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3
예판은 조금 허름해 보이긴 하지만 크고 단아한 집 앞에 이르렀다.
예판이 초헌에서 내려 대문앞으로 다가가니, 때마침 나와있던 한 여인이 서둘러 마중 나왔다.
"대감마님 오셨습니까?"
마중 나온 소연을 보며 예판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백무는 안에 있는가?"
"예, 대감마님."
이어 소연이 서둘러 방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며 소리치듯 말했다.
"어르신, 예판대감께서 오셨습니다."
소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무가 방문을 열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부리나케 예판 앞으로 달려가 얼른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대감마님 오셨습니까?"
예판이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간 잘 지냈는가?"
"예, 대감마님... 안으로 드시지요."
"아닐세. 내 예서 한 가지만 묻고 가겠네."
"예, 말씀하시지요."
예판이 한숨을 한번 쉬고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내 사실, 진즉에 물었어야 하는 것이긴 하네만... 그 일이 있고 벌써 3년이 지났네. 자네 덕에 아이가 그 모습 그대로 있긴 하네만... 결국....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백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예판을 바라보았다.
"송구합니다, 대감마님."
예상은 하고있었지만, 실제 듣고보니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애기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
예판은 알고 있다는 듯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예판이 힘없이 돌아서려는데, 때마침 누군가 오다가 마주 서더니 인사를 건네 왔다.
"아, 자네는..."
그는 바로 수현이었다.
수현은 백무에게 볼일이 있어 왔다가, 예판을 보고 얼른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예판대감 오셨습니까."
수현이 건네는 인사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부총관이 예는 어인 일인가?"
"아, 사건 수사와 관련하여 자문을 구하러 왔습니다."
예판은 관심 없는 듯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대문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다 멈추어섰다.
예판에게 인사를 하고 백무에게 다가가는 수현의 손이 문득 눈에 들어왔기때문이다.
예판은 놀라 홱하니 돌아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수현의 손에 들린 물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벽륜봉이었다.
"저것은...."
예판은 벽룬봉임을 알아보고 놀라 헛숨을 삼키고는 이내 몸을 돌려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오셨습니까?"
그 사이 백무와 수현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인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백무의 말에 수현은 손에 든 벽륜봉을 내보이며 말했다.
"듣자 하니 벽륜봉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사교도들의 술수에 대해 들어볼 수가 있었는데, 이 벽륜봉은 봉혼벽륜(封魂霹倫)이라는 물건일 수도 있다 들었습니다. 혹, 그것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 말을 듣자 백무가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알고 있지요. 봉혼벽륜... 들어만 봤을 뿐, 실제로 본 적은 없었습니다. 혹, 다시 제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무의 말에 수현이 벽륜봉을 건네주었다.
벽륜봉을 세세히 살피던 백무는 고개를 신중히 끄덕거렸다.
"이 윗부분이 타서 유실되는 바람에 알아보지 못한 듯합니다만, 이 내용대로라면 봉혼벽륜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
"이것은 영혼을 잡아두는 주술에 쓰는 물건입니다."
"영혼을 잡아둔다구요?"
"그렇습니다. 특정 영혼이나, 혹은 귀신 따위가 어디로 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하지요. 그밖에도 소혼술 따위로 불러낸 영혼을 일정 시간 구천에 머물도록 하게 하는 술수에도 쓰입니다."
수현이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면... 이것이 진짜 봉혼벽륜인지...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현의 청에 백무가 당연히 그렇게 해주겠다는듯이 결연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겠습니다.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문득 옆에 듣고만 있던 소연이 의아한 듯 나서 물었다.
"그런데... 이게 봉혼벽륜인지 아닌지가... 중한 것입니까?"
소연의 물음에 수현이 자상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저들이 무엇을 하려고 했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기억을 잃은 여인이 있는데, 그 기억을 찾기 위해서는, 기억을 잃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해서 그렇다."
수현의 말을 듣고 소연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백무가 나서 말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알아내는 대로 기별하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 부탁드립니다."
수현이 물러가자, 그런 수현의 뒷모습을 소연이 한동안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만 들어가자."
백무의 말을 못 들은 듯 소연이 계속 수현이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백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택도 없다, 이년아."
백무의 말에 소연은 울상이 되었다.
"아, 왜요? 저는 왜 안 되는 것입니까?"
"너 같은 천 것을 거들떠나 볼 줄 아느냐?"
백무가 핀잔을 주며 안으로 들어가니, 소연이 따라가며 투덜거렸다.
"나리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천 것이라고 천시하거나 하는 분 아니란 말입니다."
"쯧쯧,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 것이냐?"
백무의 타박에 소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
신료들이 빈청에 들어 삼삼오오 모이는 와중에, 먼저 와있던 좌의정 최준경은 병조판서 김승수가 안으로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병판, 혹 어영위의 편제를 바꾸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김승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예, 그리했지요. 어영위뿐만 아니라, 군의 편제를 부분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어찌... 이 사람에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좌상의 물음에 김승수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 뭐 그리 대단하게 바꾼 것이 아니라서, 딱히 말씀드릴만한 것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좌상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어영위의 편제가 다시 도총부 소관으로 바뀌었다 들었습니다만..."
"예, 그리 했지요. 뭐 병력수도 얼마 안 되고, 현재의 책무가 금군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그냥 도총부 안에 넣어 함께 관리토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하였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이 사람과 의논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상의 손에 들려있던 병사들을 지금처럼 빼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 쉽게 내어주다니요."
좌상의 말에 병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 봐야 불과 백여 명입니다, 좌상. 그 정도 인원 가지고 어찌 이리 민감하게 여기시는 겁니까? 도총부라고 해봐야 이제 궁궐을 지키는 내금위뿐입니다. 내금위라고 해봐야 불과 일천이 채 되지 않습니다. 이 궁궐을 둘러싼 어영청과 금위영, 훈련도감의 병사들만으로도 족히 일만입니다. 거기다가 바로 동원 가능한 지방군의 병사들만 3만이 넘습니다. 이 병사들은 모두 좌상과 제 명령을 따를 군사들입니다. 주상이 제아무리 조선제일검이라는 홍여립을 곁에 두고 있는다 한들, 일천의 병사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거기다가 불과 백여 명 안팎의 어영위를 얹는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병조를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고작 일백여 명의 병사 편제를 바꾸는 것까지 좌상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병판의 말에 좌상은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허나, 다음부터는 이 사람에게 귀띔이라도 주시지요."
병판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기별토록 하지요."
그 사이 다른 사람들은 자리에 하나둘씩 앉으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며시 살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안으로 들어와 눈치를 살피던 이판대감의 물음에, 병판은 헛기침을 하고, 좌상대감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서들 앉으시지요. 논의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앉아 있는 이들은 삼정승과 육조의 판서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모여있던 같은 시각, 임금은 뜻밖의 보고에 놀라 본인이 옳게 들은것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되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되묻는 임금에게 도총관 홍여립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분명 그리 바뀌었습니다. 이제부터 어영위는 소관이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의심스럽다는듯 고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슨 까닭일까? 그렇게 애써 뺏어가 놓고, 이제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려주는 연유가 말이다.."
"이전과는 달리, 현재의 어영위 병사는 대략 130여 명 안팎입니다. 병판이 보기에 그 정도 병력 편제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듯합니다."
임금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불과 백여 명의 병사 편제를 바꾼 것뿐이지만, 어영위는 엄연히 현재 수도 방비를 맡고 있다. 그것도 궁궐과 가장 가까운 곳을 맡고 있기에, 금군과 수비 구역이 겹치기도 하지. 허나 그것은 엄청난 차이다. 금군이 궁궐 안만 지키기에, 병력을 외부로 내보낼 명분이 없으나, 어영위가 있음으로 해서, 도총부는 군사를 궁궐 인근까지 배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들뜬 표정이 용안에 떠올랐다.
"비로소 실낱같은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인가. 어영위가 도총부 안으로 편제가 바뀐 이상, 어영위의 병력 구성을 바꾸는 것은 이제 도총관의 몫이다. 현재 내금위의 병력중 일부를 어영위로 변경하면, 궁궐 밖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홍여립 역시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즉시 그리할 것입니다. 궁궐 밖으로 재빠른 수하들을 배치하여, 주변 상황을 파악토록 명하겠습니다."
"그래. 애초부터 병판은 좌상의 사람이라고는 하나, 자존심이 강하고 본인의 업적에 대한 자긍심이 있는 인물이다. 또한 좌상과 더불어 일을 도모했으니,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좌상의 밑에 있는 수하라 여기지는 않을 터, 그 점이 좌상에게 빈틈을 만들어 주는 모양이구나. 허나... 좌상도 병판만큼은 함부로 하지 못할 터..."
"그렇습니다. 이 기회를 결코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세자는? 세자는 어찌하고 있다더냐?"
"근래에, 사교도들 무리 속에서 구해온 여인을 출궁 시켰다 들었습니다."
안도감으로 임금의 용안에 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다행이구나. 계속 궁궐 안에 두었다가는 어떤 분란을 일으킬지 모를 일이다. 지금 시점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렵게 살린 불씨이니 만큼, 반드시 겨루어 볼만큼 키워야 할 것이야. 그래... 이참에 병판에게 힘을 좀 보태주는 모양새를 만들면 어떻겠나?"
임금의 말에 홍여립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허나... 병판도 결국 좌상의 사람입니다. 가끔씩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좌상의 편에 섰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는 것이 아니다. 이용하는 것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하자는 것이다."
임금은 입술에 힘을 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일이야. 놓쳐서는 아니 된다."
예판이 초헌에서 내려 대문앞으로 다가가니, 때마침 나와있던 한 여인이 서둘러 마중 나왔다.
"대감마님 오셨습니까?"
마중 나온 소연을 보며 예판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백무는 안에 있는가?"
"예, 대감마님."
이어 소연이 서둘러 방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며 소리치듯 말했다.
"어르신, 예판대감께서 오셨습니다."
소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무가 방문을 열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부리나케 예판 앞으로 달려가 얼른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대감마님 오셨습니까?"
예판이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간 잘 지냈는가?"
"예, 대감마님... 안으로 드시지요."
"아닐세. 내 예서 한 가지만 묻고 가겠네."
"예, 말씀하시지요."
예판이 한숨을 한번 쉬고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내 사실, 진즉에 물었어야 하는 것이긴 하네만... 그 일이 있고 벌써 3년이 지났네. 자네 덕에 아이가 그 모습 그대로 있긴 하네만... 결국....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백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예판을 바라보았다.
"송구합니다, 대감마님."
예상은 하고있었지만, 실제 듣고보니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애기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
예판은 알고 있다는 듯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예판이 힘없이 돌아서려는데, 때마침 누군가 오다가 마주 서더니 인사를 건네 왔다.
"아, 자네는..."
그는 바로 수현이었다.
수현은 백무에게 볼일이 있어 왔다가, 예판을 보고 얼른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예판대감 오셨습니까."
수현이 건네는 인사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부총관이 예는 어인 일인가?"
"아, 사건 수사와 관련하여 자문을 구하러 왔습니다."
예판은 관심 없는 듯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대문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다 멈추어섰다.
예판에게 인사를 하고 백무에게 다가가는 수현의 손이 문득 눈에 들어왔기때문이다.
예판은 놀라 홱하니 돌아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수현의 손에 들린 물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벽륜봉이었다.
"저것은...."
예판은 벽룬봉임을 알아보고 놀라 헛숨을 삼키고는 이내 몸을 돌려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오셨습니까?"
그 사이 백무와 수현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인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백무의 말에 수현은 손에 든 벽륜봉을 내보이며 말했다.
"듣자 하니 벽륜봉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사교도들의 술수에 대해 들어볼 수가 있었는데, 이 벽륜봉은 봉혼벽륜(封魂霹倫)이라는 물건일 수도 있다 들었습니다. 혹, 그것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 말을 듣자 백무가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알고 있지요. 봉혼벽륜... 들어만 봤을 뿐, 실제로 본 적은 없었습니다. 혹, 다시 제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무의 말에 수현이 벽륜봉을 건네주었다.
벽륜봉을 세세히 살피던 백무는 고개를 신중히 끄덕거렸다.
"이 윗부분이 타서 유실되는 바람에 알아보지 못한 듯합니다만, 이 내용대로라면 봉혼벽륜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
"이것은 영혼을 잡아두는 주술에 쓰는 물건입니다."
"영혼을 잡아둔다구요?"
"그렇습니다. 특정 영혼이나, 혹은 귀신 따위가 어디로 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하지요. 그밖에도 소혼술 따위로 불러낸 영혼을 일정 시간 구천에 머물도록 하게 하는 술수에도 쓰입니다."
수현이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면... 이것이 진짜 봉혼벽륜인지...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현의 청에 백무가 당연히 그렇게 해주겠다는듯이 결연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겠습니다.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문득 옆에 듣고만 있던 소연이 의아한 듯 나서 물었다.
"그런데... 이게 봉혼벽륜인지 아닌지가... 중한 것입니까?"
소연의 물음에 수현이 자상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저들이 무엇을 하려고 했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기억을 잃은 여인이 있는데, 그 기억을 찾기 위해서는, 기억을 잃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해서 그렇다."
수현의 말을 듣고 소연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백무가 나서 말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알아내는 대로 기별하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 부탁드립니다."
수현이 물러가자, 그런 수현의 뒷모습을 소연이 한동안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만 들어가자."
백무의 말을 못 들은 듯 소연이 계속 수현이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백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택도 없다, 이년아."
백무의 말에 소연은 울상이 되었다.
"아, 왜요? 저는 왜 안 되는 것입니까?"
"너 같은 천 것을 거들떠나 볼 줄 아느냐?"
백무가 핀잔을 주며 안으로 들어가니, 소연이 따라가며 투덜거렸다.
"나리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천 것이라고 천시하거나 하는 분 아니란 말입니다."
"쯧쯧,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 것이냐?"
백무의 타박에 소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
신료들이 빈청에 들어 삼삼오오 모이는 와중에, 먼저 와있던 좌의정 최준경은 병조판서 김승수가 안으로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병판, 혹 어영위의 편제를 바꾸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김승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예, 그리했지요. 어영위뿐만 아니라, 군의 편제를 부분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어찌... 이 사람에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좌상의 물음에 김승수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 뭐 그리 대단하게 바꾼 것이 아니라서, 딱히 말씀드릴만한 것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좌상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어영위의 편제가 다시 도총부 소관으로 바뀌었다 들었습니다만..."
"예, 그리 했지요. 뭐 병력수도 얼마 안 되고, 현재의 책무가 금군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그냥 도총부 안에 넣어 함께 관리토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하였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이 사람과 의논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상의 손에 들려있던 병사들을 지금처럼 빼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 쉽게 내어주다니요."
좌상의 말에 병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 봐야 불과 백여 명입니다, 좌상. 그 정도 인원 가지고 어찌 이리 민감하게 여기시는 겁니까? 도총부라고 해봐야 이제 궁궐을 지키는 내금위뿐입니다. 내금위라고 해봐야 불과 일천이 채 되지 않습니다. 이 궁궐을 둘러싼 어영청과 금위영, 훈련도감의 병사들만으로도 족히 일만입니다. 거기다가 바로 동원 가능한 지방군의 병사들만 3만이 넘습니다. 이 병사들은 모두 좌상과 제 명령을 따를 군사들입니다. 주상이 제아무리 조선제일검이라는 홍여립을 곁에 두고 있는다 한들, 일천의 병사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거기다가 불과 백여 명 안팎의 어영위를 얹는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병조를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고작 일백여 명의 병사 편제를 바꾸는 것까지 좌상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병판의 말에 좌상은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허나, 다음부터는 이 사람에게 귀띔이라도 주시지요."
병판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기별토록 하지요."
그 사이 다른 사람들은 자리에 하나둘씩 앉으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며시 살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안으로 들어와 눈치를 살피던 이판대감의 물음에, 병판은 헛기침을 하고, 좌상대감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서들 앉으시지요. 논의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앉아 있는 이들은 삼정승과 육조의 판서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모여있던 같은 시각, 임금은 뜻밖의 보고에 놀라 본인이 옳게 들은것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되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되묻는 임금에게 도총관 홍여립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분명 그리 바뀌었습니다. 이제부터 어영위는 소관이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의심스럽다는듯 고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슨 까닭일까? 그렇게 애써 뺏어가 놓고, 이제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려주는 연유가 말이다.."
"이전과는 달리, 현재의 어영위 병사는 대략 130여 명 안팎입니다. 병판이 보기에 그 정도 병력 편제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듯합니다."
임금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불과 백여 명의 병사 편제를 바꾼 것뿐이지만, 어영위는 엄연히 현재 수도 방비를 맡고 있다. 그것도 궁궐과 가장 가까운 곳을 맡고 있기에, 금군과 수비 구역이 겹치기도 하지. 허나 그것은 엄청난 차이다. 금군이 궁궐 안만 지키기에, 병력을 외부로 내보낼 명분이 없으나, 어영위가 있음으로 해서, 도총부는 군사를 궁궐 인근까지 배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들뜬 표정이 용안에 떠올랐다.
"비로소 실낱같은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인가. 어영위가 도총부 안으로 편제가 바뀐 이상, 어영위의 병력 구성을 바꾸는 것은 이제 도총관의 몫이다. 현재 내금위의 병력중 일부를 어영위로 변경하면, 궁궐 밖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홍여립 역시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즉시 그리할 것입니다. 궁궐 밖으로 재빠른 수하들을 배치하여, 주변 상황을 파악토록 명하겠습니다."
"그래. 애초부터 병판은 좌상의 사람이라고는 하나, 자존심이 강하고 본인의 업적에 대한 자긍심이 있는 인물이다. 또한 좌상과 더불어 일을 도모했으니,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좌상의 밑에 있는 수하라 여기지는 않을 터, 그 점이 좌상에게 빈틈을 만들어 주는 모양이구나. 허나... 좌상도 병판만큼은 함부로 하지 못할 터..."
"그렇습니다. 이 기회를 결코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세자는? 세자는 어찌하고 있다더냐?"
"근래에, 사교도들 무리 속에서 구해온 여인을 출궁 시켰다 들었습니다."
안도감으로 임금의 용안에 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다행이구나. 계속 궁궐 안에 두었다가는 어떤 분란을 일으킬지 모를 일이다. 지금 시점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렵게 살린 불씨이니 만큼, 반드시 겨루어 볼만큼 키워야 할 것이야. 그래... 이참에 병판에게 힘을 좀 보태주는 모양새를 만들면 어떻겠나?"
임금의 말에 홍여립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허나... 병판도 결국 좌상의 사람입니다. 가끔씩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좌상의 편에 섰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는 것이 아니다. 이용하는 것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하자는 것이다."
임금은 입술에 힘을 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일이야. 놓쳐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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