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14
팔을 내밀고 의자에 앉아 있는 재현의 손목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수호 앞으로 큰 컵 두 개를 든 세희가 다가와 식탁 위에 놓으며 물었다.
"많이 다쳤어요?"
재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별거 아냐. 이놈이 호들갑이지."
그 말에 수호는 붕대 감는 걸 마무리하며 대답했다.
"상처 주위에 피멍까지 들었어요. 까딱하면 손목 나갈 뻔하셨다고요."
재현은 가볍게 손목을 한번 돌리며 둘러진 붕대를 건성으로 살펴보고는 세희가 가져다준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까지 남아있던 긴장감의 여운이 차가운 커피 한모금에 조금씩 사그라드는것을 느끼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오늘 만난 그런 놈이 11명이 더 있다는 거지?"
재현의 물음에 수호와 세희가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가, 다시 재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감당할 수 있겠냐?"
재현이 수호를 향해 걱정스런 얼굴로 고개짓을 하며 묻자, "뭐... 어떻게든 되겠죠." 라고 대답하며 세희를 돌아보았다.
수호의 시선을 느낀 세희가 수호를 쳐다봤다.
"지난번에 보니까 무슨 결계 같은 걸로 숨던데... 어때? 일단 좀 숨어 지내는 게?"
세희는 조금 불만 어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안 그래도 그 생각했어요. 그런데, 혼자 숨어봐야 소용없고... 같이 숨어야 할 거 같은데?"
수호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재현을 보며 물었다.
"당장 집을 빼긴 힘들 거 같은데... 삼촌 집에 머물러도 돼요?"
재현이 둘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내 집 말고. 다른 집 하나 구해줄게."
"다른 집을요?"
"응. 일종의 안전가옥이랄까?"
재현의 말에 수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 사건의 주요 증인들을 보호하는 그런 곳이요?"
"그 정도는 아니고. 그런 목적으로 비워둔 집이 있어. 그냥 단독주택인데... 당장 필요한 짐만 챙겨 가면,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할 거야."
세희도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독주택이면, 결계 치기도 좋고. 괜찮을 거 같아요."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 수호와 세희는 동시에 속으로 웅얼거리며 궁금증 어린 눈빛으로 재현을 쳐다보았다.
재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양 눈썹에 힘을 주며 아주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너희도 성인이고... 남녀가 같이 있다 보면...."
조심스럽게 꺼내는 재현의 말에,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외쳤다.
"아니거든요!"
***
대리석 문양의 바닥이 한치의 티끌도 허용하지 않고 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그에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식탁 위에는 청초한 꽃한송이가 꽃병에 다소곳이 꽃혀 있었다.
강화유리 위로 놓인 투명한 유리컵은 보이는것과 달리 그 속내를 알기 힘든 시커먼 커피를 한가득 품고 있었고, 그 유리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이선화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표정이었다.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지, 누군가 걸어들어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파생되는 숨길수 없는 차가운 마찰음 소리 조차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지 못했다.
냉장고 문이 '철컥'하고 열리는 소리에야 비로소, 깊은 생각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그녀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 오셨어요?"
선화는 살짝 놀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주환은 그런 선화의 인사에 피식 잇새로 웃음만 지어 보이고는, 냉장고 속에서 와인병을 꺼내, 어울리지도 않는 큼지막한 머그컵에 따랐다.
"우리 선화, 대한민국 최고의 무당,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네가 내린 점괘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지."
난데없는 김주환의 말에 선화의 표정이 조금씩 의아함으로 변해갔다.
김주환은 그런 그녀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와인병을 도로 냉장고에 넣고, 컵을 든 체 선화에게 다가갔다.
"이번 일도 그래. 어떤 신이 우리를 방해하는 건지는 몰라도, 결국 그 대리자를 찾아낼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아."
주환의 말에 미쳐 갈무리 하지 못한 선화의 표정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숨길 수 없는 긴장감과 함께 점점 굳어져 가고있는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말았다.
주환은 의자에 미쳐 앉지 못하고 서 있는 선화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가 식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선화를 빤히 응시하며 머그컵에 든 와인을 벌컥벌컥 마셨다.
와인을 마시는 와중에도 주환의 웃고 있는 눈은 선화에게 고정된 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웃고있어도 비열하고 잔인해 보이는 주환의 얼굴은 선화에게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왔다.
"카~ 그런데 말이야... 오늘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
갑자기 목소리 톤을 낮추며 나긋하게 말하던 주환이 몸을 앞쪽으로 숙이며 선화의 면전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백사장이 말이야, 그러더라고. 명단에도 없는... 큰 그릇을 찾았다고 말이야. 그거 처리해주면 얼마를 줄 거냐고 묻더라고."
선화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침이 절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서 목구멍의 살들이 쩍쩍 갈라질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우리 선화가 어떤 선화인데... 그런 큰 그릇을 못 찾을 리가 없다 그랬지. 그런데 너무 호언장담을 하는 거야? 아주, 아주 대단한 그릇을 찾았다고 말이야."
웃고 있던 주환의 표정이 서서히 싸늘하게 변해갔다.
"어떻게 된 걸까? 능력이 퇴보한 걸까? 아니면... 알고 있었나?"
선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몰랐어요."
대답을 들은 주환이 재미있다는 듯 돌연 낄낄 거리며 웃어댔다.
자신의 바로 면전에 대고 광기 어린 웃음을 짓는 주환을 보며, 선화는 혹여나 눈물이 나올까봐 꾹 참아냈다.
"야, 이선화. 진짜야? 몰랐다고? 이선화가? 으하하하, 와~ 이거 완전 놀랄 노자 구만."
또다시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며 싸늘하게 비틀린 얼굴로 속을 꿰뚫어 보려는듯 한동안 이선화의 두 눈을 응시했다. 이내 나지막하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알지?"
이선화는 차마 대답하지 못한 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무능한 것들... 제일 싫어. 빌려올 능력도 없는 것들 말이야. 내 사람이 그런 사람인 건 용납할 수 없어. 절대."
이선화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미 그녀의 손과 발은 진즉부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녀 코앞까지 다가와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으하하하하"
갑자기였다. 갑자기 김주환이 미친듯이 웃어대자, 선화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래, 좋아. 20년 넘게 같이 일하면서, 실수란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좋아. 실수한 셈 치지. 실수는 만회하면 그뿐이니까."
김주환이 식탁에서 뛰듯이 가뿐히 내려섰다.
"요시, 이코오... (됐어, 가자.)"
이어 김주환이 바깥쪽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자, 이선화의 등 뒤에 있던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 불쑥 솟아올랐다.
마치 그녀의 그림자에서 걸어 나오듯, 그렇게 키스케가 이선화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나시쿠 나리소오닷타... (슬플 뻔 했어.)"
키스케는 김주환을 따라가다 고개를 돌려 이선화를 보며 찡끗 윙크를 해보였다.
밖으로 나가던 김주환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고 이선화를 돌아보았다.
"아, 큰 그릇. 걔 머리 가져오라고 했어. 머리. 백사장한테 머리 가져오면 달란 대로 주겠다고 말이야. 가져오면 보여줄게. 어떤 연놈인지, 한번 보자고. 하하하"
김주환은 너무도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웃으며 밖으로 나가버렸고, 키스케 역시 소리없이 그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두 사람이 나가 모습이 보이지 않게되자 이선화는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미처 의자에 앉을 겨를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이선화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헐떡거렸다.
***
"어때?"
재현의 물음에 수호와 세희에게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연신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우와~"
허름하고 오래된 단독주택을 예상했건만, 생각보다 깨끗하고 규모도 컸다.
조금 관리가 되지않아 낡아보이고, 잡초가 높게 자라 가려졌어도 이전에는 잔디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마당과 야외 테이블까지 놓인 것이, 사람이 살았을 때는 제법 고급스럽게 잘 꾸며져 있었으리라.
"완전 좋은데요?"
수호의 말에 옆에서 세희도 공감한다는 듯이 가열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는 특성상, 열쇠로 문을 열고 닫아야 돼. 전자도어락은 안 써. 때마다 자물쇠를 바꿔야 하거든. 비용을 아껴야 해서... 문은 두 군데 있어, 이쪽 현관문이랑 반대쪽 부엌이랑 연결된 문. 두 개다 철문이고 자물쇠가 있으니까."
재현이 두 개의 열쇠가 매달린 열쇠고리 하나를 수호에게 내밀었다.
"잘 가지고 있어. 잊어버리지 말고."
"넵."
수호가 씩씩한 대답과 함께 키를 받아 들자, 재현이 다른 키를 꺼내며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제법 넓은 현관 너머로 엔틱한 느낌의 중문이 보였다.
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런대로 관리가 잘 된 나뭇결 문양의 바닥과 베이지색 벽지가 깔끔해 보였다.
"우와, 진짜 여기서 지내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2층 구조인데, 2층으로 올라가면 방 2개랑 화장실이 하나 있어. 두 사람 다 위층 방을 쓰면 돼. 아래층에도 화장실 하나랑, 안방, 그리고 부엌이 있는데, 안방에는 내가 사건 자료들을 가져다 놓을게."
"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대답을 하고 나서, 세희가 나서 말했다.
"일단 얼른 결계부터 쳐야겠어요. 눈치채기 전에."
"그래, 그럼 수호는 나랑 같이 차에서 짐을 가지고 오자."
"네."
셋은 다시 밖으로 나와, 재현과 수호가 차로 간 사이, 세희는 집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무언가 바닥에다가 뿌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바닥에 뿌린 것을 발로 꼭꼭 밟더니, 기묘한 걸음걸이로 걸으며 다시 무언가를 뿌리고 밟기를 반복했다.
재현과 수호가 짐을 다 나르고 집안 청소를 하는 동안, 세희는 집을 빙글 돌면서 마지막으로 현관문 앞에 섰다.
"이것으로 끝."
세희가 현관문 앞을 마지막으로 뿌리고 꼭꼭 밟은 뒤 다했다..라고 중얼거리며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든 순간, 얼굴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현관문에 선 그녀 바로 앞에 누군가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친 상대는 잠시 세희를 바라보다가 이내 씨익 웃어 보였다. 순간 세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상대가 오히려 세희를 보며 입가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쉬잇~ 비밀이야."
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세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다쳤어요?"
재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별거 아냐. 이놈이 호들갑이지."
그 말에 수호는 붕대 감는 걸 마무리하며 대답했다.
"상처 주위에 피멍까지 들었어요. 까딱하면 손목 나갈 뻔하셨다고요."
재현은 가볍게 손목을 한번 돌리며 둘러진 붕대를 건성으로 살펴보고는 세희가 가져다준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까지 남아있던 긴장감의 여운이 차가운 커피 한모금에 조금씩 사그라드는것을 느끼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오늘 만난 그런 놈이 11명이 더 있다는 거지?"
재현의 물음에 수호와 세희가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가, 다시 재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감당할 수 있겠냐?"
재현이 수호를 향해 걱정스런 얼굴로 고개짓을 하며 묻자, "뭐... 어떻게든 되겠죠." 라고 대답하며 세희를 돌아보았다.
수호의 시선을 느낀 세희가 수호를 쳐다봤다.
"지난번에 보니까 무슨 결계 같은 걸로 숨던데... 어때? 일단 좀 숨어 지내는 게?"
세희는 조금 불만 어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안 그래도 그 생각했어요. 그런데, 혼자 숨어봐야 소용없고... 같이 숨어야 할 거 같은데?"
수호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재현을 보며 물었다.
"당장 집을 빼긴 힘들 거 같은데... 삼촌 집에 머물러도 돼요?"
재현이 둘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내 집 말고. 다른 집 하나 구해줄게."
"다른 집을요?"
"응. 일종의 안전가옥이랄까?"
재현의 말에 수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 사건의 주요 증인들을 보호하는 그런 곳이요?"
"그 정도는 아니고. 그런 목적으로 비워둔 집이 있어. 그냥 단독주택인데... 당장 필요한 짐만 챙겨 가면,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할 거야."
세희도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독주택이면, 결계 치기도 좋고. 괜찮을 거 같아요."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 수호와 세희는 동시에 속으로 웅얼거리며 궁금증 어린 눈빛으로 재현을 쳐다보았다.
재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양 눈썹에 힘을 주며 아주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너희도 성인이고... 남녀가 같이 있다 보면...."
조심스럽게 꺼내는 재현의 말에,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외쳤다.
"아니거든요!"
***
대리석 문양의 바닥이 한치의 티끌도 허용하지 않고 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그에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식탁 위에는 청초한 꽃한송이가 꽃병에 다소곳이 꽃혀 있었다.
강화유리 위로 놓인 투명한 유리컵은 보이는것과 달리 그 속내를 알기 힘든 시커먼 커피를 한가득 품고 있었고, 그 유리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이선화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표정이었다.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지, 누군가 걸어들어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파생되는 숨길수 없는 차가운 마찰음 소리 조차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지 못했다.
냉장고 문이 '철컥'하고 열리는 소리에야 비로소, 깊은 생각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그녀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 오셨어요?"
선화는 살짝 놀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주환은 그런 선화의 인사에 피식 잇새로 웃음만 지어 보이고는, 냉장고 속에서 와인병을 꺼내, 어울리지도 않는 큼지막한 머그컵에 따랐다.
"우리 선화, 대한민국 최고의 무당,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네가 내린 점괘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지."
난데없는 김주환의 말에 선화의 표정이 조금씩 의아함으로 변해갔다.
김주환은 그런 그녀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와인병을 도로 냉장고에 넣고, 컵을 든 체 선화에게 다가갔다.
"이번 일도 그래. 어떤 신이 우리를 방해하는 건지는 몰라도, 결국 그 대리자를 찾아낼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아."
주환의 말에 미쳐 갈무리 하지 못한 선화의 표정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숨길 수 없는 긴장감과 함께 점점 굳어져 가고있는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말았다.
주환은 의자에 미쳐 앉지 못하고 서 있는 선화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가 식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선화를 빤히 응시하며 머그컵에 든 와인을 벌컥벌컥 마셨다.
와인을 마시는 와중에도 주환의 웃고 있는 눈은 선화에게 고정된 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웃고있어도 비열하고 잔인해 보이는 주환의 얼굴은 선화에게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왔다.
"카~ 그런데 말이야... 오늘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
갑자기 목소리 톤을 낮추며 나긋하게 말하던 주환이 몸을 앞쪽으로 숙이며 선화의 면전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백사장이 말이야, 그러더라고. 명단에도 없는... 큰 그릇을 찾았다고 말이야. 그거 처리해주면 얼마를 줄 거냐고 묻더라고."
선화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침이 절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서 목구멍의 살들이 쩍쩍 갈라질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우리 선화가 어떤 선화인데... 그런 큰 그릇을 못 찾을 리가 없다 그랬지. 그런데 너무 호언장담을 하는 거야? 아주, 아주 대단한 그릇을 찾았다고 말이야."
웃고 있던 주환의 표정이 서서히 싸늘하게 변해갔다.
"어떻게 된 걸까? 능력이 퇴보한 걸까? 아니면... 알고 있었나?"
선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몰랐어요."
대답을 들은 주환이 재미있다는 듯 돌연 낄낄 거리며 웃어댔다.
자신의 바로 면전에 대고 광기 어린 웃음을 짓는 주환을 보며, 선화는 혹여나 눈물이 나올까봐 꾹 참아냈다.
"야, 이선화. 진짜야? 몰랐다고? 이선화가? 으하하하, 와~ 이거 완전 놀랄 노자 구만."
또다시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며 싸늘하게 비틀린 얼굴로 속을 꿰뚫어 보려는듯 한동안 이선화의 두 눈을 응시했다. 이내 나지막하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알지?"
이선화는 차마 대답하지 못한 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무능한 것들... 제일 싫어. 빌려올 능력도 없는 것들 말이야. 내 사람이 그런 사람인 건 용납할 수 없어. 절대."
이선화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미 그녀의 손과 발은 진즉부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녀 코앞까지 다가와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으하하하하"
갑자기였다. 갑자기 김주환이 미친듯이 웃어대자, 선화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래, 좋아. 20년 넘게 같이 일하면서, 실수란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좋아. 실수한 셈 치지. 실수는 만회하면 그뿐이니까."
김주환이 식탁에서 뛰듯이 가뿐히 내려섰다.
"요시, 이코오... (됐어, 가자.)"
이어 김주환이 바깥쪽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자, 이선화의 등 뒤에 있던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 불쑥 솟아올랐다.
마치 그녀의 그림자에서 걸어 나오듯, 그렇게 키스케가 이선화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나시쿠 나리소오닷타... (슬플 뻔 했어.)"
키스케는 김주환을 따라가다 고개를 돌려 이선화를 보며 찡끗 윙크를 해보였다.
밖으로 나가던 김주환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고 이선화를 돌아보았다.
"아, 큰 그릇. 걔 머리 가져오라고 했어. 머리. 백사장한테 머리 가져오면 달란 대로 주겠다고 말이야. 가져오면 보여줄게. 어떤 연놈인지, 한번 보자고. 하하하"
김주환은 너무도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웃으며 밖으로 나가버렸고, 키스케 역시 소리없이 그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두 사람이 나가 모습이 보이지 않게되자 이선화는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미처 의자에 앉을 겨를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이선화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헐떡거렸다.
***
"어때?"
재현의 물음에 수호와 세희에게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연신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우와~"
허름하고 오래된 단독주택을 예상했건만, 생각보다 깨끗하고 규모도 컸다.
조금 관리가 되지않아 낡아보이고, 잡초가 높게 자라 가려졌어도 이전에는 잔디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마당과 야외 테이블까지 놓인 것이, 사람이 살았을 때는 제법 고급스럽게 잘 꾸며져 있었으리라.
"완전 좋은데요?"
수호의 말에 옆에서 세희도 공감한다는 듯이 가열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는 특성상, 열쇠로 문을 열고 닫아야 돼. 전자도어락은 안 써. 때마다 자물쇠를 바꿔야 하거든. 비용을 아껴야 해서... 문은 두 군데 있어, 이쪽 현관문이랑 반대쪽 부엌이랑 연결된 문. 두 개다 철문이고 자물쇠가 있으니까."
재현이 두 개의 열쇠가 매달린 열쇠고리 하나를 수호에게 내밀었다.
"잘 가지고 있어. 잊어버리지 말고."
"넵."
수호가 씩씩한 대답과 함께 키를 받아 들자, 재현이 다른 키를 꺼내며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제법 넓은 현관 너머로 엔틱한 느낌의 중문이 보였다.
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런대로 관리가 잘 된 나뭇결 문양의 바닥과 베이지색 벽지가 깔끔해 보였다.
"우와, 진짜 여기서 지내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2층 구조인데, 2층으로 올라가면 방 2개랑 화장실이 하나 있어. 두 사람 다 위층 방을 쓰면 돼. 아래층에도 화장실 하나랑, 안방, 그리고 부엌이 있는데, 안방에는 내가 사건 자료들을 가져다 놓을게."
"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대답을 하고 나서, 세희가 나서 말했다.
"일단 얼른 결계부터 쳐야겠어요. 눈치채기 전에."
"그래, 그럼 수호는 나랑 같이 차에서 짐을 가지고 오자."
"네."
셋은 다시 밖으로 나와, 재현과 수호가 차로 간 사이, 세희는 집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무언가 바닥에다가 뿌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바닥에 뿌린 것을 발로 꼭꼭 밟더니, 기묘한 걸음걸이로 걸으며 다시 무언가를 뿌리고 밟기를 반복했다.
재현과 수호가 짐을 다 나르고 집안 청소를 하는 동안, 세희는 집을 빙글 돌면서 마지막으로 현관문 앞에 섰다.
"이것으로 끝."
세희가 현관문 앞을 마지막으로 뿌리고 꼭꼭 밟은 뒤 다했다..라고 중얼거리며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든 순간, 얼굴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현관문에 선 그녀 바로 앞에 누군가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친 상대는 잠시 세희를 바라보다가 이내 씨익 웃어 보였다. 순간 세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상대가 오히려 세희를 보며 입가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쉬잇~ 비밀이야."
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세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