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1
강녕전의 창 너머에서 은은한 빛이 안을 비추고 있는 가운데, 세자가 입구 쪽 가까이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앉아있는 세자의 몇 걸음 앞에는 임금이 세자에게 등을 보인 체 뒷짐지고 서 있었다.
세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 맺힌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 억울하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임금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임금이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그날의 일을, 소상히 고하라."
세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왜구들의 수가 비록 500 이라고는 하나, 이미 지방군이 패하였을 만큼 잘 훈련된 병사들이라 들었습니다. 또한 도총관의 말에 의하면 백병전에 능하여 좁은 길목에서 싸우면 설령 이긴다 한들 그 피해가 클 것이라 하였지요. 하여, 소자는 넓은 곳에서 싸우되, 우리가 넓은 곳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면 저들이 그냥 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세자가 이야기하는 동안, 임금은 여전히 등을 보인 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소자는, 넓은 곳으로 저들을 유인할 방법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좁은 곳에서 소수의 병력만으로 저들과 싸우다, 넓은 곳으로 패하듯 물러나면 필경 따라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임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른 부관을 시키려 했으나, 도총관은 자신이 직접 할 것을 자처했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고, 다름 아닌 도총관이었기에, 저는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약속된 장소에서 병사들을 숨기고 때를 기다렸으나, 도총관은 오지 않았습니다. 부관을 시켜 확인했을 땐, 이미 도총관이 죽은 다음이었습니다."
"왜구들은?"
"제가 도총관 곁으로 다가갈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으나,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나 저를 위협하였습니다."
그때 임금이 몸을 돌려 세자를 바라보았다.
"500명이... 갑자기?"
세자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이제 막 정리하여 상소를 올리려 하였습니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도총관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모든 진상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임금은 간청하는 세자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이내 눈을 뜬 임금은, 마치 넋두리를 하듯 이야기했다.
"도총관은.... 청렴하고 올곧기가 그지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잠들어 있는 과인의 앞에 피 묻은 모습으로 나타나 억울하다 이야기하였을 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세자는 당장이라도 항변하고 싶었으나, 임금이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세자가 자신을 죽게 만들었다, 너무 억울하다, 그리 이야기할 때만 해도 내 너를 어찌해야 하나 심히 우려스러웠다. 허나..."
임금은 잠시 말을 끊고 예의 긴 한숨을 습관처럼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도총관은,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한들, 내게 와서 억울하다 말할 위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조선제일검인데 어찌 왜구 따위에게 죽겠냐 물었지. 허나, 살아생전에 도총관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조선제일검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임금의 눈빛이 처음으로 반짝거리며 은은한 빛을 내는 것만 같았다.
"그 도총관은... 가짜라는 것이다."
세자는 다행스럽다는 표정으로 임금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보셨습니다, 전하. 그것은 가짜이옵니다. 살아있는 혹은 죽은 이의 몸에 기생령이라 불리는 귀신을 불어넣어, 마치 그 사람인양 행세하는 주술이옵니다."
세자의 대답에 임금의 표정이 황망하게 변했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인양 행세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임금은 잠시 말없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다가 다시 세자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너는 어찌하는 것이 좋을 듯싶으냐?"
"전하, 주상전하를 능멸하고 충신을 해한, 흉악하기 그지없는 자들의 뒤에는 천무방과 천태호란 자가 있사옵고, 그들 뒤에는 좌상대감이 있사옵니다. 추상같은 명으로 천무방을 잡아들여 능지처참하시옵소서, 천태호를 잡으면 좌상도 잡을 수 있사옵고..."
잠시 망설이던 세자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어마마마의 억울함도 풀어드릴 수 있사옵니다."
임금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세자는 임금을 바라보며 슬픔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마마마께서도, 결국 그 기생령에 당하신 것이옵니다. 저를 죽이려 했던 자는 제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임금은 세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금니를 깨물듯 힘을 주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내려 노력했다.
그 역시 중전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진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짙은 슬픔이 밀려들었다.
"허나... 좌상은 대소 신료들을 장악하고, 대부분의 병권을 가지고 있다. 내게 있는 것은 도총관을 잃어버린 소수의 도총부가 전부이다. 좌상을 위험으로 내몰게 되면, 그땐 그자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지 않으냐?"
"일단 천무방에 대한 추포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리고 대소 신료들을 불러들여 이 일에 대한 의논을 하십시오."
"의논? 그리하면?"
"신하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좌상을 포함한 신료들을 모두 추포 하겠습니다."
임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일이 틀어지면... 너와 나는, 죽음을 면키 힘들 것이다."
"이미 서로의 목숨을 건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치지 않는다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결국 저들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도총관마저 죽은 지금, 저들은 더욱 서슴없이 파렴치한 짓을 해올 것이 자명합니다."
임금은 다시 지긋이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말이 없던 임금은 눈을 뜨며 결심한 듯 이야기했다.
"금일 부로 임수현을 도총부 도총관에 명한다. 더불어 좌포청과 우포청의 통솔권을 명하니, 당장 천무방을 추포 하라. 또한 현 시간부로 세자를 판의금부사에 명한다."
***
기분 좋은 얼굴로 좌상이 뒷짐을 쥔 체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연이어 실실 웃음을 지으며 거닐고 있을 무렵, 멀리서 좌상을 보고 인영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십니까?"
인영의 물음에 좌상이 그녀를 돌아보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작금에 돌아가는 세상이 재밌어서 그렇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으십니까?"
"정치란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느냐? 그래, 마침 잘 왔다. 사윗감은 정했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인영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저 아버지께서 정해 주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세자는 어떠하냐?"
인영이 놀란 얼굴로 좌상을 바라보았다.
"하오나, 세자는..."
인영이 말끝을 흐리니, 그런 인영을 보며 좌상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둘 다 죽은 목숨이니 딱 제 베필이렸다. 흐흐'
좌상이 그러한 생각을 하며 히죽거리듯 웃고 있는데, 돌연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와 인사를 하며 말했다.
"대감, 큰 일입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전 이조판서이자, 현재 예조를 맡고 있는 고숭렴 대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좌상이 의아한 듯 묻자, 고숭렴이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주상이... 주상이 세자를 판의금부사로 명하였고, 세자는 곧바로 동지사 윤하령을 잡아 하옥시켰습니다."
좌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윤하령이라면..."
"예, 대사헌의 자식 입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도총부와 포도청을 움직여 천무방이라고는 집단에 대한 추포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좌상의 눈이 희번뜩 거렸다.
"뭐라? 추포령?"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주상께서 대소 신료들의 입궐을 명하였다 합니다. 어서 가시지요. 당장 가서 이 일을 따져..."
그가 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좌상은 그를 지나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좌, 좌상..."
고대감이 헐레벌떡 뒤따라 달려갔으나, 그런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 좌상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이 빌어먹을 임금이 미쳐 버린 게로구나.'
좌상이 궁시렁거리며 씩씩 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주동환이 좌상을 보며 인사를 올렸고 좌상은 발걸음을 멈춰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들었느냐?"
"예."
"이게 네놈이 원하던 그림이냐?"
"아니옵니다."
"이제 다 필요 없으니, 내가 알아서 하겠다."
좌상이 그를 지나쳐 걸어가려하자, 주동환이 비켜서며 말했다.
"입궐해서는 아니 됩니다."
멈춰 선 좌상이 그를 돌아보는 사이, 뒤따라온 고숭렴이 좌상의 뒤에서 어정쩡하게 눈치를 보며 섰다.
주동환은 그를 보며 인사를 올린 뒤, 다시 좌상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는 세자의 계책입니다. 입궐하면, 추포 되실 것이옵니다."
좌상은 물론 고숭렴도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추포되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좌상이 묻는 말에 주동환은 그를 보며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세자도 이제 물러설 곳이 없을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이미 서로의 칼을 빼들었으니, 무리를 해서라도 베려고 들 터, 입궐해서는 안됩니다. 병환을 핑계로 입궐치 마시옵소서."
고숭렴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그럼 나도 가면 안되겠구만."
그러자 주동환이 그를 보며 말했다.
"세자의 표적은 좌상대감이십니다. 좌상대감만 입궐치 않는다면, 무리하여 신료들을 추포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했다가는 좌상대감에게 명분만 주는 꼴임을, 그도 잘 알 것입니다."
고대감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어찌하란 말이냐? 이대로 손 놓고 당하란 말이냐? 천무방에 대한 추포령이 내려졌다."
좌상이 따져 묻는 듯한 말에, 주동환은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뿐입니다. 천무방의 어느 한 사람, 잡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모두 본원으로 대피시켰으며, 저들은 우리의 본원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그저 이대로 가만히 있자고?"
"오늘... 다른 신료분들이 입궐하여, 세자를 판의금부사로 명한 것에 대한 철회를 요구하게 하십시요. 더불어 천무방에 대한 추포령에 대해서도 따져야 할 것입니다. 그에 머물지 말고, 홍여립의 죽음에 대한 것을 따져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어느 세월에 궁궐을 장악한단 말이냐?"
좌상이 버럭 소리치자, 주동환은 옆에서 듣고 있는 고숭렴의 눈치를 살폈다.
고대감은 멋쩍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피며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말씀을 살펴하십시오."
주동환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일단 제 말대로 하시지요. 제가 다시 살펴 적당한 계책을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좌상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필요 없다. 이제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 말을 남기고는 좌상이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자, 주동환은 한숨을 내쉬며 그런 좌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숭렴에게 다가가 말했다.
"대감께서는 좌상대감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주동환의 물음에 고숭렴이 살짝 놀란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내, 내가?"
"예.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세자를 판의금부사로 명한 것과 애꿎은 천무방에 대한 추포령으로 세자의 죄를 덮으려 한 점을 따져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아아... 그, 그래. 알겠네."
"예. 그럼..."
주동환이 고개 숙여 인사하니, 고숭렴이 후다닥 궁궐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앉아있는 세자의 몇 걸음 앞에는 임금이 세자에게 등을 보인 체 뒷짐지고 서 있었다.
세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 맺힌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 억울하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임금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임금이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그날의 일을, 소상히 고하라."
세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왜구들의 수가 비록 500 이라고는 하나, 이미 지방군이 패하였을 만큼 잘 훈련된 병사들이라 들었습니다. 또한 도총관의 말에 의하면 백병전에 능하여 좁은 길목에서 싸우면 설령 이긴다 한들 그 피해가 클 것이라 하였지요. 하여, 소자는 넓은 곳에서 싸우되, 우리가 넓은 곳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면 저들이 그냥 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세자가 이야기하는 동안, 임금은 여전히 등을 보인 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소자는, 넓은 곳으로 저들을 유인할 방법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좁은 곳에서 소수의 병력만으로 저들과 싸우다, 넓은 곳으로 패하듯 물러나면 필경 따라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임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른 부관을 시키려 했으나, 도총관은 자신이 직접 할 것을 자처했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고, 다름 아닌 도총관이었기에, 저는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약속된 장소에서 병사들을 숨기고 때를 기다렸으나, 도총관은 오지 않았습니다. 부관을 시켜 확인했을 땐, 이미 도총관이 죽은 다음이었습니다."
"왜구들은?"
"제가 도총관 곁으로 다가갈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으나,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나 저를 위협하였습니다."
그때 임금이 몸을 돌려 세자를 바라보았다.
"500명이... 갑자기?"
세자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이제 막 정리하여 상소를 올리려 하였습니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도총관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모든 진상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임금은 간청하는 세자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이내 눈을 뜬 임금은, 마치 넋두리를 하듯 이야기했다.
"도총관은.... 청렴하고 올곧기가 그지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잠들어 있는 과인의 앞에 피 묻은 모습으로 나타나 억울하다 이야기하였을 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세자는 당장이라도 항변하고 싶었으나, 임금이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세자가 자신을 죽게 만들었다, 너무 억울하다, 그리 이야기할 때만 해도 내 너를 어찌해야 하나 심히 우려스러웠다. 허나..."
임금은 잠시 말을 끊고 예의 긴 한숨을 습관처럼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도총관은,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한들, 내게 와서 억울하다 말할 위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조선제일검인데 어찌 왜구 따위에게 죽겠냐 물었지. 허나, 살아생전에 도총관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조선제일검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임금의 눈빛이 처음으로 반짝거리며 은은한 빛을 내는 것만 같았다.
"그 도총관은... 가짜라는 것이다."
세자는 다행스럽다는 표정으로 임금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보셨습니다, 전하. 그것은 가짜이옵니다. 살아있는 혹은 죽은 이의 몸에 기생령이라 불리는 귀신을 불어넣어, 마치 그 사람인양 행세하는 주술이옵니다."
세자의 대답에 임금의 표정이 황망하게 변했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인양 행세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임금은 잠시 말없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다가 다시 세자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너는 어찌하는 것이 좋을 듯싶으냐?"
"전하, 주상전하를 능멸하고 충신을 해한, 흉악하기 그지없는 자들의 뒤에는 천무방과 천태호란 자가 있사옵고, 그들 뒤에는 좌상대감이 있사옵니다. 추상같은 명으로 천무방을 잡아들여 능지처참하시옵소서, 천태호를 잡으면 좌상도 잡을 수 있사옵고..."
잠시 망설이던 세자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어마마마의 억울함도 풀어드릴 수 있사옵니다."
임금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세자는 임금을 바라보며 슬픔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마마마께서도, 결국 그 기생령에 당하신 것이옵니다. 저를 죽이려 했던 자는 제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임금은 세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금니를 깨물듯 힘을 주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내려 노력했다.
그 역시 중전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진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짙은 슬픔이 밀려들었다.
"허나... 좌상은 대소 신료들을 장악하고, 대부분의 병권을 가지고 있다. 내게 있는 것은 도총관을 잃어버린 소수의 도총부가 전부이다. 좌상을 위험으로 내몰게 되면, 그땐 그자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지 않으냐?"
"일단 천무방에 대한 추포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리고 대소 신료들을 불러들여 이 일에 대한 의논을 하십시오."
"의논? 그리하면?"
"신하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좌상을 포함한 신료들을 모두 추포 하겠습니다."
임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일이 틀어지면... 너와 나는, 죽음을 면키 힘들 것이다."
"이미 서로의 목숨을 건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치지 않는다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결국 저들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도총관마저 죽은 지금, 저들은 더욱 서슴없이 파렴치한 짓을 해올 것이 자명합니다."
임금은 다시 지긋이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말이 없던 임금은 눈을 뜨며 결심한 듯 이야기했다.
"금일 부로 임수현을 도총부 도총관에 명한다. 더불어 좌포청과 우포청의 통솔권을 명하니, 당장 천무방을 추포 하라. 또한 현 시간부로 세자를 판의금부사에 명한다."
***
기분 좋은 얼굴로 좌상이 뒷짐을 쥔 체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연이어 실실 웃음을 지으며 거닐고 있을 무렵, 멀리서 좌상을 보고 인영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십니까?"
인영의 물음에 좌상이 그녀를 돌아보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작금에 돌아가는 세상이 재밌어서 그렇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으십니까?"
"정치란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느냐? 그래, 마침 잘 왔다. 사윗감은 정했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인영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저 아버지께서 정해 주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세자는 어떠하냐?"
인영이 놀란 얼굴로 좌상을 바라보았다.
"하오나, 세자는..."
인영이 말끝을 흐리니, 그런 인영을 보며 좌상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둘 다 죽은 목숨이니 딱 제 베필이렸다. 흐흐'
좌상이 그러한 생각을 하며 히죽거리듯 웃고 있는데, 돌연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와 인사를 하며 말했다.
"대감, 큰 일입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전 이조판서이자, 현재 예조를 맡고 있는 고숭렴 대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좌상이 의아한 듯 묻자, 고숭렴이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주상이... 주상이 세자를 판의금부사로 명하였고, 세자는 곧바로 동지사 윤하령을 잡아 하옥시켰습니다."
좌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윤하령이라면..."
"예, 대사헌의 자식 입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도총부와 포도청을 움직여 천무방이라고는 집단에 대한 추포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좌상의 눈이 희번뜩 거렸다.
"뭐라? 추포령?"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주상께서 대소 신료들의 입궐을 명하였다 합니다. 어서 가시지요. 당장 가서 이 일을 따져..."
그가 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좌상은 그를 지나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좌, 좌상..."
고대감이 헐레벌떡 뒤따라 달려갔으나, 그런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 좌상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이 빌어먹을 임금이 미쳐 버린 게로구나.'
좌상이 궁시렁거리며 씩씩 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주동환이 좌상을 보며 인사를 올렸고 좌상은 발걸음을 멈춰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들었느냐?"
"예."
"이게 네놈이 원하던 그림이냐?"
"아니옵니다."
"이제 다 필요 없으니, 내가 알아서 하겠다."
좌상이 그를 지나쳐 걸어가려하자, 주동환이 비켜서며 말했다.
"입궐해서는 아니 됩니다."
멈춰 선 좌상이 그를 돌아보는 사이, 뒤따라온 고숭렴이 좌상의 뒤에서 어정쩡하게 눈치를 보며 섰다.
주동환은 그를 보며 인사를 올린 뒤, 다시 좌상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는 세자의 계책입니다. 입궐하면, 추포 되실 것이옵니다."
좌상은 물론 고숭렴도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추포되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좌상이 묻는 말에 주동환은 그를 보며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세자도 이제 물러설 곳이 없을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이미 서로의 칼을 빼들었으니, 무리를 해서라도 베려고 들 터, 입궐해서는 안됩니다. 병환을 핑계로 입궐치 마시옵소서."
고숭렴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그럼 나도 가면 안되겠구만."
그러자 주동환이 그를 보며 말했다.
"세자의 표적은 좌상대감이십니다. 좌상대감만 입궐치 않는다면, 무리하여 신료들을 추포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했다가는 좌상대감에게 명분만 주는 꼴임을, 그도 잘 알 것입니다."
고대감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어찌하란 말이냐? 이대로 손 놓고 당하란 말이냐? 천무방에 대한 추포령이 내려졌다."
좌상이 따져 묻는 듯한 말에, 주동환은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뿐입니다. 천무방의 어느 한 사람, 잡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모두 본원으로 대피시켰으며, 저들은 우리의 본원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그저 이대로 가만히 있자고?"
"오늘... 다른 신료분들이 입궐하여, 세자를 판의금부사로 명한 것에 대한 철회를 요구하게 하십시요. 더불어 천무방에 대한 추포령에 대해서도 따져야 할 것입니다. 그에 머물지 말고, 홍여립의 죽음에 대한 것을 따져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어느 세월에 궁궐을 장악한단 말이냐?"
좌상이 버럭 소리치자, 주동환은 옆에서 듣고 있는 고숭렴의 눈치를 살폈다.
고대감은 멋쩍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피며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말씀을 살펴하십시오."
주동환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일단 제 말대로 하시지요. 제가 다시 살펴 적당한 계책을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좌상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필요 없다. 이제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 말을 남기고는 좌상이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자, 주동환은 한숨을 내쉬며 그런 좌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숭렴에게 다가가 말했다.
"대감께서는 좌상대감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주동환의 물음에 고숭렴이 살짝 놀란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내, 내가?"
"예.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세자를 판의금부사로 명한 것과 애꿎은 천무방에 대한 추포령으로 세자의 죄를 덮으려 한 점을 따져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아아... 그, 그래. 알겠네."
"예. 그럼..."
주동환이 고개 숙여 인사하니, 고숭렴이 후다닥 궁궐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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