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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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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1.23분

19화 - #2


소란스러운 소리에 밖으로 나온 천태호는, 자신을 찾아온 예판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대감마님, 좌상대감의 명령 없이는 저희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천태호의 말에 예판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좌상대감은 내가 설득하겠네. 돈은 달란 대로 줄 터이니, 일단 내 말을 좀 들어보게."

천태호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예판을 막고 서 있던 수하들이 좌우로 물러났다.

"말씀해 보시지요. 무슨 일이십니까?"

천태호의 물음에 예판이 숨을 고르고는 대답했다.

"내게... 봉혼벽륜이 있네."

사뭇 비장한듯 진지하게 말하는 예판의 이야기에 천태호는 흠칫 놀랐으나, 이내 애써 태연한 척 되물었다.

"뭐가... 있으시다구요?"

"봉혼벽륜 말일세. 왜 자네가 일전에 내게 이야기했던, 그 영혼을 구천에 머물게 한다는 그 물건 말일세."

"아... 예.... 그것을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봉혼벽륜이 있으니, 내 딸의 영혼을 불러내 구천에 머물게 할 수 있지 않느냔 말일세."

예판의 말에 천태호는 마치 지루한 이야기를 듣는 다는듯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 예.. 그렇지요."

"자네... 소혼술을 할 줄 아는가? 아니면 달리 소혼술을 할 줄 아는 자 아무라도 불러주게. 내 딸의 영혼을 불러내 달라고 한 뒤, 그 봉혼벽륜으로 구천에 머물게 해 주게. 다만 며칠만, 며칠만이라도 머물게 해 주면 되네. 내 그럼... 내 전재산이라도 자네에게 기꺼이 내어줌세."

간절한 표정으로 사정하는 예판을 보면서 천태호는 피식 입꼬리만 올리며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아... 예예, 뭐... 그럼 어디, 그 봉혼벽륜이란 것 좀 볼까요?"

"그래? 그래그래... 내 집에 잘 숨겨두었으니, 함께 가세."

천태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시죠."

"그래, 그래."

마음급한 예판이 앞장서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천태호는 나가다 말고, 한 수하에게 귓속말로 은밀하게 지시했다.

"주동환을 찾아서, 예판의 집으로 오라고 전해."

천태호는 이어 다급히 예판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천태호가 기거하는 곳에서 예판의 집까지는 제법 거리가 되었다.

한참을 걸어 예판의 집에 도착한 천태호는 예판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3년 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체 누워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홍예령으로 3년 전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나, 혼례를 올리기 직전 쓰러져 지금까지 의식을 잃고 잠든듯 누워만 있었다.

홍예령을 본 천태호는 놀란 표정으로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역시... 백무 솜씨가 놀랍구만."

옆에 있던 예판 역시 동의한다는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3년 전하고 똑같으니 말일세."

천태호는 이내 관심 없는 듯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봉혼벽륜은 어디 있습니까?"

예판은 서둘러 누워있는 홍예령의 요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것일세."

그것은 끄트머리가 타서 그을린 나무 지팡이로, 붉은색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물건이었다.

그 물건을 보자 천태호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듯 휘둥그레졌다.

"오호... 이건... 어찌 이것이 남아있을고?"

천태호의 말에 예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물건을... 아는가?"

하지만, 천태호는 듣지 못한 척, 되물었다.

"이 물건이 어디서 나셨습니까?"

"그게... 금호라고... 도총부 부총관으로 있는 자의 손에 있었던 물건일세. 백무에게 어떤 물건인지 알아봐 달라 청하는 것을 보았다가, 내가 백무에게서 뺏어온 것일세."

그 말에 천태호가 깔깔거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 그래요? 하하... 백무, 요 계집은 아직도 허술하기 짝이 없구나. 좋습니다, 좋아요. 어찌 되었든 이 물건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으니, 그거면 됐지요."

순간 예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 시?"

천태호는 입꼬리를 간사하게 올리며 웃더니, 갑자기 봉혼벽륜을 예판의 품으로 던지듯이 건네주었다.

놀란 예판이 엉겁결에 황급히 받아 들고는, 천태호를 보며 되물었다.

"어... 어찌 그러느냐?"

"보시다시피, 끄트머리가 탔지 않습니까? 봉혼벽륜이 사용되기 위해서는 그 위에 방륜지(防倫紙)라는 것이 붙어 있어야 하거늘. 그것이 타버려서 쓸모없는 것이 돼버렸습니다."

천태호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가버리자, 분개한 예판이 따라 나오며 말했다.

"네 이놈! 당장 서지 못하겠느냐? 천 것이 사람 대우를 해줬더니, 아주 오만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내 당장 네놈을..."

문득 그는 말을 멈추었다.

방 밖으로 나서자, 눈앞에 보인 풍경은 그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마당에는 집에서 부리는 하인들이 모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어있고, 시체들이 즐비한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든 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웨... 웬 놈이냐?"

옆에서 갑자기 천태호가 낄낄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놔... 대감, 막상 칼을 보니까 쫄으셨소? 크크, 그래도 죽기는 싫은가 보네. 아... 진짜..."

광기 어린 천태호를 보며, 예판은 가슴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 어찌 이러는가? 나는 이 나라 예조를 책임지는 예조판서이고, 자네가 모시는 좌상대감의 사람일세."

그의 말에 천태호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 보듯 쳐다보았다.

"그래서 여태 살려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대, 감."

어느새 예판은 침을 꿀꺽 삼키며 창백한 얼굴로 주춤 물러섰다.

"대감... 그 봉혼벽륜은 쓸데없는 물건이니 내다 버리든 태워 없애든 마음대로 하시고... 이따위 일로 저를 부르는 일은 다시없길 바랍니다. 또 다시 그리하면... 그땐 대감 목을 친 후, 좌상대감께 사죄할 것이니... 아시겠소?"

"그... 그..리하겠네."

떨리는 예판의 목소리에 천태호는 다시금 낄낄 거리며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럼, 뒤치닥 거리는 직접 하시오."

천태호는 손을 흔들며 툇마루에서 내려섰다.

"가자, 동환아."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주동환은 천태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겁에 질린 예판은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온 천태호는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자, 돌연 뒤돌아서 주동환을 쳐다보았다.

주동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멈춰 서니, 천태호가 씨익 웃으며 주동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알고 있었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주동환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무얼... 말입니까?"

"뭐긴 새꺄... 이 새끼 보게...."

살기 어린 눈으로 주동환을 보던 천태호가 이내 낄낄거리며 웃더니 재차 물었다.

"연희... 연희 살아있는 거, 알고 있었지?"

주동환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어찌... 아셨습니까?"

"어찌 알긴... 이 새끼가 누굴 속이려고?"

"아닙니다. 속이려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근데 왜 얘길 안 해?"

"아,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확실하지 않기는, 이 새끼가..."

천태호는 다시금 킬킬 거리며 비웃었다.

"이 뒤진 새끼가 지금 누굴 속여? 왜? 그년이 지금 어디 있길래?"

"듣기론... 궁궐 안에 있는 듯합니다."

천태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궁궐? 궁궐 어디?"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세자가 보살피고 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세자가? 세자가 왜?"

"그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잠시 생각하던 천태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가지고 나올걸 그랬나?"

그러다가 이내 손사래 치며 말했다.

"에이, 아냐. 부정타. 됐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는, 천태호가 돌아서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동환이 얼른 뒤따르며 물었다.

"방주님은 대체 어찌 아신 겁니까?"

주동환이 묻자, 천태호가 돌아서서 그를 보며 말했다

"어찌 알긴. 그년한테 걸 때 썼던 벽륜봉을 방금 그 예판 놈이 가지고 있지 않더냐?"

그 말에 주동환의 표정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럼..."

주동환이 다시 돌아가려 하자, 천태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다. 어차피 타다 말아서, 이제는 쓸모없는 물건이니... 만약 그 계집이 그때 죽었다면, 그 벽륜봉에 주문이 사라졌을 터... 그렇다면 여태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내 네놈을 떠본 것이다."

주동환은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아차 하며 여태 생각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책망했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어쩌긴... 치워야지. 괜히 세자 주위를 맴돌게 해서 좋을 것 없다. 좌상에게 빌미만 만들어줄 뿐이야. 기껏 세자를 키워주려 하는데, 그런 벌레가 날아들어선 안되지."

주동환이 충격으로 굳은 표정을 에둘러 감추며 천태호에게 말했다.

"그 일이라면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러자 천태호가 그를 돌아보더니, 비웃으며 킬킬거렸다.

"글세... 어쩌려고? 네놈이 그년을 죽일리는 없고."

"제가 알아서 문제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천태호가 허튼짓 하지 말라는듯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봤다.

"안 그래도 당분간은 둘 생각이야. 하지만, 혹여라도 세자에게 위해가 될 빌미를 만들어 주게 되면, 그땐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릴 테니까..."

"예. 그때가 되면, 제가 직접 목을 치겠습니다."

이번에는 천태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없는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래."

짧은 대답을 마치고, 천태호는 다시금 걸어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주동환이 뒤따랐다.



***



푸르스름한 밤하늘 위로 반짝거리는 별이 빼곡하게 가득 차 은하수가 물결 흐르듯 적요한 풍경을, 홀로 툇마루에 걸터앉아 구경하고 있던 연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하, 보고 계십니까. 은하수입니다."

기둥에 살짝 고개를 기대어, 밤하늘을 바라보다 시원한 밤바람을 느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연희야.'

문득 들리는 부름에 눈을 떴다.

머릿속에 아득하게 떠오르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연희야, 내 손을 잡아 보거라.'

연희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떠올려 보려 애써보지만, 그 사람의 얼굴이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잘했다. 우리 연희는 뭐든 잘하는구나.'

젊은 남자의 애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연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누군가의 이야기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아마도 기억 저편에 묻혀있던 것들 중 일부가 떠오른 것이리라.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그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 어떤 모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방금 들렸던 목소리를 다시 회상해 보려 해도,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기억이 다시 잊히는 것만 같아 안타깝고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왜? 누구길래?"

답답함에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때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었어?"

순간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담벼락에 걸터앉은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연희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를 줄 알았더니... 눈치가 빠르구나. 그래, 잘했다. 예나 지금이나 뭐든 잘하는구나."

이 목소리는.... 놀랍게도 방금 전 떠올랐던 바로 그 목소리가 아닌가?

연희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지고, 담벼락에 걸터앉은 주동환은 그런 그녀를 보며 세상 둘도 없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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