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1
어슴츠레한 시야를 밝히려 몇 차례 눈을 깜빡거리자, 제일 먼저 들려온 것은 쩌렁쩌렁한 호령이었다.
"죄인 최준경은 들으라."
머릿속이 몽롱한 것이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대뜸 자신을 죄인이라 부르니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지금이라도 네 죄를 인정한다면, 참수를 면할 것이니..."
참수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좌상이 고개를 홱 드니, 눈 앞에 임금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지체할 것도 없이 납작 엎드려 외쳤다.
"저, 전하, 살려주십시오. 소신은 그저 이용당한 것뿐이옵니다."
그러자 옆에 칼을 들고 선 세자가 큰 소리로 외쳐 물었다.
"네 죄를 인정치 않는단 말이냐?"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죄를 인정하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이옵니다."
벌벌떠는 최준경을 보며 세자가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임금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세자가 좌상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방금... 분명 죄를 인정하셨습니다. 자, 그럼... 그다음을 의논해 볼까요?"
난데없는 상황에 좌상은 얼떨떨했다.
자신이 기생령의 술수에 당한 것은 기억하고, 기생령의 끝은 참수라는 것을 알기에,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세자는 바로 그 점을 노려, 과장된 행동을 한 것이었다.
좌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세자를 한번 올려다 본 후 주위를 살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자신의 뒤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대소 신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가슴이 철렁한 기분과 함께, 자신이 세자에게 당했음을 알았다.
"하마터면 참수를 당할 뻔했으니, 큰~~ 일 날 뻔하셨습니다. 좌상."
세자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좌상이 분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 이제 모든 죄를 인정하셨으니, 더 이상 그 자리에는 못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인 앞에서 죄를 인정하셨으니, 어느 누구도 좌상의 편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목숨을 건지시려거든, 천태호란 자와 천무방에 대해 말씀하시지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그저 이용당한 것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용당한 것은 아니셨지요. 언제부터 어떻게 이용당했는지, 그자의 술수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
눈을 뜬 천태호는, 일어나기 무섭게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마치 포효하는 듯, 괴성을 질러대는 천태호를, 수하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망연자실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주동환은 놀란 표정으로 천태호에게 다가가 그를 만류했다.
"방주님! 방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천태호가 일그러진 얼굴로 주동환을 보더니, 대뜸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네놈 때문이야! 네놈 때문이란 말이다."
목을 조여오는 천태호의 손을 붙잡으며, 주동환이 거칠게 소리쳤다.
"정신 차리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천태호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그 계집이... 그 계집이... 새파랗게 젊은...머리 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년이..."
이어 지친 듯 숨을 헐떡이며 주춤거리자, 주동환이 손을 놓아주었고, 그는 휘청휘청 걸어가 침상 한쪽 언저리에 걸터앉았다.
"주술을 할 줄 아는 계집년이 있었다."
"소연이라는 계집 말입니까?"
"그게 그년이냐? 백무의 제자라는 계집?"
"그렇습니다."
천태호가 허탈한 듯 웃음을 지었다.
"계집년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았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구나."
"어찌 된 일입니까? 소상히 말씀해 주십시오."
"세자의 함정이었다."
"예?"
"세자를 처벌한다는 미명 하에 대신들을 모아놓고, 미리 결계를 쳐놓았더구나."
천태호의 말에 주동환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결계를 쳐 놓았다면, 방주께서 몰랐을 리 없지 않습니까?"
천태호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 몸이 아닌 데다가, 너무 방심한 상태였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결계가 발동된 뒤였다."
"그래서 어찌 된 것입니까?"
"나도 거기까지다. 결계의 힘에 떠밀려, 좌상의 몸을 놓쳐버렸다."
주동환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천태호의 눈이 살기로 번득거렸다.
"알고 있다. 이제 내 방식으로 간다. 궁궐 인근에 금위영 병사 500명이 대기해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궁궐을 친다."
천태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동환을 응시하며 말했다.
"가라. 가서 궁궐 안에 있는 것들은, 싹 다 죽여 버려라."
주동환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천태호는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수하들을 향해 소리쳐 말했다.
"결사의 날이 왔다. 이제...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다."
주동환은 바깥쪽으로 걸음을 향하다,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는 장검을 보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장검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일본도였고, 이곳을 침략했던 왜구들의 수장이 가지고 있던 칼이었다.
주동환은 그 일본도를 등 뒤로 메고, 바깥으로 나와 말위에 올랐다.
그가 말을 재촉해 금위영 병사들이 대기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주동환의 뒤로, 마치 도깨비불 같은 것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금세 늘어나 어느새 오백여 개에 달했고, 그것들 모두 주동환을 따라 같이 달려나갔다.
***
연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성거리다 소연이 오자, 황급히 다가가 물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다 잘된 것입니까?"
연희의 물음에, 소연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다 잘되었습니다."
연희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듯, 소연을 따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좌상이 모든 죄를 인정하여 좌천되었고, 천무방에 대한 추포령이 다시 내려졌습니다. 이제 곧..."
문득 바깥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소연이 말을 멈추었고, 연희 역시 표정이 굳어졌다.
"이것은 비명소리가 아닙니까?"
소연과 연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는 서둘러 소리 난 곳으로 뛰어갔다.
바로 앞에서 세자와 수현이 수하들과 함께 달려가는 모습이 보이자, 두 사람은 더욱 속도를 내어 세자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냐?"
격전이 일어나고 있는 한쪽에 당황해하는 장수를 보며 세자가 묻자, 그가 세자를 보며 대답했다.
"그... 금위영 군사들이 갑자기 공격을 해 왔습니다."
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금위영이? 이제 다 끝난 일이거늘."
이어 세자가 싸우고 있는 병사들 쪽을 향해 소리쳤다.
"금위영은 공격을 멈추어라. 어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리지 않는 듯 계속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보는 순간, 소연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세자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저들은 금위영 병사들이 아닙니다."
세자와 수현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들은.... 저들은 바로 그 왜구들입니다."
그 말에 세자와 수현은 동시에 표정이 무섭게 굳어지며 다시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공격해오는 금위영 병사들에게서는 훈련된 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광기에 미쳐버린 야수처럼 거침없이 공격해 오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저 정도 숫자로는..."
수현이 이상한 듯 중얼거리는 사이, 금위영 병사 하나가 도총부 병사들의 공격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그는 잠시 움찔거리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춘 것이 죽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내 그 옆에 있던 다른 도총부 병사가 부르르 몸을 떠는가 싶더니, 미쳐 날뛰는 금위영 병사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다른 도총부 병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용없습니다."
뒤에서 소연이 소리쳐 말했다.
"육신을 옮겨 다니며 끊임없이 공격해 올 것입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세자가 분한 표정으로 금위영 병사들을 노려보다가 소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녕... 방법이 없는 것이냐?"
소연이 잠시 망설이다가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술사... 천태호를 찾아야 합니다. 그의 몸에 파사신검을 꽃으면... 막을 수 있습니다."
세자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말이냐?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이냐?"
"예, 틀림없습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세자는 계속 물밀듯이 밀려오는 금위영의 병사들을 보면서 결심을 굳힌 듯, 수현에게 말했다.
"금호, 내가 천태호를 찾을 때까지... 주상전하를 지켜주거라."
세자의 말에 수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세자를 보며 말했다.
"하오나, 저하.... 저하가 위험하옵니다."
"지금은 모두가 위험하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이어 소연을 보며 말했다.
"너는 나와 함께 가자."
소연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연희가 얼른 나서며 말했다.
"저도...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잠시 근심스런 얼굴로 망설이자, 소연이 얼른 나서 말했다.
"지금 천태호를 찾기 위해서는 연희 소저가 가진 기운이 필요합니다."
세자는 망설이다, 결심한 듯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서둘러가자."
세자의 뒤를 소연과 연희가 뒤따르자, 이 모습을 본 수현이 다른 부관을 보며 말했다.
"수하 둘을 데리고, 저하를 보필하거라."
그러자 부관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수하 둘과 함께 세자 일행을 뒤따라 갔다.
그러는 사이 금위영 병사들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수현은 한번 심호흡을 한 뒤, 검을 뽑아 들었다.
이어 그가 벼락같이 검을 휘두르자, 마치 몽둥이에 얻어맞은 듯 금위영 병사들이 서너 명씩 훌훌 나가떨어졌다.
죽여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수현은 최대한 시간을 버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임. 수. 현!"
쩌렁쩌렁한 외침 소리와 함께 미쳐 날뛰던 광인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이 양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했고, 그 한가운데를 한 사람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마주하고 선 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서는 이를 응시했다.
"지난번 저승 구경은, 잘하고 왔느냐?"
비아냥 거리듯 묻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주동환이었다.
그리고 수현은 긴장된 표정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죄인 최준경은 들으라."
머릿속이 몽롱한 것이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대뜸 자신을 죄인이라 부르니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지금이라도 네 죄를 인정한다면, 참수를 면할 것이니..."
참수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좌상이 고개를 홱 드니, 눈 앞에 임금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지체할 것도 없이 납작 엎드려 외쳤다.
"저, 전하, 살려주십시오. 소신은 그저 이용당한 것뿐이옵니다."
그러자 옆에 칼을 들고 선 세자가 큰 소리로 외쳐 물었다.
"네 죄를 인정치 않는단 말이냐?"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죄를 인정하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이옵니다."
벌벌떠는 최준경을 보며 세자가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임금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세자가 좌상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방금... 분명 죄를 인정하셨습니다. 자, 그럼... 그다음을 의논해 볼까요?"
난데없는 상황에 좌상은 얼떨떨했다.
자신이 기생령의 술수에 당한 것은 기억하고, 기생령의 끝은 참수라는 것을 알기에,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세자는 바로 그 점을 노려, 과장된 행동을 한 것이었다.
좌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세자를 한번 올려다 본 후 주위를 살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자신의 뒤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대소 신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가슴이 철렁한 기분과 함께, 자신이 세자에게 당했음을 알았다.
"하마터면 참수를 당할 뻔했으니, 큰~~ 일 날 뻔하셨습니다. 좌상."
세자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좌상이 분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 이제 모든 죄를 인정하셨으니, 더 이상 그 자리에는 못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인 앞에서 죄를 인정하셨으니, 어느 누구도 좌상의 편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목숨을 건지시려거든, 천태호란 자와 천무방에 대해 말씀하시지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그저 이용당한 것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용당한 것은 아니셨지요. 언제부터 어떻게 이용당했는지, 그자의 술수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
눈을 뜬 천태호는, 일어나기 무섭게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마치 포효하는 듯, 괴성을 질러대는 천태호를, 수하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망연자실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주동환은 놀란 표정으로 천태호에게 다가가 그를 만류했다.
"방주님! 방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천태호가 일그러진 얼굴로 주동환을 보더니, 대뜸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네놈 때문이야! 네놈 때문이란 말이다."
목을 조여오는 천태호의 손을 붙잡으며, 주동환이 거칠게 소리쳤다.
"정신 차리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천태호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그 계집이... 그 계집이... 새파랗게 젊은...머리 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년이..."
이어 지친 듯 숨을 헐떡이며 주춤거리자, 주동환이 손을 놓아주었고, 그는 휘청휘청 걸어가 침상 한쪽 언저리에 걸터앉았다.
"주술을 할 줄 아는 계집년이 있었다."
"소연이라는 계집 말입니까?"
"그게 그년이냐? 백무의 제자라는 계집?"
"그렇습니다."
천태호가 허탈한 듯 웃음을 지었다.
"계집년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았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구나."
"어찌 된 일입니까? 소상히 말씀해 주십시오."
"세자의 함정이었다."
"예?"
"세자를 처벌한다는 미명 하에 대신들을 모아놓고, 미리 결계를 쳐놓았더구나."
천태호의 말에 주동환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결계를 쳐 놓았다면, 방주께서 몰랐을 리 없지 않습니까?"
천태호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 몸이 아닌 데다가, 너무 방심한 상태였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결계가 발동된 뒤였다."
"그래서 어찌 된 것입니까?"
"나도 거기까지다. 결계의 힘에 떠밀려, 좌상의 몸을 놓쳐버렸다."
주동환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천태호의 눈이 살기로 번득거렸다.
"알고 있다. 이제 내 방식으로 간다. 궁궐 인근에 금위영 병사 500명이 대기해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궁궐을 친다."
천태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동환을 응시하며 말했다.
"가라. 가서 궁궐 안에 있는 것들은, 싹 다 죽여 버려라."
주동환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천태호는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수하들을 향해 소리쳐 말했다.
"결사의 날이 왔다. 이제...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다."
주동환은 바깥쪽으로 걸음을 향하다,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는 장검을 보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장검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일본도였고, 이곳을 침략했던 왜구들의 수장이 가지고 있던 칼이었다.
주동환은 그 일본도를 등 뒤로 메고, 바깥으로 나와 말위에 올랐다.
그가 말을 재촉해 금위영 병사들이 대기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주동환의 뒤로, 마치 도깨비불 같은 것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금세 늘어나 어느새 오백여 개에 달했고, 그것들 모두 주동환을 따라 같이 달려나갔다.
***
연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성거리다 소연이 오자, 황급히 다가가 물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다 잘된 것입니까?"
연희의 물음에, 소연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다 잘되었습니다."
연희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듯, 소연을 따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좌상이 모든 죄를 인정하여 좌천되었고, 천무방에 대한 추포령이 다시 내려졌습니다. 이제 곧..."
문득 바깥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소연이 말을 멈추었고, 연희 역시 표정이 굳어졌다.
"이것은 비명소리가 아닙니까?"
소연과 연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는 서둘러 소리 난 곳으로 뛰어갔다.
바로 앞에서 세자와 수현이 수하들과 함께 달려가는 모습이 보이자, 두 사람은 더욱 속도를 내어 세자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냐?"
격전이 일어나고 있는 한쪽에 당황해하는 장수를 보며 세자가 묻자, 그가 세자를 보며 대답했다.
"그... 금위영 군사들이 갑자기 공격을 해 왔습니다."
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금위영이? 이제 다 끝난 일이거늘."
이어 세자가 싸우고 있는 병사들 쪽을 향해 소리쳤다.
"금위영은 공격을 멈추어라. 어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리지 않는 듯 계속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보는 순간, 소연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세자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저들은 금위영 병사들이 아닙니다."
세자와 수현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들은.... 저들은 바로 그 왜구들입니다."
그 말에 세자와 수현은 동시에 표정이 무섭게 굳어지며 다시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공격해오는 금위영 병사들에게서는 훈련된 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광기에 미쳐버린 야수처럼 거침없이 공격해 오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저 정도 숫자로는..."
수현이 이상한 듯 중얼거리는 사이, 금위영 병사 하나가 도총부 병사들의 공격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그는 잠시 움찔거리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춘 것이 죽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내 그 옆에 있던 다른 도총부 병사가 부르르 몸을 떠는가 싶더니, 미쳐 날뛰는 금위영 병사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다른 도총부 병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용없습니다."
뒤에서 소연이 소리쳐 말했다.
"육신을 옮겨 다니며 끊임없이 공격해 올 것입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세자가 분한 표정으로 금위영 병사들을 노려보다가 소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녕... 방법이 없는 것이냐?"
소연이 잠시 망설이다가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술사... 천태호를 찾아야 합니다. 그의 몸에 파사신검을 꽃으면... 막을 수 있습니다."
세자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말이냐?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이냐?"
"예, 틀림없습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세자는 계속 물밀듯이 밀려오는 금위영의 병사들을 보면서 결심을 굳힌 듯, 수현에게 말했다.
"금호, 내가 천태호를 찾을 때까지... 주상전하를 지켜주거라."
세자의 말에 수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세자를 보며 말했다.
"하오나, 저하.... 저하가 위험하옵니다."
"지금은 모두가 위험하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이어 소연을 보며 말했다.
"너는 나와 함께 가자."
소연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연희가 얼른 나서며 말했다.
"저도...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가 잠시 근심스런 얼굴로 망설이자, 소연이 얼른 나서 말했다.
"지금 천태호를 찾기 위해서는 연희 소저가 가진 기운이 필요합니다."
세자는 망설이다, 결심한 듯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서둘러가자."
세자의 뒤를 소연과 연희가 뒤따르자, 이 모습을 본 수현이 다른 부관을 보며 말했다.
"수하 둘을 데리고, 저하를 보필하거라."
그러자 부관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수하 둘과 함께 세자 일행을 뒤따라 갔다.
그러는 사이 금위영 병사들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수현은 한번 심호흡을 한 뒤, 검을 뽑아 들었다.
이어 그가 벼락같이 검을 휘두르자, 마치 몽둥이에 얻어맞은 듯 금위영 병사들이 서너 명씩 훌훌 나가떨어졌다.
죽여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수현은 최대한 시간을 버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임. 수. 현!"
쩌렁쩌렁한 외침 소리와 함께 미쳐 날뛰던 광인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이 양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했고, 그 한가운데를 한 사람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마주하고 선 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서는 이를 응시했다.
"지난번 저승 구경은, 잘하고 왔느냐?"
비아냥 거리듯 묻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주동환이었다.
그리고 수현은 긴장된 표정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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