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1
당연히 청유위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예상했던 조철웅까지도, 본의 아니게 입장이 난처해져 버렸다.
무림맹의 체면을 세워주려 했던 것이, 도리어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결과를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 마지못해 태연한 척하고 있는 조철웅 곁으로 조여령이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숙부님, 이번 비무에서 승자에 청을 들어주기로 하셨지요?"
조여령이 확인하듯 묻는 말에, 조철웅이 억지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 으음... 그랬지, 그래...."
이어 승리에 기뻐하는 라마를 향해 물었다.
"라소협, 소협께서는 이 사람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면 말하시게.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능히 도울 것이니."
라마는 기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철웅이 건네는 말에 다가와 인사를 하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황궁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라마의 말에 조철웅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황궁?"
"예, 그렇습니다. 황궁이 어떤 곳인지 구경도 하고 싶고, 또... 그곳에 무녀 실력이 출중하다 하니, 무녀를 만나 점이나 한번 보고 싶습니다."
조철웅은 뜻밖의 말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녕 그것이 이 사람에 청하는 것 맞소?"
"예, 그렇습니다."
그러자 조여령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소협께서는 의로움이 충만하시어, 재물에 욕심이 없으신 듯합니다. 황궁을 구경하는 정도야, 숙부님이 얼마든지 들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조여령의 재촉에 조철웅은 어색한 웃음을 이어가며 대답했다.
"그, 그래. 그렇지. 잘 알겠네. 내 자네에게 황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패를 내어주지. 그리고 내 조카가 진 신세도 있으니, 여비도 좀 챙겨줌세."
"감사합니다."
조여령이 기뻐하며 라마를 향해 말했다.
"제 사촌이 그곳에 있으니, 기별해 두겠습니다. 소협이 갔을 때, 섭섭하지 않도록 말이죠."
라마는 살짝 과장을 보태어 씨익 웃어 보이고는, 인사를 한 뒤 그만 자리에서 물러났다.
지금 라마는 황궁에 갈 수 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느꼈던 마나의 크기와 마법의 사용에 대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상위 마법을 위해 원소의 정령들이나, 신급에 해당하는 존재들과 직접 계약을 맺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 정도 수준에 이르러면 단순히 마나만 많은 것이 아니라, 마법사로서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풍부한 마나가 근간이 되니, 어쩐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
눈을 떴을 때, 처음 보는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보랏빛 구름이 코 앞에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고, 발 아래로는 마치 구름 같으면서도 땅을 밟는 듯 밟히고 있었다.
"뭐야?"
라마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의 눈 앞에 한 사람이 보였다.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 의자에 앉은 한 사람이 고뇌하는 표정으로 앉아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고,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콧대를 짚은 체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구...."
라마가 그를 보며 의아해하는 순간, 그가 "하~"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 설레 내저었다.
"어쩔 수가 없구만. 이리 간곡하게 청을 하니..."
"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마에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옷을 입고 있는 그는, 꽤나 깔끔하고 멋들어지게 생긴 모습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라마 앞으로 다가와, 대뜸 라마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그래, 그 심정 다 알지. 마법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이 나를, 존경하는 그 마음."
"예? 누구신지..."
그의 이상한 행동에 라마가 어리둥절해하는 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라마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래그래, 다른 세계로 넘어와서 다른 힘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나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내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어. 네 갈망, 네 소원, 너의 그 바램...."
"뭘....?"
"그래그래. 그래서 특별히 해주는 거야."
"뭘요?"
어느 순간 그의 앞에 서 있는 키에 맞춘, 높은 탁상 하나가 나타났다.
뭐가 이렇게 갑자기 생겨나니 라마는 놀라 주춤 물러섰다.
"자, 보통... 마법사들이 준비해 오는 거긴 한데, 특.별.히 신경 써서 내가 한번 준비해 봤어."
그가 종이 한 장을 펼쳐서 탁상 위에 놓자, 라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가 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어? 이건.... 계약서네요?"
"그래. 특별 계약서지. 네가 내 힘을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는... 마법 계약 중에서도 가장 높은 상위 마법이야."
"어, 어째서...?"
"너의 바램을, 내 어찌 외면할 수 있었겠어? 다~ 너를 위한 거야. 자, 어서 싸인해."
그가 손을 들자, 손에는 펜이 쥐어져 있었다.
펜을 건네든 라마는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어 그를 보며 물었다.
"아, 저, 그럼 혹시 페르쿠나스...?"
"그래그래, 이름은 뭐 중요한 게 아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 자자, 어서 사인하고."
그런데 이상했다. 보통 이런 계약은 마법사 쪽에서 어떻게든 사인하려고 안달인데, 어째 입장이 뒤바뀐 느낌이 들었다.
"아... 뭔가 좀 이상하긴 한데..."
라마는 어색해하면서 계약을 보자, 페르쿠나스가 사인하는 곳 위에를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약관 동의하고."
"네? 야, 약관이요?"
"응. 거기.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원하면 언제든 너에게 힘을 빌려 줄 수 있다. 거기. 체크."
"아... 왜죠?"
"아, 별거 아냐, 별거 아냐. 일단 체크하고."
"예."
라마는 페르쿠나스가 가리키는 곳에 표시를 하였고, 페르쿠나스는 그다음 체크할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도 동의."
"이건 뭐죠?"
라마는 물어보면서 직접 그 내용을 읽어 보았다.
"언제든지 원하면 계약자를 통해 이 세계로 출입이 가능하다?"
"어어, 뭐... 재밌잖아. 니가 내 힘을 마음껏 쓰는 대신, 나도 너를 통해 이 세계를 구경하는 거지. 뭐 유람 같은 거라고 생각해."
"아... 그런가요?"
"그럼~ 자자, 나 다음 계약자 만나러 가봐야 하거든? 빨리빨리 하자."
".... 예...."
라마가 그곳에 체크를 한 뒤, 마지막란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하기 무섭게, 페르쿠나스가 종이를 가져가 버렸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를 보고는 품 안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그래, 수고했어. 내 힘 잘 쓰고."
"저기... 그럼, 혹시 저를 다시 본 세계로 돌려보내 주실 수도 있나요?"
"왜?"
"아.... 그래도...."
"여기 있어. 왜 갈려고 그래. 어차피 너 거기서 왕따였잖아. 자살 안 한 게 신기할 정도였더만."
살짝 빈정이 상한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나름 친구도 있었고."
"아냐. 없어. 그냥 여기서 살아."
"예?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간다."
***
눈을 뜬 라마는 부시시한 얼굴로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와중에, 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계약을 한 걸까?
보통 이런 계약을 하면 마법사들은 기뻐 환호하고, 대내외로 인정을 받아 대마법사로 칭호를 받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건 마치 사기꾼한테 사기 계약당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뭘까?"
라마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계약을 했다.
계약을 했으니, 마법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비전 계열의 마법 중 최상위 마법을 시전 할 수 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라마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였다.
황궁에 가고자 하는 목적보다는, 사람들 눈을 피해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였다.
라마가 준비하는 걸 보고, 뒤늦게 일어나 송이개와 유림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사이, 조여령이 나타났다.
채비를 하고 있는 라마 앞으로 조여령이 다가와 보따리 하나를 내어주며 말했다.
"이 안에는 황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출입패와 여비를 넉넉히 넣어두었습니다. 소협께서 필요하실 때 요긴하게 사용하십시오."
라마는 조여령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봇따리를 받아 들었다.
"고맙게 받죠. 모용담에게도 잘 일러두겠습니다."
라마의 말에 조여령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하곤 후다닥 달려 나가 버렸다.
하..... 또 기분 나빠지려고 그러네.
그런 라마 곁으로 송이개가 다가와 물었다.
"황궁으로 가실 겝니까?"
라마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일단은 조용히 수련을 좀 할까 합니다."
"수련이요?"
"예, 사람들 이목을 피해서 수련을 할만한 장소가 있을까요?"
라마의 물음에, 송이개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당한 곳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황궁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만..."
"괜찮아요. 어차피 이제는 딱히 가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고..."
라마는 페르쿠나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니, 어쩐지 입에서 쓴맛이 나는 것 같았다.
"출출한데, 뭐라도 먹고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유림이 기지개를 켜며 다가와 묻는 말에, 라마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라마의 시선을 느끼고 움츠러들었으나, 이내 라마는 그런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밥 먹고 가려다 보면 지체되고, 그러다 보면 또 하루를 보내게 되니, 서두르는 거요. 그쪽은, 이제 그만 따라와도 될 것 같은데? 더 따라오시게?"
유림이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 옛날에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도원결의로써 큰 뜻을 품었다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어떻게 보면 이곳 낙현에서 큰~ 뜻을..."
옆에서 보고 있던 송이개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지럴 한다."
"뭘 또 그렇게 험악하게 말씀하시나, 거...."
서운해하는 유림을 보며, 라마는 어제, 비무에서 이긴 자신을 보며 함께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의형제니 그딴 소리를 하지 말고."
"예예, 제가 설마 진심으로 그리 말했겠습니까? 하하..."
뺀질거리는 거 하고는. 어쨌든 그리 밉상 같지는 않았다.
"준비해요. 얼른 갑시다."
라마의 말에 두 사람은 서둘러 자기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체면을 세워주려 했던 것이, 도리어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결과를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 마지못해 태연한 척하고 있는 조철웅 곁으로 조여령이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숙부님, 이번 비무에서 승자에 청을 들어주기로 하셨지요?"
조여령이 확인하듯 묻는 말에, 조철웅이 억지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 으음... 그랬지, 그래...."
이어 승리에 기뻐하는 라마를 향해 물었다.
"라소협, 소협께서는 이 사람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면 말하시게.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능히 도울 것이니."
라마는 기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철웅이 건네는 말에 다가와 인사를 하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황궁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라마의 말에 조철웅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황궁?"
"예, 그렇습니다. 황궁이 어떤 곳인지 구경도 하고 싶고, 또... 그곳에 무녀 실력이 출중하다 하니, 무녀를 만나 점이나 한번 보고 싶습니다."
조철웅은 뜻밖의 말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녕 그것이 이 사람에 청하는 것 맞소?"
"예, 그렇습니다."
그러자 조여령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소협께서는 의로움이 충만하시어, 재물에 욕심이 없으신 듯합니다. 황궁을 구경하는 정도야, 숙부님이 얼마든지 들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조여령의 재촉에 조철웅은 어색한 웃음을 이어가며 대답했다.
"그, 그래. 그렇지. 잘 알겠네. 내 자네에게 황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패를 내어주지. 그리고 내 조카가 진 신세도 있으니, 여비도 좀 챙겨줌세."
"감사합니다."
조여령이 기뻐하며 라마를 향해 말했다.
"제 사촌이 그곳에 있으니, 기별해 두겠습니다. 소협이 갔을 때, 섭섭하지 않도록 말이죠."
라마는 살짝 과장을 보태어 씨익 웃어 보이고는, 인사를 한 뒤 그만 자리에서 물러났다.
지금 라마는 황궁에 갈 수 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느꼈던 마나의 크기와 마법의 사용에 대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상위 마법을 위해 원소의 정령들이나, 신급에 해당하는 존재들과 직접 계약을 맺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 정도 수준에 이르러면 단순히 마나만 많은 것이 아니라, 마법사로서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풍부한 마나가 근간이 되니, 어쩐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
눈을 떴을 때, 처음 보는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보랏빛 구름이 코 앞에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고, 발 아래로는 마치 구름 같으면서도 땅을 밟는 듯 밟히고 있었다.
"뭐야?"
라마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의 눈 앞에 한 사람이 보였다.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 의자에 앉은 한 사람이 고뇌하는 표정으로 앉아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고,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콧대를 짚은 체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구...."
라마가 그를 보며 의아해하는 순간, 그가 "하~"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 설레 내저었다.
"어쩔 수가 없구만. 이리 간곡하게 청을 하니..."
"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마에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옷을 입고 있는 그는, 꽤나 깔끔하고 멋들어지게 생긴 모습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라마 앞으로 다가와, 대뜸 라마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그래, 그 심정 다 알지. 마법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이 나를, 존경하는 그 마음."
"예? 누구신지..."
그의 이상한 행동에 라마가 어리둥절해하는 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라마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래그래, 다른 세계로 넘어와서 다른 힘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나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내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어. 네 갈망, 네 소원, 너의 그 바램...."
"뭘....?"
"그래그래. 그래서 특별히 해주는 거야."
"뭘요?"
어느 순간 그의 앞에 서 있는 키에 맞춘, 높은 탁상 하나가 나타났다.
뭐가 이렇게 갑자기 생겨나니 라마는 놀라 주춤 물러섰다.
"자, 보통... 마법사들이 준비해 오는 거긴 한데, 특.별.히 신경 써서 내가 한번 준비해 봤어."
그가 종이 한 장을 펼쳐서 탁상 위에 놓자, 라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가 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어? 이건.... 계약서네요?"
"그래. 특별 계약서지. 네가 내 힘을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는... 마법 계약 중에서도 가장 높은 상위 마법이야."
"어, 어째서...?"
"너의 바램을, 내 어찌 외면할 수 있었겠어? 다~ 너를 위한 거야. 자, 어서 싸인해."
그가 손을 들자, 손에는 펜이 쥐어져 있었다.
펜을 건네든 라마는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어 그를 보며 물었다.
"아, 저, 그럼 혹시 페르쿠나스...?"
"그래그래, 이름은 뭐 중요한 게 아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 자자, 어서 사인하고."
그런데 이상했다. 보통 이런 계약은 마법사 쪽에서 어떻게든 사인하려고 안달인데, 어째 입장이 뒤바뀐 느낌이 들었다.
"아... 뭔가 좀 이상하긴 한데..."
라마는 어색해하면서 계약을 보자, 페르쿠나스가 사인하는 곳 위에를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약관 동의하고."
"네? 야, 약관이요?"
"응. 거기.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원하면 언제든 너에게 힘을 빌려 줄 수 있다. 거기. 체크."
"아... 왜죠?"
"아, 별거 아냐, 별거 아냐. 일단 체크하고."
"예."
라마는 페르쿠나스가 가리키는 곳에 표시를 하였고, 페르쿠나스는 그다음 체크할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도 동의."
"이건 뭐죠?"
라마는 물어보면서 직접 그 내용을 읽어 보았다.
"언제든지 원하면 계약자를 통해 이 세계로 출입이 가능하다?"
"어어, 뭐... 재밌잖아. 니가 내 힘을 마음껏 쓰는 대신, 나도 너를 통해 이 세계를 구경하는 거지. 뭐 유람 같은 거라고 생각해."
"아... 그런가요?"
"그럼~ 자자, 나 다음 계약자 만나러 가봐야 하거든? 빨리빨리 하자."
".... 예...."
라마가 그곳에 체크를 한 뒤, 마지막란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하기 무섭게, 페르쿠나스가 종이를 가져가 버렸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를 보고는 품 안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그래, 수고했어. 내 힘 잘 쓰고."
"저기... 그럼, 혹시 저를 다시 본 세계로 돌려보내 주실 수도 있나요?"
"왜?"
"아.... 그래도...."
"여기 있어. 왜 갈려고 그래. 어차피 너 거기서 왕따였잖아. 자살 안 한 게 신기할 정도였더만."
살짝 빈정이 상한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나름 친구도 있었고."
"아냐. 없어. 그냥 여기서 살아."
"예?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간다."
***
눈을 뜬 라마는 부시시한 얼굴로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와중에, 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계약을 한 걸까?
보통 이런 계약을 하면 마법사들은 기뻐 환호하고, 대내외로 인정을 받아 대마법사로 칭호를 받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건 마치 사기꾼한테 사기 계약당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뭘까?"
라마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계약을 했다.
계약을 했으니, 마법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비전 계열의 마법 중 최상위 마법을 시전 할 수 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라마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였다.
황궁에 가고자 하는 목적보다는, 사람들 눈을 피해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였다.
라마가 준비하는 걸 보고, 뒤늦게 일어나 송이개와 유림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사이, 조여령이 나타났다.
채비를 하고 있는 라마 앞으로 조여령이 다가와 보따리 하나를 내어주며 말했다.
"이 안에는 황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출입패와 여비를 넉넉히 넣어두었습니다. 소협께서 필요하실 때 요긴하게 사용하십시오."
라마는 조여령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봇따리를 받아 들었다.
"고맙게 받죠. 모용담에게도 잘 일러두겠습니다."
라마의 말에 조여령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하곤 후다닥 달려 나가 버렸다.
하..... 또 기분 나빠지려고 그러네.
그런 라마 곁으로 송이개가 다가와 물었다.
"황궁으로 가실 겝니까?"
라마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일단은 조용히 수련을 좀 할까 합니다."
"수련이요?"
"예, 사람들 이목을 피해서 수련을 할만한 장소가 있을까요?"
라마의 물음에, 송이개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당한 곳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황궁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만..."
"괜찮아요. 어차피 이제는 딱히 가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고..."
라마는 페르쿠나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니, 어쩐지 입에서 쓴맛이 나는 것 같았다.
"출출한데, 뭐라도 먹고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유림이 기지개를 켜며 다가와 묻는 말에, 라마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라마의 시선을 느끼고 움츠러들었으나, 이내 라마는 그런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밥 먹고 가려다 보면 지체되고, 그러다 보면 또 하루를 보내게 되니, 서두르는 거요. 그쪽은, 이제 그만 따라와도 될 것 같은데? 더 따라오시게?"
유림이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 옛날에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도원결의로써 큰 뜻을 품었다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어떻게 보면 이곳 낙현에서 큰~ 뜻을..."
옆에서 보고 있던 송이개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지럴 한다."
"뭘 또 그렇게 험악하게 말씀하시나, 거...."
서운해하는 유림을 보며, 라마는 어제, 비무에서 이긴 자신을 보며 함께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의형제니 그딴 소리를 하지 말고."
"예예, 제가 설마 진심으로 그리 말했겠습니까? 하하..."
뺀질거리는 거 하고는. 어쨌든 그리 밉상 같지는 않았다.
"준비해요. 얼른 갑시다."
라마의 말에 두 사람은 서둘러 자기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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