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3
객점의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앉은 은사월과 하후평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럼 화군께서는 황궁의 청을 받고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럼... 혹 무엇을 알아내셨습니까?"
"쉬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은 알겠더이다."
은사월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먹고 살수를 쓴다 해도, 이긴다 보장하기는 힘들 것 같더군요."
"더불어... 은방주가 그자를 상대하는 동안,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재밌는 사실이라뇨?"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꽤 많다는 점이죠."
그 말에 은사월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예, 일단 놔두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어떻게 따라오는지 보고 판단할 생각이었습니다."
"어떻소? 그자의 신출귀몰함이 탁월하여, 나는 고사하고 은방주도 그자를 쫓아다니기는 쉽지 않아 보이던데..."
"예. 맞습니다. 공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졌다니... 정말 상상도 못 해봤습니다. 또 어떤 능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 참으로 묘한 사람입니다."
"그자가 무림맹으로 간다 하지 않았소?"
"예, 그리했지요."
"따라잡을 수 있으시겠소?"
하후평의 말에 은사월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이제부터 서로 협력합시다. 은방주는 그자를 쫓든 아니면 앞지르든, 무림맹 쪽으로 가서 그자의 행보를 살피시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자에 대한 것인데, 그건 나보다 은방주가 더 나은 듯 싶어서 하는 말이오. 그리고 은방주가 알아봐야 할 일은 내가 알아보겠소. 파쇄된 무림맹의 분파에 가서 남은 흔적이나 목격자가 있는지, 내 함 알아보리다."
은사월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시지요. 좋은 방법 같습니다. 헌데... 서로 목적을 바꾸게 되면 우리 뒤를 쫓는 이들에게 혼선이 생기지 않을까요?"
하후평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오. 그들이 왜 우리를 쫓는지... 우릴 쫓아서 무얼 알고자 하는지... 우리가 서로 목적을 바꾸면 저들이 어찌 나오는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소?"
하후평의 말에 은사월이 잠시 턱을 만지며 생각하더니, 이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 하시지요. 재밌을 듯합니다."
"역시, 은방주가 이 사람 마음을 알아줄 줄 알았소."
"과찬이십니다."
***
"소협, 안에 계십니까?"
문밖에서 송이개가 부르는 소리에 집안에서 곧 대답이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대답을 듣고 송이개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놀랍게도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응? 어디 가신겐가?"
놀란 송이개가 다시 문을 닫고 나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협!, 소협, 어디 계십니까?"
그러다 방금 닫고 나온 문이 벌컥 열리며 라마가 나왔다.
"여기 있어요."
그의 행동에 송이개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 방금까지 안 계셨었는데? 어디 계셨습니까?"
"간단하게 실험을 좀 해보고 있었어요."
"실험이라뇨?"
"그건 차차 얘기하시죠. 채비는 다 된 겁니까?"
"예, 준비되었습니다. 바로 출발하실 겁니까?"
"그래야죠."
라마가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자, 송이개가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큰 마당 쪽으로 나오니, 그곳에는 유림과 모용연이 있었고, 딱 보기에도 품질이 좋아 보이는 말이 네필 있었다.
"갑시다."
라마가 말위에 올라타고, 송이개와 모용연이 뒤따라 올라타자, 유림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도... 따라갑니까?"
"예, 이번엔 같이 가시죠. 할 일이 있으니까."
"하, 할 일이요? 제가 어떤?"
"와보면 알아요."
라마가 먼저 출발하니 그 뒤를 따라 모용연과 송이개가 따르고, 이어 유림이 부랴부랴 말위에 올라 그 뒤를 따랐다.
"꽤 먼길이 될 것입니다."
송이개의 말에 라마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을 타고 가는 길은 이전에 송이개와 산을 넘어 다니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초록으로 물든 풍경을 구경하며, 때때로 흐르는 개울가의 소리를 들으며, 여유롭게 거닐 듯이 그렇게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세상에 푸른 초목과 풍경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세상이 이처럼 아름다웠던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 것이다.
여유롭게 거니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속에 한가득 자리 잡은 여유로움은 이제껏 그가 살아오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 때문인지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 또한 달라 보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여유롭게만 느껴졌다.
"소협, 그럼 우리 모두가 무림맹으로 가는 것이옵니까?"
뒤따르던 유림이 묻는 말에, 라마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보면서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유림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양양이라... 사람 살기는 낙양보다 좋지요. 물 많고 사람 많고, 풍족하기 이를 데 없는 곳입니다."
그의 말에 송이개가 맞장구쳤다.
"그렇지. 인심도 후하고, 거지도 살만한 곳이지."
그들의 대화를 들은 라마가 물었다.
"무림맹이 꽤 좋은 곳에 위치해 있군요."
그의 말에 송이개가 대답했다.
"그렇지요. 무림맹의 총본은 양양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천하에 그 분파가 퍼져 있습죠."
"그럼 의천맹은 어디 있습니까?"
라마의 물음에 이번에는 유림이 나서 대답했다.
"의천맹 총본은 건안에 있지요. 상대적으로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의천맹인지라, 의천맹의 분파는 천하에 퍼져있다기보다 주로 양주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근래에는 서주나 기주, 예주, 연주 등에 그 위세를 늘려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무림맹에 견주기엔 아직 많이 부족하지요."
이어 송이개나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특히 기주나 예주 지역에서 충돌이 잦습니다. 지난번 무림맹 분파의 공격처럼, 야비한 짓도 서슴지 않지요."
송이개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문득 길을 가던 라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니, 모용연이 따라서 산꼭대기를 바라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보십니까?"
모용연이 묻는 말에 라마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조금 달려볼까요?"
라마가 "이랴!"하며 말을 재촉해서 달리기 시작하니, 일행 모두가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마의 시선이 닿았던 산꼭대기에 한 사람이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큼지막한 체격에 민소매를 입고 있었고, 두툼한 팔에는 야차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끝에 구멍이 뚫린 통이 달린 화살을 들어 커다란 활에 놓아 시위를 당기니, 큼지막한 팔뚝에 근육이 꿈틀거렸다.
이내 쏘아진 화살은 아주 먼 곳까지 독특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그리고 그 화살이 향한 방향 쪽으로 제법 먼 곳에 있는 두 명의 사람이 그 소리를 듣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경공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백마에서 낙양까지 단숨에 날아올 순 없습니다."
산만한 덩치를 한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하니, 여리여리해 보이는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님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는 이미 인간의 경지가 아닌 것이지."
"어찌할까요?"
사내의 물음에 여인은 잠시 망설이듯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내 그녀는 결심한 듯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들이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 이내 형주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형주는 묵추랑의 지역이니, 지금 즉시 묵추랑에 연통을 넣어 저자의 행적을 쫓도록 해라."
"예, 천호법님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사내가 어딘가로 향하고, 여인은 소리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무심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라마....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그런 고수가 튀어나왔단 말인가?"
***
무의 공간. 녹색 빛의 오로라가 하늘을 수놓는 틈의 공간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의 앞에 곧 라마가 모습을 드러내고, 라마는 의아한 표정이 되어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라마 앞에 서 이는, 바로 네메시스였고, 그녀는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라마에게 말했다.
"한 가지 알려줄 말이 있어."
"뭐죠?"
"너네 세계에 있던 흡혈귀들의 왕을 기억해?"
라마는 뭔가 생각난 듯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했다.
"아, 샤리트 왕이요? 마왕이라 불렸죠."
"그래. 그자가 지금 네가 있는 세계로 넘어간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라마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에? 그게 무슨 말이죠? 어떻게요? 신들도 못하는 걸..."
네메시스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그날이야... 우리 모두 방심했어. 그자는 신의 행세를 하며 그날 너와 계약을 맺었던 거야. 우리 속에 숨어 있었던 거지."
네메시스의 말에 라마는 수많은 신들과 정신없이 계약하던 날을 떠올렸다.
"맙소사. 하지만 저와 계약했다면, 제가 불러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계약 내용이 좀 다를 거야."
그제야 라마는 아차 싶었다.
처음에 한두 신은 계약 내용을 살펴봤지만, 그다음부터 워낙 비슷해서 정신없이 서명만 했었던 것이다.
"우리도 방심했어. 우리 들 사이에 설마 마신이 끼어 있을 줄은 몰랐어. 모두 너와 계약하는 것에 정신이 팔여 있었지."
"그럼 어쩌죠? 이 세계로 넘어와서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죠?"
"그래서 말인데, 네가 그놈을 좀 찾아줘야겠어."
"에? 제가요?"
"지금 그 세계에서는 네가 최고 아냐? 우리 모두와 계약한 너는 이미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능히 마신과 싸워 볼만 해."
"음... 샤리트 마왕은 원래 제가 있던 세계에서도 신들과 전쟁했던..."
"흠흠!"
돌연 네메시스가 헛기침을 하며 라마의 말을 잘랐다.
"일단 찾아봐. 찾은 다음에 다시 의논하자고."
"어디서 어떻게 찾아요? 이 넓은 세상 어디에 있을 줄 알고요?"
"마신, 마왕, 그런 칭호를 가졌던 자야. 그 세계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릴 테니까, 찾는 게 어렵진 않을 거야."
"하지만 흡혈귀 왕인데... 그에게 물리면 같은 흡혈귀가 될 테고, 흡혈귀가 많아지면 이 세상은 괴멸하게 될 텐데요?"
"그러니까 늘어나기 전에 해치워야지. 어쨌든 너한테 얘기했어. 네가 그 세계의 유일한 희망이니까, 하기 싫으면 말던가."
네메시스가 훌쩍 사라져 버리자, 라마는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뭐야? 황궁 일 알아보는 것도 바빠 죽겠구만. 하아....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라마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 몰라, 몰라. 그놈이 설쳐대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이어 라마의 모습도 틈의 세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그럼 화군께서는 황궁의 청을 받고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럼... 혹 무엇을 알아내셨습니까?"
"쉬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은 알겠더이다."
은사월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먹고 살수를 쓴다 해도, 이긴다 보장하기는 힘들 것 같더군요."
"더불어... 은방주가 그자를 상대하는 동안,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재밌는 사실이라뇨?"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꽤 많다는 점이죠."
그 말에 은사월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예, 일단 놔두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어떻게 따라오는지 보고 판단할 생각이었습니다."
"어떻소? 그자의 신출귀몰함이 탁월하여, 나는 고사하고 은방주도 그자를 쫓아다니기는 쉽지 않아 보이던데..."
"예. 맞습니다. 공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졌다니... 정말 상상도 못 해봤습니다. 또 어떤 능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 참으로 묘한 사람입니다."
"그자가 무림맹으로 간다 하지 않았소?"
"예, 그리했지요."
"따라잡을 수 있으시겠소?"
하후평의 말에 은사월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이제부터 서로 협력합시다. 은방주는 그자를 쫓든 아니면 앞지르든, 무림맹 쪽으로 가서 그자의 행보를 살피시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자에 대한 것인데, 그건 나보다 은방주가 더 나은 듯 싶어서 하는 말이오. 그리고 은방주가 알아봐야 할 일은 내가 알아보겠소. 파쇄된 무림맹의 분파에 가서 남은 흔적이나 목격자가 있는지, 내 함 알아보리다."
은사월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시지요. 좋은 방법 같습니다. 헌데... 서로 목적을 바꾸게 되면 우리 뒤를 쫓는 이들에게 혼선이 생기지 않을까요?"
하후평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오. 그들이 왜 우리를 쫓는지... 우릴 쫓아서 무얼 알고자 하는지... 우리가 서로 목적을 바꾸면 저들이 어찌 나오는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소?"
하후평의 말에 은사월이 잠시 턱을 만지며 생각하더니, 이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 하시지요. 재밌을 듯합니다."
"역시, 은방주가 이 사람 마음을 알아줄 줄 알았소."
"과찬이십니다."
***
"소협, 안에 계십니까?"
문밖에서 송이개가 부르는 소리에 집안에서 곧 대답이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대답을 듣고 송이개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놀랍게도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응? 어디 가신겐가?"
놀란 송이개가 다시 문을 닫고 나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협!, 소협, 어디 계십니까?"
그러다 방금 닫고 나온 문이 벌컥 열리며 라마가 나왔다.
"여기 있어요."
그의 행동에 송이개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 방금까지 안 계셨었는데? 어디 계셨습니까?"
"간단하게 실험을 좀 해보고 있었어요."
"실험이라뇨?"
"그건 차차 얘기하시죠. 채비는 다 된 겁니까?"
"예, 준비되었습니다. 바로 출발하실 겁니까?"
"그래야죠."
라마가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자, 송이개가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큰 마당 쪽으로 나오니, 그곳에는 유림과 모용연이 있었고, 딱 보기에도 품질이 좋아 보이는 말이 네필 있었다.
"갑시다."
라마가 말위에 올라타고, 송이개와 모용연이 뒤따라 올라타자, 유림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도... 따라갑니까?"
"예, 이번엔 같이 가시죠. 할 일이 있으니까."
"하, 할 일이요? 제가 어떤?"
"와보면 알아요."
라마가 먼저 출발하니 그 뒤를 따라 모용연과 송이개가 따르고, 이어 유림이 부랴부랴 말위에 올라 그 뒤를 따랐다.
"꽤 먼길이 될 것입니다."
송이개의 말에 라마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을 타고 가는 길은 이전에 송이개와 산을 넘어 다니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초록으로 물든 풍경을 구경하며, 때때로 흐르는 개울가의 소리를 들으며, 여유롭게 거닐 듯이 그렇게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세상에 푸른 초목과 풍경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세상이 이처럼 아름다웠던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 것이다.
여유롭게 거니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속에 한가득 자리 잡은 여유로움은 이제껏 그가 살아오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 때문인지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 또한 달라 보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여유롭게만 느껴졌다.
"소협, 그럼 우리 모두가 무림맹으로 가는 것이옵니까?"
뒤따르던 유림이 묻는 말에, 라마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보면서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유림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양양이라... 사람 살기는 낙양보다 좋지요. 물 많고 사람 많고, 풍족하기 이를 데 없는 곳입니다."
그의 말에 송이개가 맞장구쳤다.
"그렇지. 인심도 후하고, 거지도 살만한 곳이지."
그들의 대화를 들은 라마가 물었다.
"무림맹이 꽤 좋은 곳에 위치해 있군요."
그의 말에 송이개가 대답했다.
"그렇지요. 무림맹의 총본은 양양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천하에 그 분파가 퍼져 있습죠."
"그럼 의천맹은 어디 있습니까?"
라마의 물음에 이번에는 유림이 나서 대답했다.
"의천맹 총본은 건안에 있지요. 상대적으로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의천맹인지라, 의천맹의 분파는 천하에 퍼져있다기보다 주로 양주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근래에는 서주나 기주, 예주, 연주 등에 그 위세를 늘려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무림맹에 견주기엔 아직 많이 부족하지요."
이어 송이개나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특히 기주나 예주 지역에서 충돌이 잦습니다. 지난번 무림맹 분파의 공격처럼, 야비한 짓도 서슴지 않지요."
송이개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문득 길을 가던 라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니, 모용연이 따라서 산꼭대기를 바라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보십니까?"
모용연이 묻는 말에 라마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조금 달려볼까요?"
라마가 "이랴!"하며 말을 재촉해서 달리기 시작하니, 일행 모두가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마의 시선이 닿았던 산꼭대기에 한 사람이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큼지막한 체격에 민소매를 입고 있었고, 두툼한 팔에는 야차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끝에 구멍이 뚫린 통이 달린 화살을 들어 커다란 활에 놓아 시위를 당기니, 큼지막한 팔뚝에 근육이 꿈틀거렸다.
이내 쏘아진 화살은 아주 먼 곳까지 독특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그리고 그 화살이 향한 방향 쪽으로 제법 먼 곳에 있는 두 명의 사람이 그 소리를 듣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경공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백마에서 낙양까지 단숨에 날아올 순 없습니다."
산만한 덩치를 한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하니, 여리여리해 보이는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님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는 이미 인간의 경지가 아닌 것이지."
"어찌할까요?"
사내의 물음에 여인은 잠시 망설이듯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내 그녀는 결심한 듯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들이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 이내 형주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형주는 묵추랑의 지역이니, 지금 즉시 묵추랑에 연통을 넣어 저자의 행적을 쫓도록 해라."
"예, 천호법님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사내가 어딘가로 향하고, 여인은 소리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무심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라마....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그런 고수가 튀어나왔단 말인가?"
***
무의 공간. 녹색 빛의 오로라가 하늘을 수놓는 틈의 공간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의 앞에 곧 라마가 모습을 드러내고, 라마는 의아한 표정이 되어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라마 앞에 서 이는, 바로 네메시스였고, 그녀는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라마에게 말했다.
"한 가지 알려줄 말이 있어."
"뭐죠?"
"너네 세계에 있던 흡혈귀들의 왕을 기억해?"
라마는 뭔가 생각난 듯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했다.
"아, 샤리트 왕이요? 마왕이라 불렸죠."
"그래. 그자가 지금 네가 있는 세계로 넘어간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라마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에? 그게 무슨 말이죠? 어떻게요? 신들도 못하는 걸..."
네메시스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그날이야... 우리 모두 방심했어. 그자는 신의 행세를 하며 그날 너와 계약을 맺었던 거야. 우리 속에 숨어 있었던 거지."
네메시스의 말에 라마는 수많은 신들과 정신없이 계약하던 날을 떠올렸다.
"맙소사. 하지만 저와 계약했다면, 제가 불러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계약 내용이 좀 다를 거야."
그제야 라마는 아차 싶었다.
처음에 한두 신은 계약 내용을 살펴봤지만, 그다음부터 워낙 비슷해서 정신없이 서명만 했었던 것이다.
"우리도 방심했어. 우리 들 사이에 설마 마신이 끼어 있을 줄은 몰랐어. 모두 너와 계약하는 것에 정신이 팔여 있었지."
"그럼 어쩌죠? 이 세계로 넘어와서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죠?"
"그래서 말인데, 네가 그놈을 좀 찾아줘야겠어."
"에? 제가요?"
"지금 그 세계에서는 네가 최고 아냐? 우리 모두와 계약한 너는 이미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능히 마신과 싸워 볼만 해."
"음... 샤리트 마왕은 원래 제가 있던 세계에서도 신들과 전쟁했던..."
"흠흠!"
돌연 네메시스가 헛기침을 하며 라마의 말을 잘랐다.
"일단 찾아봐. 찾은 다음에 다시 의논하자고."
"어디서 어떻게 찾아요? 이 넓은 세상 어디에 있을 줄 알고요?"
"마신, 마왕, 그런 칭호를 가졌던 자야. 그 세계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릴 테니까, 찾는 게 어렵진 않을 거야."
"하지만 흡혈귀 왕인데... 그에게 물리면 같은 흡혈귀가 될 테고, 흡혈귀가 많아지면 이 세상은 괴멸하게 될 텐데요?"
"그러니까 늘어나기 전에 해치워야지. 어쨌든 너한테 얘기했어. 네가 그 세계의 유일한 희망이니까, 하기 싫으면 말던가."
네메시스가 훌쩍 사라져 버리자, 라마는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뭐야? 황궁 일 알아보는 것도 바빠 죽겠구만. 하아....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라마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 몰라, 몰라. 그놈이 설쳐대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이어 라마의 모습도 틈의 세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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