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3
연희을 데리고 나온 세자는 당장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부터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한껏 기대감을 품고 바라보는 연희때문에 그런 것을 내색할 수 는 없었다.
"흠... 송연희... 라고 하였느냐?"
세자가 묻는 말에 연희은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기억나지 않으나 그렇다 들었습니다."
"기억을.... 잃었다고?"
연희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였다.
"네, 진짜 아무것도 생각이 안납니다. 제가 뭘 했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세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맞은편에서 같이 걷고 있는 수현을 바라보자, 수현은 어깨를 으슥해 보이고는 세자의 눈빛을 서둘러 피했다.
"흠, 이보게. 부총관"
세자가 나름 근엄한 목소리로 수현을 부르니, 수현이 놀란 눈으로 세자를 돌아보았다.
이어 큰 눈을 껌뻑 껌뻑거리더니, 조금 늦게 서둘러 대답했다.
"네.... 네?"
세자가 고개를 얼른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연희 낭자가 머물만한 거처가 어디 없겠느냐?"
평소와 다른 말투에 수현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자를 쳐다보았다.
"아... 예예...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헌데, 저하... 그것은 그냥 제게 맡기시고, 그만 환궁하시지요."
"아니다. 이 참에 밖에 나와보는 것이다. 궁궐 안이 숨막힐 것 같아서..."
그 사이 세 사람은 대궐 밖 외곽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거친 흙바닥 길이 나오자, 연희이 무언가를 밟은 듯 "아야" 소리를 내며 절뚝거렸고, 수현이 놀라 물었다.
"이런... 괜찮느냐?"
세자는 얼른 무릎을 굽히고 연희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비로소 그녀가 맨발로 걷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자, 세자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세세히 살피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그는 서둘러 자신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내주었다.
"아, 아니 저하... 굳이..."
놀란 수현이 말리려 했으나, 그럴 겨를 없이 세자는 신발을 벗어 내주었다.
연희가 놀란 눈으로 세자를 바라보니, 세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버선을 신고있으니...괜찮다.. 어서 신거라."
이어 수현에게 말했다.
"거처를 마련하거든, 입을 옷과 신발을 준비해 주고, 사람을 보내 씻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연희은 그런 세자에게 고마워하며 조심스럽게 세자의 신발을 신었다.
큼지막한 신발크기 때문에, 덜거덕 거리기는 했지만 걷는 것에 크게 무리가 있지는 않았다.
연희는 고마웠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긴 하지만, 이런 친절함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쉬이 받아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층 더 반짝 거리는 눈빛으로 세자를 바라보았고, 세자는 그런 그녀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헛..흠..."
돌멩이를 밟은 듯, 세자는 순간 움찔하였다가, 애써 태연한 척 걸었다.
"괜... 찮으십니까?"
수현이 놀라 묻는 말에, 세자가 고개를 돌리니, 연희까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자는 이내 억지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닐세.. 눈에 뭐가 들어갔나...."
세자가 눈을 비비자, 수현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눈에 뭐가 들어갔는데, 왜 발을 절뚝거리십니까?"
"절뚝은 무슨? 버선에 뭐가 들어갔는지, 간지러워서 그래, 간지러워서..."
"제법 아팠을 거 같은데... 아까 소리를 들어봐서는... 누가 들으면 발가락이라도 부러진 줄 알겠습니다."
"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냥 살짝... 살짝 따끔했네, 살짝..."
세자가 연희의 눈치를 살피며 수현에게 눈빛으로 주의를 주었지만, 수현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런 세자의 눈빛을 외면했다.
세자는 말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 수현에게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저들의 이목이 집중되면 이일이 커질 수도 있어. 거처를 마련하는대로 이번 사교도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하거라."
"아, 예예...."
몇발자국 더 걷던 세자는 이내 멈춰서며 말했다.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 봐야 겠구나."
수현은 살짝 절뚝 거리는 세자를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구나."
세자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궁궐쪽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수현과 연희가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세자마마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연희가 혼잣말처럼 묻는 말에, 수현이 연희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글세... 왕가의 사람같지 않은 세자랄까. 위태로운 세자랄까.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어디로 튈지 영 예상이 안 되는 사람이지. 자, 가자. 이쪽으로..."
수현이 먼저 앞장서자, 연희가 뒤따라 걸었다.
그녀는 수현을 따라 걸으면서도, 이따금씩 세자가 가는 길 쪽을 흘낏 거리며 아쉬운듯 바라보았다.
***
세자는 어머니의 초상화 앞에 말없이 서 있었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세자는 무척이나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아버지인 왕은 어머니에 대해 그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조차 몰랐으며, 왕명에따라 어머니에대해 함구령이 내려졌으며 차차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세자는 그 모든 것이 궁금했다.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참수형에 처해졌다.
어지간해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겠거니와, 한다 하더라도 통상 사약을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처형 당하는 어머니를 눈 앞에서 목도한 세자는 어떻게든 어머니가 무죄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 당시는 어린나이였고 성장한 지금의 그는 어머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무력함을 느꼈다.
그런데, 드디어 실마리를 풀수있는 단서가 나타났다.
뭔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한걸음 내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꼭... 밝혀내겠습니다, 어마마마..."
세자는 어머니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금호(수현)이옵니다."
뭔가 힘이 잔뜩 들어있는 그의 목소리에, 세자는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들어오너라."
세자의 대답에 문이 열리고,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는 수현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 저녁에 연회가 있는 것 아시지요?"
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수현이 실망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오늘 왕실 친인척들과 주요 신료들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회가 있습니다. 응당 나가보셔야지요."
세자가 생각난 듯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아... 알고 있다. 나가봐야지. 시간이 되었느냐?"
"예. 그런데... "
수현의 어물거리는듯한 말에 세자가 눈썹을 휘며 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연희라는 아이는 어찌할까요? 혼자 놔둬도 되는지, 아니면..."
"응? 누구?"
"연희... 말입니다. 아까..."
수현이 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세자가 생각난 듯 "아아!" 하며 말을 이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래... 불안한 상태이니, 혼자둘수는 없겠구나."
"그럼 그냥 저는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수현의 말에 세자가 단호히 말했다.
"아니다. 그렇다고 내곁에 자네가 없어서야... 명색의 어명을 받아 내곁을 지키는 운검이 아닌가. 차라리 잘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연회에 그 아이를 데려오너라."
세자의 말에 수현이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를 왜...."
"기억을 잃었다 하지 않았느냐? 만약 양반가 출신의 아이라면, 그 자리에 있는 이들중에 누가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느냐? 일단 기억을 찾는 일이 우선이다."
"아, 예. 알겠습니다."
수현이 물러가자, 세자는 옷매무새를 살핀 뒤 천천히 방을 나섰다.
왕실 친인척들이야 그렇다 쳐도, 주요 신료들이라 하면 세 정승과 더불어 주요 요직에 있는 사람들일 텐데, 그들중 누구 한사람 좌의정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
왕실 사람들 조차 그의 앞에서 눈치를 살피며 잘 보이려 애쓸 정도이니, 그야말로 실질적인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연회 장소에 도착하니, 여러 신료들은 물론 왕실 종친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세자마마, 강녕하셨습니까?"
문득 인사를 건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낮익은 얼굴의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혜령이구나."
세자와는 어려서부터 제법 친했던 혜령 옹주였다.
세자가 그녀를 보고 환하게 반기자, 그녀는 한걸음 더 곁으로 다가와 섰다.
"요즘 얼굴 뵙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약간 장난끼 어린 그녀의 말에 세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던가?"
체 안부를 나누기도 전에, 두 사람 곁으로 또다른 이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었다.
"어머, 저하, 옹주마마, 강녕하시옵니까."
인사를 건네는 그녀는 화사한 꽃단장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인상이 강하게 보였다.
"아, 인영이구나. 잘 지냈어?"
혜령은 그녀를 알아보곤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고, 세자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바로 좌의정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옹주마마...어머, 그런데 저하...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어쩐지 수심이 깊어 보이십니다."
인영의 물음에, 세자는 여전히 차가운눈빛으로 신경쓸것 없다는듯이 대답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세자의 무뚝뚝한 대답에도, 인영은 세자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의금부의 작은 일까지 나서서 챙기셨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정사를 챙기시다가 탈이라도 날까 걱정입니다."
인영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담겨져 있었다.
정치적 의도라기 보다,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세자는 아직까지 세자빈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세자빈으로 인영이 거론되고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니 신경쓰실것 없습니다. 오늘 의상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세자가 화제를 돌리자, 인영은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그렇습니까?"
기뻐하는 인영을 보며, 세자는 여전히 무뚝뚝한 눈빛으로 비웃듯 입술끝만 올려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때 목소리가 걸걸한 덩치 큰 사내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저하, 강녕하셨습니까?"
세자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그는 너털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금일 의금부에 직접 나서 죄인를 구명하셨다 들었습니다."
그의 등장에 인영과 혜령은 옆으로 살짝 피할 수밖에 없었다.
세자는 그런 그의 등장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운 듯 웃으며 반겼다.
"예, 맞습니다. 병판대감."
그는 병권을 쥐고 있는 병조판서 김승수로 좌의정의 사람이면서도, 의외로 공사의 구분이 명확하고 호기로운 인물이라 세자는 그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다.
"저는 오랜 세월을 전장에서 적들과 싸워왔습니다. 또한 의금부 판사를 지내면서, 숱하게 많은 죄인들을 보아왔지요. 저는 죄를 지은 사람인지 아닌지, 한눈에 딱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요망한 것이 세자마마의 판단을 어지럽힌 것이라면, 제가 단숨에 목을 베어 버릴 것입니다."
그는 마초적인 느낌이 강한 전형적인 남자였으며, 오랜 세월 전쟁터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라선 인물이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현재는 기억을 잃어 신분을 알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안그래도 수현에게 일러 오늘 연회자리에 데려오라 말해 두었습니다. 혹여 이 안에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저 너머로 수현이 여인을 데리고 들어서고 있었다.
"아, 마침 저기 오는 군요. 보시다시피 그녀는...."
말을 하다말고 세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현을 따라 걸어오고있는 저 여인이 정말 아까의 그 연희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푸른 빛깔의 치마와 뒤로 묶은 고운 머릿결이, 그녀가 정말 죄인으로 잡혀 왔던 그녀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해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으니,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만 같았다.
넋 놓고 보는 사이, 수현과 함께 다가온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는 연희을 보며 세자는 멍한 표정에서 깨어났다.
"이... 이분이... 그...?"
병판도 놀란 눈으로 수현에게 물었고, 수현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병판대감. 오늘 세자마마께서 구명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어허허, 험험...., 세자마마. 더 살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녀는 죄인이 아닙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병판의 호언장담에 세자는 어찌 그러하냐는 듯한 의아한 눈빛으로 병판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제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 죄인일 수 있단 말입니까. 하하하"
그의 말에 연희는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였고 수현은 살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그건 말도 안 되죠."
돌연 튀어나온 앙칼진 목소리로 인영이 나서며 말했다.
"엄연히 국법이 있고 법도가 있습니다. 개인의 의견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연희을 노려보며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당 죄인으로 판결이 나면 처형해야겠지요."
그녀의 말에 연희의 표정이 굳어지자, 수현이 얼른 나섰다.
"자자, 연회자리가 아닙니까, 준비된 음식이 많습니다."
수현이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고, 연회내내 인영은 잡아먹을 듯한 도끼눈으로 연희을 노려보았다.
결국 그 연회에서 연희를 알아보는 이는 한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한껏 기대감을 품고 바라보는 연희때문에 그런 것을 내색할 수 는 없었다.
"흠... 송연희... 라고 하였느냐?"
세자가 묻는 말에 연희은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기억나지 않으나 그렇다 들었습니다."
"기억을.... 잃었다고?"
연희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였다.
"네, 진짜 아무것도 생각이 안납니다. 제가 뭘 했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세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맞은편에서 같이 걷고 있는 수현을 바라보자, 수현은 어깨를 으슥해 보이고는 세자의 눈빛을 서둘러 피했다.
"흠, 이보게. 부총관"
세자가 나름 근엄한 목소리로 수현을 부르니, 수현이 놀란 눈으로 세자를 돌아보았다.
이어 큰 눈을 껌뻑 껌뻑거리더니, 조금 늦게 서둘러 대답했다.
"네.... 네?"
세자가 고개를 얼른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연희 낭자가 머물만한 거처가 어디 없겠느냐?"
평소와 다른 말투에 수현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자를 쳐다보았다.
"아... 예예...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헌데, 저하... 그것은 그냥 제게 맡기시고, 그만 환궁하시지요."
"아니다. 이 참에 밖에 나와보는 것이다. 궁궐 안이 숨막힐 것 같아서..."
그 사이 세 사람은 대궐 밖 외곽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거친 흙바닥 길이 나오자, 연희이 무언가를 밟은 듯 "아야" 소리를 내며 절뚝거렸고, 수현이 놀라 물었다.
"이런... 괜찮느냐?"
세자는 얼른 무릎을 굽히고 연희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비로소 그녀가 맨발로 걷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자, 세자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세세히 살피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그는 서둘러 자신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내주었다.
"아, 아니 저하... 굳이..."
놀란 수현이 말리려 했으나, 그럴 겨를 없이 세자는 신발을 벗어 내주었다.
연희가 놀란 눈으로 세자를 바라보니, 세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버선을 신고있으니...괜찮다.. 어서 신거라."
이어 수현에게 말했다.
"거처를 마련하거든, 입을 옷과 신발을 준비해 주고, 사람을 보내 씻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연희은 그런 세자에게 고마워하며 조심스럽게 세자의 신발을 신었다.
큼지막한 신발크기 때문에, 덜거덕 거리기는 했지만 걷는 것에 크게 무리가 있지는 않았다.
연희는 고마웠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긴 하지만, 이런 친절함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쉬이 받아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층 더 반짝 거리는 눈빛으로 세자를 바라보았고, 세자는 그런 그녀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헛..흠..."
돌멩이를 밟은 듯, 세자는 순간 움찔하였다가, 애써 태연한 척 걸었다.
"괜... 찮으십니까?"
수현이 놀라 묻는 말에, 세자가 고개를 돌리니, 연희까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자는 이내 억지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닐세.. 눈에 뭐가 들어갔나...."
세자가 눈을 비비자, 수현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눈에 뭐가 들어갔는데, 왜 발을 절뚝거리십니까?"
"절뚝은 무슨? 버선에 뭐가 들어갔는지, 간지러워서 그래, 간지러워서..."
"제법 아팠을 거 같은데... 아까 소리를 들어봐서는... 누가 들으면 발가락이라도 부러진 줄 알겠습니다."
"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냥 살짝... 살짝 따끔했네, 살짝..."
세자가 연희의 눈치를 살피며 수현에게 눈빛으로 주의를 주었지만, 수현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런 세자의 눈빛을 외면했다.
세자는 말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 수현에게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저들의 이목이 집중되면 이일이 커질 수도 있어. 거처를 마련하는대로 이번 사교도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하거라."
"아, 예예...."
몇발자국 더 걷던 세자는 이내 멈춰서며 말했다.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 봐야 겠구나."
수현은 살짝 절뚝 거리는 세자를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구나."
세자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궁궐쪽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수현과 연희가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세자마마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연희가 혼잣말처럼 묻는 말에, 수현이 연희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글세... 왕가의 사람같지 않은 세자랄까. 위태로운 세자랄까.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어디로 튈지 영 예상이 안 되는 사람이지. 자, 가자. 이쪽으로..."
수현이 먼저 앞장서자, 연희가 뒤따라 걸었다.
그녀는 수현을 따라 걸으면서도, 이따금씩 세자가 가는 길 쪽을 흘낏 거리며 아쉬운듯 바라보았다.
***
세자는 어머니의 초상화 앞에 말없이 서 있었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세자는 무척이나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아버지인 왕은 어머니에 대해 그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조차 몰랐으며, 왕명에따라 어머니에대해 함구령이 내려졌으며 차차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세자는 그 모든 것이 궁금했다.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참수형에 처해졌다.
어지간해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겠거니와, 한다 하더라도 통상 사약을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처형 당하는 어머니를 눈 앞에서 목도한 세자는 어떻게든 어머니가 무죄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 당시는 어린나이였고 성장한 지금의 그는 어머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무력함을 느꼈다.
그런데, 드디어 실마리를 풀수있는 단서가 나타났다.
뭔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한걸음 내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꼭... 밝혀내겠습니다, 어마마마..."
세자는 어머니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금호(수현)이옵니다."
뭔가 힘이 잔뜩 들어있는 그의 목소리에, 세자는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들어오너라."
세자의 대답에 문이 열리고,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는 수현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 저녁에 연회가 있는 것 아시지요?"
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수현이 실망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오늘 왕실 친인척들과 주요 신료들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회가 있습니다. 응당 나가보셔야지요."
세자가 생각난 듯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아... 알고 있다. 나가봐야지. 시간이 되었느냐?"
"예. 그런데... "
수현의 어물거리는듯한 말에 세자가 눈썹을 휘며 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연희라는 아이는 어찌할까요? 혼자 놔둬도 되는지, 아니면..."
"응? 누구?"
"연희... 말입니다. 아까..."
수현이 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세자가 생각난 듯 "아아!" 하며 말을 이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래... 불안한 상태이니, 혼자둘수는 없겠구나."
"그럼 그냥 저는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수현의 말에 세자가 단호히 말했다.
"아니다. 그렇다고 내곁에 자네가 없어서야... 명색의 어명을 받아 내곁을 지키는 운검이 아닌가. 차라리 잘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연회에 그 아이를 데려오너라."
세자의 말에 수현이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를 왜...."
"기억을 잃었다 하지 않았느냐? 만약 양반가 출신의 아이라면, 그 자리에 있는 이들중에 누가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느냐? 일단 기억을 찾는 일이 우선이다."
"아, 예. 알겠습니다."
수현이 물러가자, 세자는 옷매무새를 살핀 뒤 천천히 방을 나섰다.
왕실 친인척들이야 그렇다 쳐도, 주요 신료들이라 하면 세 정승과 더불어 주요 요직에 있는 사람들일 텐데, 그들중 누구 한사람 좌의정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
왕실 사람들 조차 그의 앞에서 눈치를 살피며 잘 보이려 애쓸 정도이니, 그야말로 실질적인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연회 장소에 도착하니, 여러 신료들은 물론 왕실 종친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세자마마, 강녕하셨습니까?"
문득 인사를 건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낮익은 얼굴의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혜령이구나."
세자와는 어려서부터 제법 친했던 혜령 옹주였다.
세자가 그녀를 보고 환하게 반기자, 그녀는 한걸음 더 곁으로 다가와 섰다.
"요즘 얼굴 뵙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약간 장난끼 어린 그녀의 말에 세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던가?"
체 안부를 나누기도 전에, 두 사람 곁으로 또다른 이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었다.
"어머, 저하, 옹주마마, 강녕하시옵니까."
인사를 건네는 그녀는 화사한 꽃단장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인상이 강하게 보였다.
"아, 인영이구나. 잘 지냈어?"
혜령은 그녀를 알아보곤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고, 세자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바로 좌의정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옹주마마...어머, 그런데 저하...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어쩐지 수심이 깊어 보이십니다."
인영의 물음에, 세자는 여전히 차가운눈빛으로 신경쓸것 없다는듯이 대답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세자의 무뚝뚝한 대답에도, 인영은 세자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의금부의 작은 일까지 나서서 챙기셨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정사를 챙기시다가 탈이라도 날까 걱정입니다."
인영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담겨져 있었다.
정치적 의도라기 보다,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세자는 아직까지 세자빈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세자빈으로 인영이 거론되고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니 신경쓰실것 없습니다. 오늘 의상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세자가 화제를 돌리자, 인영은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그렇습니까?"
기뻐하는 인영을 보며, 세자는 여전히 무뚝뚝한 눈빛으로 비웃듯 입술끝만 올려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때 목소리가 걸걸한 덩치 큰 사내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저하, 강녕하셨습니까?"
세자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그는 너털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금일 의금부에 직접 나서 죄인를 구명하셨다 들었습니다."
그의 등장에 인영과 혜령은 옆으로 살짝 피할 수밖에 없었다.
세자는 그런 그의 등장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운 듯 웃으며 반겼다.
"예, 맞습니다. 병판대감."
그는 병권을 쥐고 있는 병조판서 김승수로 좌의정의 사람이면서도, 의외로 공사의 구분이 명확하고 호기로운 인물이라 세자는 그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다.
"저는 오랜 세월을 전장에서 적들과 싸워왔습니다. 또한 의금부 판사를 지내면서, 숱하게 많은 죄인들을 보아왔지요. 저는 죄를 지은 사람인지 아닌지, 한눈에 딱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요망한 것이 세자마마의 판단을 어지럽힌 것이라면, 제가 단숨에 목을 베어 버릴 것입니다."
그는 마초적인 느낌이 강한 전형적인 남자였으며, 오랜 세월 전쟁터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라선 인물이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현재는 기억을 잃어 신분을 알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안그래도 수현에게 일러 오늘 연회자리에 데려오라 말해 두었습니다. 혹여 이 안에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저 너머로 수현이 여인을 데리고 들어서고 있었다.
"아, 마침 저기 오는 군요. 보시다시피 그녀는...."
말을 하다말고 세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현을 따라 걸어오고있는 저 여인이 정말 아까의 그 연희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푸른 빛깔의 치마와 뒤로 묶은 고운 머릿결이, 그녀가 정말 죄인으로 잡혀 왔던 그녀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해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으니,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만 같았다.
넋 놓고 보는 사이, 수현과 함께 다가온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는 연희을 보며 세자는 멍한 표정에서 깨어났다.
"이... 이분이... 그...?"
병판도 놀란 눈으로 수현에게 물었고, 수현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병판대감. 오늘 세자마마께서 구명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어허허, 험험...., 세자마마. 더 살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녀는 죄인이 아닙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병판의 호언장담에 세자는 어찌 그러하냐는 듯한 의아한 눈빛으로 병판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제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 죄인일 수 있단 말입니까. 하하하"
그의 말에 연희는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였고 수현은 살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그건 말도 안 되죠."
돌연 튀어나온 앙칼진 목소리로 인영이 나서며 말했다.
"엄연히 국법이 있고 법도가 있습니다. 개인의 의견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연희을 노려보며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당 죄인으로 판결이 나면 처형해야겠지요."
그녀의 말에 연희의 표정이 굳어지자, 수현이 얼른 나섰다.
"자자, 연회자리가 아닙니까, 준비된 음식이 많습니다."
수현이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고, 연회내내 인영은 잡아먹을 듯한 도끼눈으로 연희을 노려보았다.
결국 그 연회에서 연희를 알아보는 이는 한사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