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4
한필의 말을 탄 병졸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앞서있던 세자가 말을 멈춰 세우자, 뒤에 있던 홍여립이 손을 들어 보였고, 뒤따르던 병사들은 일제히 멈춰 섰다.
말을 타고 온 병졸은 세자 앞에 이르자 말을 멈춰 세우고, 곧바로 말에서 내려 세자에게 인사를 올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저하, 왜구들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이다경(二茶頃) 정도면 마주할 것입니다." (역자주 : 일다경 = 15분)
뒤쪽에 있던 홍여립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왜구들은 통상 백병전에 출중합니다. 도검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니 이렇듯 좁은 곳에서 싸우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령 우리가 이길 수 있다 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병사들을 뒤로 물려 좀 더 넓은 곳에서 포위 공격함이 좋을 듯합니다."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홍여립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 장수들을 불러 모아 지시를 내렸고, 곧 장수들이 병사들을 인솔하여 뒤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홍여립이 지시를 마치고 세자 곁으로 돌아오자, 세자가 그를 보며 말했다.
"적들도 이미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알고 대비할 것입니다."
"예,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 것입니다. 명예로운 죽음만을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적은 수라지만, 결사항쟁하게 되면 우리 측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니, 예봉을 꺾어야 할 것입니다."
"저하께옵서, 생각이 있으십니까?"
"저들은 백병전에 자신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좁은 곳에서는 우리가 불리하다구요. 저들도 그것을 잘 알 것입니다. 조선군이 백병전에 약하니, 좁은 곳에서 싸울수록 자신들이 유리할 것이라구요. 그러니..."
세자가 주위를 한번 돌아보았다. 산자락을 따라 나있는 길이 제법 넓은 편이나 대규모 병사들이 전투를 치르기에는 턱없이 좁은 길이었다.
"적당한 병사들을 데리고 이것에서 먼저 적과 마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자의 말에 홍여립이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예? 허나 이런 좁은 지역에서는...."
"알고 있습니다.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하고, 바로 밀리는 척 퇴각하시지요."
"유인책을 쓰자는 말씀이시군요."
"예, 그냥 넓은 곳에서 기다리기만 해서야, 저들이라고 마냥 달려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들도 자신들이 어떤 싸움에 유리한지 잘 알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달려들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할 듯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바로 뒤에 넓은 곳이 있으니, 병력들을 에워싸도록 하고, 접근전보다는 때를 맞춰 화살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예, 지시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유인전은 제가 직접 맡도록 하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세자가 걱정스러운 듯 물으니 홍여립이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를 걱정하시는 것이옵니까, 저하?"
그의 되물음에 세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하였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염려 마시옵소서, 저하.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할 것입니다."
"예."
세자가 부관들과 함께 이동하는 병력을 따라 뒤쪽으로 향하니, 홍여립은 일부 병사들을 데리고 그곳에서 대기했다.
"듣거라. 무리하여 싸우지 말고, 적당히 싸우다 퇴각할 것이다. 알겠느냐?"
홍여립이 큰 소리로 외치니, 옆에 있던 부관과 예하 병사들이 일제히 "예"하며 대답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그들 앞에 일련의 왜구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몇 차례 왜구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홍여립은, 그들의 모습이 딱히 새로울 것은 없다곤 하지만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긴 했다.
지금까지 보고에 의하면 적들은 500명 정도 규모로, 왜구 치고는 그 규모가 적지 않았다.
더욱이 잘 훈련된 병사들이라 들었기에, 일사불란하게 다가오는 모습을 예상했었으나, 의외로 제대로 된 대오도 갖추지 않은 체 마치 도적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쯧쯧... 제대로 대오조차 갖추지 못하는 자들 따위에게 지방군이 패했단 말인가?"
홍여립이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더니,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다치거나 죽지 않게 조심히 싸우거라."
홍여립이 소리치니,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고쳐 잡았다.
왜구들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략도, 전술도 없이 그저 개떼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장수도 없이 공격해 오는 것인가?"
의아한 생각에 홍여립이 눈살을 찌푸리던 그 순간, 맨 선두에 선 이들의 모습이 홍여립의 눈에 들어왔다.
"뭣?"
그들은 훈련된 병사들이 아니었다. 아니 마치 산사람 같지가 않았다.
하얗게 동공이 사라져 버린 눈과 야생 짐승처럼 입을 벌리며 달려드는 왜구, 아니 그것들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챈 홍여립이 소리쳤다.
"퇴각하라!"
싸우기도 전에 퇴각하란 소리에 병사들이 어리둥절하는 사이, 왜구들은 순식간에 덮쳐왔다.
제일 앞에서 창을 들고 있던 병사들에 의해 선두에 선 왜구들이 여지없이 창에 찔렸으나, 그들은 고통조차 없는 것 같았다.
창에 찔리거나 말거나 그저 앞으로 달려들려고 발버둥 쳤고, 뒤쪽에 있던 왜구들은 앞에 있는 왜구들을 넘어 끊임없이 앞으로 몰려들었다.
"뭐...뭐야?"
병사들은 그들의 기괴한 모습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광기에 휩싸인 왜구들은 승냥이 처럼 병사들을 덮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모습을, 산 위쪽 언덕배기에서 두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한명은 좌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천태호 였고, 다른 한명은 주동환이었다.
주동환 역시 놀란 표정이었고, 좌상이 된 천태호만이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주동환이 놀란 표정으로 물으니, 천태호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것이 바로 금령제중술, 금지된 술법이다. 원혼을 육신에 묶어 광기와 살육만을 일삼게 만드는 것이지."
주동환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굳어진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허나... 500명이나 되는 왜구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원혼이 된다는 말입니까?"
천태호가 피식 웃으며 주동환을 돌아보았다.
"저들이 이곳에 살고자 왔을 것 같으냐? 아니면, 자신이 원해서 왔을 것 같으냐?"
주동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천태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죽음으로 내몰린 자들이다. 원혼이 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것이 이상한 것이지."
주동환은 다시 아수라장이 된 전장을 바라보았다.
홍여립이 특유의 검술로 그들을 막아내며 병사들의 퇴각을 독려하고 있었다.
"통제는 가능한 것입니까?"
"물론. 그 근간은 기생술이나 언령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육신이 조각나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인근에 죽어있는 아무 몸으로나 다시 옮겨갈 것이다. 끊임없이 죽어도, 500이란 숫자는 줄지 않을 터. 이대로 궁궐까지 가서 왕이고 세자고, 대신이고 모두 죽여 없애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동환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것은 계획과 다르지 않습니까?"
천태호가 주동환을 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넌 니가 내 머리 위에 있는 줄 알지? 결정은 내가 해. 그리고 아직 결정한 거 아니니까 유난 떨지 말고. 니 계획대로 세자랑 홍여립이나 제거해. 나머진 알아서 할 테니까."
주동환은 천태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말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저 밑에서 혼란스럽게 싸우고 있는 홍여립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천태호는 주동환이 내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신도 말위에 올라탄 뒤 어디론가 모습을 감춰 버렸다.
주동환은 빠르게 산길을 내려가, 광인이 된 왜구들을 상대하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병사들을 통솔하는 홍여립에게로 향했다.
주동환은 지척까지 다가가 말에서 내린 뒤, 칼을 뽑아 들고 천천히 홍여립을 향해 나아갔다.
자신의 눈앞에 거치적 거리는 병사들을 단숨에 베어버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홍. 여. 립!"
광란의 아수라장 안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크게 울려 퍼졌고, 홍여립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홍여립이 주동환을 바라보고 두 사람이 서로 마주 하는 순간, 마치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두 사람만 서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누구냐?"
홍여립이 묻는 목소리는, 일반사람이라면 이 광기어린 아수라장 속에서 제대로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공을 연마한 홍여립과 주동환은 특별한 대상의 소리에만 귀 기울일 수 있었다.
홍여립의 질문에 주동환의 눈에도 광기가 어렸으나, 그것은 왜구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조차 광기가 어려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홍여립은 주동환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스승?"
"예, 이놈 표영호 입니다. 스승님."
그 말에 홍여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여, 영호? 네가 영호라고?"
"예. 스승님이 가차없이 내다 버린 바로 그 제자. 영호입니다. 첫 제자이니 자식 같은 제자이니 말 같지 않은 소리는 그렇게 해대시더니, 제자를 버리고 호의호식하니 좋습니까?"
주동환의 비아냥거림에 홍여립의 표정이 굳어졌다.
홍여립의 눈에 주동환의 눈 너머로 영호의 모습이 어른 거리는 것만 같았다.
"난.... 난 널 버린 것이 아니다."
홍여립의 말이 체 다 끝나기도 전에 주동환이 버럭 소리 질렀다.
"닥쳐! 당신은 날 버렸어. 당신을 아버지같이 따랐던 나를, 저잣거리에서 참수되도록 내팽겨 쳤어!"
한이 맺힌 절규와 같은 주동환의 일갈에 홍여립은 가슴이 아파왔다.
그는 아직도 그날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의금부 병사들에게 끌려가다, 그 손을 뿌리치고 달려와 홍여립의 옷자락을 잡고 울던 영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스승님, 스승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제 아버지와는 인연을 끊고 산지 오래입니다. 서자라는 이유로 자식을 내다 버린 사람입니다. 그가 어찌 제 아비일 수 있겠습니까? 스승님을 아버지라 믿고 따랐습니다. 스승님. 제발, 제발 전하께 말씀 올려 주십시오. 스승님."
울며불며 매달리는 영호를 의금부 병사들이 다시금 붙잡아 끌고 갔다.
그렇게 질질 끌려가는 영호의 모습을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홍여립이었다.
임금 앞에 엎드려 간곡히 호소했었다.
"전하, 차라리 소신이 대신 죽겠습니다. 부디... 부디 영호를 살려주십시오."
그런 홍여립을 보며 임금은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지 않느냐? 지금 내겐... 아무런 힘이 없구나."
홍여립은 처음으로 임금 앞에서 통곡하듯 울었다.
임금 역시 충신인 홍여립의 제자를 지켜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눈물 흘렸고, 그 날 영호는 참수당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역모에 가담했다 하여, 삼족을 멸해야 한다는 좌상의 청을 승인했던 날로 돌아가 결정을 번복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것은 불가능했을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일로 제자인 영호를 잃게 된 것은, 임금이나 홍여립이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홍여립으로서는, 마치 자식을 묻듯 그렇게 가슴에 묻었던 영호였다.
그런 영호가, 지금 눈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며 왔다.
"영호야..."
넋을 잃고 바라보는 홍여립을 향해, 주동환의 칼이 움직였다.
그것은 흡사 찰나와도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홍여립의 앞에 선 주동환의 칼에는 진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과 함께 허물어져 내리는 홍여립의 육신은, 아수라장이 된 그곳 한가운데에서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앞서있던 세자가 말을 멈춰 세우자, 뒤에 있던 홍여립이 손을 들어 보였고, 뒤따르던 병사들은 일제히 멈춰 섰다.
말을 타고 온 병졸은 세자 앞에 이르자 말을 멈춰 세우고, 곧바로 말에서 내려 세자에게 인사를 올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저하, 왜구들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이다경(二茶頃) 정도면 마주할 것입니다." (역자주 : 일다경 = 15분)
뒤쪽에 있던 홍여립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왜구들은 통상 백병전에 출중합니다. 도검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니 이렇듯 좁은 곳에서 싸우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령 우리가 이길 수 있다 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병사들을 뒤로 물려 좀 더 넓은 곳에서 포위 공격함이 좋을 듯합니다."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홍여립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 장수들을 불러 모아 지시를 내렸고, 곧 장수들이 병사들을 인솔하여 뒤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홍여립이 지시를 마치고 세자 곁으로 돌아오자, 세자가 그를 보며 말했다.
"적들도 이미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알고 대비할 것입니다."
"예,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 것입니다. 명예로운 죽음만을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적은 수라지만, 결사항쟁하게 되면 우리 측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니, 예봉을 꺾어야 할 것입니다."
"저하께옵서, 생각이 있으십니까?"
"저들은 백병전에 자신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좁은 곳에서는 우리가 불리하다구요. 저들도 그것을 잘 알 것입니다. 조선군이 백병전에 약하니, 좁은 곳에서 싸울수록 자신들이 유리할 것이라구요. 그러니..."
세자가 주위를 한번 돌아보았다. 산자락을 따라 나있는 길이 제법 넓은 편이나 대규모 병사들이 전투를 치르기에는 턱없이 좁은 길이었다.
"적당한 병사들을 데리고 이것에서 먼저 적과 마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자의 말에 홍여립이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예? 허나 이런 좁은 지역에서는...."
"알고 있습니다.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하고, 바로 밀리는 척 퇴각하시지요."
"유인책을 쓰자는 말씀이시군요."
"예, 그냥 넓은 곳에서 기다리기만 해서야, 저들이라고 마냥 달려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들도 자신들이 어떤 싸움에 유리한지 잘 알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달려들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할 듯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바로 뒤에 넓은 곳이 있으니, 병력들을 에워싸도록 하고, 접근전보다는 때를 맞춰 화살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예, 지시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유인전은 제가 직접 맡도록 하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세자가 걱정스러운 듯 물으니 홍여립이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를 걱정하시는 것이옵니까, 저하?"
그의 되물음에 세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하였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염려 마시옵소서, 저하.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할 것입니다."
"예."
세자가 부관들과 함께 이동하는 병력을 따라 뒤쪽으로 향하니, 홍여립은 일부 병사들을 데리고 그곳에서 대기했다.
"듣거라. 무리하여 싸우지 말고, 적당히 싸우다 퇴각할 것이다. 알겠느냐?"
홍여립이 큰 소리로 외치니, 옆에 있던 부관과 예하 병사들이 일제히 "예"하며 대답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그들 앞에 일련의 왜구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몇 차례 왜구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홍여립은, 그들의 모습이 딱히 새로울 것은 없다곤 하지만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긴 했다.
지금까지 보고에 의하면 적들은 500명 정도 규모로, 왜구 치고는 그 규모가 적지 않았다.
더욱이 잘 훈련된 병사들이라 들었기에, 일사불란하게 다가오는 모습을 예상했었으나, 의외로 제대로 된 대오도 갖추지 않은 체 마치 도적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쯧쯧... 제대로 대오조차 갖추지 못하는 자들 따위에게 지방군이 패했단 말인가?"
홍여립이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더니,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다치거나 죽지 않게 조심히 싸우거라."
홍여립이 소리치니,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고쳐 잡았다.
왜구들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략도, 전술도 없이 그저 개떼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장수도 없이 공격해 오는 것인가?"
의아한 생각에 홍여립이 눈살을 찌푸리던 그 순간, 맨 선두에 선 이들의 모습이 홍여립의 눈에 들어왔다.
"뭣?"
그들은 훈련된 병사들이 아니었다. 아니 마치 산사람 같지가 않았다.
하얗게 동공이 사라져 버린 눈과 야생 짐승처럼 입을 벌리며 달려드는 왜구, 아니 그것들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챈 홍여립이 소리쳤다.
"퇴각하라!"
싸우기도 전에 퇴각하란 소리에 병사들이 어리둥절하는 사이, 왜구들은 순식간에 덮쳐왔다.
제일 앞에서 창을 들고 있던 병사들에 의해 선두에 선 왜구들이 여지없이 창에 찔렸으나, 그들은 고통조차 없는 것 같았다.
창에 찔리거나 말거나 그저 앞으로 달려들려고 발버둥 쳤고, 뒤쪽에 있던 왜구들은 앞에 있는 왜구들을 넘어 끊임없이 앞으로 몰려들었다.
"뭐...뭐야?"
병사들은 그들의 기괴한 모습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광기에 휩싸인 왜구들은 승냥이 처럼 병사들을 덮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모습을, 산 위쪽 언덕배기에서 두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한명은 좌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천태호 였고, 다른 한명은 주동환이었다.
주동환 역시 놀란 표정이었고, 좌상이 된 천태호만이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주동환이 놀란 표정으로 물으니, 천태호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것이 바로 금령제중술, 금지된 술법이다. 원혼을 육신에 묶어 광기와 살육만을 일삼게 만드는 것이지."
주동환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굳어진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허나... 500명이나 되는 왜구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원혼이 된다는 말입니까?"
천태호가 피식 웃으며 주동환을 돌아보았다.
"저들이 이곳에 살고자 왔을 것 같으냐? 아니면, 자신이 원해서 왔을 것 같으냐?"
주동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천태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죽음으로 내몰린 자들이다. 원혼이 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것이 이상한 것이지."
주동환은 다시 아수라장이 된 전장을 바라보았다.
홍여립이 특유의 검술로 그들을 막아내며 병사들의 퇴각을 독려하고 있었다.
"통제는 가능한 것입니까?"
"물론. 그 근간은 기생술이나 언령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육신이 조각나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인근에 죽어있는 아무 몸으로나 다시 옮겨갈 것이다. 끊임없이 죽어도, 500이란 숫자는 줄지 않을 터. 이대로 궁궐까지 가서 왕이고 세자고, 대신이고 모두 죽여 없애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동환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것은 계획과 다르지 않습니까?"
천태호가 주동환을 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넌 니가 내 머리 위에 있는 줄 알지? 결정은 내가 해. 그리고 아직 결정한 거 아니니까 유난 떨지 말고. 니 계획대로 세자랑 홍여립이나 제거해. 나머진 알아서 할 테니까."
주동환은 천태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말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저 밑에서 혼란스럽게 싸우고 있는 홍여립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천태호는 주동환이 내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신도 말위에 올라탄 뒤 어디론가 모습을 감춰 버렸다.
주동환은 빠르게 산길을 내려가, 광인이 된 왜구들을 상대하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병사들을 통솔하는 홍여립에게로 향했다.
주동환은 지척까지 다가가 말에서 내린 뒤, 칼을 뽑아 들고 천천히 홍여립을 향해 나아갔다.
자신의 눈앞에 거치적 거리는 병사들을 단숨에 베어버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홍. 여. 립!"
광란의 아수라장 안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크게 울려 퍼졌고, 홍여립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홍여립이 주동환을 바라보고 두 사람이 서로 마주 하는 순간, 마치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두 사람만 서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누구냐?"
홍여립이 묻는 목소리는, 일반사람이라면 이 광기어린 아수라장 속에서 제대로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공을 연마한 홍여립과 주동환은 특별한 대상의 소리에만 귀 기울일 수 있었다.
홍여립의 질문에 주동환의 눈에도 광기가 어렸으나, 그것은 왜구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조차 광기가 어려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홍여립은 주동환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스승?"
"예, 이놈 표영호 입니다. 스승님."
그 말에 홍여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여, 영호? 네가 영호라고?"
"예. 스승님이 가차없이 내다 버린 바로 그 제자. 영호입니다. 첫 제자이니 자식 같은 제자이니 말 같지 않은 소리는 그렇게 해대시더니, 제자를 버리고 호의호식하니 좋습니까?"
주동환의 비아냥거림에 홍여립의 표정이 굳어졌다.
홍여립의 눈에 주동환의 눈 너머로 영호의 모습이 어른 거리는 것만 같았다.
"난.... 난 널 버린 것이 아니다."
홍여립의 말이 체 다 끝나기도 전에 주동환이 버럭 소리 질렀다.
"닥쳐! 당신은 날 버렸어. 당신을 아버지같이 따랐던 나를, 저잣거리에서 참수되도록 내팽겨 쳤어!"
한이 맺힌 절규와 같은 주동환의 일갈에 홍여립은 가슴이 아파왔다.
그는 아직도 그날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의금부 병사들에게 끌려가다, 그 손을 뿌리치고 달려와 홍여립의 옷자락을 잡고 울던 영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스승님, 스승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제 아버지와는 인연을 끊고 산지 오래입니다. 서자라는 이유로 자식을 내다 버린 사람입니다. 그가 어찌 제 아비일 수 있겠습니까? 스승님을 아버지라 믿고 따랐습니다. 스승님. 제발, 제발 전하께 말씀 올려 주십시오. 스승님."
울며불며 매달리는 영호를 의금부 병사들이 다시금 붙잡아 끌고 갔다.
그렇게 질질 끌려가는 영호의 모습을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홍여립이었다.
임금 앞에 엎드려 간곡히 호소했었다.
"전하, 차라리 소신이 대신 죽겠습니다. 부디... 부디 영호를 살려주십시오."
그런 홍여립을 보며 임금은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지 않느냐? 지금 내겐... 아무런 힘이 없구나."
홍여립은 처음으로 임금 앞에서 통곡하듯 울었다.
임금 역시 충신인 홍여립의 제자를 지켜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눈물 흘렸고, 그 날 영호는 참수당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역모에 가담했다 하여, 삼족을 멸해야 한다는 좌상의 청을 승인했던 날로 돌아가 결정을 번복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것은 불가능했을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일로 제자인 영호를 잃게 된 것은, 임금이나 홍여립이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홍여립으로서는, 마치 자식을 묻듯 그렇게 가슴에 묻었던 영호였다.
그런 영호가, 지금 눈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며 왔다.
"영호야..."
넋을 잃고 바라보는 홍여립을 향해, 주동환의 칼이 움직였다.
그것은 흡사 찰나와도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홍여립의 앞에 선 주동환의 칼에는 진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과 함께 허물어져 내리는 홍여립의 육신은, 아수라장이 된 그곳 한가운데에서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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