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1
잿빛 하늘은, 땅 위에 모든 것들을 저주하듯 며칠째 추적추적한 비를 뿌리고 있었다.
달빛마저 시커먼 구름이 집어삼킨 어두컴컴한 이 공간은, 과학의 힘을 빌린 가로등마저 없었다면 어둠 그 자체였을지도 몰랐다.
석호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예리한 통증, 그리고 빗물에 섞여 흘러내리는 자신의 피를 보며 상태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꼈다.
물론 지금 왼쪽 옆구리에 깊이 들어간 좌상이 아니라도, 눈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이 자신을 살려 보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11년만인가? 12년인가? 오랜만이긴 한데... 옛날부터 재수 없었어, 니 눈빛... 남의 여자한테 찝쩍 대기나 하는 한심한 새끼..."
석호의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 김주환은 어금니를 꽉 깨문 체, 분노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석호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호정이는 너한테서 도망치고 싶어 했어. 항상. 난 그런 그녀를 도왔을 뿐이야."
부상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어투로 말하는 석호가 주환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타깝게 됐네? 잘난 네 동생이라도 있었으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주환의 비아냥에 석호는 빈정거리며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다물 수밖에 없었다.
"쓰읍... 뭐, 팔자려니 생각해야지. 운이 좋네. 넌 예전부터 운이 좋았어."
주환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운이 아니야, 이 친구야. 아직도 모르겠어? 이 모든 게 다 내가 만든 거야. 운까지도."
주환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통증에 몸을 구부렸다.
"그래, 그 잘난 능력 가지고, 권력의 단물이나 빨아먹으며 살면 되지. 호정이는 왜 붙잡고 있었던 거야?"
석호의 말에 체 다 끝나기도 전에 주환이 버럭 소리 질렀다.
"호정이는 내 여자야!"
석호는 예의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호정이는 호정이야. 어느 누구의 소유가 아니야."
주환이 잠시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체념한 듯 말을 내뱉었다.
"유언을 들어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네가 못 잊어 안달 난 호정이한테 안부나 전해라."
주환의 말에 석호가 키득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꼭 지옥에 가서도, 네놈 끝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볼게."
석호의 저주 섞인 말에도 주환은 끄떡없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어 옆에 서 있는 젊은 남자에게 짧게 고개짓을 한번 하자, 젊은 남자는 팔꿈치 길이 정도 되는 칼을 들고 석호에게 다가갔다.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소리도 없이 빠르게 그가 들고 있는 칼이 석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석호는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는, 이내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젊은 남자는 칼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고는 익숙한 듯, 등 뒤에 메고 있던 칼집에 칼을 넣었다.
주환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의 곁에 계속 서 있던 한 여인은 그가 비에 맞지 않도록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반대쪽 어깨는 빗물에 속절없이 젖어들고 있었다.
"시신은...?"
그녀의 물음에 주환이 그녀를 힐끔 보고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뭔 시신? 그냥 내버려 두면 경찰들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을."
"경찰들이 조사하게 내버려 둘 셈이야?"
그녀의 되물음에, 주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래? 우리가 하는 일이 이런 일인데, 뭘 걱정해? 내비둬, 들개들한테 뜯어 먹히다가 발견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어 가차없이 몸을 돌려 차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외쳤다.
"가자, 키스케. 이애니, 이코오~!"
주환의 외침에, 석호의 시신 옆에 서 있던 키스케가 미련 없이 주환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주환이 비에 맞을까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그녀만이, 죽어있는 석호의 시신을 연달아 돌아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떠나가고 난 뒤, 아니 조금은 더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석호의 뒤쪽에 있던 차량 뒷좌석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한 소년이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은 빗물에 섞여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소년의 그런 얼굴을 보아줄 이가 이곳에는 없었다.
"아빠!"
소년은 애타는 목소리로 쓰러진 석호를 향해 달려갔다.
이미 숨이 끊어진 석호의 시신을 부여잡고, 아이는 하염없이 울며 아빠를 불렀다.
"아빠아...."
잿빛 하늘이 쏟아붓는 빗소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마저 덮어버리고 있었다.
***
희멀건한 피부에 동그랗고 큰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그를 보며, 한참을 버텼던 그녀의 시선은 끝내 다른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왜 이러실까? 다 아는 사이끼리."
그는 앞쪽으로 잔뜩 수그린 체 그녀에게 끼 부리듯 간사하게 애교를 부렸다.
원체 얼굴이 준수한 편이라, 대체로 여자들은 그에게 호의적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그의 그러한 태도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봐요, 수호 씨.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요."
"아니 이게 어떻게 다른 겁니까? 정상적으로 잘 동작하고, 명세에 있는 그대로 다 구현됐지 않습니까?"
따져 묻는 게 따져 묻는 것이 아니다.
교묘하게 애교를 부리는 듯한 그의 어투와 행동에, 그녀는 심히 불편한 표정으로 몸을 최대한 뒤로 뺐다.
"자꾸 이런 식으로 일 해오면 곤란해요. 명시가 안되어 있어도, 이 정도는 당연하게 해와야죠."
그녀의 말에 수호는 그제야 몸을 제대로 일으켜 세웠다.
"아~ 실장님, 우리가 일 원데이 투데이 하는 것도 아니고, 명세에도 없는 일을 어떤 프로그래머가 합니까?"
"그래도 그렇지. 아니..."
그녀가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수호가 손을 내밀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에이! 명세를 기준으로 가격을 산정하는데, 명세에 없는 일을 어떻게 합니까? 다 필요 없고. 일 더 시키려면 돈을 더 주시든가. 아니면 나 바로 공정거래위원회로 전화 겁니다, 진짜?"
수호의 저런 협박 아닌 협박을 꽤 오래 보아온 조실장이다.
"클라이언트한테 전달은 해주겠지만, 결과는 너무 뻔하지 않나? 수호 씨나 우리나 클라이언트한테 잘못 보여서 좋을 거 없는 거 아냐? 어차피 하게 될 거 좀 해줘. 제대로 안 챙긴 우리 쪽 잘못도 있지만..."
조실장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향하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여 버렸다.
조실장은 다시 시선을 수호에게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는 해줄 거라는, 서로의 신뢰가 있는 거 아니었나? 그 정도 신뢰도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수호 씨한테 일을 맡겨? 요즘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신뢰 없는 사람한테는 일 못 맡기지."
조실장의 말에 수호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하~ 신뢰요? 와~ 날 정말, 그 정도로 밖에 못 본 겁니까? 아니, 내가 신뢰 빼면 시첸데...."
"그래, 신뢰 빼면 시체지. 우리 임수호 님. 그러니까 우리 신뢰관계 깨지지 않게, 마무리 잘 좀 부탁해요?"
수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조실장을 응시하다가, 그녀 앞에 놓아둔 서류 봉투를 낚아채듯 들었다.
"진~짜 사람들이 알아야 돼. 이거 이거, 정말 사람 일 이렇게 시키는 거 아닙니다."
조실장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수호의 비아냥을 받아쳤다.
"일 끝나면 바로 프로젝트 하나 할 수 있어? 3천 짜린데, 3천 치곤, 별거 없어."
막 나가려던 수호가 그대로 몸을 의자에 뉘이듯이 앉으며 싱긋 웃는 얼굴로 능글능글거렸다.
"에이, 누님, 실장님, 우리 누님은 어떻게 나이를 안 먹어? 4년 전이랑 바뀐 게 하나도 없네? 아니, 오히려 젊어진 거 같은데?"
옆에서 젊은 여자가 풉하고 웃는소리에 조실장이 싸늘하게 흘겨보자, 그녀는 애써 표정을 고치며 웃음을 삼켰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프로젝트 마무리만 잘해와. 바로 던져줄 테니까."
수호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두 손가락으로 거수경례를 해 보였다.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신속하게 해결해 놓고 오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수호가 후다닥 밖으로 나가자, 남은 두 사람은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꼭 아이 같아요. 천진난만하달까?"
젊은 여자의 말에, 실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홍 매니저님."
젊은 여자는 웃음을 그치고 사색이 된 표정으로 조실장을 쳐다보았다. 조실장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매니저님의 잘못을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시... 실장님..."
한편, 밖으로 나온 수호는 막상 나와서는 투덜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여튼, 저러니까 저 나이 먹도록 결혼을 못했지. 아 진짜, 돌겠네. 이거 마무리를 어떻게 한다?"
수호는 나오는 내내 궁시렁궁시렁 거리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여튼 어떻게든 돈 쪼금 주고 일 더 시켜먹으려고. 인간들이 왜 저러는지 몰라."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 버튼을 누르자, 멀찍이 서 있는 차 한 대가 '철컥'소리를 내며 잠금장치를 풀었다.
수호의 궁시렁거림은 차에 도착할때까지 그치지않고 계속 이어졌다.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자, 차는 거친 엔진 소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차에 있던 작은 액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자, 수호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숙여 떨어진 액자를 집어 들었다.
"갑자기 이게 왜 떨어져, 재수 없게."
수호는 투덜대며 액자를 다시 차량 대시보드 위에다가 붙여 놓고는 운전을 위해 앞을 보는 순간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악! 뭐야?"
깜짝 놀란 것도 잠시, 그는 차 앞에 서 있는 조그만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뭐야? 씨... 귀신인 줄 알았네?"
수호는 차문 유리창을 밑으로 내려 바깥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이봐요, 차 나가요."
그러자 차를 가로막고 서 있던 여자는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는 수호 앞으로 다가왔다.
"같이 갑시다."
너무나 태연히,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를 보며, 수호가 눈을 껌뻑거렸다.
"누구... 신데요?"
"그건 가면서 얘기하고."
그녀의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수호는 기가 차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니 이보세요, 지금 뭐 헌팅하시는 겁니까? 제가 키가 있어서, 키 작은 여자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수호의 타박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 앞을 돌아 보조석 쪽으로 걸어왔다.
"어... 어?"
수호는 당황스러움에 잠시 굳어있다가 부랴부랴 차문을 잠그려 했지만, 그녀가 한발 더 빨랐다.
차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보조석에 올라탄 그녀를 보며 수호는 이런 미친여자가 다있어? 하는 표정으로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 뭐예요? 지금?"
그녀는 태연하게 말하며 빨리 가자는 듯 앞을 향해 턱짓을 했다.
"뭐... 이런 걸 필연이라고 하죠. 갑시다. 출발."
"어딜요?"
"어디긴? 집에 안 가요?"
"우리 집에 당신이 왜 가요?"
"일단 가서 얘기하자니까."
"가서 뭘 얘기해요?"
"아~ 거, 사내자식이 뭐가 그렇게 겁이 많아? 누가 잡아먹어?"
"그쪽이 잡아먹을 거 같은데요?"
"안 잡아먹어."
"진짜 누구신데 이러세요?"
"가.면.서. 얘기한다고, 가면서. 일단 가자고."
"아... 미치겠네."
생긴건 멀쩡한데...또라이 인가?쯧쯧...라며 중얼거리던 수호는 제대로 미쳤네..제대로 미쳤어....라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민스런 얼굴로 그녀를 힐끔 한번 쳐다보고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엑셀에 발을 올렸다.
달빛마저 시커먼 구름이 집어삼킨 어두컴컴한 이 공간은, 과학의 힘을 빌린 가로등마저 없었다면 어둠 그 자체였을지도 몰랐다.
석호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예리한 통증, 그리고 빗물에 섞여 흘러내리는 자신의 피를 보며 상태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꼈다.
물론 지금 왼쪽 옆구리에 깊이 들어간 좌상이 아니라도, 눈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이 자신을 살려 보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11년만인가? 12년인가? 오랜만이긴 한데... 옛날부터 재수 없었어, 니 눈빛... 남의 여자한테 찝쩍 대기나 하는 한심한 새끼..."
석호의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 김주환은 어금니를 꽉 깨문 체, 분노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석호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호정이는 너한테서 도망치고 싶어 했어. 항상. 난 그런 그녀를 도왔을 뿐이야."
부상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어투로 말하는 석호가 주환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타깝게 됐네? 잘난 네 동생이라도 있었으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주환의 비아냥에 석호는 빈정거리며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다물 수밖에 없었다.
"쓰읍... 뭐, 팔자려니 생각해야지. 운이 좋네. 넌 예전부터 운이 좋았어."
주환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운이 아니야, 이 친구야. 아직도 모르겠어? 이 모든 게 다 내가 만든 거야. 운까지도."
주환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통증에 몸을 구부렸다.
"그래, 그 잘난 능력 가지고, 권력의 단물이나 빨아먹으며 살면 되지. 호정이는 왜 붙잡고 있었던 거야?"
석호의 말에 체 다 끝나기도 전에 주환이 버럭 소리 질렀다.
"호정이는 내 여자야!"
석호는 예의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호정이는 호정이야. 어느 누구의 소유가 아니야."
주환이 잠시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체념한 듯 말을 내뱉었다.
"유언을 들어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네가 못 잊어 안달 난 호정이한테 안부나 전해라."
주환의 말에 석호가 키득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꼭 지옥에 가서도, 네놈 끝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볼게."
석호의 저주 섞인 말에도 주환은 끄떡없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어 옆에 서 있는 젊은 남자에게 짧게 고개짓을 한번 하자, 젊은 남자는 팔꿈치 길이 정도 되는 칼을 들고 석호에게 다가갔다.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소리도 없이 빠르게 그가 들고 있는 칼이 석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석호는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는, 이내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젊은 남자는 칼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고는 익숙한 듯, 등 뒤에 메고 있던 칼집에 칼을 넣었다.
주환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의 곁에 계속 서 있던 한 여인은 그가 비에 맞지 않도록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반대쪽 어깨는 빗물에 속절없이 젖어들고 있었다.
"시신은...?"
그녀의 물음에 주환이 그녀를 힐끔 보고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뭔 시신? 그냥 내버려 두면 경찰들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을."
"경찰들이 조사하게 내버려 둘 셈이야?"
그녀의 되물음에, 주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래? 우리가 하는 일이 이런 일인데, 뭘 걱정해? 내비둬, 들개들한테 뜯어 먹히다가 발견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어 가차없이 몸을 돌려 차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외쳤다.
"가자, 키스케. 이애니, 이코오~!"
주환의 외침에, 석호의 시신 옆에 서 있던 키스케가 미련 없이 주환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주환이 비에 맞을까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그녀만이, 죽어있는 석호의 시신을 연달아 돌아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떠나가고 난 뒤, 아니 조금은 더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석호의 뒤쪽에 있던 차량 뒷좌석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한 소년이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은 빗물에 섞여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소년의 그런 얼굴을 보아줄 이가 이곳에는 없었다.
"아빠!"
소년은 애타는 목소리로 쓰러진 석호를 향해 달려갔다.
이미 숨이 끊어진 석호의 시신을 부여잡고, 아이는 하염없이 울며 아빠를 불렀다.
"아빠아...."
잿빛 하늘이 쏟아붓는 빗소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마저 덮어버리고 있었다.
***
희멀건한 피부에 동그랗고 큰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그를 보며, 한참을 버텼던 그녀의 시선은 끝내 다른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왜 이러실까? 다 아는 사이끼리."
그는 앞쪽으로 잔뜩 수그린 체 그녀에게 끼 부리듯 간사하게 애교를 부렸다.
원체 얼굴이 준수한 편이라, 대체로 여자들은 그에게 호의적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그의 그러한 태도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봐요, 수호 씨.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요."
"아니 이게 어떻게 다른 겁니까? 정상적으로 잘 동작하고, 명세에 있는 그대로 다 구현됐지 않습니까?"
따져 묻는 게 따져 묻는 것이 아니다.
교묘하게 애교를 부리는 듯한 그의 어투와 행동에, 그녀는 심히 불편한 표정으로 몸을 최대한 뒤로 뺐다.
"자꾸 이런 식으로 일 해오면 곤란해요. 명시가 안되어 있어도, 이 정도는 당연하게 해와야죠."
그녀의 말에 수호는 그제야 몸을 제대로 일으켜 세웠다.
"아~ 실장님, 우리가 일 원데이 투데이 하는 것도 아니고, 명세에도 없는 일을 어떤 프로그래머가 합니까?"
"그래도 그렇지. 아니..."
그녀가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수호가 손을 내밀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에이! 명세를 기준으로 가격을 산정하는데, 명세에 없는 일을 어떻게 합니까? 다 필요 없고. 일 더 시키려면 돈을 더 주시든가. 아니면 나 바로 공정거래위원회로 전화 겁니다, 진짜?"
수호의 저런 협박 아닌 협박을 꽤 오래 보아온 조실장이다.
"클라이언트한테 전달은 해주겠지만, 결과는 너무 뻔하지 않나? 수호 씨나 우리나 클라이언트한테 잘못 보여서 좋을 거 없는 거 아냐? 어차피 하게 될 거 좀 해줘. 제대로 안 챙긴 우리 쪽 잘못도 있지만..."
조실장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향하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여 버렸다.
조실장은 다시 시선을 수호에게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는 해줄 거라는, 서로의 신뢰가 있는 거 아니었나? 그 정도 신뢰도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수호 씨한테 일을 맡겨? 요즘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신뢰 없는 사람한테는 일 못 맡기지."
조실장의 말에 수호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하~ 신뢰요? 와~ 날 정말, 그 정도로 밖에 못 본 겁니까? 아니, 내가 신뢰 빼면 시첸데...."
"그래, 신뢰 빼면 시체지. 우리 임수호 님. 그러니까 우리 신뢰관계 깨지지 않게, 마무리 잘 좀 부탁해요?"
수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조실장을 응시하다가, 그녀 앞에 놓아둔 서류 봉투를 낚아채듯 들었다.
"진~짜 사람들이 알아야 돼. 이거 이거, 정말 사람 일 이렇게 시키는 거 아닙니다."
조실장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수호의 비아냥을 받아쳤다.
"일 끝나면 바로 프로젝트 하나 할 수 있어? 3천 짜린데, 3천 치곤, 별거 없어."
막 나가려던 수호가 그대로 몸을 의자에 뉘이듯이 앉으며 싱긋 웃는 얼굴로 능글능글거렸다.
"에이, 누님, 실장님, 우리 누님은 어떻게 나이를 안 먹어? 4년 전이랑 바뀐 게 하나도 없네? 아니, 오히려 젊어진 거 같은데?"
옆에서 젊은 여자가 풉하고 웃는소리에 조실장이 싸늘하게 흘겨보자, 그녀는 애써 표정을 고치며 웃음을 삼켰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프로젝트 마무리만 잘해와. 바로 던져줄 테니까."
수호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두 손가락으로 거수경례를 해 보였다.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신속하게 해결해 놓고 오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수호가 후다닥 밖으로 나가자, 남은 두 사람은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꼭 아이 같아요. 천진난만하달까?"
젊은 여자의 말에, 실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홍 매니저님."
젊은 여자는 웃음을 그치고 사색이 된 표정으로 조실장을 쳐다보았다. 조실장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매니저님의 잘못을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시... 실장님..."
한편, 밖으로 나온 수호는 막상 나와서는 투덜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여튼, 저러니까 저 나이 먹도록 결혼을 못했지. 아 진짜, 돌겠네. 이거 마무리를 어떻게 한다?"
수호는 나오는 내내 궁시렁궁시렁 거리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여튼 어떻게든 돈 쪼금 주고 일 더 시켜먹으려고. 인간들이 왜 저러는지 몰라."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 버튼을 누르자, 멀찍이 서 있는 차 한 대가 '철컥'소리를 내며 잠금장치를 풀었다.
수호의 궁시렁거림은 차에 도착할때까지 그치지않고 계속 이어졌다.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자, 차는 거친 엔진 소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차에 있던 작은 액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자, 수호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숙여 떨어진 액자를 집어 들었다.
"갑자기 이게 왜 떨어져, 재수 없게."
수호는 투덜대며 액자를 다시 차량 대시보드 위에다가 붙여 놓고는 운전을 위해 앞을 보는 순간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악! 뭐야?"
깜짝 놀란 것도 잠시, 그는 차 앞에 서 있는 조그만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뭐야? 씨... 귀신인 줄 알았네?"
수호는 차문 유리창을 밑으로 내려 바깥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이봐요, 차 나가요."
그러자 차를 가로막고 서 있던 여자는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는 수호 앞으로 다가왔다.
"같이 갑시다."
너무나 태연히,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를 보며, 수호가 눈을 껌뻑거렸다.
"누구... 신데요?"
"그건 가면서 얘기하고."
그녀의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수호는 기가 차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니 이보세요, 지금 뭐 헌팅하시는 겁니까? 제가 키가 있어서, 키 작은 여자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수호의 타박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 앞을 돌아 보조석 쪽으로 걸어왔다.
"어... 어?"
수호는 당황스러움에 잠시 굳어있다가 부랴부랴 차문을 잠그려 했지만, 그녀가 한발 더 빨랐다.
차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보조석에 올라탄 그녀를 보며 수호는 이런 미친여자가 다있어? 하는 표정으로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 뭐예요? 지금?"
그녀는 태연하게 말하며 빨리 가자는 듯 앞을 향해 턱짓을 했다.
"뭐... 이런 걸 필연이라고 하죠. 갑시다. 출발."
"어딜요?"
"어디긴? 집에 안 가요?"
"우리 집에 당신이 왜 가요?"
"일단 가서 얘기하자니까."
"가서 뭘 얘기해요?"
"아~ 거, 사내자식이 뭐가 그렇게 겁이 많아? 누가 잡아먹어?"
"그쪽이 잡아먹을 거 같은데요?"
"안 잡아먹어."
"진짜 누구신데 이러세요?"
"가.면.서. 얘기한다고, 가면서. 일단 가자고."
"아... 미치겠네."
생긴건 멀쩡한데...또라이 인가?쯧쯧...라며 중얼거리던 수호는 제대로 미쳤네..제대로 미쳤어....라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민스런 얼굴로 그녀를 힐끔 한번 쳐다보고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엑셀에 발을 올렸다.
아직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