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2
엄청나게 큰 식탁이 여럿 놓인 자리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그중에 라마도 끼어 있었는데, 라마가 끼어있는 자리가 아마도 제일 상석인 듯했다.
정중앙에 앉아있는 노령의 남자가 바로 이 모용세가의 가주이자, 모영연의 할아버지인 모용후였다.
근엄하고 무게감 있는 인상의 사람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라마는 그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래, 성이 라씨라고 하였는가?"
모용후의 물음에 라마는 정중히 대답했다.
"아, 예... 그렇습니다."
"그래, 라씨라... 일전에도 라씨를 본 적이 있었던가? 뭐, 어느 지역 출신이신가?"
"아... 그게... 연... 아가씨를 만나 곳이... 제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그쪽에 유명한 가문이 어디 있었던가?"
그러자 중후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위로 남궁세가가 있습니다."
그는 차기가주이자, 모용후의 첫째 아들이며, 연의 아버지인 모용무훈의 형인 모용성훈이었다.
"그래그래, 남궁세가. 남궁세가도 참 훌륭한 가문이지. 그래... 우리 손녀딸을 구해주었다니 참으로 고마운 사람일세. 무공이 뛰어난 듯한데, 누구의 가르침을 받았는가?"
이건 또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눈앞에 산해진미가 가득하고, 어제저녁에는 지친 감이 있어서 제대로 못 먹었던 터라, 한껏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저 노친네가 자꾸 말을 걸어오니, 뭘 집어먹을 겨를이 없었다.
"아저... 그게... 그냥 혼자 수련하였습니다."
모용후는 라마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쯧쯧...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지 못했구만.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지 못했어. 그 지역엔 명사가 없지. 없어. 그래서 혼자 수련한 게야. 쯧쯧... 안타까운 일이야. 쯧쯧..."
모용후는 라마를 마치 불쌍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라마는 그게 왜 안타까운 일인지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딱히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라마는 그리 눈치가 있는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지금 이 순간 저 모용후란 노인네가 자신에 대해 꽤나 실망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뭐 하긴, 지들이 이리 으리으리한 집에서 명망있는 집안으로 떵떵 거리고 있을 테니, 그럴만도 하지.
속으로 그렇게 이해하려 애쓰며, 음식을 좀 먹으려 했지만, 어쩐지 음식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흠흠... 그래, 그럼 식사 잘하시고 가시게나."
모용후는 심기가 불편한 듯 얼마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식사를 좀 더 하시지 그러십니까?"
모용무훈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보지만, 모용후는 헛기침만 두어번 하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가 버렸다.
이어 모용성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가보겠네. 신경 쓰지 말고 손님 잘 대접하고 보내게."
라마의 귀에는 잘 대접하라는 소리는 안 들어오고, 보내라는 말만 귀에 쏙 들어왔다.
라마도 어쩐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모용무훈이 곤란한 표정으로 라마를 보며 말했다.
"원체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니, 소협이 이해해 주시게."
모용무훈이 미안해하며 건네 오는 말에 라마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습니다."
다른 식탁에서 식사 중인 모용연은 연신 라마가 앉아있는 식탁 쪽을 흘낏거리며 분위기를 살피는 듯했지만, 이쪽의 대화가 그곳까지 들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라마는 식사를 마저 하려 했으나, 어쩐지 배고픔이 싹 가셔 버렸다.
분명 배가 고팠었는데....
비록 주먹밥이었을지언정, 철무방에서 먹었던 밥이 더 맛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런 기분은 그리 낯선 기분이 아니었다.
그가 있던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 출신인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문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무엇하나 내세울 게 없었고, 재능조차 바닥이었던 그는, 누구 한 사람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외톨이나 다름없었다.
'이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라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만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만두를 한입 베어 문 라마의 눈에 자기 자리 앞에 놓인 나무젓가락 한쌍을 볼 수 있었다.
이 세계로 넘어온 뒤 식사를 할 때면 종종 보았지만, 어떻게 쓰는 것인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앞에 탐스렇고 작은 과일이 달콤한 육수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보니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 육수에 손을 넣을 수는 없으니, 이 젓가락이란 것을 사용해 볼까 싶어 들었다.
하지만 집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애써 젓가락을 육수 안에 과일 하나를 집어 들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왔으나, 이내 톡 하고 튕겨져 나간 과일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흐흐흐" "큭큭"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단 두 사람, 모용담과 모용성훈을 제외하고 이 식탁에 앉은 다른 남자들은 모두 라마를 보며 키득거리고 웃었다.
"소협, 소협은 젓가락을 쓰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누군가 라마에게 결코 온화하지 않은 말투로 말을 건네 왔다.
그 옆에 사내가 여전히 웃으며 맞장구쳤다.
"음식을 죄다 손으로만 집어 드셨던 모양이네."
"그러게. 송이개가 가르쳐 준거 아냐? 흐흐"
그들의 이야기에 라마는 기분이 상했지만, 차마 화를 내지는 못했다.
그런 라마의 눈치를 살피느라, 모용담과 모용성훈의 표정만 난처해졌다.
"손님에게 무슨 실례인가?"
모용성훈이 나지막하게 꾸짖으니, 그들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해 보이지만, 여전히 눈은 웃고 있었다.
문득 라마가 다른 식탁들을 돌아보았다.
모용연을 포함해 여자들만 앉은 식탁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규칙이 이 집에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끝에, 송이개가 보였다.
그는 식탁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해 보이는 그 무언가에, 이 어마어마한 음식들과 비교되게 큼지막한 그릇 하나에 무언가를 잔뜩 담아가지고, 손으로 집어 먹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비로소 라마는 이 거대한 저택 안에 자리 잡은 알 수 없는 공기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
라마가 일찌감치 떠난다는 말을 듣고 모용연이 서둘러 마중 나왔다.
딱히 챙길 짐도 없었던 라마는 조용히 떠나가려 했지만, 하인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용연과 모용담, 그리고 연의 부모는 기꺼이 라마가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마중 나왔다.
반면 모용후나 모용성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째서 이리 급히 가십니까?"
모용연이 속상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 오자, 그녀의 어머니도 말을 보태었다.
"조금 더 머물다가 가시지요."
라마는 애써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만 가봐야죠."
별로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없을뿐더러, 어쩐지 이곳 사람들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허면 이거라도..."
연의 어머니는 라마에게 돈이 든 주머니를 건네주며 말했다.
"여비라도 하시지요."
라마는 가진 돈이 없었기에, 그녀가 건네주는 돈을 마다하지 않았다.
속상해하는 모용연을 보니 살짝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라마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모용연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곁에는 송이개가 함께였다.
라마는 길을 모른다는 핑계로 송이개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송이개와 함께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체 한참을 걸어가다가, 저 멀리 모용세가의 대저택이 아스라이 보일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서서 그곳을 바라보았다.
"후아~"
왜인지 모르겠지만, 속이 시원했다.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됐다. 아님 말지 뭐..."
라마는 그런 와중에도 마음 한켠에 자리 잡은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그렇게 이야기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소협?"
송이개가 물어오니 라마가 피식 웃음 지었다.
"저곳에서 어찌 지내셨습니까? 잠깐 있는데도 숨이 턱턱 막히던데?"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이었던 송이개는, 이내 라마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모용세가를 바라보았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으레 다들 저리 됩디다. 그래도 연 아가씨는 달랐죠. 나리님도 담 도련님도. 참 좋으신 분들입니다. 마치 돼지우리 안에 피어난 꽃처럼, 그들만은 달랐죠."
"언제나 그렇게 따로 식사합니까?"
송이개가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짖어 보였다.
"평소에는 같이 식사할 일이 별로 없죠. 연아가씨가 아니면, 저와 같이 밥 먹으려고 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신기하군요. 그렇게 싫으면 내쳤을 텐데..."
라마가 되물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송이개도 그 곁을 따라 걸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 없죠. 엄연히 저는 개방에 소속된 몸이고. 개방 또한 구파일방 오대세가중 하나이자, 정파무림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일을 하는 곳이니깐요."
라마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래요? 개방이 그리 중요합니까?"
"그럼요. 개방은 그 수도 가장 많죠. 또한 전국에 거지들이 퍼져있으니, 개방에 없는 정보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무림맹 내에서도 개방이 가지는 절대적인 장점이죠."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파들은 개방과 함께 하길 원치 않습니다. 무림맹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구룡회(九龍會)의 선출에서 단 한 번도 개방의 방주가 뽑힌 적이 없을 정도죠."
"그쯤 되면, 개방이 싫다고 나가도 이상하지 않겠군요."
라마의 말에 송이개가 껄껄 거리고 웃었다.
"그럴 순 없죠. 정파무림의 시작을 함께한 것이 개방입니다. 개방은 정파에 몸담아 올바른 일을 한다는 대의명분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조직입니다. 그건 다른 문파들도 모두 알고 있는 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개방이 싫어도 나가라 하지 못하는 것이죠. 제가 모용세가 있는 것이 모두를 불편하게 할지라도, 차마 저더러 나가라고 말 못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들은 둘째치고 본인은 안 불편합니까? 전 불편해서 싫습니다."
"하하, 저도 싫습니다. 연아가씨를 보고 참는 것이죠. 저야 뭐,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마주할 일도 없습니다."
정처 없이 걷고 있는 라마를 의식한 듯, 송이개가 물어왔다.
"근데... 어디로 가십니까? 제가 어디까지 안내해 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글세요. 누군가를 찾고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
라마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자신이 이 세계로 넘어올 당시, 꿈속에서 본 여인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근거도 없었지만, 자신이 이 세계로 온 것과 꿈속에서 본 여인이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그 여인을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럼 저는..."
곤란해하는 송이개를 돌아보며 라마가 물었다.
"왜요? 얼른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가셔도 됩니다. 사실은... 길 안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한 걸 좀 여쭙고자 했습니다."
송이개는 이해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까짓 거 좀 더 가보죠 뭐. 어디든 다 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말만 하시지요."
송이개를 보며 라마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어찌 되었던, 어디를 가든, 까짓 거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럼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고.
그중에 라마도 끼어 있었는데, 라마가 끼어있는 자리가 아마도 제일 상석인 듯했다.
정중앙에 앉아있는 노령의 남자가 바로 이 모용세가의 가주이자, 모영연의 할아버지인 모용후였다.
근엄하고 무게감 있는 인상의 사람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라마는 그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래, 성이 라씨라고 하였는가?"
모용후의 물음에 라마는 정중히 대답했다.
"아, 예... 그렇습니다."
"그래, 라씨라... 일전에도 라씨를 본 적이 있었던가? 뭐, 어느 지역 출신이신가?"
"아... 그게... 연... 아가씨를 만나 곳이... 제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그쪽에 유명한 가문이 어디 있었던가?"
그러자 중후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위로 남궁세가가 있습니다."
그는 차기가주이자, 모용후의 첫째 아들이며, 연의 아버지인 모용무훈의 형인 모용성훈이었다.
"그래그래, 남궁세가. 남궁세가도 참 훌륭한 가문이지. 그래... 우리 손녀딸을 구해주었다니 참으로 고마운 사람일세. 무공이 뛰어난 듯한데, 누구의 가르침을 받았는가?"
이건 또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눈앞에 산해진미가 가득하고, 어제저녁에는 지친 감이 있어서 제대로 못 먹었던 터라, 한껏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저 노친네가 자꾸 말을 걸어오니, 뭘 집어먹을 겨를이 없었다.
"아저... 그게... 그냥 혼자 수련하였습니다."
모용후는 라마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쯧쯧...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지 못했구만.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지 못했어. 그 지역엔 명사가 없지. 없어. 그래서 혼자 수련한 게야. 쯧쯧... 안타까운 일이야. 쯧쯧..."
모용후는 라마를 마치 불쌍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라마는 그게 왜 안타까운 일인지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딱히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라마는 그리 눈치가 있는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지금 이 순간 저 모용후란 노인네가 자신에 대해 꽤나 실망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뭐 하긴, 지들이 이리 으리으리한 집에서 명망있는 집안으로 떵떵 거리고 있을 테니, 그럴만도 하지.
속으로 그렇게 이해하려 애쓰며, 음식을 좀 먹으려 했지만, 어쩐지 음식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흠흠... 그래, 그럼 식사 잘하시고 가시게나."
모용후는 심기가 불편한 듯 얼마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식사를 좀 더 하시지 그러십니까?"
모용무훈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보지만, 모용후는 헛기침만 두어번 하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가 버렸다.
이어 모용성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가보겠네. 신경 쓰지 말고 손님 잘 대접하고 보내게."
라마의 귀에는 잘 대접하라는 소리는 안 들어오고, 보내라는 말만 귀에 쏙 들어왔다.
라마도 어쩐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모용무훈이 곤란한 표정으로 라마를 보며 말했다.
"원체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니, 소협이 이해해 주시게."
모용무훈이 미안해하며 건네 오는 말에 라마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습니다."
다른 식탁에서 식사 중인 모용연은 연신 라마가 앉아있는 식탁 쪽을 흘낏거리며 분위기를 살피는 듯했지만, 이쪽의 대화가 그곳까지 들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라마는 식사를 마저 하려 했으나, 어쩐지 배고픔이 싹 가셔 버렸다.
분명 배가 고팠었는데....
비록 주먹밥이었을지언정, 철무방에서 먹었던 밥이 더 맛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런 기분은 그리 낯선 기분이 아니었다.
그가 있던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 출신인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문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무엇하나 내세울 게 없었고, 재능조차 바닥이었던 그는, 누구 한 사람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외톨이나 다름없었다.
'이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라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만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만두를 한입 베어 문 라마의 눈에 자기 자리 앞에 놓인 나무젓가락 한쌍을 볼 수 있었다.
이 세계로 넘어온 뒤 식사를 할 때면 종종 보았지만, 어떻게 쓰는 것인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앞에 탐스렇고 작은 과일이 달콤한 육수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보니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 육수에 손을 넣을 수는 없으니, 이 젓가락이란 것을 사용해 볼까 싶어 들었다.
하지만 집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애써 젓가락을 육수 안에 과일 하나를 집어 들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왔으나, 이내 톡 하고 튕겨져 나간 과일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흐흐흐" "큭큭"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단 두 사람, 모용담과 모용성훈을 제외하고 이 식탁에 앉은 다른 남자들은 모두 라마를 보며 키득거리고 웃었다.
"소협, 소협은 젓가락을 쓰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누군가 라마에게 결코 온화하지 않은 말투로 말을 건네 왔다.
그 옆에 사내가 여전히 웃으며 맞장구쳤다.
"음식을 죄다 손으로만 집어 드셨던 모양이네."
"그러게. 송이개가 가르쳐 준거 아냐? 흐흐"
그들의 이야기에 라마는 기분이 상했지만, 차마 화를 내지는 못했다.
그런 라마의 눈치를 살피느라, 모용담과 모용성훈의 표정만 난처해졌다.
"손님에게 무슨 실례인가?"
모용성훈이 나지막하게 꾸짖으니, 그들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해 보이지만, 여전히 눈은 웃고 있었다.
문득 라마가 다른 식탁들을 돌아보았다.
모용연을 포함해 여자들만 앉은 식탁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규칙이 이 집에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끝에, 송이개가 보였다.
그는 식탁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해 보이는 그 무언가에, 이 어마어마한 음식들과 비교되게 큼지막한 그릇 하나에 무언가를 잔뜩 담아가지고, 손으로 집어 먹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비로소 라마는 이 거대한 저택 안에 자리 잡은 알 수 없는 공기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
라마가 일찌감치 떠난다는 말을 듣고 모용연이 서둘러 마중 나왔다.
딱히 챙길 짐도 없었던 라마는 조용히 떠나가려 했지만, 하인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용연과 모용담, 그리고 연의 부모는 기꺼이 라마가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마중 나왔다.
반면 모용후나 모용성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째서 이리 급히 가십니까?"
모용연이 속상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 오자, 그녀의 어머니도 말을 보태었다.
"조금 더 머물다가 가시지요."
라마는 애써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만 가봐야죠."
별로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없을뿐더러, 어쩐지 이곳 사람들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허면 이거라도..."
연의 어머니는 라마에게 돈이 든 주머니를 건네주며 말했다.
"여비라도 하시지요."
라마는 가진 돈이 없었기에, 그녀가 건네주는 돈을 마다하지 않았다.
속상해하는 모용연을 보니 살짝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라마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모용연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곁에는 송이개가 함께였다.
라마는 길을 모른다는 핑계로 송이개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송이개와 함께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체 한참을 걸어가다가, 저 멀리 모용세가의 대저택이 아스라이 보일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서서 그곳을 바라보았다.
"후아~"
왜인지 모르겠지만, 속이 시원했다.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됐다. 아님 말지 뭐..."
라마는 그런 와중에도 마음 한켠에 자리 잡은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그렇게 이야기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소협?"
송이개가 물어오니 라마가 피식 웃음 지었다.
"저곳에서 어찌 지내셨습니까? 잠깐 있는데도 숨이 턱턱 막히던데?"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이었던 송이개는, 이내 라마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모용세가를 바라보았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으레 다들 저리 됩디다. 그래도 연 아가씨는 달랐죠. 나리님도 담 도련님도. 참 좋으신 분들입니다. 마치 돼지우리 안에 피어난 꽃처럼, 그들만은 달랐죠."
"언제나 그렇게 따로 식사합니까?"
송이개가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짖어 보였다.
"평소에는 같이 식사할 일이 별로 없죠. 연아가씨가 아니면, 저와 같이 밥 먹으려고 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신기하군요. 그렇게 싫으면 내쳤을 텐데..."
라마가 되물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송이개도 그 곁을 따라 걸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 없죠. 엄연히 저는 개방에 소속된 몸이고. 개방 또한 구파일방 오대세가중 하나이자, 정파무림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일을 하는 곳이니깐요."
라마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래요? 개방이 그리 중요합니까?"
"그럼요. 개방은 그 수도 가장 많죠. 또한 전국에 거지들이 퍼져있으니, 개방에 없는 정보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무림맹 내에서도 개방이 가지는 절대적인 장점이죠."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파들은 개방과 함께 하길 원치 않습니다. 무림맹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구룡회(九龍會)의 선출에서 단 한 번도 개방의 방주가 뽑힌 적이 없을 정도죠."
"그쯤 되면, 개방이 싫다고 나가도 이상하지 않겠군요."
라마의 말에 송이개가 껄껄 거리고 웃었다.
"그럴 순 없죠. 정파무림의 시작을 함께한 것이 개방입니다. 개방은 정파에 몸담아 올바른 일을 한다는 대의명분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조직입니다. 그건 다른 문파들도 모두 알고 있는 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개방이 싫어도 나가라 하지 못하는 것이죠. 제가 모용세가 있는 것이 모두를 불편하게 할지라도, 차마 저더러 나가라고 말 못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들은 둘째치고 본인은 안 불편합니까? 전 불편해서 싫습니다."
"하하, 저도 싫습니다. 연아가씨를 보고 참는 것이죠. 저야 뭐,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마주할 일도 없습니다."
정처 없이 걷고 있는 라마를 의식한 듯, 송이개가 물어왔다.
"근데... 어디로 가십니까? 제가 어디까지 안내해 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글세요. 누군가를 찾고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
라마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자신이 이 세계로 넘어올 당시, 꿈속에서 본 여인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근거도 없었지만, 자신이 이 세계로 온 것과 꿈속에서 본 여인이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그 여인을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럼 저는..."
곤란해하는 송이개를 돌아보며 라마가 물었다.
"왜요? 얼른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가셔도 됩니다. 사실은... 길 안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한 걸 좀 여쭙고자 했습니다."
송이개는 이해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까짓 거 좀 더 가보죠 뭐. 어디든 다 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말만 하시지요."
송이개를 보며 라마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어찌 되었던, 어디를 가든, 까짓 거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럼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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