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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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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0.08분

67화 - #1


넓은 터에서 병사들과 함께 몸을 숨기며 퇴각하는 아군을 기다리고 있던 세자는 점차 의아함이 밀려들었다.

지금쯤이면 퇴각하고도 남았을 시간인건만, 그러한 기색 없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일이 틀어짐을 느낀 세자는 옆에 있는 부관에게 명령했다.

"바로 가서 동태를 살피고 오너라."

"예, 저하."

부관이 서둘러 말을 타고 달려나가자, 불길한 기분에 휩싸인 세자의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선제일검이라는 홍여립이다.

조선천지에 당해낼 사람이 없다는 사람이니, 믿고는 있으나 어쩐지 불안한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말을 타고 달려가는 부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자는 한숨을 내쉬다, 문득 연희가 건네주었던 파사신검이 생각나 손을 품 안에 넣어 검을 더듬어 보았다.

품 안에 잘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불길했던 마음에 위안이 조금 되는 것 같았다.

기다리기를 잠시, 저 멀리 말을 탄 부관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홀로 돌아오는 부관의 모습에 세자는 비로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확신하고 수풀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찌 된 것이냐?"

세자가 큰소리로 다그쳐 물으니, 부관이 말을 멈춰 세우며 소리쳐 말했다.

"저하! 왜구들은 모두 사라지고, 도총관께서는 변을 당하셨습니다."

부관의 믿을 수 없는 말에 세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아,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총관이? 어서 말을 가져오라!"

수하 하나가 말을 대령하자마자 세자는 얼른 말위에 올라타 말고삐를 돌리려 했다.

그때 곁에 있던 다른 부관이 황급히 나서며 세자를 만류했다.

"저하, 기다리십시오. 같이 가셔야..."

허나 세자는 부관의 말을 체 다 듣지도 않고 그대로 말을 재촉해 달리기 시작했다.

보고를 했던 부관이 놀라 서둘러 그 뒤를 따르자, 다른 부관들도 부랴부랴 말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세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홍여립이 그렇게 쓰러질 것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기에, 다른 것은 생각치 않고 서둘러 달려갔다.

아버지인 임금에게 유일하게 기댈 곳이 되어주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세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구들과 마주했던 장소에 이르렀을 때, 세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의 시신만이 즐비하고, 왜구의 시신은 단 한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마치 보란 듯이 핏물 위에 누워있는 한 사람, 홍여립이 보였다.

"도총관!"

세자는 말에서 뛰어내려 홍여립에게 달려갔다.

그를 부둥켜안고 부축해 보지만, 그의 육신은 이미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장군! 홍 장군!"

세자의 눈에 눈물이 그득해졌다.

"이... 어찌 된 일이오? 조선 팔도에 당해낼 사람이 없다더니... 어찌 이리 허무하게 가신단 말입니까?"

그런 세자를 지켜보는 다른 이가 있었다.

불과 십여 걸음 앞에 주동환이 서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주동환과 그 뒤로 왜구들이 차분하게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와 부관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가려졌던 주술 장막이 걷히며 주동환과 왜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슬퍼하던 세자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뒤에 서 있던 부관 역시 사색이 된 표정으로 주춤 거리며 물러섰다.

"오랜만입니다. 저하."

주동환이 싸늘한 표정으로 세자를 바라보며 한걸음 다가섰다.

세자는 주동환을 보며, 어렴풋한 지난 일을 떠올렸다.

연희와 이야기를 나누던, 바로 그 사교도의 사람임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더불어 그의 등 뒤에 희멀건 눈으로 흔들거리며 서 있는 왜구들을 보는 순간, 그들 역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게 중에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병사도 있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른 이들처럼 흔들거리며 태연히 서 있었다.

그제야 원래 계획과 달리 퇴각조차 못하고 이곳에서 전멸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란 것은... 자네가 나를 안다는 뜻인가?"

세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동환을 응시했고, 주동환은 어느새 조금 더 다가서며 세자의 지척 거리에 와 서 있었다.

"이놈, 한때나마 세자 저하의 곁을 지키던 표영호라 하옵니다."

말 자체는 예의를 갖추었으나, 어투에서는 예의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표... 영호? 영호? 영호라면... 그... 홍장군의..."

"그렇습니다. 홍여립의 장군의 제자 입죠. 바로 그 버림받은 제자 말입니다."

세자는 쓰러져 있는 홍여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선제일검이란 그가 쓰러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주동환이 천천히 칼끝을 들어 세자가 있는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 주셔야겠습니다."

세자는 굳어진 표정으로 주동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옛날, 아직 어린 나에게 검을 바로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던 그대인가?"

차분하게 묻는 세자의 질문에, 주동환이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내게서 세 번의 수를 봐주던 그대인데, 어떤가? 지금도 그러한가?"

세자의 말에 주동환이 어이없는 너털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지요. 마지막으로, 제가 세 번의 공격을 받아들이지요."

세자는 칼을 고쳐 잡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자세는 느릿했으되,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자 역시 오랜 시간 수련을 해왔으나, 지금 주동환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얼마 전 안영군이 연희를 납치했을 때를 떠올리며, 세자는 큰 동작으로 주동환의 정면을 공격해 갔다.

너무 큰 동작이었기에, 주동환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칼을 들어 가볍게 막아낼 수 있었다.

"저하, 그간 수련을..."

그러나 그것은 허초였다.

처음엔 두 손으로 휘두르던 장검을, 내리치는 순간 왼손으로만 내려쳤다.

장검을 최대한 큰 동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기에, 주동환은 당연한 듯 두 손으로 칼을 받치고 세자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그가 방심한 틈을 타, 품 안에 있던 파사신검을 오른손으로 꺼내어 휘둘렀다.

비록 기습적인 공격이라고는 하나, 순간적으로 품 안에 있던 단검을 뽑아 드는 행위였으니, 위태롭고 부자연스러웠다.

주동환은 갑작스러운 세자의 돌발 공격에 당황하여 조금 늦게 피하는 바람에 얼굴이 칼끝에 살짝 스쳤다.

잠시 당황했던 주동환의 표정이 싸늘해지며 말했다.

"이런 조잡한 수법을 쓰시다니, 저하는..."

그러나 말을 하다 말고 주동환은 자신의 발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뭣?"

고작 뺨 언저리를 살짝 스쳤을 뿐일진대, 그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이없어하는 표정도 잠시, 그는 그대로 고꾸라져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뒤쪽에 서 있던 무수한 왜구들이 일제히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있던 세자와 부관 역시,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세자는 다시금 자신의 손에 쥐어진 파사신검을 내려다봤다.

그날 안영군에게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그는 부관에게 명했다.

"어서, 홍 장군의 시신을 모셔라. 이곳을 피해야 한다."

세자는 파사신검을 손에 쥔 체로, 부관과 함께 홍여립의 시신을 들어 말위에 올린 뒤,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매복해있는 병사들이 있는 후방에 도착하자, 세자가 부관들을 향해 소리쳤다.

"불화살을 준비하라!"

그러자 부관들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고, 그중 하나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하오나, 저하, 이곳은 수풀이 우거져 큰 불길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불길을 잡을 물을 미리 준비시키고, 서둘러 불화살을 준비시켜라."

"예."

부관들이 서두르는 사이, 세자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파사신검을 내려다보며 부관들이 몸을 숨기고 있던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 있던 부관들은 홍여립의 시신을 보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다들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사이, 불화살의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모두 준비하라!"

세자가 소리치며, 수중에 있던 파사신검을 검집 안에 넣었다.

궁수들의 활 끝에 불이 붙여지고, 왜구가 있는 길목 입구를 겨냥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광기 어린 왜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친 듯한 괴음과 함께 광분한 승냥이 마냥 달려오는 모습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왜구들이 적당한 거리에 이르는 순간, 세자는 다시 파사신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달려들던 왜구들이 그대로 우르르 쓰러져 버렸고, 이를 보고 있던 병사들도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이다, 쏴라!"

세자의 명령에, 궁수들의 화살이 일제히 활시위를 떠났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긴 동선을 그리며 왜구들을 향해 날아갔고, 일순간 쓰러져있는 왜구들은 불길에 휩싸였다.

불타는 왜구들을, 세자는 굳어진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편, 왜구들과 달리 다시 일어나지 못한 주동환의 곁에 천태호가 본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쓰러져 있는 주동환을 쳐다보다, 저만치에서 크게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보면서, 불신과 곤혹스러움이 얼굴에 드리워졌다.

"도대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그는, 다시금 황망한 표정으로 주동환을 내려다보았다.

뺨에 가벼운 상처 하나 빼고는 딱히 부상이라 할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상태를 살피는 사이, 뒤쪽에서 우락부락한 사내 세명이 나타났다.

"방주님, 이곳을 피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들 중 하나가 건네는 말에, 천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동환을 챙기거라."

"예."

수하들은 천태호의 말에 주동환을 들어 말위에 올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쳐다보던 천태호는 몸을 돌려 불길이 일어나는 곳을 쳐다보며 양손을 합장하고는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천태호의 주변으로 희끄무레한 것들이 보일 듯 말 듯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서둘러야겠다."

천태호가 그리 말하며 말위에 오르고, 먼저 출발하자 수하들이 주동환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홍여립의 전사 소식을 들은 임금은, 한달음에 뛰어 나와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 마치 부모를 잃은 사람처럼 통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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