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2
달려드는 두 왜장을, 세자는 재빠른 동작으로 피하며 그들 아래에서 발목을 공격했다.
왜장들은, 고통은 못 느낄지 몰라도 발목이 공격당하자 휘청거리며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과연, 깃들어 있는 육신의 제약을 뛰어넘지는 못하는구나."
세자는 적의 단점을 빨리 파악한 후, 재빠른 동작으로 두 왜장 사이를 오가며 왜장들의 다리를 집중 공격했다.
어딘지 모르게 민첩하지 못했던 두 왜장은, 결국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쓰러졌고,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니 공격을 하지는 못하고 계속 버둥거릴 뿐 이었다.
세자는 만약을 위해, 두 왜장의 팔까지 잘라 버린 뒤, 다시 선화를 노려보았다.
"죽여봐야 소용없을 테고. 천태호는 뒤에 있는 것이냐?"
선화는 믿었던 두 왜장이 무참히 패하고, 세자가 자신에게 검을 겨누자, 표정을 구기며 이를 갈듯 말했다.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곱게 자란 줄 알았더니, 제법이구나. 하지만 너무 좋아하지 말거라. 이게 끝이 아니니..."
선화가 다시금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자, 세자는 무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 사랑채 뒤편에서부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리 빠르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마치 넋을 놓은 사람들 같았다.
눈의 검은자위가 없고, 입을 벌린 체 걸어 나오는 모양새에 언뜻 봐도 안색이 새파란 것이 산사람 같지가 않았다.
"보아라, 죽음을 지배하는 율제님의 힘을."
선화의 말을 끝으로, 그것들은 돌연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세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세자가 뒤로 주춤 물러서는 사이, 소연이 재빨리 연희의 손을 잡고 세자 곁으로 달려가 바닥에 큰 원을 그렸다.
이어 양손을 합장하며 양발을 모아 주문을 외우니, 그녀가 그린 큰 원 주위로 은은한 녹색 빛이 떠올랐다.
"그릇된 것들은 감히 범접치 못하리라!"
소연이 큰 소리로 외치자, 다가오던 괴인들은 모두 원 앞에서 멈춰 다가오지 못했다.
"이게 무엇이냐?"
세자가 놀라 묻는 말에, 소연이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결계이옵니다. 이 안에 있으면 저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는 마음이 급했다.
"이 안에서 살아남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어떻게든 천태호를 찾아야 한다."
문득 세자는 과거 파사신검을 뽑아 들었을 때의 효과를 떠올리며, 품 안에서 파사신검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라면..."
세자가 파사신검을 뽑아 드는 순간, 연희는 잠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고, 뒤편에 있던 선화 역시 움찔 거리며 놀랐다.
"과연... 예사롭지 않은 일이 있었다더니..."
선화가 놀란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지만, 세자를 둘러싼 괴인들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세자가 당황해 하자, 뒤편에 있던 선화가 깔깔거리듯 웃으며 말했다.
"언제까지고 같은 수법이 통할 줄 알았더냐? 이놈들은 죽은 영을 이용한 술법도 아니거니와, 왜구의 육신을 잃었을 때, 율제님께서 알고 이미 대비하셨으니, 이들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소용없을 것이다."
세자가 다음 묘수를 생각하며 골몰하고 있는 사이, 연희가 조심스럽게 결계 밖으로 팔을 내뻗었다.
"뭐 하는 거요?"
소연이 놀라 외쳤지만, 결계 주위를 둘러싼 것들은 놀랍게도 연희를 공격하지 않았다.
아마도 기생령인 연희는 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일은... 제가 해야 하는 모양입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와 소연은 무거운 표정으로 연희를 쳐다보았다.
"그걸 제게 돌려주십시오."
연희는 차분한 어조로 세자에게 양손을 내밀었고, 세자는 손에 들려진 파사신검을 검집 안에 넣어 연희의 손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네게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이냐?"
그러자 연희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이어 파사신검을 건네받은 연희는 천천히 결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괴인들은 연희를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여기는 듯,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그녀에게 오히려 순순히 길을 터 주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연희는 그 말을 남기고 천천히 선화 쪽으로 걸어갔다.
선화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연희를 보며 소리쳤다.
"요망한 계집 같으니라고... 율제님에게 큰 은혜를 받아놓고, 이렇게 원수로 갚으려 드느냐?"
선화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연희를 노려보았지만, 연희는 그저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한 발 한 발 더 다가갔다.
"고마움은... 느끼고 있습니다."
연희가 그녀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파사신검을 뽑아들자, 선화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러지 마... 그러면 안돼. 너라고 멀쩡할 거 같아? 너도 결국 원귀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선화의 외침에 세자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뭐?"
세자는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다급한 눈으로 연희를 쳐다보았고, 연희 또한 세자를 고요한 눈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연희의 표정을 본 세자는 비로소 연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안돼. 안된다. 멈추거라.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세자가 절실한 눈으로 소연을 돌아보며 묻는 말에, 소연은 쓸쓸한 표정을 지은 체 고개를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오직 그것뿐이옵니다."
"아니다!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세자가 부정하며 결계밖으로 걸어나와 주위를 에워싼 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안됩니다. 저하, 위험합니다."
소연이 만류해 보지만, 세자는 어떻게든 이대로 연희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검을들고 괴인들을 베기 시작했다.
베고 또 베도 괴인들은 꾸역꾸역 빈틈없이 밀려와 연희에게 다가가려는 세자의 주위을 막아섰다.
"연희야! 기다리거라."
세자의 간절한 외침에 연희는 세자를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밝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했습니다. 저하."
그때, 선화가 돌연 연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신검을 빼들고 있던 연희는 그런 선화를 향해 신검을 휘둘렀고, 선화의 내뻗었던 손이 신검에 베어버렸다.
잠깐의 고통을 느끼는가 싶더니, 선화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주동환이 쓰러질 때와 마찬가지로, 순간이었다.
그런 내용을 알길 없던 연희는 놀란 표정으로 쓰러진 선화를 내려다보았다.
선화는 쓰러진 체 꼼짝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뒤편에서는 죽은 괴인들이 꾸역꾸역 밀려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이 많은 시신을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알길 없었으나, 연희는 결심을 굳힌 듯 사랑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희야! 안된다! 연희야!"
뒤에서 들려오는 세자의 다급한 외침 소리를 뒤로 하고, 연희는 사랑채의 문을 열었다.
문안은 지극히 조용했다.
마치 바깥과는 단절된 세상인양, 은은한 촛불로 밝혀진 어둠 속의 방은, 마치 공허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앙, 작은 단상 위에 천태호가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연희는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천태호에게 다가갔다.
수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태연히 누워있는 천태호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발걸음에 괴로움이 담겼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며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그녀의 볼을따라 흐르며 걷는 발길 위에 서러운 흔적을 남겼다.
연희는 천태호의 단상 앞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이것이 끝이련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지 잊어버렸을 만큼, 끝 모를 여행의 종착지가 이곳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의미 없이 끌려가다 이미 정해놓은 재판을 받을 때부터 였던 것 같았다.
거기서 구세주처럼 등장한 세자를 만나면서부터 이 모든 여행이 시작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의금부를 끌려가고 있을 때, 우연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을까.
거기서 세자를 만나는 것은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천태호의 계획 중 하나였을까.
연희는 하염없이 흐르는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파사신검을 들었다.
양손으로 신검을 잡은 연희는 천태호 가슴 위로 신검을 치켜들었다.
'저하, 강녕하시옵소서.'
연희가 마음속으로 세자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 천태호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마음에, 서둘러 손을 내리찍으려 했으나, 천태호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연희의 양손을 붙잡았다.
"네년이 감히..."
천태호가 씩씩 거리며 연희를 노려보았다.
"네깟 년에게 당할 줄 알았더냐? 네년도, 세자도 다 내손으로 죽여주마."
연희가 어떻게든 천태호의 손을 뿌리쳐 보려 발버둥 쳐보지만, 천태호의 힘은 그녀가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천태호는 연희의 양손을 붙잡은 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천태호는 낄낄 거리며 연희를 내려다보았다.
"병든 고아가 되어 떠돌다 개죽음 당해, 구천을 떠돌던 원혼이 되었던 주제에... 네년에게 새로운 삶을 준 이 나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아?"
연희는 콧방귀를 뀌며 천태호를 향해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은혜? 그럼 이 몸의 주인은? 세영은? 당신... 세영을 어떻게 한 거야?"
천태호가 더욱 큰 소리로 웃으며 어이없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하하, 미친년인 게로구나. 아니면 그 같잖은 선심에 제 목숨 날아가는 건 계산이 안되더냐? 그래, 윤세영은 지금 네년 몸속에 잠들어 있겠지. 그렇지 않았으면? 네년이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세영의 아버지는? 그 사람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게 만든 게 당신이지?"
"크흐흐, 별걸 다 걱정하는 년이구나. 그래, 내가 손을 좀 썼지.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사람이란 그런 것이지. 권력의 맛을 보는 순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발버둥 치기 마련이지. 제 아비도 제 자식도 팔아먹어가며 바라는 것이 바로 그 권력이란 것이다. 권력을 나눠가진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삶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들끼리의 권력다툼에, 그저 나는 어느 한편에 힘을 실어주었을 뿐이다."
천태호가 연희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재밌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윤세영의 아비라고 다를 것 같더냐? 세자라고 다를 것 같더냐? 다 똑같은 족속들이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기 위해 무엇이든 할 족속들이지.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을 가진 그것들을 처단하고, 권력의 분배를 다시 하겠다는 것이다. 너나 나처럼 천하게 태어난 우리들이, 권력을 가져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내게 반기를 드는 것이냐? 앙?"
천태호가 말끝에 언성을 높이며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연희의 손에서 신검을 빼앗으려 들었다.
연희는 어떻게든 뺏기지 않으려 발버둥 쳐 보지만, 천태호의 손 힘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게... 이게, 그 백무의 유산이더냐? 힘을 고갈시켜 죽게끔 만들려고 했더니, 이런 물건 따위에 제 힘을 담아놓고 있었던 것이냐? 이까짓..."
천태호는 끝내는 연희의 손에서 신검을 빼앗아 들고는, 연희를 힘껏 밀쳐내 버렸다.
힘을 당하지 못한 연희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이어 원망스럽게 천태호를 올려다보았다.
천태호가 파사신검을 내려다보다 연희에게 고개를 돌려 비웃으며 말했다.
"이것도 재밌겠구나. 이 칼로 소연인가 하는 계집까지 없애버린다면..., 제 스승의 칼에 죽는 제자가 되는거지. 어떠냐? 재밌지?"
광기 어린 웃음을 짓는 천태호를, 연희는 절망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왜장들은, 고통은 못 느낄지 몰라도 발목이 공격당하자 휘청거리며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과연, 깃들어 있는 육신의 제약을 뛰어넘지는 못하는구나."
세자는 적의 단점을 빨리 파악한 후, 재빠른 동작으로 두 왜장 사이를 오가며 왜장들의 다리를 집중 공격했다.
어딘지 모르게 민첩하지 못했던 두 왜장은, 결국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쓰러졌고,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니 공격을 하지는 못하고 계속 버둥거릴 뿐 이었다.
세자는 만약을 위해, 두 왜장의 팔까지 잘라 버린 뒤, 다시 선화를 노려보았다.
"죽여봐야 소용없을 테고. 천태호는 뒤에 있는 것이냐?"
선화는 믿었던 두 왜장이 무참히 패하고, 세자가 자신에게 검을 겨누자, 표정을 구기며 이를 갈듯 말했다.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곱게 자란 줄 알았더니, 제법이구나. 하지만 너무 좋아하지 말거라. 이게 끝이 아니니..."
선화가 다시금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자, 세자는 무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 사랑채 뒤편에서부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리 빠르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마치 넋을 놓은 사람들 같았다.
눈의 검은자위가 없고, 입을 벌린 체 걸어 나오는 모양새에 언뜻 봐도 안색이 새파란 것이 산사람 같지가 않았다.
"보아라, 죽음을 지배하는 율제님의 힘을."
선화의 말을 끝으로, 그것들은 돌연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세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세자가 뒤로 주춤 물러서는 사이, 소연이 재빨리 연희의 손을 잡고 세자 곁으로 달려가 바닥에 큰 원을 그렸다.
이어 양손을 합장하며 양발을 모아 주문을 외우니, 그녀가 그린 큰 원 주위로 은은한 녹색 빛이 떠올랐다.
"그릇된 것들은 감히 범접치 못하리라!"
소연이 큰 소리로 외치자, 다가오던 괴인들은 모두 원 앞에서 멈춰 다가오지 못했다.
"이게 무엇이냐?"
세자가 놀라 묻는 말에, 소연이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결계이옵니다. 이 안에 있으면 저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는 마음이 급했다.
"이 안에서 살아남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어떻게든 천태호를 찾아야 한다."
문득 세자는 과거 파사신검을 뽑아 들었을 때의 효과를 떠올리며, 품 안에서 파사신검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라면..."
세자가 파사신검을 뽑아 드는 순간, 연희는 잠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고, 뒤편에 있던 선화 역시 움찔 거리며 놀랐다.
"과연... 예사롭지 않은 일이 있었다더니..."
선화가 놀란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지만, 세자를 둘러싼 괴인들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세자가 당황해 하자, 뒤편에 있던 선화가 깔깔거리듯 웃으며 말했다.
"언제까지고 같은 수법이 통할 줄 알았더냐? 이놈들은 죽은 영을 이용한 술법도 아니거니와, 왜구의 육신을 잃었을 때, 율제님께서 알고 이미 대비하셨으니, 이들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소용없을 것이다."
세자가 다음 묘수를 생각하며 골몰하고 있는 사이, 연희가 조심스럽게 결계 밖으로 팔을 내뻗었다.
"뭐 하는 거요?"
소연이 놀라 외쳤지만, 결계 주위를 둘러싼 것들은 놀랍게도 연희를 공격하지 않았다.
아마도 기생령인 연희는 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일은... 제가 해야 하는 모양입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와 소연은 무거운 표정으로 연희를 쳐다보았다.
"그걸 제게 돌려주십시오."
연희는 차분한 어조로 세자에게 양손을 내밀었고, 세자는 손에 들려진 파사신검을 검집 안에 넣어 연희의 손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네게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이냐?"
그러자 연희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이어 파사신검을 건네받은 연희는 천천히 결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괴인들은 연희를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여기는 듯,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그녀에게 오히려 순순히 길을 터 주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연희는 그 말을 남기고 천천히 선화 쪽으로 걸어갔다.
선화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연희를 보며 소리쳤다.
"요망한 계집 같으니라고... 율제님에게 큰 은혜를 받아놓고, 이렇게 원수로 갚으려 드느냐?"
선화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연희를 노려보았지만, 연희는 그저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한 발 한 발 더 다가갔다.
"고마움은... 느끼고 있습니다."
연희가 그녀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파사신검을 뽑아들자, 선화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러지 마... 그러면 안돼. 너라고 멀쩡할 거 같아? 너도 결국 원귀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선화의 외침에 세자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뭐?"
세자는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다급한 눈으로 연희를 쳐다보았고, 연희 또한 세자를 고요한 눈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연희의 표정을 본 세자는 비로소 연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안돼. 안된다. 멈추거라.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세자가 절실한 눈으로 소연을 돌아보며 묻는 말에, 소연은 쓸쓸한 표정을 지은 체 고개를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오직 그것뿐이옵니다."
"아니다!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세자가 부정하며 결계밖으로 걸어나와 주위를 에워싼 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안됩니다. 저하, 위험합니다."
소연이 만류해 보지만, 세자는 어떻게든 이대로 연희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검을들고 괴인들을 베기 시작했다.
베고 또 베도 괴인들은 꾸역꾸역 빈틈없이 밀려와 연희에게 다가가려는 세자의 주위을 막아섰다.
"연희야! 기다리거라."
세자의 간절한 외침에 연희는 세자를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밝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했습니다. 저하."
그때, 선화가 돌연 연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신검을 빼들고 있던 연희는 그런 선화를 향해 신검을 휘둘렀고, 선화의 내뻗었던 손이 신검에 베어버렸다.
잠깐의 고통을 느끼는가 싶더니, 선화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주동환이 쓰러질 때와 마찬가지로, 순간이었다.
그런 내용을 알길 없던 연희는 놀란 표정으로 쓰러진 선화를 내려다보았다.
선화는 쓰러진 체 꼼짝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뒤편에서는 죽은 괴인들이 꾸역꾸역 밀려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이 많은 시신을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알길 없었으나, 연희는 결심을 굳힌 듯 사랑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희야! 안된다! 연희야!"
뒤에서 들려오는 세자의 다급한 외침 소리를 뒤로 하고, 연희는 사랑채의 문을 열었다.
문안은 지극히 조용했다.
마치 바깥과는 단절된 세상인양, 은은한 촛불로 밝혀진 어둠 속의 방은, 마치 공허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앙, 작은 단상 위에 천태호가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연희는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천태호에게 다가갔다.
수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태연히 누워있는 천태호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발걸음에 괴로움이 담겼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며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그녀의 볼을따라 흐르며 걷는 발길 위에 서러운 흔적을 남겼다.
연희는 천태호의 단상 앞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이것이 끝이련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지 잊어버렸을 만큼, 끝 모를 여행의 종착지가 이곳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의미 없이 끌려가다 이미 정해놓은 재판을 받을 때부터 였던 것 같았다.
거기서 구세주처럼 등장한 세자를 만나면서부터 이 모든 여행이 시작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의금부를 끌려가고 있을 때, 우연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을까.
거기서 세자를 만나는 것은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천태호의 계획 중 하나였을까.
연희는 하염없이 흐르는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파사신검을 들었다.
양손으로 신검을 잡은 연희는 천태호 가슴 위로 신검을 치켜들었다.
'저하, 강녕하시옵소서.'
연희가 마음속으로 세자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 천태호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마음에, 서둘러 손을 내리찍으려 했으나, 천태호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연희의 양손을 붙잡았다.
"네년이 감히..."
천태호가 씩씩 거리며 연희를 노려보았다.
"네깟 년에게 당할 줄 알았더냐? 네년도, 세자도 다 내손으로 죽여주마."
연희가 어떻게든 천태호의 손을 뿌리쳐 보려 발버둥 쳐보지만, 천태호의 힘은 그녀가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천태호는 연희의 양손을 붙잡은 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천태호는 낄낄 거리며 연희를 내려다보았다.
"병든 고아가 되어 떠돌다 개죽음 당해, 구천을 떠돌던 원혼이 되었던 주제에... 네년에게 새로운 삶을 준 이 나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아?"
연희는 콧방귀를 뀌며 천태호를 향해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은혜? 그럼 이 몸의 주인은? 세영은? 당신... 세영을 어떻게 한 거야?"
천태호가 더욱 큰 소리로 웃으며 어이없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하하, 미친년인 게로구나. 아니면 그 같잖은 선심에 제 목숨 날아가는 건 계산이 안되더냐? 그래, 윤세영은 지금 네년 몸속에 잠들어 있겠지. 그렇지 않았으면? 네년이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세영의 아버지는? 그 사람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게 만든 게 당신이지?"
"크흐흐, 별걸 다 걱정하는 년이구나. 그래, 내가 손을 좀 썼지.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사람이란 그런 것이지. 권력의 맛을 보는 순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발버둥 치기 마련이지. 제 아비도 제 자식도 팔아먹어가며 바라는 것이 바로 그 권력이란 것이다. 권력을 나눠가진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삶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들끼리의 권력다툼에, 그저 나는 어느 한편에 힘을 실어주었을 뿐이다."
천태호가 연희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재밌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윤세영의 아비라고 다를 것 같더냐? 세자라고 다를 것 같더냐? 다 똑같은 족속들이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기 위해 무엇이든 할 족속들이지.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을 가진 그것들을 처단하고, 권력의 분배를 다시 하겠다는 것이다. 너나 나처럼 천하게 태어난 우리들이, 권력을 가져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내게 반기를 드는 것이냐? 앙?"
천태호가 말끝에 언성을 높이며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연희의 손에서 신검을 빼앗으려 들었다.
연희는 어떻게든 뺏기지 않으려 발버둥 쳐 보지만, 천태호의 손 힘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게... 이게, 그 백무의 유산이더냐? 힘을 고갈시켜 죽게끔 만들려고 했더니, 이런 물건 따위에 제 힘을 담아놓고 있었던 것이냐? 이까짓..."
천태호는 끝내는 연희의 손에서 신검을 빼앗아 들고는, 연희를 힘껏 밀쳐내 버렸다.
힘을 당하지 못한 연희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이어 원망스럽게 천태호를 올려다보았다.
천태호가 파사신검을 내려다보다 연희에게 고개를 돌려 비웃으며 말했다.
"이것도 재밌겠구나. 이 칼로 소연인가 하는 계집까지 없애버린다면..., 제 스승의 칼에 죽는 제자가 되는거지. 어떠냐? 재밌지?"
광기 어린 웃음을 짓는 천태호를, 연희는 절망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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