중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해봐야 알 것 같구나. 붕괴되고 있는 영혼으로부터 과거의 기억을 회상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는... 나도 가늠하기 힘들구나."
"해봐요. 해봐야 아는 거라면... 해봐야죠."
나래의 간곡한 부탁에 백하도령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둘은 방황하는 현준에게 다가갔다.
부서져 내리는 현준의 영혼 지척까지 다가간 백하도령은 손을 뻗어 그의 영혼 안에서 지나간 기억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 영혼에서 뽑아져 나오는 것은 미미하고 흐릿한 기억들 뿐이었다.
회상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백하도령이 집중하여 온 힘을 다하자 영혼에서 뽑혀 나오는 기억이 차츰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백하도령이 힘겹게 기억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래는 양손을 모아 기도하듯 애원했다. 제발...
어느 정도 기억이 모이자, 백하도령은 반대쪽 손을 현준 앞으로 뻗어 기억을 형상화시켰다.
드디어 현준 앞에 보랏빛 기억의 형상이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한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아이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기 무섭게, 아이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앙~"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순간 방황하던 현준을 그 자리에 멈춰 세웠다.
현준의 영혼은 멈춰 서서 멍하니 앞쪽을 응시했다.
"아아아앙~~"
아기의 울음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현준의 영혼은 망연자실하게 멈춰 서있을 뿐이었다.
나래는 현준의 뒤쪽으로 바짝 다가서서 소리쳤다.
"서찬이가... 서찬이가, 울어요!"
순간 현준의 눈동자가 돌아왔다.
"서찬아..."
현준은 멍한 표정으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내 잠에서 깨어나듯 움찔하고는 후다닥 달려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서찬아, 울지마... 울지마..."
현준이 아기를 달래자, 아기는 이내 울음을 그쳤고, 아빠를 알아본 듯 방긋이 웃었다.
비로소 현준의 얼굴에 미소가 찾아왔다.
"우리 서찬이가 왜 울었을까? 배고파서 울었을까?"
현준이 웃는 얼굴로 장난스레 물으며 아기 배에 얼굴을 부비적거리자, 아기가 까르르하고 웃기 시작했다.
그 사이 현준의 몸은 점차 완전한 형태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효과가 있는 것 같구나."
백하도령의 말에 나래는 다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왕자님, 우리 왕자님은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될까요? 어떤 사람이 될까요?"
현준은 서찬을 안고서 빙글빙글 돌며 연신 웃는 얼굴로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서찬은 현준의 품에 안겨 재밌다는 듯이 방긋방긋 까르르거렸다.
그 모습이 오히려 나래의 눈물샘을 자극해, 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 서찬이, 많이 아팠지?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우리 서찬이 아프지 않게 지켜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서찬아~"
현준은 웃으며 아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눈물을 흘리며 아기에게 잇따라 자꾸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은 현준의 눈에서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연신 웃어대며 꺄르르 거릴 뿐이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찬아..."
아이를 품안에 꼭안고 현준은 흐느껴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래 역시 따라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아기를 꼭 안아주며,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현준은, 아기에게 용서를 구하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느새 주위에서 불던 모래바람은 사그라들고 없었다.
짙은 회색빛의 세계는 이제 보랏빛의 오로라들이 넘실거리는 기묘한 세계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현준은 아기를 꼭 끌어안은 체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듯, 굳어져 있었다.
어언간 나래와 백하도령 뒤에서 강림차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뜻밖이군요."
강림차사의 말에 나래와 백하도령이 돌아보자, 그가 다가와 곁에 서며 말했다.
"스스로를 용서한 것 같군요."
"스스로를 용서해요?"
"네. 이곳 심연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스스로를 용서하는 겁니다."
"그럼...."
강림차사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하얗고 환한 빛을 내뿜는 손바닥만한 구슬이었다.
"이건... 아기의 영혼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금방 죽었기 때문에, 순수한 영혼인 체로 다음 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강림차사의 말에 나래는 그 영혼의 구슬을 바라보았다.
은은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그 영혼의 구슬은 어쩐지 따뜻한 온기를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이제 선택해야 지요."
"선택이요?"
"둘 다 환생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되어 태어날 것입니다. 또는 현생의 수호신이 될 수도 있지요."
이어 나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길 바라십니까?"
강림차사의 물음에 나래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좋은 것일까?
고민하던 나래는 이내 강림차사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어찌 그러시죠?"
"이 문제 대한 답은 저희가 아니라 다른 분이 내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게 누구죠?"
나래가 현준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저분의... 어머니요."
백하도령과 강림차사가 동시에 현준을 바라보았다.
"그래 주실 수 있나요?"
나래의 물음에 강림차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이 신이 되신 분께서 간청하시니, 들어드려야지요."
강림차사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온 세상이 한순간에 휘몰아치는 것 같더니, 어느새 그들은 저승전의 강림차사 사무실로 돌아와 있었다.
강림차사가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자, 그의 손에는 또 다른 구슬이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은... 윤현준씨의 영혼입니다."
강림차사의 반대쪽 손에는 아기의 영혼이 여전히 은은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 두 영혼은 지금 시간이 멈춰 있을 것입니다. 그 어머니란 분을 만나러 가볼까요?"
나래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백하도령이 다가와 나래의 손을 붙잡았다.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강림차사가 말을 함과 동시에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백하도령과 나래도 뒤이어 문 너머로 걸어들어갔다.
문 너머의 세상은 뜻밖에도 현실 세계였다.
저승전 강림차사의 사무실에 있던 문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이어져 있었고, 창고의 육중한 철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어머?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래는 놀라서 그 철문을 다시 열어보았지만, 철문 너머에는 그저 지저분한 창고가 있을 뿐, 저승전의 사무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래가 신기해 하자, 백하도령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해 주었다.
"저승사자들이 문을 열면, 그곳이 어디든,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의 문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아하..."
나래가 감탄하며 신기해하는 동안, 먼저 나온 강림차사가 하늘 위를 살피다가 말했다.
"저기 계시군요."
강림차사의 시선을 따라 나래와 백하도령이 고개를 들어보자, 자신들이 기억 너머로 떠나올 때 뒤에 두고 온 여왕의 모습이 보였다.
이어 강림차사가 나래를 돌아보며 물었다.
"직접 얘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얘기할까요?"
나래는 주먹을 꽉 쥐며 한걸음 나서 대답했다.
"제가 얘기할게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 허공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왕을 응시했다.
"함께 가자꾸나."
백하도령이 나래의 손을 잡아주었다.
손을 통해 그의 온기가 전해졌고, 그것은 이내 나래의 마음속에 용기를 꽃피웠다.
나래가 씩씩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자, 백하도령은 그녀와 함께 허공 위로 솟구쳐 올라 여왕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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