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1
세자는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처형터에 막 도착했을 때, 병사들이 그를 막아섰다.
"놔라!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것이냐?"
세자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높은 관직을 뜻하는 붉은 색 관복 차림의 한 사람이 다가와, 아직 앳되어 보이는 세자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쯧쯧... 세자 마마, 어찌 이리 경거망동하십니까? 이는 모두가 전하의 뜻입니다."
"좌상대감, 제발... 제발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세자는 그에게 애원하며 말했다.
그 사이, 좌상 너머 포박된 여인 앞에 한 사내가 커다란 칼을 높게 치켜들었다.
"어머니! 어머니!"
세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부르며 달려가려 애썼지만, 병사들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눈을 가리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그녀는 세자의 목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세차게 움직여 보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세자는 한쪽에 서서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왕에게 달려가 다리를 붙잡고 매달려 애원했다.
왕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는듯 했지만, 그는 그저 태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집행하라!"
처형터에 울려 퍼지는 그 단 한마디에, 칼날은 사정없이 여인의 목을 내리쳤다.
"안돼! 안돼! 어머니!"
.
.
.
"어머니!"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의 방이었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자는 양손에 자신의 얼굴을 묻은 체,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린 시절 눈앞에서 봐야 했던 어머니의 참수형은,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거의 매일같이 꿈속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인기척이 들리자, 곧 궁녀들이 들어와 씻을 물을 준비해 주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되었다."
세자의 말에 궁녀들은 익숙한 듯, 일제히 세자의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세자 잠시 주위를 살피듯 경계한 뒤, 조심스럽게 방 안쪽에 마련된 작은 밀실로 향했다.
한 사람이나 겨우 들어갈 법한 좁은 공간, 자그마한 탁자 위에 한 여인의 초상화가 놓여져 있었다.
그는 쓸쓸한 눈빛으로, 그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
잠시 후, 문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조강시간이 다 되었사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다시 초상화를 바라본 세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이야기 한 뒤 몸을 돌려 방문을 나섰다.
문 밖에 서 있던 내관은, 세자가 나와 거침없이 걸어가자 부랴부랴 그 뒤를 따랐다.
"전하께옵서 잠시 후에 조수라를 마치시고 신료분들과 다과를 드신다 하옵니다. 저하께옵서도 함께 하시지요."
세자는 냉랭한 목소리로,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되었다."
" 저하, 자꾸 이렇게 피하기만 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혹여..."
내관이 말끝을 흐리자, 걸어가던 세자가 돌연 멈추어 섰다.
놀란 내관 역시 움찔거리며 멈춰 섰고, 고개를 돌린 세자가 그를 응시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폐세자라도 되면 어쩌냐? 뭐 그런 얘긴가?"
기겁한 내관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저하, 어찌 그리 망극한 말씀을 하십니까,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차라리 폐세자가 나을 지도 모르겠구나."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하는 세자를, 내관은 놀란 토끼눈으로 바라보며 뒤따랐다.
"저하, 조강에 드시지 않고 어딜 가시는 것이옵니까?"
동궁전 밖으로 나서자 마자,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고, 그가 나타나자 내관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반면 흘낏 그를 돌아본 세자는,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 걸었다.
"저하, 근자에 계속 조강에 드시지 않고 계십니다. 이러다가..."
그가 하는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세자는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하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얼른 세자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좌의정이 와 있습니다. 세자마마를 주시하고 있는 듯 하니,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그의 우려 섞인 경고에, 세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 궁에서 내게 그런 경고를 하게 되면, 그건 반역이나 마찬가지야."
세자의 말에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건 저하의 지기로서 당부하는 겁니다, 마마... 벌써 이 절친 중에 절친인 수현을 잊은 겁니까?"
세자는 그의 이야기에 한숨부터 내뱉었다.
"네가 내 절친이라면, 내 앞에서 좌의정의 눈치나 보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저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궁궐 안은 당상관에서부터 말단 참봉에 이르기까지 좌의정 사람이 아닌 자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물며..."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멈춰 선 세자가 사나운 눈빛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현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세자가 다시 앞서 걸어가자, 수현이 얼른 그 곁으로 다가서서 걸으며 말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뭐 다 세자마마께옵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제가 무슨 도움이..."
재잘재잘 말을 하던 수현과 세자는, 막 궁궐 밖으로 나서다가, 그 앞으로 일련의 군사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수현이 수다를 잠시 멈춘 사이, 그 군사 무리는 두 사람 앞까지 다가왔고, 제일 앞에 있던 한 무관이 세자를 알아보고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어디서 오는 것인가?"
세자의 물음에 무관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요망한 사술을 벌이는 무리가 있다 하여, 추포하고 의금부로 호송하던 길입니다."
세자가 행렬을 살펴보니, 병사들에게 이끌려 오는 대부분이 중년 나이 정도의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검은 옷을 입고 손이 묶인 체 이끌려 오고 있었다.
무관이 세자의 시선을 따라 그들을 돌아보고는, 세자에게 말했다.
"미신을 믿는 사교도들이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즉각 파쇄하고, 의식을 행하던 이들을 모두 추포해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수현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즘 저런 사교도 무리들이 판을 쳐서, 나라가 혼란스럽다 하더니만... 쯧쯧"
수현의 말에 무관이 수현을 힐끔 바라보았다.
세자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현이 그 뒤를 따르고, 무관은 고개만 살짝 숙여 보인 뒤, 다시 병사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무심히 걸어가던 세자는, 잡혀온 이들에게서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왠지 그녀들을 보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이내 참지 못하고 힐끔힐끔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 수가 제법 적지 않다 생각하며 걸어가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세자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발걸음을 멈춰 서서 고개를 홱하고 돌리더니, 죄인 무리 중 한 사람을 유심히 응시했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용모의 여인이었다.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목 뒷덜미에는 하나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신이 세자의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낯익은 문양에 세자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 옆에 서서 그녀의 목덜미에 있는 문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막 출발하려던 행렬은 세자의 갑작스런 행동에 다시금 멈춰 섰고, 행렬 앞에 있는 무관과 부관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세자를 돌아보았다.
"이... 이 문양은 무엇이냐?"
세자가 그녀 목덜미의 문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멍한 시선의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 듯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세자를 바라보았다.
초점을 잃고 흐리멍텅한 눈은, 흡사 그녀가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문양을 어디서 새긴 것이냐?"
세자가 격앙된 목소리로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흐릿한 눈을 껌뻑 거리며 세자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자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무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물으니, 세자는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그에게 물었다.
"이자들에 대한 판결은 언제 이루어 지는가?"
"익일 아침에 처리할 것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수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침부터 피냄새가 진동하게 생겼군."
세자는 아무말 없이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세자는 걸어가면서, 수현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문양.... 어머니와 관련이 있어."
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엇다.
"문양이라면... 방금 목 뒤에 그 문신이...."
수현 역시 방금 본 문양이 낯익다 싶었는데, 세자의 말에 기억이 번쩍 떠올랐다.
"아!"
이어 수현이 뒤를 돌아보자, 세자가 걸어가며 말했다.
"그녀가 누군지, 저 문양은 뭔지 알아내야겠어."
그러자 수현이 세자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빼내야지. 오늘 저녁까지 그녀에 대해 알아내서 나한테 좀 알려줘."
세자의 말에 수현이 문득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저, 제가 말입니까?"
수현의 되물음에, 세자가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할까?"
"아... 아하하, 그럼요, 제가 해야죠. 제가 하겠습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할 일입죠."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내야해. 충분한 구실을 만들지 못하면, 무리수를 두게 될 테니까..."
수현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무리수라뇨?"
"그녀를 살려야 어떻게든 알아낼 거 아냐? 난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어떻게 궁에 오게 됐는지, 궁에 오기 전까지 어디서 무엇을하며 살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해. 아바마마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함구하라 하셨어."
세자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혼잣말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알아낼 거야.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판결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모든 것을밝혀내고 말 꺼야."
세자는 그 말을 남기며 다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수현은 그 뒤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째... 앞날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어 서둘러 세자를 따라가며 말했다.
"같이 가셔야죠, 저하"
그가 처형터에 막 도착했을 때, 병사들이 그를 막아섰다.
"놔라!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것이냐?"
세자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높은 관직을 뜻하는 붉은 색 관복 차림의 한 사람이 다가와, 아직 앳되어 보이는 세자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쯧쯧... 세자 마마, 어찌 이리 경거망동하십니까? 이는 모두가 전하의 뜻입니다."
"좌상대감, 제발... 제발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세자는 그에게 애원하며 말했다.
그 사이, 좌상 너머 포박된 여인 앞에 한 사내가 커다란 칼을 높게 치켜들었다.
"어머니! 어머니!"
세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부르며 달려가려 애썼지만, 병사들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눈을 가리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그녀는 세자의 목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세차게 움직여 보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세자는 한쪽에 서서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왕에게 달려가 다리를 붙잡고 매달려 애원했다.
왕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는듯 했지만, 그는 그저 태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집행하라!"
처형터에 울려 퍼지는 그 단 한마디에, 칼날은 사정없이 여인의 목을 내리쳤다.
"안돼! 안돼! 어머니!"
.
.
.
"어머니!"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의 방이었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자는 양손에 자신의 얼굴을 묻은 체,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린 시절 눈앞에서 봐야 했던 어머니의 참수형은,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거의 매일같이 꿈속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인기척이 들리자, 곧 궁녀들이 들어와 씻을 물을 준비해 주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되었다."
세자의 말에 궁녀들은 익숙한 듯, 일제히 세자의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세자 잠시 주위를 살피듯 경계한 뒤, 조심스럽게 방 안쪽에 마련된 작은 밀실로 향했다.
한 사람이나 겨우 들어갈 법한 좁은 공간, 자그마한 탁자 위에 한 여인의 초상화가 놓여져 있었다.
그는 쓸쓸한 눈빛으로, 그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
잠시 후, 문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조강시간이 다 되었사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다시 초상화를 바라본 세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이야기 한 뒤 몸을 돌려 방문을 나섰다.
문 밖에 서 있던 내관은, 세자가 나와 거침없이 걸어가자 부랴부랴 그 뒤를 따랐다.
"전하께옵서 잠시 후에 조수라를 마치시고 신료분들과 다과를 드신다 하옵니다. 저하께옵서도 함께 하시지요."
세자는 냉랭한 목소리로,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되었다."
" 저하, 자꾸 이렇게 피하기만 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혹여..."
내관이 말끝을 흐리자, 걸어가던 세자가 돌연 멈추어 섰다.
놀란 내관 역시 움찔거리며 멈춰 섰고, 고개를 돌린 세자가 그를 응시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폐세자라도 되면 어쩌냐? 뭐 그런 얘긴가?"
기겁한 내관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저하, 어찌 그리 망극한 말씀을 하십니까,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차라리 폐세자가 나을 지도 모르겠구나."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하는 세자를, 내관은 놀란 토끼눈으로 바라보며 뒤따랐다.
"저하, 조강에 드시지 않고 어딜 가시는 것이옵니까?"
동궁전 밖으로 나서자 마자,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고, 그가 나타나자 내관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반면 흘낏 그를 돌아본 세자는,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 걸었다.
"저하, 근자에 계속 조강에 드시지 않고 계십니다. 이러다가..."
그가 하는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세자는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하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얼른 세자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좌의정이 와 있습니다. 세자마마를 주시하고 있는 듯 하니,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그의 우려 섞인 경고에, 세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 궁에서 내게 그런 경고를 하게 되면, 그건 반역이나 마찬가지야."
세자의 말에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건 저하의 지기로서 당부하는 겁니다, 마마... 벌써 이 절친 중에 절친인 수현을 잊은 겁니까?"
세자는 그의 이야기에 한숨부터 내뱉었다.
"네가 내 절친이라면, 내 앞에서 좌의정의 눈치나 보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저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궁궐 안은 당상관에서부터 말단 참봉에 이르기까지 좌의정 사람이 아닌 자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물며..."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멈춰 선 세자가 사나운 눈빛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현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세자가 다시 앞서 걸어가자, 수현이 얼른 그 곁으로 다가서서 걸으며 말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뭐 다 세자마마께옵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제가 무슨 도움이..."
재잘재잘 말을 하던 수현과 세자는, 막 궁궐 밖으로 나서다가, 그 앞으로 일련의 군사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수현이 수다를 잠시 멈춘 사이, 그 군사 무리는 두 사람 앞까지 다가왔고, 제일 앞에 있던 한 무관이 세자를 알아보고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어디서 오는 것인가?"
세자의 물음에 무관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요망한 사술을 벌이는 무리가 있다 하여, 추포하고 의금부로 호송하던 길입니다."
세자가 행렬을 살펴보니, 병사들에게 이끌려 오는 대부분이 중년 나이 정도의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검은 옷을 입고 손이 묶인 체 이끌려 오고 있었다.
무관이 세자의 시선을 따라 그들을 돌아보고는, 세자에게 말했다.
"미신을 믿는 사교도들이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즉각 파쇄하고, 의식을 행하던 이들을 모두 추포해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수현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즘 저런 사교도 무리들이 판을 쳐서, 나라가 혼란스럽다 하더니만... 쯧쯧"
수현의 말에 무관이 수현을 힐끔 바라보았다.
세자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현이 그 뒤를 따르고, 무관은 고개만 살짝 숙여 보인 뒤, 다시 병사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무심히 걸어가던 세자는, 잡혀온 이들에게서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왠지 그녀들을 보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이내 참지 못하고 힐끔힐끔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 수가 제법 적지 않다 생각하며 걸어가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세자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발걸음을 멈춰 서서 고개를 홱하고 돌리더니, 죄인 무리 중 한 사람을 유심히 응시했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용모의 여인이었다.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목 뒷덜미에는 하나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신이 세자의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낯익은 문양에 세자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 옆에 서서 그녀의 목덜미에 있는 문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막 출발하려던 행렬은 세자의 갑작스런 행동에 다시금 멈춰 섰고, 행렬 앞에 있는 무관과 부관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세자를 돌아보았다.
"이... 이 문양은 무엇이냐?"
세자가 그녀 목덜미의 문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멍한 시선의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 듯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세자를 바라보았다.
초점을 잃고 흐리멍텅한 눈은, 흡사 그녀가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문양을 어디서 새긴 것이냐?"
세자가 격앙된 목소리로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흐릿한 눈을 껌뻑 거리며 세자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자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무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물으니, 세자는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그에게 물었다.
"이자들에 대한 판결은 언제 이루어 지는가?"
"익일 아침에 처리할 것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수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침부터 피냄새가 진동하게 생겼군."
세자는 아무말 없이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세자는 걸어가면서, 수현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문양.... 어머니와 관련이 있어."
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엇다.
"문양이라면... 방금 목 뒤에 그 문신이...."
수현 역시 방금 본 문양이 낯익다 싶었는데, 세자의 말에 기억이 번쩍 떠올랐다.
"아!"
이어 수현이 뒤를 돌아보자, 세자가 걸어가며 말했다.
"그녀가 누군지, 저 문양은 뭔지 알아내야겠어."
그러자 수현이 세자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빼내야지. 오늘 저녁까지 그녀에 대해 알아내서 나한테 좀 알려줘."
세자의 말에 수현이 문득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저, 제가 말입니까?"
수현의 되물음에, 세자가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할까?"
"아... 아하하, 그럼요, 제가 해야죠. 제가 하겠습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할 일입죠."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내야해. 충분한 구실을 만들지 못하면, 무리수를 두게 될 테니까..."
수현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무리수라뇨?"
"그녀를 살려야 어떻게든 알아낼 거 아냐? 난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어떻게 궁에 오게 됐는지, 궁에 오기 전까지 어디서 무엇을하며 살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해. 아바마마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함구하라 하셨어."
세자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혼잣말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알아낼 거야.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판결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모든 것을밝혀내고 말 꺼야."
세자는 그 말을 남기며 다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수현은 그 뒤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째... 앞날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어 서둘러 세자를 따라가며 말했다.
"같이 가셔야죠, 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