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4
첫날이라 다들 프로젝트 내용을 먼저 파악하는데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은 어수선하게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처음부터 기운 빼지 맙시다. 앞으로 바짝 조일 예정이니 오늘은 모두들 일찍 퇴근하고 내일 뵙겠습니다"
빠르게 인사를 끝낸 본부장님은 미련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자리를 정돈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리님은 퇴근 안 하세요?"
옆자리 최재원대리가 다정에게 물었다.
'이 남자는 나에 대해 못 들었나? 왜 이렇게 친한 척이야?'
다정은 최재원대리를 한번 쳐다보고는 컴퓨터 전원을 끄며 무심히 대답했다.
"이제 막 하려고요. 내일 뵙겠습니다"
자신에게 신경 꺼주길 바라며 서둘러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났다.
"오늘 첫날이고, 앞으로 바빠질 텐데, 같이 화이팅 하는 의미에서, 저녁이나 술 한 잔 어떠세요?"
다정의 무심함에도 굴하지 않고 서글서글 웃으며 다시 물어왔다.
"아뇨, 괜찮습니다."
칼같이 거절하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
뒤에 남은 재원은 여지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다정의 뒷모습을 보며 훗하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쉽지 않겠네..."
***
다정은 보지도 않는 tv를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곤 한숨을 길게 한 번 내쉬었다.
오늘 하루 꿈 때문에 전전긍긍하느라 기운이 다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내 꿈인데.. 왜?! 내가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네..., 본부장님은 내가 그런 꿈을 꾼지도 모른다고~, 이다정!"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제는 꿈에도 나오지 않는데..."
괜히, 혼자만 억울한 기분이었다.
회의 내내 자신도 모르게 본부장님에게 향하는 시선을 잡아두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지시를 내리고 의견을 듣는 본부장님을 볼 때마다, 지난 꿈속에서 봤던 침대 위 본부장님의 넓은 가슴이 자꾸 겹쳐 보여, 회의에 집중하는 게 어려웠다.
"하필이면, 그런 꿈을 꿔서... 실제 몸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다정은 꿈과 현실을 혼동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서준이라는 남자가 여태껏 고요히 잠잠했던 자신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는 게 문제였다.
다정은 자신이 많이 이쁘다는 걸 알고 있다.
아주 어릴 땐 인형처럼 생긴 다정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귀엽다며 통통한 볼살을 만지고, 뽀뽀를 해대며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아이 없는 부부들에게 다정은 탐나는 아이였고, 그래서 유괴를 당할 뻔 한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도 다정은 밝고 활발한 성격을 가지고 자랐다. 이렇게 까칠한 성격으로 외모를 숨기게 된 계기는 왕따를 당한 학창 시절 동안의 영향이었다.
다정은 친구들과 하굣길에 떡볶이도 사 먹고 만화책방에도 가고, 때론 땡땡이를 쳐서 다음날 선생님한테 혼나면서도 친구들과 마주 보며 킥킥대고 웃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될 줄 알았다.
기대와 달리, 등굣길부터 하교할 때까지 다정을 따라다니는 남학생들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고, 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점한 다정을 시샘하고 질투하는 여학생들에게 지독한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하며 내내 외롭고 힘든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학교를 갈 수 없게 된 다정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공부만 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당시에는 공부밖에 없었다.
아픈 눈으로 미친 듯이 책만 파고들게 되면서 시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점점 안경알도 굵어졌다. 굵은 안경알은 다정의 커다란 눈을 가려버렸다.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이 안경을 쓴 자신에게는 머무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항상 자신에게 향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사라지자 해방감을 느꼈다.
그래서 다정은 마침내 찾은 안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숨기기 시작했다.
꾸준히 상담치료도 받고, 옆에서 묵묵히 사랑을 주는 부모님과 수연이 있었기에 지금의 다정이 있을 수 있었다.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은 사람과의 교류가 쉽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가 편했다.
그런데 꿈속에 등장한 본부장님을 실제로 보게 되면서 다정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비록 몇 번의 짧은 꿈속에서 당황스럽고, 억울했으며 도망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깨고 나면 가슴이 설레었다.
그래서 기다려졌다. 꿈속에서 만나는 본부장님이.
"오늘 밤 꿈에는 안 오시려나? 이제 나올 때도 된 거 아니야? 말도 못해봤는데, 설마...그 세번이 끝인거야?"
다정은 괜스레 허공을 향해 투정을 부렸다.
'그러고 보니, 꿈꾸면 뭐해? 시간도 짧던데, 뭐야?, 어디 말이라도 한 번 붙여 볼 수 있겠어?' 퍼뜩 드는 생각에 남아있는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꿈속에서만이라도 독종 이다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솔직한 자신을 본부장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야말로 꿈일 뿐이니까.
"내 꿈이잖아! 내 맘대로 할 수 있게 해 줘야지!" 또다시 투털 거리며 침대 위로 기어올라갔다.
'어차피, 자고 나면 사라지는 꿈일 뿐인걸...'
'쳇, 요즘은 너무 푹 자네.'
자신이 언제 꿈이나 꿨는지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지난밤 푸-욱 자고 일어난 다정은 실망감으로 멍하니 누워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실망스러운 아침이 쌓여만 갔다.
****
본부장님의 기대에 부흥하기위해 TF팀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여러 의견이 오가며 빠르게 진행되는 회의들, 그에 맞춰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 위해 급급한 직원들의 다크서클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김없이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사무실로 들어서는 최재원대리였다. 회사 로비에 있는 카페에 들렀다 왔는지 양손에 여러 잔의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입구에서부터 한잔씩 팀원들에게 나눠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다른직원들과 달리 화사했다.
'같이 고생하는데 왜 최대리만 쌩쌩한거야?, 젊음이 좋다', 고 부러워하거나, 심지어 황과장님은 최재원대리에게 '몸에 좋은 보약을 혼자 먹는거 아니야? 그러지 말고 같이 좀 먹지?' 라며 진심이 묻어나는 농담을 하시기도 했다.
"이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여기 커피 한잔 드세요."
최재원대리는 다정의 책상위에도 커피를 올려놓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항상 그렇듯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커피 감사합니다." 다정은 포기한 듯 감사인사를 했고, 다정의 인사에 재원은 외투를 벗는 척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최재원대리의 출근길 커피배달은 팀원들에게 가끔 있는 일상이었다. 처음 최재원대리가 팀원들에게 커피를 돌릴 때 다정은 불편한 마음에 거절을 했고, 며칠 후 또다시 커피를 돌리는 최재원대리에게 마찬가지로 거절의 의사를 보냈다.
"커피 싫어하세요?" 라며 묻는 최재원대리의 눈빛은 아닐 텐데?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알면서도 자꾸 권하는 막무가내에 기분 나빠진 다정은, 그렇다면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하기로 했다.
"아뇨, 불편해서요"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답한 후 다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정의 생각과는 달리 최재원대리는 그 이후에도 계속 친절한 얼굴로 커피를 권했고, 다른 팀원들에게도 똑같이 돌리는 커피이고, 다정 또한 커피를 좋아했기에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커피를 마시려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어딘가 기분이 안 좋은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본부장님의 두 눈과 마주친 다정은 순간 놀라 굳어버렸다.
"이대리, 지난번 내가 준 기획안 다시 줘 볼래?"
황과장은 자신의 요청에도 맞은편에 앉은 다정에게서 서류가 넘어오지 않자,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들다 멍하니 앉아 있는 다정을 보았다.
"이대리!" 다시 한번 목소리에 힘을 줘 부르자, 그제서야 다정이 의문이 담긴 눈으로 황과장을 돌아봤다.
"네?"
"왜 이렇게 멍하니 앉아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대리가. 무슨 일 있어?" 황과장님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다정은 정신을 수습하려 노력했다.
"아뇨,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고." 다정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일이네, 기획안 좀 줘" 여태 이런 적이 없는 다정이라 황과장은 조금 놀랐지만, 오히려 좋게 받아들였다. 그동안은 너무 또래답지 않은 다정이 안타까웠다. 자신의 여동생만 해도 다정과 비슷한 연배지만 아직까지 부모님한테 철없이 투정 부리며 놀러 다니느라 여념이 없지 않은가.
서류를 찾아 황과장님에게 드리고 다정은 스쳐 지나가듯 본부장님을 힐끗 쳐다보았다. 본부장님은 다정을 쳐다본 적도 없다는 듯 칼같이 반듯한 모습으로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날 쳐다본 게 아닐 수도 있잖아, 바보같이...' 다정은 본부장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누군가가 보지 않았길 간절히 바랐다.
***
다정이 착각이라 여기며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서준은 서류로 내렸던 시선을 다시 들어 다정의 작고 검은 정수리를 쳐다봤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짝 얼어서 숨은 쉬고 있나 걱정스러웠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고개를 숙여 일에 빠져 있었다.
핏,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저렇게 겁 많은 사람에게 독종이란 별명이 어떻게 생겼나 모르겠다.
처음에는 패션센스가 남다른 참 독특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크고 두꺼운 안경은 그렇다 치지만, 어깨뽕을 자랑하는 정장이나, 아주 크고 두꺼운 털 니트를 입어 북극곰처럼 거대해 보일 때도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입을 것 같지 않아 수거함에 넣어야 할 것 같은, 아니 수거함에서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옷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녔다. 정말, 서준의 눈에 정상적으로 보이는 거라고는 뒤로 질끈 모아 하나로 묶은 윤기 나는 검고 긴 머리카락 하나뿐이었다.
궁금했다. 이다정의 무엇이 최재원을 진정식품에 남아있게 하는지...
첫날이라 다들 프로젝트 내용을 먼저 파악하는데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은 어수선하게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처음부터 기운 빼지 맙시다. 앞으로 바짝 조일 예정이니 오늘은 모두들 일찍 퇴근하고 내일 뵙겠습니다"
빠르게 인사를 끝낸 본부장님은 미련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자리를 정돈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리님은 퇴근 안 하세요?"
옆자리 최재원대리가 다정에게 물었다.
'이 남자는 나에 대해 못 들었나? 왜 이렇게 친한 척이야?'
다정은 최재원대리를 한번 쳐다보고는 컴퓨터 전원을 끄며 무심히 대답했다.
"이제 막 하려고요. 내일 뵙겠습니다"
자신에게 신경 꺼주길 바라며 서둘러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났다.
"오늘 첫날이고, 앞으로 바빠질 텐데, 같이 화이팅 하는 의미에서, 저녁이나 술 한 잔 어떠세요?"
다정의 무심함에도 굴하지 않고 서글서글 웃으며 다시 물어왔다.
"아뇨, 괜찮습니다."
칼같이 거절하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
뒤에 남은 재원은 여지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다정의 뒷모습을 보며 훗하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쉽지 않겠네..."
***
다정은 보지도 않는 tv를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곤 한숨을 길게 한 번 내쉬었다.
오늘 하루 꿈 때문에 전전긍긍하느라 기운이 다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내 꿈인데.. 왜?! 내가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네..., 본부장님은 내가 그런 꿈을 꾼지도 모른다고~, 이다정!"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제는 꿈에도 나오지 않는데..."
괜히, 혼자만 억울한 기분이었다.
회의 내내 자신도 모르게 본부장님에게 향하는 시선을 잡아두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지시를 내리고 의견을 듣는 본부장님을 볼 때마다, 지난 꿈속에서 봤던 침대 위 본부장님의 넓은 가슴이 자꾸 겹쳐 보여, 회의에 집중하는 게 어려웠다.
"하필이면, 그런 꿈을 꿔서... 실제 몸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다정은 꿈과 현실을 혼동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서준이라는 남자가 여태껏 고요히 잠잠했던 자신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는 게 문제였다.
다정은 자신이 많이 이쁘다는 걸 알고 있다.
아주 어릴 땐 인형처럼 생긴 다정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귀엽다며 통통한 볼살을 만지고, 뽀뽀를 해대며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아이 없는 부부들에게 다정은 탐나는 아이였고, 그래서 유괴를 당할 뻔 한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도 다정은 밝고 활발한 성격을 가지고 자랐다. 이렇게 까칠한 성격으로 외모를 숨기게 된 계기는 왕따를 당한 학창 시절 동안의 영향이었다.
다정은 친구들과 하굣길에 떡볶이도 사 먹고 만화책방에도 가고, 때론 땡땡이를 쳐서 다음날 선생님한테 혼나면서도 친구들과 마주 보며 킥킥대고 웃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될 줄 알았다.
기대와 달리, 등굣길부터 하교할 때까지 다정을 따라다니는 남학생들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고, 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점한 다정을 시샘하고 질투하는 여학생들에게 지독한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하며 내내 외롭고 힘든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학교를 갈 수 없게 된 다정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공부만 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당시에는 공부밖에 없었다.
아픈 눈으로 미친 듯이 책만 파고들게 되면서 시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점점 안경알도 굵어졌다. 굵은 안경알은 다정의 커다란 눈을 가려버렸다.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이 안경을 쓴 자신에게는 머무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항상 자신에게 향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사라지자 해방감을 느꼈다.
그래서 다정은 마침내 찾은 안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숨기기 시작했다.
꾸준히 상담치료도 받고, 옆에서 묵묵히 사랑을 주는 부모님과 수연이 있었기에 지금의 다정이 있을 수 있었다.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은 사람과의 교류가 쉽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가 편했다.
그런데 꿈속에 등장한 본부장님을 실제로 보게 되면서 다정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비록 몇 번의 짧은 꿈속에서 당황스럽고, 억울했으며 도망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깨고 나면 가슴이 설레었다.
그래서 기다려졌다. 꿈속에서 만나는 본부장님이.
"오늘 밤 꿈에는 안 오시려나? 이제 나올 때도 된 거 아니야? 말도 못해봤는데, 설마...그 세번이 끝인거야?"
다정은 괜스레 허공을 향해 투정을 부렸다.
'그러고 보니, 꿈꾸면 뭐해? 시간도 짧던데, 뭐야?, 어디 말이라도 한 번 붙여 볼 수 있겠어?' 퍼뜩 드는 생각에 남아있는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꿈속에서만이라도 독종 이다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솔직한 자신을 본부장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야말로 꿈일 뿐이니까.
"내 꿈이잖아! 내 맘대로 할 수 있게 해 줘야지!" 또다시 투털 거리며 침대 위로 기어올라갔다.
'어차피, 자고 나면 사라지는 꿈일 뿐인걸...'
'쳇, 요즘은 너무 푹 자네.'
자신이 언제 꿈이나 꿨는지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지난밤 푸-욱 자고 일어난 다정은 실망감으로 멍하니 누워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실망스러운 아침이 쌓여만 갔다.
****
본부장님의 기대에 부흥하기위해 TF팀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여러 의견이 오가며 빠르게 진행되는 회의들, 그에 맞춰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 위해 급급한 직원들의 다크서클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김없이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사무실로 들어서는 최재원대리였다. 회사 로비에 있는 카페에 들렀다 왔는지 양손에 여러 잔의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입구에서부터 한잔씩 팀원들에게 나눠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다른직원들과 달리 화사했다.
'같이 고생하는데 왜 최대리만 쌩쌩한거야?, 젊음이 좋다', 고 부러워하거나, 심지어 황과장님은 최재원대리에게 '몸에 좋은 보약을 혼자 먹는거 아니야? 그러지 말고 같이 좀 먹지?' 라며 진심이 묻어나는 농담을 하시기도 했다.
"이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여기 커피 한잔 드세요."
최재원대리는 다정의 책상위에도 커피를 올려놓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항상 그렇듯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커피 감사합니다." 다정은 포기한 듯 감사인사를 했고, 다정의 인사에 재원은 외투를 벗는 척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최재원대리의 출근길 커피배달은 팀원들에게 가끔 있는 일상이었다. 처음 최재원대리가 팀원들에게 커피를 돌릴 때 다정은 불편한 마음에 거절을 했고, 며칠 후 또다시 커피를 돌리는 최재원대리에게 마찬가지로 거절의 의사를 보냈다.
"커피 싫어하세요?" 라며 묻는 최재원대리의 눈빛은 아닐 텐데?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알면서도 자꾸 권하는 막무가내에 기분 나빠진 다정은, 그렇다면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하기로 했다.
"아뇨, 불편해서요"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답한 후 다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정의 생각과는 달리 최재원대리는 그 이후에도 계속 친절한 얼굴로 커피를 권했고, 다른 팀원들에게도 똑같이 돌리는 커피이고, 다정 또한 커피를 좋아했기에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커피를 마시려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어딘가 기분이 안 좋은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본부장님의 두 눈과 마주친 다정은 순간 놀라 굳어버렸다.
"이대리, 지난번 내가 준 기획안 다시 줘 볼래?"
황과장은 자신의 요청에도 맞은편에 앉은 다정에게서 서류가 넘어오지 않자,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들다 멍하니 앉아 있는 다정을 보았다.
"이대리!" 다시 한번 목소리에 힘을 줘 부르자, 그제서야 다정이 의문이 담긴 눈으로 황과장을 돌아봤다.
"네?"
"왜 이렇게 멍하니 앉아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대리가. 무슨 일 있어?" 황과장님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다정은 정신을 수습하려 노력했다.
"아뇨,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고." 다정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일이네, 기획안 좀 줘" 여태 이런 적이 없는 다정이라 황과장은 조금 놀랐지만, 오히려 좋게 받아들였다. 그동안은 너무 또래답지 않은 다정이 안타까웠다. 자신의 여동생만 해도 다정과 비슷한 연배지만 아직까지 부모님한테 철없이 투정 부리며 놀러 다니느라 여념이 없지 않은가.
서류를 찾아 황과장님에게 드리고 다정은 스쳐 지나가듯 본부장님을 힐끗 쳐다보았다. 본부장님은 다정을 쳐다본 적도 없다는 듯 칼같이 반듯한 모습으로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날 쳐다본 게 아닐 수도 있잖아, 바보같이...' 다정은 본부장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누군가가 보지 않았길 간절히 바랐다.
***
다정이 착각이라 여기며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서준은 서류로 내렸던 시선을 다시 들어 다정의 작고 검은 정수리를 쳐다봤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짝 얼어서 숨은 쉬고 있나 걱정스러웠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고개를 숙여 일에 빠져 있었다.
핏,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저렇게 겁 많은 사람에게 독종이란 별명이 어떻게 생겼나 모르겠다.
처음에는 패션센스가 남다른 참 독특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크고 두꺼운 안경은 그렇다 치지만, 어깨뽕을 자랑하는 정장이나, 아주 크고 두꺼운 털 니트를 입어 북극곰처럼 거대해 보일 때도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입을 것 같지 않아 수거함에 넣어야 할 것 같은, 아니 수거함에서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옷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녔다. 정말, 서준의 눈에 정상적으로 보이는 거라고는 뒤로 질끈 모아 하나로 묶은 윤기 나는 검고 긴 머리카락 하나뿐이었다.
궁금했다. 이다정의 무엇이 최재원을 진정식품에 남아있게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