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1
검. 검이 내 손에 쥐어져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은 날 죽이기 위해 꽤 진지하다.
뭣 같은 상황이 이해는 안 되지만, 당장 살기 위해 검을 움켜잡을 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검조차 제대로 쥐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몸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제법 근육이 튼실한 팔을 가지고 있었고, 쥐어진 검도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몸안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운은 꽤 거세게 휘몰아치지만, 정작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상대가 덤벼온다.
엄청난 기세에 벼락같이 치고 들어오지만, 이 순간 저자가 공격해 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검의 궤적은 눈으로 좇기 힘들 만큼 빠른 쾌검이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를지 알고 있다면 굳이 보지 않아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미 검이 어디서 어떻게 변화하여 올 것인지 알고 있다.
참 어이없는 상황이다.
이유야 어쨌든 그걸 알고 있기에, 무리 없이 피해내고 또 피해낼 뿐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아주 가벼운 공격만으로 상대의 몸에 가벼운 찰과상을 내는 것도 가능했다.
상처를 입은 상대는 뒤로 물러서서 꽤나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저 뒤에 무수히 많은 이들의 표정 또한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추양검술(鰍洋劍術)을 알고 있는 것이냐?"
상대가 나에게 묻고 있다.
뭐래?
"모른다."
"거짓말. 알지도 못하면서 이토록 절묘하게 피한다는 말이냐?"
그가 이를 갈듯이 말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이 화웅산에 천살검수라는 명칭을 헛으로 받은 것이 아니란 걸 보여주마."
꽤 화가 난 모양이다. 난 별로 관심 없는데...
아.... 진짜.... 한숨이 나온다.
싸우고 싶지 않은데....
이 시점에서 내가 별별 말을 다 해봤지만, 저 인간의 반응은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어차피 뭐라고 말해도 화내며 덤빌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저 화상에게 더 이상 말을 건네는 것조차 피곤하게 느껴졌다.
"갈!"
상대가 분노를 폭발시키며 달려들고 있다.
무섭도록 빠르면서 변화무쌍한 공격이다.
이 시점부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죽는다.
알고도 죽은 적이 몇 번 있었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칼이 측면으로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기 무섭게 얼른 상대 쪽으로 바짝 붙었다.
추양검술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이 시점에 상대와의 간극을 좁히는 것만으로도 꽤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 들어봤는데, 그들은 이러한 수법을 일종에 '보법'이라고 통칭하여 부르는 것 같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는 당황하고 있다.
본능적으로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대가 물러서는 위치를 미리 알고 다시 간극을 좁혀 나가면, 나는 검한번 휘두르지 않고도 아연실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해 두었던 마지막을 위해 검을 치켜들었다.
아주 순식간에 나는 상대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을 수 있었다.
표정이 창백해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찌나 고소한지...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이쯤 하시지?"
태연하게 건네는 나의 말 한마디에,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검을 손에서 놓았다.
둔탁한 금속성 소리가 울려 퍼지고, 뒤쪽에 있던 사내들 표정 역시 상대 못지않게 질려 있었다.
"고...고수다."
고수는 개뿔, 이 인간한테 지금 몇 번을 뒤졌는데...
"내.... 내가 졌소."
상대의 인정에 우쭐한 기분이 든다.
상대를 이긴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던가?
마법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누구를 이겨본 적 없던 내가 이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니, 그야말로 온몸에 희열이 가득해졌다.
역사 속에 전해지는 수많은 악당들이 왜 그토록 양민학살을 하고 다녔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검을 거두고 거만하게 이야기했다.
"착하게 삽시다."
뭐 빈약한 멘트긴 해도,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제압하고 건네는 말이니, 우쭐함이란.... 벌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벌집에서 꿀 빨아먹는 재미랄까.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돌아서서 내 갈길을 가면 그뿐인 것이다.
아차!
생각지 못한 순간이었다.
설마 이 개떡 같은 새끼가 품 안에 단도를 숨겨놓고 있었을 줄이야.
방심한 사이 아랫배를 뚫고 들어온 단도의 고통이 폐부를 찢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으아악!"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런 나의 목을 붙잡은 상대는 나지막하게 말을 건네었다.
"꼴좋다, 이 십새꺄."
이 새끼....
하지만 힘이 없다.
그대로 고꾸라진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아~ 진짜 치사한 새끼. 뒤에서 이딴 짓거리를 하다니.... 그러니까 강도질이나 하며 사는 거야, 이 씹탱구리야.
샹 졸라 억울하네.
***
눈을 번쩍 뜬 그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침 햇살이 오래된 목재 창틀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가운데, 바깥에서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 또.... 이 개새... 치사하게 뒤에서 찔러?"
그는 투덜거리고 있었으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허름한 집은 사람이 사는 흔적이 없는, 산중에 버려진 빈집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켜고는 몸을 좌우로 비틀어 풀었다.
"두고 보자. 이 새끼, 이번엔 꼭 죽여버린다."
다시 한번 결사항쟁을 결심하는 그의 이름은 라마다.
본명 라이텐 마샤크. 분명 얼마 전까지 엘룬 메이지 연합에 속한, 서열상 끝에서도 제일 끝인 끗발 없는 인생에, 재능 없는 마법사였던 그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강력한 힘에 빨려 들어왔고, 눈을 떴을 땐 이 '무림(武林)'이라는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
오자마자 방황하다가 개죽음당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지만, 놀랍게도 죽으면 그날 아침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일은 똑같이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그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계속 의미 없는 죽음이 되풀이되었지만, 이내 깨닫고 그걸 이용하기 시작했다.
워낙 약한 신체를 타고난 데다가, 뛰어난 치유마법사도 치료하지 못한 절름발이였던 그가, 어찌 된 이유인지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부터는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더욱이 얼마 안 되는 그의 마법력이 사라진 대신, '내공'이라고 불리는 힘이 몸안에 생겨났는데, 사실 어떻게 운용하는 것인지 잘 몰라 꽤 애를 먹었다.
시간의 반복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를 살해하지 않았어도 이미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몇 번을 죽었을 것이다.
그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몇 번의 주화입마의 고비를 넘기면서 내공의 운용을 터득한 덕에 다른 사람들이 수십 년 걸려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얻었단 사실을 알지 못할 따름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 그는 무림이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원래 이름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데, 약칭으로 불렀던 라마란 이름은 꽤 잘 알아들은 덕에 아예 그 이름만 사용하는 중이다.
이 세계의 룰을 하나둘씩 깨달아 가며 정처 없이 떠돌다가 밤늦은 시간 빈집에서 잠을 청하고 나왔더니, 난데없이 산적들을 만났다.
이 좀... 아니 조그마한 산이 무슨 화웅산인지 뭔지란다.
그리고 자기들이 이 화웅산을 지배하는 집단, 철귀단(鐵鬼斷)이라든가 뭐라든가.
별로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거기 우두머리인 천살검수인지 뭔지 하는 자가 끝끝내 라마를 죽이려 들고 있었다.
라마가 상대하기에는 제법 고수인지라, 벌써 수십 번을 죽고 다시 깨어난 덕에, 조금씩 그자를 상대하는 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긴 하지만,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으니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라마는 예정된 대로 그들을 만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뭐 다른 길로 안 가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나는 시점만 달라질 뿐, 어디로 가도 결국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수하들을 시켜서 이 빈집 주위를 지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수풀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며, 히죽거리는 웃음으로 말을 건네 오는 것이 첫 번째다.
"여~ 어딜 가..."
"아니 안가, 빨리빨리 나와."
그는 체 말을 다하지도 않았는데, 라마가 말을 잘라 버리자 살짝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아따 거 성질 급한 놈일세, 가진 거..."
"급해, 급해, 가진 거 없어. 빨리 너네 대장 나오라 그래."
또다시 말이 잘리자 그는 꽤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이 씨...."
그는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짝'하는 피부 마찰음이 감칠맛 나게 들려오며, 익숙한 얼굴의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야, 뒤로 빠져있어. 그것도 시비라고 걸고 있냐?"
한심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그가 바로, 철귀단의 두목인 천살검수였다.
뒤통수를 맞은 사내는 머쓱한 표정이 되어 뒷머리를 문지르며 물러서고, 천살검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라마를 응시했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탈탈 털고 가라."
라마는 귀찮다는 듯이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됐고. 빨리빨리 덤벼라. 아주 이제 지긋지긋하다."
라마의 말에 천살검수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너 지금 내가 누군 줄 알고..."
"알아, 알아, 천살검수. 니 뒤에 있는 애들은 철귀단인지 뭔지... 하여튼 아니까, 빨리빨리 덤벼."
천살검수란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자객이냐? 누가 보냈어? 나 죽이면..."
"아냐! 아무도 안 보냈어! 쫌! 그냥 좀 닥치고 덤비면 안 되겠니?"
라마의 재촉에 천살검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새끼가 진짜...."
그리고 천살검수의 공격이 시작했다.
이미 익숙할 데로 익숙한 공격이다.
가볍게 공격을 피하고 예정된 찰과상을 입히자, 천살검수는 표정이 사색이 되어 물러섰고, 뒤에 서 있는 수하들 표정이 굳어졌다.
놀란 천살검수가 라마를 보며 물었다.
"추양검술을..."
"몰라! 몰라, 몰라! 그냥 덤벼!"
라마가 또다시 말을 자르자 화가 난 천살검수가 소리쳤다.
"거짓말. 알지도 못하면서 이토록 절묘하게 피한다는 말이냐?"
"그래! 그래그래, 모르는데 안다. 어쩔래?"
천살검수의 분노가 폭발했다.
"갈!"
잔뜩 긴장한 라마가 천살검수의 공격을 피해 간극을 좁히기 시작하자, 다시금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천살검수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천살검수는 결국 검을 손에서 놓았다.
"고....고수다."
수하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약간 귀찮은 어조로 말했다.
"착하게 살자. 응?"
라마가 뒤돌아 서려는 척하다가 얼른 다시 자리로 돌아와 목을 겨누자, 품 안에서 얼른 단도를 꺼내들던 천살검수가 놀라 황급히 도로 넣었다.
"읍!"
그만 도로 넣던 단도에 자신의 가슴을 살짝 찔리고 말았고, 그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쫌!"
라마가 검을 왼손으로 옮겨 들고 오른손으로 천살검수의 머리를 내리쳤다.
찰진 소리와 함께 손이 천살검수의 머리에 짝짝 달라붙듯이 가격했다.
"쫌! 쫌! 착하게! 착하게!"
말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쫌! 응? 쫌!"
"예예... 죄, 죄송합니다."
어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목을 베고 싶지만, 아직까지 누굴 죽여본 적 없는 라마에게 그 같은 시도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이 새끼한테 죽은 게 몇 번인데....
당장이라도 목을 벨까 싶다가도 선 듯 내키지 않았다.
"진짜, 또 엄한 짓 하면 그땐 진짜 죽는다."
"예.... 예, 형님...."
"내가 왜 니 형님이야? 나보다 열댓 살은 많겠구만."
"예예... 아, 아우님."
"아우는.... 우씨... 진짜..."
"죄, 죄송합니다."
싹싹 비는 천살검수를 한번 더 부라린 눈으로 위협을 가한 뒤,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오듯 걸어가기 시작했다.
괜히 더 말려들기 전에 얼른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이제,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이 세계로 넘어올 때, 꿈속에서 만난 여인이 건넨 말을 되새기며 자신이 갈길을 찾을 뿐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은 날 죽이기 위해 꽤 진지하다.
뭣 같은 상황이 이해는 안 되지만, 당장 살기 위해 검을 움켜잡을 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검조차 제대로 쥐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몸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제법 근육이 튼실한 팔을 가지고 있었고, 쥐어진 검도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몸안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운은 꽤 거세게 휘몰아치지만, 정작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상대가 덤벼온다.
엄청난 기세에 벼락같이 치고 들어오지만, 이 순간 저자가 공격해 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검의 궤적은 눈으로 좇기 힘들 만큼 빠른 쾌검이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를지 알고 있다면 굳이 보지 않아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미 검이 어디서 어떻게 변화하여 올 것인지 알고 있다.
참 어이없는 상황이다.
이유야 어쨌든 그걸 알고 있기에, 무리 없이 피해내고 또 피해낼 뿐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아주 가벼운 공격만으로 상대의 몸에 가벼운 찰과상을 내는 것도 가능했다.
상처를 입은 상대는 뒤로 물러서서 꽤나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저 뒤에 무수히 많은 이들의 표정 또한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추양검술(鰍洋劍術)을 알고 있는 것이냐?"
상대가 나에게 묻고 있다.
뭐래?
"모른다."
"거짓말. 알지도 못하면서 이토록 절묘하게 피한다는 말이냐?"
그가 이를 갈듯이 말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이 화웅산에 천살검수라는 명칭을 헛으로 받은 것이 아니란 걸 보여주마."
꽤 화가 난 모양이다. 난 별로 관심 없는데...
아.... 진짜.... 한숨이 나온다.
싸우고 싶지 않은데....
이 시점에서 내가 별별 말을 다 해봤지만, 저 인간의 반응은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어차피 뭐라고 말해도 화내며 덤빌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저 화상에게 더 이상 말을 건네는 것조차 피곤하게 느껴졌다.
"갈!"
상대가 분노를 폭발시키며 달려들고 있다.
무섭도록 빠르면서 변화무쌍한 공격이다.
이 시점부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죽는다.
알고도 죽은 적이 몇 번 있었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칼이 측면으로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기 무섭게 얼른 상대 쪽으로 바짝 붙었다.
추양검술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이 시점에 상대와의 간극을 좁히는 것만으로도 꽤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 들어봤는데, 그들은 이러한 수법을 일종에 '보법'이라고 통칭하여 부르는 것 같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는 당황하고 있다.
본능적으로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대가 물러서는 위치를 미리 알고 다시 간극을 좁혀 나가면, 나는 검한번 휘두르지 않고도 아연실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해 두었던 마지막을 위해 검을 치켜들었다.
아주 순식간에 나는 상대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을 수 있었다.
표정이 창백해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찌나 고소한지...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이쯤 하시지?"
태연하게 건네는 나의 말 한마디에,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검을 손에서 놓았다.
둔탁한 금속성 소리가 울려 퍼지고, 뒤쪽에 있던 사내들 표정 역시 상대 못지않게 질려 있었다.
"고...고수다."
고수는 개뿔, 이 인간한테 지금 몇 번을 뒤졌는데...
"내.... 내가 졌소."
상대의 인정에 우쭐한 기분이 든다.
상대를 이긴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던가?
마법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누구를 이겨본 적 없던 내가 이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니, 그야말로 온몸에 희열이 가득해졌다.
역사 속에 전해지는 수많은 악당들이 왜 그토록 양민학살을 하고 다녔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검을 거두고 거만하게 이야기했다.
"착하게 삽시다."
뭐 빈약한 멘트긴 해도,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제압하고 건네는 말이니, 우쭐함이란.... 벌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벌집에서 꿀 빨아먹는 재미랄까.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돌아서서 내 갈길을 가면 그뿐인 것이다.
아차!
생각지 못한 순간이었다.
설마 이 개떡 같은 새끼가 품 안에 단도를 숨겨놓고 있었을 줄이야.
방심한 사이 아랫배를 뚫고 들어온 단도의 고통이 폐부를 찢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으아악!"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런 나의 목을 붙잡은 상대는 나지막하게 말을 건네었다.
"꼴좋다, 이 십새꺄."
이 새끼....
하지만 힘이 없다.
그대로 고꾸라진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아~ 진짜 치사한 새끼. 뒤에서 이딴 짓거리를 하다니.... 그러니까 강도질이나 하며 사는 거야, 이 씹탱구리야.
샹 졸라 억울하네.
***
눈을 번쩍 뜬 그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침 햇살이 오래된 목재 창틀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가운데, 바깥에서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 또.... 이 개새... 치사하게 뒤에서 찔러?"
그는 투덜거리고 있었으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허름한 집은 사람이 사는 흔적이 없는, 산중에 버려진 빈집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켜고는 몸을 좌우로 비틀어 풀었다.
"두고 보자. 이 새끼, 이번엔 꼭 죽여버린다."
다시 한번 결사항쟁을 결심하는 그의 이름은 라마다.
본명 라이텐 마샤크. 분명 얼마 전까지 엘룬 메이지 연합에 속한, 서열상 끝에서도 제일 끝인 끗발 없는 인생에, 재능 없는 마법사였던 그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강력한 힘에 빨려 들어왔고, 눈을 떴을 땐 이 '무림(武林)'이라는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
오자마자 방황하다가 개죽음당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지만, 놀랍게도 죽으면 그날 아침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일은 똑같이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그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계속 의미 없는 죽음이 되풀이되었지만, 이내 깨닫고 그걸 이용하기 시작했다.
워낙 약한 신체를 타고난 데다가, 뛰어난 치유마법사도 치료하지 못한 절름발이였던 그가, 어찌 된 이유인지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부터는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더욱이 얼마 안 되는 그의 마법력이 사라진 대신, '내공'이라고 불리는 힘이 몸안에 생겨났는데, 사실 어떻게 운용하는 것인지 잘 몰라 꽤 애를 먹었다.
시간의 반복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를 살해하지 않았어도 이미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몇 번을 죽었을 것이다.
그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몇 번의 주화입마의 고비를 넘기면서 내공의 운용을 터득한 덕에 다른 사람들이 수십 년 걸려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얻었단 사실을 알지 못할 따름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 그는 무림이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원래 이름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데, 약칭으로 불렀던 라마란 이름은 꽤 잘 알아들은 덕에 아예 그 이름만 사용하는 중이다.
이 세계의 룰을 하나둘씩 깨달아 가며 정처 없이 떠돌다가 밤늦은 시간 빈집에서 잠을 청하고 나왔더니, 난데없이 산적들을 만났다.
이 좀... 아니 조그마한 산이 무슨 화웅산인지 뭔지란다.
그리고 자기들이 이 화웅산을 지배하는 집단, 철귀단(鐵鬼斷)이라든가 뭐라든가.
별로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거기 우두머리인 천살검수인지 뭔지 하는 자가 끝끝내 라마를 죽이려 들고 있었다.
라마가 상대하기에는 제법 고수인지라, 벌써 수십 번을 죽고 다시 깨어난 덕에, 조금씩 그자를 상대하는 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긴 하지만,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으니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라마는 예정된 대로 그들을 만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뭐 다른 길로 안 가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나는 시점만 달라질 뿐, 어디로 가도 결국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수하들을 시켜서 이 빈집 주위를 지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수풀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며, 히죽거리는 웃음으로 말을 건네 오는 것이 첫 번째다.
"여~ 어딜 가..."
"아니 안가, 빨리빨리 나와."
그는 체 말을 다하지도 않았는데, 라마가 말을 잘라 버리자 살짝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아따 거 성질 급한 놈일세, 가진 거..."
"급해, 급해, 가진 거 없어. 빨리 너네 대장 나오라 그래."
또다시 말이 잘리자 그는 꽤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이 씨...."
그는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짝'하는 피부 마찰음이 감칠맛 나게 들려오며, 익숙한 얼굴의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야, 뒤로 빠져있어. 그것도 시비라고 걸고 있냐?"
한심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그가 바로, 철귀단의 두목인 천살검수였다.
뒤통수를 맞은 사내는 머쓱한 표정이 되어 뒷머리를 문지르며 물러서고, 천살검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라마를 응시했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탈탈 털고 가라."
라마는 귀찮다는 듯이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됐고. 빨리빨리 덤벼라. 아주 이제 지긋지긋하다."
라마의 말에 천살검수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너 지금 내가 누군 줄 알고..."
"알아, 알아, 천살검수. 니 뒤에 있는 애들은 철귀단인지 뭔지... 하여튼 아니까, 빨리빨리 덤벼."
천살검수란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자객이냐? 누가 보냈어? 나 죽이면..."
"아냐! 아무도 안 보냈어! 쫌! 그냥 좀 닥치고 덤비면 안 되겠니?"
라마의 재촉에 천살검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새끼가 진짜...."
그리고 천살검수의 공격이 시작했다.
이미 익숙할 데로 익숙한 공격이다.
가볍게 공격을 피하고 예정된 찰과상을 입히자, 천살검수는 표정이 사색이 되어 물러섰고, 뒤에 서 있는 수하들 표정이 굳어졌다.
놀란 천살검수가 라마를 보며 물었다.
"추양검술을..."
"몰라! 몰라, 몰라! 그냥 덤벼!"
라마가 또다시 말을 자르자 화가 난 천살검수가 소리쳤다.
"거짓말. 알지도 못하면서 이토록 절묘하게 피한다는 말이냐?"
"그래! 그래그래, 모르는데 안다. 어쩔래?"
천살검수의 분노가 폭발했다.
"갈!"
잔뜩 긴장한 라마가 천살검수의 공격을 피해 간극을 좁히기 시작하자, 다시금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천살검수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천살검수는 결국 검을 손에서 놓았다.
"고....고수다."
수하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약간 귀찮은 어조로 말했다.
"착하게 살자. 응?"
라마가 뒤돌아 서려는 척하다가 얼른 다시 자리로 돌아와 목을 겨누자, 품 안에서 얼른 단도를 꺼내들던 천살검수가 놀라 황급히 도로 넣었다.
"읍!"
그만 도로 넣던 단도에 자신의 가슴을 살짝 찔리고 말았고, 그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쫌!"
라마가 검을 왼손으로 옮겨 들고 오른손으로 천살검수의 머리를 내리쳤다.
찰진 소리와 함께 손이 천살검수의 머리에 짝짝 달라붙듯이 가격했다.
"쫌! 쫌! 착하게! 착하게!"
말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쫌! 응? 쫌!"
"예예... 죄, 죄송합니다."
어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목을 베고 싶지만, 아직까지 누굴 죽여본 적 없는 라마에게 그 같은 시도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이 새끼한테 죽은 게 몇 번인데....
당장이라도 목을 벨까 싶다가도 선 듯 내키지 않았다.
"진짜, 또 엄한 짓 하면 그땐 진짜 죽는다."
"예.... 예, 형님...."
"내가 왜 니 형님이야? 나보다 열댓 살은 많겠구만."
"예예... 아, 아우님."
"아우는.... 우씨... 진짜..."
"죄, 죄송합니다."
싹싹 비는 천살검수를 한번 더 부라린 눈으로 위협을 가한 뒤,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오듯 걸어가기 시작했다.
괜히 더 말려들기 전에 얼른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이제,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이 세계로 넘어올 때, 꿈속에서 만난 여인이 건넨 말을 되새기며 자신이 갈길을 찾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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