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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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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검휘필
· 최초 등록: 2025.10.26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1.03분

32화 - #3


기괴한 초록빛 오로라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기묘한 빛들이 일렁거리는 땅 위에 서 있는 라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라마가 눈을 깜빡이자, 이번엔 초록빛 세상이 보랏빛 세상으로 바뀌며 거친 바람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 거센 바람에도 라마는 꿈쩍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곳은 그의 세계라고 할 수 틈의 세계였고, 그곳에서는 무엇이든지 라마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곳에는 오직 라마만 있었다.

라마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말없이 서서 그 황량하고 적막한 세상을 바라보다가, 홀연히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거진 나무와 푸른 수풀들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있었다.

불사에 가까운 능력과 더불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무적의 힘을 손에 넣었지만, 어쩐지 그리 기쁘지 않았다.

왜일까? 어딘지 모르게 만족스럽지 못한 이 기분은 무얼까?

라마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모용연은 황급히 집안을 뛰쳐나오고 있었다.

"분명 하루를 더 보낸다고 해놓고선!"

모용연은 하루를 더 보내고 출발하겠다던 라마가 종적 없이 사라져 버리자, 화를 내며 뛰쳐나오고 있었고, 그 뒤를 송이개가 뒤따랐다.

"기다려 보시죠. 설마 약조를 하였는데 그냥 두고 가셨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아!"

집 밖으로 뛰쳐나온 모용연의 눈에 길에 늘어뜨린 은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소협, 떠나신 줄 알고 깜짝..."

환한 표정으로 바뀐 모용연이 그에게 달려갔다가 흠칫 놀라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곱게 빗은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젊은 남자였는데, 꽤나 준수한 용모를 하고 있었고, 검은 빛의 고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어, 뭔지 모를 품격 같은 것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모용연을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사람을 잘못 본 것 자체가 신기하군요. 제 머리카락을 보고 오해하신 것이오?"

그가 묻는 말에 모용연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은빛 머리칼을 가진 이가 저희 가문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리 흔한 머리색은 아닐 터, 소저가 찾는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하군요."

송이개가 모용연의 뒤에 서서 그를 보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에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소협을 제외하고 오직 한 사람만이 생각나는군요."

송이개의 경계 어린 모습에, 은빛 머리카락의 남자는 예의 여유로운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결례를 저질렀다면 용서하시지요.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니... 소인은 그저 이 앞을 지나는 길이었을 뿐이오."

그런 그를 보며 송이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철무방주 은사월.... 이시겠구려."

철무방주란 말에 모용연의 표정이 아연실색해졌다.

"어, 어찌 철무방주가 이곳 모용가 앞까지 온 것입니까?"

모용연이 놀라 주춤 물러서며 묻는 사이, 은사월 뒤로 세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건장한 체격이 꽤나 살벌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나서 으름장을 놓듯이 말했다.

"이 땅 전체가 모용가의 것이라도 된단 말인가? 방주께서 이미 그저 지나는 길이라고 대답하셨거늘,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그런 그의 으름장에 송이개가 눈을 껌뻑거리며 아무런 사심 없이 대답했다.

"맞소, 모두 모용가의 소유요."

사내는 살벌한 표정으로 쏘아보듯 서 있었는데, 그 옆에 다른 두 명의 사내가 풋 하고 웃자, 은사월까지 깔깔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 이놈이..."

사내가 핏대까지 세워가며 노려보는 사이, 한줄기 바람과 함께 송이개의 등 뒤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눈 튀어나오겠다. 엄한 곳에서 시비 걸지 말고 지나가던 길이면 그냥 계속 지나가시지?"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니, 모용연과 송이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라마가 서 있었다.

"아, 소협!"

송이개와 모용연이 반가워하니, 라마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잠깐 바람 쐬고 오는 길입니다."

"말씀이라도 하고 나가시지 그러셨습니까?"

모용연이 투박하듯 묻는 말에, 라마는 대답 없이 여전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 라마를 보며, 은사월은 물론 그의 수하들도 놀라고 있었다.

정말로 은사월처럼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이 넓은 곳에서 다가오는 기척도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협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은사월이 라마를 보며 묻는 말에, 라마는 그런 은사월을 퉁명스레 바라보며 대답했다.

"라마."

"라마? 독특한 이름이군요."

"철무방과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좀 있는 편이라, 좋게 보고 있으니, 어서 갈길들 가쇼."

라마의 거침없는 말에 은사월의 수하들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이놈 보소?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 보게?"

그중 덩치가 가장 큰 사내가 성큼성큼 라마 쪽으로 다가서니, 라마가 모용연과 송이개를 잡고 뒤로 밀쳐내며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덩치 믿고 까불다가 혼~ 쭐 난다."

장난치듯 비아냥 거리는 라마를 보며 그 사내의 표정은 더욱 험상궂게 변했다.

"이놈!"

그는 큼지막한 주먹을 휘둘러 마치 라마의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듯 으깨버리려 했으나, 라마는 아주 살짝 움직여서 그의 주먹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주먹은 그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나지 않고, 내려치던 방향을 선회하며, 다시 라마에게로 향했다.

라마는 그의 주먹을 피해, 되려 그에게로 더욱 다가서는가 싶더니, 그 큰 덩치를 툭 밀쳐냈다.

분명 보기에는 툭 밀쳐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거구의 사내는 힘없이 밀려나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고, 한바탕 흙먼지를 뒤집어쓴 뒤에야 콜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놈이...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덩치가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라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잔재주? 힘에 그렇게 자신 있어? 힘으로 해볼까?"

라마가 성큼성큼 다가서니, 사내는 어쩐지 라마의 모습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죽어라!"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덮쳐 오자, 라마는 피하지 않고 그의 주먹을 오른손으로 받아냈다.

그는 자신의 주먹이 라마의 손바닥을 치는 순간, '됐다!'싶은 생각에 웃음 짓다가 이내 굳어져 버렸다.

라마의 손안에 그의 주먹은 그저 조용히 머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분명 상당힌 기를 실어 내찌른 주먹이라 정면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주먹을, 아이들 고사리 손 받아내듯 막아내는 이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체..."

그가 놀라 해하는 것도 잠시, 라마의 손에 쥐어진 손으로부터 강렬한 공력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윽..."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온몸에 기란 기는 다 끌어모아서 밀려오는 라마의 기세를 막아내기 급급했다.

하지만 그 기세는 너무 거칠고 너무 거대했다.

사내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갈 무렵, 돌연 날카로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 라마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라마는 어쩔 수 없이 사내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고, 두 사람 사이에 애써 웃고 있는 은사월이 서 있었다.

"이렇게까지 제 체면을 깎아내리시다니... 도저히 그냥 물러설 수가 없군요."

은사월의 말에 라마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바라던 바다. 철무방의 방주라고? 어디 그 대단한 실력 한번 구경해 보자."

라마의 왼쪽 검은 눈이 반짝거리는가 싶더니, 강렬한 기운이 은사월의 정면을 파고들었다.

은사월은 맞서지 않고 재빨리 몸을 움직여 라마의 공격을 피했는데, 이번엔 라마의 오른쪽 파란 눈이 반짝거리더니, 푸른 섬광이 날아들었다.

은사월은 처음 보는 술수에 놀라 황급히 몸을 옆으로 피하였는데, 놀랍게도 푸른 섬광은 멈추지 않고, 마치 스스로 은사월을 쫓는 듯이 뒤쫓아왔다.

은사월은 벼락같은 움직임으로 다시 푸른 섬광을 따돌렸는데, 이번엔 다른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자신을 덮쳐왔다.

분명 한 사람과 싸우고 있음에도, 마치 두 사람과 싸우는 듯한 착각이 드는 듯 하니, 은사월의 눈이 반짝거렸다.

'쌍수호박이구나.'

이어 은사월이 쏘아놓은 화살처럼 라마의 지척으로 날아들자, 라마는 손을 내뻗어 그를 움켜잡으려 했다.

하지만 은사월의 동작은 믿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은사월이 어느새 코앞에서 사라지고 나니 은사월을 쫓던 푸른 섬광이 라마의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어라?"

라마의 몸에 적중할 것이라 예상했던 푸른 섬광은 그저 허공을 스쳐지나 땅바닥에 내리 꽂혔다.

라마가 어느새 사라져 버리니, 은사월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속도에 자신 있는 그였기에, 그만큼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서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어딜?!"

돌연 뒤쪽에서 라마의 손이 쑥 뻗어 나오니, 놀란 은사월이 재빨리 뭄을 움직였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에 라마의 손을 피하며 반대로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헙!"

예상치 못한 공격에 라마가 뒤로 휘청거리자, 잠시 놀라 주춤했던 은사월이 재빨리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은 적중하지 못했다.

또다시 코앞에서 라마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은사월의 표정은 당혹감에 젖어 있었다.

도대체 자신의 눈으로 좇을 수 없는 빠름이라니, 여태까지 경신공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이 천하제일이라 자부하고 있었건만,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놀라기는 라마도 마찬가지였다.

등 뒤에서 기습 공격으로 허를 찌를 줄 알았는데, 되려 일격을 당해버렸다.

어찌나 행동이 빠른지 좀처럼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 못 움직이게 해 주마!'

라마가 은사월과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내자, 은사월은 여전히 그의 신출귀몰에 놀라 해하고 있었고, 그런 은사월을 보며 라마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입꼬리를 거만하게 올리며 그의 푸른 눈이 이글거리듯 번득거리니, 들어 올리는 그의 손을 따라 은사월의 몸도 둥실 떠올랐다.

"뭣....?"

은사월은 허공에 매달린 사람 마냥 버둥거리며 떠올랐고,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에 더더욱 놀라 해 하고 있었다.

"능공섭물(凌空攝物)인가?"

"능공섭물로 사람을 들어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하들 중 하나가 소리치니, 그들은 물론이거니와, 송이개, 모용연 역시 기겁을 하고 있었다.

은사월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고 주위를 살피더니, 돌연 허공을 딛고 달려 라마의 힘으로부터 순식간에 벗어났다.

"어라?"

라마는 은사월이 자신의 힘에서 손쉽게 벗어나자, 내심 깜짝 놀라고 있었다.

통상 중력계 마법을 쓰면 그 안에 갇힌 이는 자력으로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기 마련인데, 은사월은 너무도 쉽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대로 라면 중력의 힘에 의해 떠올라 제대로 디딜 수 없으니 벗어날 수 없는 것인데,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익힌 은사월에게는 그 힘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법 화살에, 중력계조작까지 힘을 쓰지 못하니, 라마로써도 꽤나 난처했다.

무림 고수란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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