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17
현서를 안은 여왕 주위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점차 빛이 사그라들면서, 주위에 생성되었던 현상은 사라지고, 공장 구석에 서 있는 여왕과 여왕 품에 안긴 검은 그림자 아이만 남았다.
여왕은 품에 안았던 아이를 놓아주며 자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현서야, 엄마가 미안해."
그러자, 아이의 검은 그림자는 마치 오래된 시멘트가 부서져 내리듯, 그렇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부서져 내리는 검은 그림자 안으로 해맑게 웃고 있는 밝은 아이가 서 있었다.
"엄마, 괜찮아~"
아이는 오히려 여왕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난 그래도 엄마가 좋아."
아이는 다시 한번 여왕의 품에 안겼고, 여왕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다독여 주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아이는 환한 빛으로 변하더니 도깨비불처럼 작고 환한 빛이 되어 여왕의 머리 위를 빙글 돌다가, 머리 옆에서 둥실둥실 떠다녔다.
여왕은 환한 표정으로 아이가 변한 빛 구슬을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도 이곳에 있는 것 같구나."
백하도령이 어딘가를 응시하며 하는 말에, 나래가 서두르며 말했다.
"얼른 가요."
그녀의 말을 들은 듯, 누비는 코를 킁킁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왕과 일행 모두가 그 뒤를 쫓아 걸었다.
이번에는 공장을 벗어나 놀이공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멈춰버린 커다란 대관람차 아래쪽에 이르렀을때, 대관람차 매표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검은 그림자 아이가 보였다.
"현준아."
여왕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검은 그림자 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런 빛으로 마치 그려 넣은 듯한 눈과 입이 움직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왜? 왜 날 찾아?"
아이의 물음에 여왕의 표정은 다시금 슬퍼졌다.
"나래야."
백하도령의 부름에, 나래는 준비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백하도령의 손이 여왕의 어깨에 가 닿자, 그녀의 몸안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주위에 현상을 만들어냈다.
푸른 빛결의 기운이 주위를 가득 메운 가운데, 또 다른 여왕이 빨랫줄에서 걷어온 마른 옷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엄마~"
한 아이가 그런 여왕에게 다가가 불렀다.
"엄마 이거 봐봐, 내가..."
아이가 말을 하지만, 여왕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엄마 지금 빨래 정리하잖아."
"내가 이거..."
아이가 손에 꼭 쥔 무언가를 내밀어 보이지만, 여왕은 또다시 보지도 않고 물었다.
"숙제는 다 했어?"
"숙제?"
"다 했어? 안 했어?"
옷을 정리하며 독촉하듯 묻는 여왕의 물음에, 아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안 했어..."
"얼른 숙제부터 해."
단호한 여왕의 한마디 말에 아이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뒤돌아 걸어가는 아이는, 걸음걸음마다 불쑥불쑥 커지더니 어느새 고등학생 정도로 커져 버렸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어렸을 때의 시무룩함 그대로였다.
"엄마 이거 뭐야?"
아이가 돌아서서 여왕에게 물었다.
여왕은 어느새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고, 쉽지 않은 삶의 무게에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뭐긴 뭐야? 현우가 너랑 같이 방 쓰면 집중을 못하잖니."
여왕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아이의 몸에서 거무스름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난? 내 방은 없는 거야?"
아이의 물음에, 여왕은 여전히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어차피 공부 안 하잖아. 형아 공부하게 좀 나와 있어. 그리고 너도 형아들처럼 공부 좀 해, 공부 좀.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지, 공부해서 달라디?"
여왕의 핀잔에 아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더욱 더 짙어졌다.
안방을 포함해 방이 3개인 집이었다. 그나마도 어렵게 구한 집이었고, 그 이상 큰집을 구하는 것은 여왕의 형편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첫째와 둘째가 각자 방을 쓰고, 셋째였던 현준의 물건들은 거실로 쫓겨나 있었다.
현준이 거실에 나와있는 자신의 물건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서 있었고, 그런 현준에게서 검은 기운이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현준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림자처럼 검은 기운에 감싸여 투명해진 현준은, 마치 그곳에 없는 듯 초점 없는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왕은 바빴다. 집안일하랴 바깥일 하랴, 남편 없이 남자아이 셋을 키우는 그녀는 단 한순간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집에 현준은 있으면서 없었다.
투명해진 현준은 여전히 초점 없이 서 있었고, 여왕은 그런 현준을 보지 못하는 듯 의식하지 못하고 바삐 움직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래 옆의 여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게... 상처가 될 줄은 몰랐어요."
문득 현준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또렷해진 현준이 고개를 들어 분주한 여왕을 응시하자, 여왕이 그런 현준을 보며 물었다.
"뭐하느라 이제 들어와? 대체 밖에서 맨날 뭐 하는 거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허구헌 날 술만 마시니?"
따지듯 묻는 여왕을 보며 현준이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뭐하러 들어와? 들어오기 싫어. 이 집에 내 공간은 없잖아. 내가 있을 곳이 없다고."
현준은 버럭 소리 지르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투명해졌고, 나이 든 여왕은 혀를 차며 인상을 쓸 뿐이었다.
현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은 더욱 짙어져 투명해진 현준을 거의 가리고 있었다.
'부정한 것들은 싫어!'
나래가 온몸에 힘을 꽉 주어 부정해 보지만, 어쩐지 현준의 검은 기운은 사그러 들지 않았다.
"왜?"
나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옆에서 여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던 백하도령이 나래를 보며 말했다.
"저것은 부정한 기운이 아니다."
백하도령의 말에 나래는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부정한 게 아니라구요? 그럼 어떻게 해요?"
"본질을 알아야 한다. 저 아이를 감싸고 있는 것들이 무언지..."
나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검은 기운으로 다가갔다.
"위험해."
뒤에서 보고 있던 한울이 걱정되어 나서 말하자, 나래는 씩씩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마. 괜찮아."
나래는 아이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 검은 기운을 만졌다.
검은 기운은 독소처럼 다가온 나래의 손을 아프게 만들었고, 나래는 순간 느껴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통증 뒤에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나래의 손을 통해 울려 퍼졌다.
'이건.... 무기력이야.'
나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항상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었던 아이는 여왕과 형들에게 휘둘려 왔고, 오랜 시간 축적된 실망과 무력감은 무기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검은 기운의 정체를 알게 된 나래는 다시 한번 온몸에 힘을 주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무기력은 싫어!'
그와 동시에 아이를 휘감고 있던 검은 기운이 태풍처럼 몰아치는 바람에 산산이 찢겨 나가듯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투명했던 아이는 다시 또렷한 형체를 띄기 시작했고, 백하도령의 곁에 서 있던 여왕이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현준아 미안해..."
하지만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나래는 여왕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 하자,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현준이를.... 믿어주세요."
나래의 말에 여왕은 멍한 표정으로 나래를 바라보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현준을 보면서 말했다.
"현준아... 엄마 좀... 도와줄래?"
여왕의 말에 비로소 아이가 움직였다.
몸을 돌려 여왕 쪽을 바라보며 아이가 물었다.
"뭐?"
마치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얼굴의 아이를 보면서, 여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 좀 도와줄래? 우리 현준이가 도와줬으면 하는데?"
아이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무표정해지며 되물었다.
"뭘? 내가 뭘 도울 수 있긴 한 거야?"
"그럼, 우리 현준이가 도와주면, 엄마가 참 고마울 거 같은데? 도와줄래?"
잠시 말이 없던 아이는 이내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여왕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자, 현준은 여왕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 그 걸음걸음마다 현준은 나이가 어려지더니 어느새 조그마한 꼬마 아이로 변해갔다.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다가와서는 여왕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엄마, 내가 뭘 주워 왔는지 알아?"
여왕은 그런 현준을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글쎄? 뭘 주워 왔을까요? 우리 왕자님이?"
현준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짠~"
거기에는 반짝 거리는 돌멩이 하나가 놓여있었다. 해변가에서 볼 수 있는 하얗고 반짝거리는 조약돌이었다.
"우와~ 우리 현준이가 보물을 주워 왔네?"
여왕의 대답에, 현준은 환한 표정이 되어 여왕의 품에 달려와 안겼다.
"엄마 줄게."
"정말? 엄마가 너무너무 고마운데?"
"히히히"
아이의 웃음소리가 너무도 밝게 들려왔다.
"고마워, 고마워 현준아."
웃고 있는 여왕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의 몸이 환하게 빛을 내더니, 첫째 현서처럼 둥근 빛 구슬로 변하였다.
허공 위를 날아오른 빛 구슬은 빙글빙글 돌더니 현서 옆으로 가 함께 둥실둥실 떠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는 두 개의 빛 구슬이 여왕 얼굴 옆에 떠다니자, 이를 본 나래 얼굴의 웃음 또한 환하게 번져 나갔다.
"첫째와 셋째를 구했으니, 이제 둘째만 구하면 되겠구나."
백하도령의 말에 나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둘째는 어디 있나요?"
"조금 먼 곳에 있는 것 같구나."
백하도령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하는 말에, 나래는 또다시 재촉했다.
"그럼 얼른 가요.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백하도령의 표정이 어쩐지 굳어져 있는 것 같았다.
"왜요?"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래가 물으니, 백하도령이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마지막 아이는...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이미 강력한 기운이 아이를 둘러싸고 있다."
나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부정해도 소용없을까요?"
그렇게 묻는 나래를 보며 백하도령이 어느새 예의 여유롭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네가 싫다면, 그게 무엇이든 싫은 것이다. 그러니, 네 자신을 믿거라."
백하도령의 대답에, 나래는 어쩐지 용기가 샘솟는 것 같은 기분에 활짝 웃어 보였다.
"네."
이어 점차 빛이 사그라들면서, 주위에 생성되었던 현상은 사라지고, 공장 구석에 서 있는 여왕과 여왕 품에 안긴 검은 그림자 아이만 남았다.
여왕은 품에 안았던 아이를 놓아주며 자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현서야, 엄마가 미안해."
그러자, 아이의 검은 그림자는 마치 오래된 시멘트가 부서져 내리듯, 그렇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부서져 내리는 검은 그림자 안으로 해맑게 웃고 있는 밝은 아이가 서 있었다.
"엄마, 괜찮아~"
아이는 오히려 여왕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난 그래도 엄마가 좋아."
아이는 다시 한번 여왕의 품에 안겼고, 여왕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다독여 주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아이는 환한 빛으로 변하더니 도깨비불처럼 작고 환한 빛이 되어 여왕의 머리 위를 빙글 돌다가, 머리 옆에서 둥실둥실 떠다녔다.
여왕은 환한 표정으로 아이가 변한 빛 구슬을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도 이곳에 있는 것 같구나."
백하도령이 어딘가를 응시하며 하는 말에, 나래가 서두르며 말했다.
"얼른 가요."
그녀의 말을 들은 듯, 누비는 코를 킁킁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왕과 일행 모두가 그 뒤를 쫓아 걸었다.
이번에는 공장을 벗어나 놀이공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멈춰버린 커다란 대관람차 아래쪽에 이르렀을때, 대관람차 매표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검은 그림자 아이가 보였다.
"현준아."
여왕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검은 그림자 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런 빛으로 마치 그려 넣은 듯한 눈과 입이 움직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왜? 왜 날 찾아?"
아이의 물음에 여왕의 표정은 다시금 슬퍼졌다.
"나래야."
백하도령의 부름에, 나래는 준비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백하도령의 손이 여왕의 어깨에 가 닿자, 그녀의 몸안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주위에 현상을 만들어냈다.
푸른 빛결의 기운이 주위를 가득 메운 가운데, 또 다른 여왕이 빨랫줄에서 걷어온 마른 옷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엄마~"
한 아이가 그런 여왕에게 다가가 불렀다.
"엄마 이거 봐봐, 내가..."
아이가 말을 하지만, 여왕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엄마 지금 빨래 정리하잖아."
"내가 이거..."
아이가 손에 꼭 쥔 무언가를 내밀어 보이지만, 여왕은 또다시 보지도 않고 물었다.
"숙제는 다 했어?"
"숙제?"
"다 했어? 안 했어?"
옷을 정리하며 독촉하듯 묻는 여왕의 물음에, 아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안 했어..."
"얼른 숙제부터 해."
단호한 여왕의 한마디 말에 아이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뒤돌아 걸어가는 아이는, 걸음걸음마다 불쑥불쑥 커지더니 어느새 고등학생 정도로 커져 버렸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어렸을 때의 시무룩함 그대로였다.
"엄마 이거 뭐야?"
아이가 돌아서서 여왕에게 물었다.
여왕은 어느새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고, 쉽지 않은 삶의 무게에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뭐긴 뭐야? 현우가 너랑 같이 방 쓰면 집중을 못하잖니."
여왕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아이의 몸에서 거무스름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난? 내 방은 없는 거야?"
아이의 물음에, 여왕은 여전히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어차피 공부 안 하잖아. 형아 공부하게 좀 나와 있어. 그리고 너도 형아들처럼 공부 좀 해, 공부 좀.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지, 공부해서 달라디?"
여왕의 핀잔에 아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더욱 더 짙어졌다.
안방을 포함해 방이 3개인 집이었다. 그나마도 어렵게 구한 집이었고, 그 이상 큰집을 구하는 것은 여왕의 형편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첫째와 둘째가 각자 방을 쓰고, 셋째였던 현준의 물건들은 거실로 쫓겨나 있었다.
현준이 거실에 나와있는 자신의 물건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서 있었고, 그런 현준에게서 검은 기운이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현준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림자처럼 검은 기운에 감싸여 투명해진 현준은, 마치 그곳에 없는 듯 초점 없는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왕은 바빴다. 집안일하랴 바깥일 하랴, 남편 없이 남자아이 셋을 키우는 그녀는 단 한순간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집에 현준은 있으면서 없었다.
투명해진 현준은 여전히 초점 없이 서 있었고, 여왕은 그런 현준을 보지 못하는 듯 의식하지 못하고 바삐 움직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래 옆의 여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게... 상처가 될 줄은 몰랐어요."
문득 현준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또렷해진 현준이 고개를 들어 분주한 여왕을 응시하자, 여왕이 그런 현준을 보며 물었다.
"뭐하느라 이제 들어와? 대체 밖에서 맨날 뭐 하는 거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허구헌 날 술만 마시니?"
따지듯 묻는 여왕을 보며 현준이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뭐하러 들어와? 들어오기 싫어. 이 집에 내 공간은 없잖아. 내가 있을 곳이 없다고."
현준은 버럭 소리 지르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투명해졌고, 나이 든 여왕은 혀를 차며 인상을 쓸 뿐이었다.
현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은 더욱 짙어져 투명해진 현준을 거의 가리고 있었다.
'부정한 것들은 싫어!'
나래가 온몸에 힘을 꽉 주어 부정해 보지만, 어쩐지 현준의 검은 기운은 사그러 들지 않았다.
"왜?"
나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옆에서 여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던 백하도령이 나래를 보며 말했다.
"저것은 부정한 기운이 아니다."
백하도령의 말에 나래는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부정한 게 아니라구요? 그럼 어떻게 해요?"
"본질을 알아야 한다. 저 아이를 감싸고 있는 것들이 무언지..."
나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검은 기운으로 다가갔다.
"위험해."
뒤에서 보고 있던 한울이 걱정되어 나서 말하자, 나래는 씩씩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마. 괜찮아."
나래는 아이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 검은 기운을 만졌다.
검은 기운은 독소처럼 다가온 나래의 손을 아프게 만들었고, 나래는 순간 느껴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통증 뒤에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나래의 손을 통해 울려 퍼졌다.
'이건.... 무기력이야.'
나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항상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었던 아이는 여왕과 형들에게 휘둘려 왔고, 오랜 시간 축적된 실망과 무력감은 무기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검은 기운의 정체를 알게 된 나래는 다시 한번 온몸에 힘을 주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무기력은 싫어!'
그와 동시에 아이를 휘감고 있던 검은 기운이 태풍처럼 몰아치는 바람에 산산이 찢겨 나가듯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투명했던 아이는 다시 또렷한 형체를 띄기 시작했고, 백하도령의 곁에 서 있던 여왕이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현준아 미안해..."
하지만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나래는 여왕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 하자,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현준이를.... 믿어주세요."
나래의 말에 여왕은 멍한 표정으로 나래를 바라보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현준을 보면서 말했다.
"현준아... 엄마 좀... 도와줄래?"
여왕의 말에 비로소 아이가 움직였다.
몸을 돌려 여왕 쪽을 바라보며 아이가 물었다.
"뭐?"
마치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얼굴의 아이를 보면서, 여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 좀 도와줄래? 우리 현준이가 도와줬으면 하는데?"
아이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무표정해지며 되물었다.
"뭘? 내가 뭘 도울 수 있긴 한 거야?"
"그럼, 우리 현준이가 도와주면, 엄마가 참 고마울 거 같은데? 도와줄래?"
잠시 말이 없던 아이는 이내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여왕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자, 현준은 여왕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 그 걸음걸음마다 현준은 나이가 어려지더니 어느새 조그마한 꼬마 아이로 변해갔다.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다가와서는 여왕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엄마, 내가 뭘 주워 왔는지 알아?"
여왕은 그런 현준을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글쎄? 뭘 주워 왔을까요? 우리 왕자님이?"
현준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짠~"
거기에는 반짝 거리는 돌멩이 하나가 놓여있었다. 해변가에서 볼 수 있는 하얗고 반짝거리는 조약돌이었다.
"우와~ 우리 현준이가 보물을 주워 왔네?"
여왕의 대답에, 현준은 환한 표정이 되어 여왕의 품에 달려와 안겼다.
"엄마 줄게."
"정말? 엄마가 너무너무 고마운데?"
"히히히"
아이의 웃음소리가 너무도 밝게 들려왔다.
"고마워, 고마워 현준아."
웃고 있는 여왕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의 몸이 환하게 빛을 내더니, 첫째 현서처럼 둥근 빛 구슬로 변하였다.
허공 위를 날아오른 빛 구슬은 빙글빙글 돌더니 현서 옆으로 가 함께 둥실둥실 떠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는 두 개의 빛 구슬이 여왕 얼굴 옆에 떠다니자, 이를 본 나래 얼굴의 웃음 또한 환하게 번져 나갔다.
"첫째와 셋째를 구했으니, 이제 둘째만 구하면 되겠구나."
백하도령의 말에 나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둘째는 어디 있나요?"
"조금 먼 곳에 있는 것 같구나."
백하도령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하는 말에, 나래는 또다시 재촉했다.
"그럼 얼른 가요.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백하도령의 표정이 어쩐지 굳어져 있는 것 같았다.
"왜요?"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래가 물으니, 백하도령이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마지막 아이는...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이미 강력한 기운이 아이를 둘러싸고 있다."
나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부정해도 소용없을까요?"
그렇게 묻는 나래를 보며 백하도령이 어느새 예의 여유롭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네가 싫다면, 그게 무엇이든 싫은 것이다. 그러니, 네 자신을 믿거라."
백하도령의 대답에, 나래는 어쩐지 용기가 샘솟는 것 같은 기분에 활짝 웃어 보였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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