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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9.82분

65화 - #3


잔뜩 겁에 질린 체 주위 눈치를 살피고 있던 상궁은, 자신의 눈앞에 세자가 나타나자 기겁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세자는 확연히 달라진 상궁의 태도를 보며,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기억나는 것이 있느냐?"

세자의 질문에, 상궁은 바닥에 코가 닿을 듯 바짝 엎드려 대답했다.

"그...그것이... 제가, 어찌 여기 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허면, 네가 기억나는 마지막이 무엇이냐?"

상궁은 잠시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그게... 아마도... 시장길에 무언가를 살피러... 갔었던 것 같사옵니다. 저, 정확하게는 잘 기억나지 않사옵니다."

"그간 있었던 일이 정녕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냐?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느낌 같은 것도 나지 않더냐?"

상궁은 망설이다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시, 실은... 기억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하나, 제가 마치 아주 긴 꿈을 꾼 듯했습니다."

세자는 눈을 빛내며 몸을 낮춰 상궁을 향해 말했다.

"좀 더 소상히 말해 보거라."

세자의 뒤에 있던 소연과 연희, 그리고 수현도 한 발자국씩 더 다가섰다.

"그... 그게.... 꿈속에서... 제가 하는 말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듯했습니다. 마치... 메아리가 울리듯... 그리고... 저는 이상하게 생긴 곳에 있었습니다. 마치... 마치 무당들이 있는 곳 같았고, 부적들이 많았습니다. 나가려 해도 나갈 수 없었고, 어딘가에서 제 목소리, 그리고 제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다른 목소리만 들려왔습니다. 그... 그것이 꿈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사옵니다."

뒤에 있던 소연이 나서 말했다.

"혼백을 분리시키는 것이 기생령 주술의 바탕인 듯합니다. 혼은 아마도 주술에 의해, 천태호의 주술 방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니 육신과 연결되어, 육신의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세자가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본 뒤, 상궁에게 말을 이었다.

"기억을 잘 더듬어 보거라. 네가 들은 이야기에 어떤 것이 있었느냐? 아니면 그곳에서 본 풍경이나 들은 이야기들을 조금 더 말해볼 수 있겠느냐?"

상궁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저하... 송구하오나, 더 이상은 기억나는 것이 없사옵니다."

세자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되었다. 이제 그만 가서 쉬거라."

"가, 감읍하옵니다. 저하..."

상궁이 병사들의 인솔을 받아 자리를 피하는 사이, 수현이 세자에게 걱정스러운듯 말했다.

"이래서는 도움되는 것이 없는 것 아니옵니까?"

세자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적어도 기생령의 상태가 완전한 무의식은 아니란 것을 알았으니, 소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자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생령의 술수가 풀리는 순간, 참수하여 발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

수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참수일까요? 사약이라든가... 다른 방법도 많을 텐데..."

수현의 물음에 소연이 고민하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마도 그것은 기생령들이 가진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두려움?"

수현이 되묻자 소연이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이미 죽음을 겪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죽을때 고통에 대한 두려움까지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전 상궁에게 빙의되었던 기생령 역시 죽음에는 초연하였어도, 고문에 대해서는 두려워했었습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초연할 수는 있겠지. 어차피 다른 몸으로 옮겨가면 그뿐이니, 그러나 죽는 순간에 자신이 마주하게 될 고통은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기생령이 고통을 느낄 겨를 없이 죽음에 이르는 수법이 필요했겠지."

소연이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이유를 바탕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두 가지 경우에 주술사가 기생령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주술을 사용해 불러들이는 경우, 다른 하나는 참수와 같은 방법으로 육신이 죽음에 이른 경우입니다."

"그래, 허나 주술로 불러들인 경우, 그 육신의 혼령이 돌아가면,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후의 행동에 큰 변화가 생기므로, 참수당할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입막음을 한 것이야."

세자는 어머니 생각에 울분이 치솟았다.

꽉 쥐어진 주먹은 피가 통하지 않아 붉게 물들었고, 속상해하는 세자를 보면서 연희는 조심스럽게 그런 세자의 손을 감싸 쥐었다.

세자는 슬며시 잡아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자 흠칫 놀라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위로를 담은 눈빛으로 자신을 곧게 바라보는 연희의 얼굴에 격분했던 감정들이 조금씩 사그러 들기 시작했다.

반면 소연은 내심 크게 놀라고 말았다.

신분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연희가 서슴없이 세자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소연이 수현의 눈치를 살피니, 수현은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한 듯 태연했다.

소연은 다시 세자와 연희를 바라보았다.

손을 마주잡고 서로를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마주 보고있는 그들을 보며, 소연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연희에게 가지고 있었던 의심이 이전부터 조금씩 씻겨 내려가고 있었음을, 그리고 조금은 그녀에게 정이 들어버렸음을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소연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



궁궐안에서 거창한 군례가 끝나자, 세자를 위시한 홍여립이 선두에 서서 말을 타고 출정을 위해 나섰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중앙군 1만은, 나오는 세자와 홍여립을 보고는, 깃발을 든 이들 중심으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구경하고자 적지않은 인파들이 몰려있었다.

연희는 그들 사이에서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말위에 앉아있는 세자를 걱정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의 눈치만 보던 연희는 후다닥 세자 곁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 있느냐?"

어제밤 늦게까지 서로 이야기하며 미리 인사를 나누었는데 급하게 달려오는 연희를 보자 불안한 마음에 세자가 다급히 물었다.

연희는 고개를 재빨리 젓고는 얼른 무언가를 건네주려 손을 내밀었다.

세자가 받아든 물건은 다름 아닌 파사신검이었다.

"혹시 모르니 가지고 가십시오."

연희의 말에 세자가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연희는 후다닥 다시 인파 속으로 돌아가 버렸다.

세자는 인파 속에서 몸을 숨기고 눈인사를 건네는 연희를 보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파사신검을 품 안에 갈무리하였다.

드디어 1만의 병사가 진격 중인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땅을 울릴 정도였고, 수많은 병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하나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런 세자와 연희를 지켜보는 시선이 하나 더 있었다.

삿갓 아래 얼굴을 가리고 인파 속에 숨어 지켜보는 이는 다름 아닌 주동환이었다.

원래는 세자의 출정식 동태를 살피러 온 것이었으나, 그의 눈에는 오직 연희만 보였다.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연희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주동환은 이내 그녀가 수현과 함께 궁궐 쪽으로 돌아가자, 그 역시 인파 속에 섞여 몸을 돌렸다.

세자가 죽게 되면, 연희는 더 이상 궁궐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좌상의 몸을 장악하고 있는 천태호가, 그녀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천태호는 의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온갖 비밀을 알고 있는 연희를 가만히 내버려 둘리 만무했다.

연희를 안전히 지내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니면, 정말 천태호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일전에 전 예조판서인 홍소찬 대감이 가지고 있는 연희의 봉혼벽륜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궁궐에서 제법 떨어진, 민가들하고도 거리가 있어 인적이 드문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큼지막한 저택이었다.

사람이 기거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보이는 곳으로, 일전에도 천태호를 만난 적 있는 그곳에 이르러, 그는 잠시 멈추어 섰다.

활짝 열려있는 대문 앞에서, 그는 양손을 합장하며 수인을 맺었다.

주술에서 사용되는 수인을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가며 맺더니, 보법으로 방위를 밟아가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놀랍게도 주동환의 눈앞에, 지금까지 폐가 같았던 저택 안 풍경이 바뀌었다.

보이지도 않던 사람 몇몇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호위를 하던 무사들이 주동환을 보자 목례를 해 보였다.

그곳은 천태호가 만들어둔 주술 공간으로, 실제로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인적 드문 폐가와 연결해 둔 것이었다.

주동환은 이미 익숙한 듯 차분한 발걸음으로 제일 깊숙한 곳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앞으로 한 중년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로 주동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기회를 주시오. 실수를 만회할 것이오."

그러나 주동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제신녀의 지위를 박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거라. 방주님의 명에 따라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싸늘하게 답하고는 제 갈 길가는 주동환을, 그녀는 분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따라가며 말했다.

"그 계집 때문이지? 그 계집 때문에 날 이리 박대하는 것이지?"

그러자, 발걸음을 멈춰 선 주동환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눈빛과는 달랐다.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험악한 범의 눈빛처럼,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살벌한 눈이었다.

그런 주동환의 살기에 놀란 제신녀 선화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한 번만 더 연희를 위험에 빠뜨리면, 그땐 네년 영혼까지 내 손으로 직접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살벌한 경고를 한 주동환은 홱하니 돌아서서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고, 제신녀 선화는 그런 주동환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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